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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는 이론이 하나 있습니다. 궁극의 라이트 노벨 이론이라는 건데 정말로 잘 쓴 라이트 노벨이 있으면 그건 오타쿠 층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며 어떤 문학의 기준으로 봐도 좋은, 분명 라이트 노벨이지만 라이트 노벨 같지 않은, 장르를 초월한 범장르적인 글이 될 거라는 거죠. 그리고 그 글이 한국인이 쓴 한국의 소설이라면 그 소설이 개척한 장르를 한국적 라이트 노벨이라고 붙여도 될 겁니다. 뭐 그냥 단순한 헛소리 같지만 어쨌든 전 이걸 밀고 있습니다.
이 기준에서 본다면 흐리호우는 제가 말하는 궁극의 소설에 가깝거나 그에 준하는 물건입니다. 에? 그렇게 엄청난 글이야? 라고 묻는다면 음, 글쎄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기준에는 맞습니다. 새로운 장르, 초월적인 글. 광고가 틀린 말이 아니군요. 새로운 스타일이 등장했다. 라이트 노벨이면서 문학성을 겸비할 수 있는 새로운 장르. 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에게 가장 적당한 말은 그것일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소설에서 걱정되는 점은 일러가 없다고, 아니면 모에가 없다고 징징대는 사람이 이 책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됩니다. 노블엔진 팝이 이정도의 작품을 계속 뽑아낼 수 있다면 정말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것 같군요.
-완성된 소설-
일단 이 책에서 놀라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소설은 글 자체가 잘 되어있습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거에요. 문장의 기본조차 되어있지 않은 작품이 얼마나 많은데요. 게다가 책 내에서 오류가 없습니다. 아 뭐 문장 하나하나 분석하면 있을지도 모르죠. 근데 이야기의 근본을 무너트리는 오류, 억지, 작가 편의주의의 구성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합니까......왜 이리 슬퍼질까요. 맞아요. 이건 당연한 거죠. 오류가 없는 건 당연한 겁니다. 응당 그래야 하는데 요즘 소설이 이상한거죠. 어쨌든 이 부분에서 엄청난 플러스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쓰기 쉽지 않거든요. 이건 작가가 퇴고도 착실히 하고 출판사에서 검수도 열심히 한 겁니다. 완벽? 아니죠. 완전? 뭐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이건 완성된 소설입니다. 제가 원하는 게 그거에요! 완성! 열 줄짜리 문장도 완성하지 못해서 줄줄 새는 글과는 다르게 이건 책 한 권의 요소와 요소가 연결되서 부자연스러운 점 없이완성된 소설이란 말입니다.
-라이트 노벨-
게다가 더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이건 어딜 봐도 명백히 라이트 노벨이라는 점이에요! 라이트 노벨 독자와 일반 독자들에게 동시에 어필할 수 있습니다! 듣기만 해도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소재를 사용해서 일반 독자들이 떠나가게 만들지도 않고, 흥미를 유발해서 대중에게 어필하는 부분을 라이트 노벨적인 요소로 풀어내서 엄청나게 가볍고 재밌는 소설이 되었습니다.
그걸 위해서 라이트 노벨의 단권 완결성도 자기 식대로 해석했어요. 어차피 책 자체도 단권이니까 당연히 단권 완결성이 있는건 당연하지만, 글을 다섯가지 에피소드로 구성해서 각 에피소드마다 가벼운 추리와 미스터리 요소를 넣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 그리고 그 다섯가지의 에피소드를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하나하나 배분해 폐인이 된 호우의 사회 복귀라는 메인 갈등과 호우와 엮인 주위 인간관계와 갈등을 설명하는 그 구성은 정말로 멋집니다.
아 뭐, 여기까지는 장점만 늘어놓은 거고, 역시 제 글에선 단점을 봐야 제대로 글을 읽은 것 같죠.
-추리-
작중의 핵심이 되는 추리는 솔직히 심심하긴 합니다. 탐정 역인 호우가 추리와 추론에 관해서 극에 달해있는 초인이라 추리에 대해서 어떠한 장애도 없는 점도 그렇지만, 커다란 갈등에 작은 수수께끼가 붙어있는 글이 아니라 그냥 작은 수수께끼들을 늘어놓은 글이라 인상에 별로 남지 않고(뭐 거꾸로 얘기하면 일상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완전히 부합하는 글을 쓰는거죠), 게다가 가장 중요한 마지막의 수수께끼가 갑툭튀한 느낌이 있거든요. 결말 부분이 제대로 된 게 아닌거죠. 그 이전까지는 호우의 능력을 설명하고, 호우 주변의 인간관계를 진행시키는 용도였고 필요한 부분이었는데, 마지막 부분은 그냥 덤 같거든요. 물론 마지막을 그렇게 한 이유도 작중에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만, 차라리 분량을 더 늘려서 이렇게 하는 건 어땠을까요. 절정이나 결말 부분에서 과거의 동료인 덤프와 백설이 다시 나타나고 호우가 실패한 일생일대의 의뢰와 다시 엮이는 거죠. 솔직히 전 그러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아니라서 놀랐습니다. 작가는 커다란 갈등과 다시 대면하는 것보단 일상 미스터리의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아니면 과거의 이야기는 그저 과거와 설정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전 이 사실을 깨닫고 완벽하고 매력적인 인물인 호우에게 흠집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야-
그리고 고지나 비이에 비하면 사야의 비중이 어정쩡하군요. 개성이나 사정이 잘 보이지 않아요. 이 작품의 라이트 노벨다운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막장 인간관계에서(놀랍게도 치정 요소는 전혀 없지만) 호우의 전 여자친구이며, 현재 고지의 남자친구이고, 형태만 보면 비이와 연적관계가 되는 이 사야라는 여자의 존재는 무의미합니다. 작중의 구도는 고지와 비이가 사랑하는 호우를 두고 다투는 거고 사야는 고지의 잉여 여동생 포지션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고지와 사야는 정말로 연인관계가 맞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다른 문제-
노블엔진 팝 이라는 출판사는,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한 라이트 노벨을 쓰는 곳이죠? 하지만 설마 대중에게 어필하는 방법이 추리소설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대중에게 어필하는 판타지, 대중에게 어필하는 러브코미디, 등등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대중에게 어필하는 라이트 노벨이라기보다는 라이트 노벨 독자에게 어필하는 순문학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방향이 어느 쪽인지 말이죠.
-총평-
음, 그래도 충분히 완성도 있는 글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마음에 안 든다면 일상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마음에 안 들어서지 글을 못 썼다든가, 아니면 라이트 노벨이라던가 하는 이유는 아닐 것 같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추리물은 엄청나게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벼운 추리면 저도 추리물이라는 장르를 상당히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재밌었어요! 반시연 작가님의 신작을 기대하죠.(어? 혹시 2권 나오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