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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모든 문에는 열쇠가 있다.
글쓴이: SnowCavalier
작성일: 12-02-15 23:39 조회: 4,653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 닫힌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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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그 해를 잊지 못한다.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워서 언니와 함께 방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평소엔 그렇게 상냥하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소리를 방 문 너머로 들어야 했다. 닫힌 적이 없던 우리 자매의 방문을, 나와 언니는 닫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잠기면 어떡하지, 평생 갇혀 살아야 하는 건가, 지금 생각하면 참 귀여운 걱정을 했었다.

우린 창문도 닫아버렸다. 햇빛을 가리기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불평하던 커튼도 쳤다. 밖에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어렸던 우리는 이 소리, 저 소리가 뒤엉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던 소음의 범람을 참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창문과 커튼은 우리를 지키기엔 너무 연약했다. 악의에 찬 비난과 비명, 무언가를, 아니면 누군가를 연호하는 소리는 여전히 귀를 괴롭혔다.

마음도 닫아버렸다. 덮어쓴 이불 속에서, 우리는 단둘이었다. 세상 속에서 서로만이 의미 있는 존재였다. 이불 속은 편안했다. 변화가 없었고, 조용했다. 우리 둘의 공간을 방해하는 존재는 부모님뿐이었다. 가끔 식사를 가져다주시고, 새로운 놀 거리를 이것저것 가져다 주셨다. 밥은 먹었다. 배가 고팠으니까. 하지만 인형도, 게임도 우리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즈음의 기억은 애매해서 확실히 모르겠다. 해가 넘어가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방 밖으로 나와도 된다며, 부모님께서 우리를 불러냈다. 한동안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방 밖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았던가? 서로 바라보며 어리둥절해 있자니 우리를 덮고 있는 이불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머니가 우리를 끌어안고 펑펑 우셨다. 아버지는 햇빛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나도 모르게 귀를 막았지만, 더는 시끄럽지 않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살포시 손을 내리고, 창문 가로 쪼르르 달려갔다. 햇빛이 강렬하게 쏟아져 눈앞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찡그리며 감아버린 두 눈을 조심스레 뜨자 파란 하늘이 보였다. 하얀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초록빛 풀이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집들로 가득했다. 내 뇌는 갑작스레 닥친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고 잠시 멈추어버렸다.

세상은 색으로 가득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언니의 손을 잡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집 근처에 있던 바닷가에서 노을이 질 때까지 놀았다. 그날 본 노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태양, 짙푸르게 물든 하늘. 부모님께서 우리를 맞이하러 왔을 때, 우린 바닷물 범벅이 된 채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버릇처럼 방문을 닫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다.

그 해, 잊으려 해도 있을 수 없는 그 해에, 난 가장 소중했던 것을 잃었어. 엄마와 아빠는 나를 할머니께 맡기고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 슬프게도 이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아.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면 울지 않았을 텐데. 그럼 엄마, 아빠의 얼굴을 똑바로 기억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난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부모님을 곤란하게 했을까? 난 그때부터 어쩔 수 없을 만큼 멍청했나 봐.

마지막으로 안겼던 엄마의 품은 따뜻했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아빠의 커다란 손은 조금 차가웠지. 기분이 좋았지만, 그래도 헤어지는 건 싫었어. 버려지는 것 같았거든. 사랑하는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고, 무서운 밤에 곁에서 나를 지켜주던 이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두려웠어. 그러고 보면 그 어린 나이에도 함께 자지 못한다는 말은 귀신같이 알아들었지. 울음을 그치지 않는 나 때문에 얼마나 곤란했을까? 금방 돌아올 거라고 타일러도 울음을 그치지 않고, 몇 밤 자면 돌아오느냐고 끈질기게 되묻는 나에게, 결국 엄마는 백 밤이 지나면 돌아온다는 약속을 해 줬어. 그런데도 난, 손가락, 발가락을 다 세어도 모자라는 백이라는 숫자가 너무 크다며 더 서럽게 울었지. 백 번째 밤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어. 여섯 살 꼬마에게 백이란 숫자는 너무 컸던 거야.

결국, 난 우는 채로 할머니에게 맡겨졌어. 울고 있는 나를 고향에 두고, 엄마, 아빠는 돌아갔지. 그 등을 보며 너무하다고 생각했었어, 내가 이렇게 우는 데도 날 혼자 내버려둔다고. 지금은 내가 너무했다고 생각해. 나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그래서 기억 속 부모님의 모습은 눈물로 얼룩져 있어. 행복했던 기억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 장면만이 가슴 한 편에 남아, 날 괴롭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품으로 남겨주신 수많은 사진 속 부모님의 얼굴에도, 이젠 눈물 자국이 가득해. 나이가 조금 더 들고 나니 후회가 되더라. 하나라도 깨끗하게 액자에 넣어 보관했어야 하는데.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땐 이미 눈물에 젖지 않은 사진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더라고.

나는 아직도 아흔아홉 번째 밤을 살고 있어.

그 해에 내 세상은 바뀌었어요. 어찌 그 해를 잊을 수 있겠어요? 부모님을 만난 해인걸요. 그분들께서 나를 딸로 맞아주시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요? 아직도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이젠 상상이 가질 않아요.

그래요, 난 고아였어요. 낳아준 사람에 대한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죠. 고아원에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도 몰라요.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고,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불행하진 않았어요.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의외로 불행도 모르는 법이에요. 주변에 엄마, 아빠가 있는 아이가 아무도 없었는걸요. 그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어요. 우리를 돌봐주시는 수녀님들도 그런 이야기는 전혀 해 주시지 않으셨죠.

그래서 부모가 생긴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기쁘다기보단 당황스러웠어요. 그게 뭔데, 하고 되물으니 난감해하시던 수녀님의 모습이 떠올라요. 앞으로 돌봐줄 사람이라는 대답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고아원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싫었어요. 고아원은 내 세계의 전부였으니까요. 아침엔 일찍 일어나서 기도해야 했고 밥도 조금씩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뛰어놀 공간이라곤 작은 마당 하나뿐이었고,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었던 그곳. 지금 생각하면 참 엄격하고 재미없는 곳이었네요.

그래도 친구들이 있었어요. 익숙하기도 했죠. 어렸던 저는 그곳에서 벗어나기 싫어서 울었어요. 부모님께선 참 난감해하셨대요. 나이가 들고 그때의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래도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왜 저였어요? 다른 아이들도 많았는데. 입 밖으로 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참지 못하고 여쭈어봤어요.

신화 속 클라리스를 닮은, 빛나는 머리랑 예쁜 얼굴 때문이었대요.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어요. 처음 보는 아이의 무엇을 보고 아이로 맞이할지 말지를 결정하겠어요? 외모겠지요. 그래도 조금, 아주 조금 가슴이 아팠어요. 그날부터 저와 부모님이 피로 이어져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 새삼 신경 쓰였어요. 아니, 사실은 항상 신경 쓰고 있었죠. 말 잘 듣고 말썽 피우지 않으려고, 공부도 잘해서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려고, 그래서 착한 아이로 있으려고. 많이 참았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믿어요, 내가 못난 아이였다고 해도 날 사랑해주셨을 거라고. 하지만 이미 행복을 알아버린걸요.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절대로. 그래서 난 어리광을 피우지 않아요.

이런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는 마세요. 연약한 속살을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아니, 겁쟁이일지도 몰라요. 여전히 내 속은 여린 그대로니까요. 드러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난 껍질을 더 단단하게 만들 거에요.

Chapter 1. 어느 토요일 오후.

-1-

남자는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중이었다. 여느 때라면 지하철에 앉아서 졸고 있었을 것이다. 대중교통에 홀로 탑승한 남성은 보통 신문을 보거나, 책을 보거나, 경전을 읽거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거나, 또는 졸기 마련인데, 그는 종이와 활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출판사에서 일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일하는 데에서 지겹도록 보아야 하는 저 글자 나부랭이들에게 도통 애정을 느끼지 못하였다. 스마트 폰과 스마트 패드가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이 앞으로 책은 사라질 것이라 장담하였고, 그도 동의했다. 출판사가 망하면 앞으로 생계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생각은 기우에 그쳤다. 종이라는 정보 전달 매체는 끈질기게 살아남았으며, 활자와 함께 오늘도 그를 괴롭혔다. 그는 이 사실에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건너편에 앉은 사람처럼 퇴근길에서조차 종이와 그 위에 쓰인 무언가를 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지하철에서 할 수 있는 다른 특기할 만한 취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나 남은 선택지를 고르는 데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 그는 항상 졸았다.

그날 그가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부산을 피웠기 때문이다. 잠의 나라로 떠나기 직전 그의 옆에 앉은 소녀는 가냘픈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때문에 잠에 들지 못했지만,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피아노를 치는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이 피아노 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어떤 가락을 연주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아름다울 거야.’

그는 잠이 들다 만 머리로 멍하게 생각했다. 손가락이 멈추고, 그 손이 갑자기 후드를 젖히고 헤드폰을 벗겨 냈을 때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머리가 은빛이었기 때문이다.

사십 평생 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아오면서 흰색이나 회색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많이 보았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에게 흔한 색이니까. 그러나 소녀의 머리카락은 은으로 땋아 내린 실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은색은 유채색일까, 무채색일까. 이 순간 그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색은 절대로 무채색이 아니다. 이 색이 흰색이나, 회색과 같은 선상에 놓일 리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신의 논리에 만족하며 넋을 잃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헤드폰과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 순간, 그는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잠기운이 완전히 달아난 남자는 자신보다 스무 살은 어려 보이는 소녀의 미모에 홀린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얕은 죄책감을 느꼈다. 아내와 딸에게 마음속으로 사죄하고 그는 다시 잠을 청했다. 은색 머리를 가진 사람은 희귀하기는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옆자리 여자아이가 아리땁기는 하지만 내 딸도 그에 뒤지진 않지, 딸하고 닮아서 그래, 등등 머릿속으로 변명하며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보상받지 못했다. 채 일 분도 되지 않아 소녀의 손가락은 선율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5분쯤 후엔 또다시 헤드폰을 벗어버렸다. 그는 잠을 자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공공장소의 예절에 대해 말해 줘야 하나 고민하며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본 남자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소녀의 눈에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에서는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생기에 넘치는 눈동자였다.

눈이 참 예쁘시군요.”

소녀는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눈은 서로 바라보게 되었다. 영원과도 같은 잠시가 지나고, 푸른 두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진 그는 살짝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감탄했을 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그토록 아름다운 눈동자는 처음 봤거든요. , 그리고..”

고마워요. 아저씨.”

남자는 대답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40대임에도 그는 자신이 아저씨라기보다는 오빠나 형이라 불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아저씨가 그렇듯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이미 소녀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빠르게도, 이미 귀에는 헤드폰까지 덮여 있었다. 남자는 대화를 지속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목소리도 정말 아름답군. 저 목소리로 오빠라고 한 번만 불러주면 좋을 텐데.‘

그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그 희망이 사그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 주책없다고 생각하며 이번에야말로 자야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머지않아 잠들 수 있었다.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지하철은 중앙청사 역에 멈추었다.

-2-

중앙청사 역에서 내린 은빛 머리의 아가씨, 예 린은 머릿속에서 방금 대화한 아저씨에 대한 기억을 날려버렸다.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있었다. 대륙을 건널 교통수단이 생겨난 이래 사람의 털 색은 점점 다양해졌지만, 귀금속을 연상시키는 색은 드물었다. 은을 녹여 만든 듯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래저래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녀는 방금 같은 상황에 익숙했지만, 그것을 좋아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린은 은빛 머리에 대해 좋은 추억보다는 나쁜 추억이 많았다. 그래서 외출할 때면 모자를 쓰거나, 후드가 달린 외투를 입었다. 주목받기가 그렇게 싫으면 머리를 염색하라고 소꿉친구는 제안하곤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예쁘다고 생각했고, 꽤나 좋아했기에, 언제나 그 제안을 사양했다.

지금이, 5 50. 아직 여유가 있네. 이노리는 보나 마나 늦겠지.’

린은 중앙청사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고 거리를 둘러보았다. 무언가 시간 때울 거리를 찾아서. 하지만 이 거리는 언제나 똑같았다.

역을 나오면 길 건너 맞은편에 큰 백화점이 보인다. 이 주변에서 가장 화려한 십자가를 머리에 진 건물이다. 그 오른쪽에는 낡은 만큼 전통 있는 극장이 하나. 유명한 종교극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극장 위에도 수수하지만, 커다란 십자가가 달려 있었다. 객석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선 교회처럼 주말이면 예배가 열렸다. 첫 예배로부터 벌써 10, 이젠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백화점으로부터 극장을 지나 쭉 내려가면 작은 소극장들이 와글와글 몰려 있다. 예전만 해도 다양한 연극들이 상연되어 붐비던 곳이지만, 최근엔 한산하다. 영화관이 많이 생긴 탓도 있겠지만, 그뿐만은 아닐 테지. 이 극장들의 옥상에도 자그마한 십자가들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백화점에서 길을 한 번 더 건넌 곳에는 큰 서점이 하나 있다. 머리 꼭대기에 십자가가 아닌 성경을 이고 있다는 사실로 유명한 이 서점 비블리오매니아는 나라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서점이다. 금서를 제외한다면, 그 곳에서 살 수 없는 책은 없으리라. 그러나 금서가 그렇지 않은 책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백화점과 서점 사이로 난 길로 들어가면 쇼핑할 수 있는 거리가 있다.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으로, 옷부터 시작해서 악세사리, 신발 등 패션용품 가게가 즐비했다. 그녀도 이노리와 자주 아이쇼핑을 하러 가곤 했다. 그 거리에까지 생각이 닿은 린은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청바지에 하얀 후드 티. 계절이 가을로 변한 후엔 외출할 적이면 언제나 이 옷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0월인가. 연락이 올 때까지 옷이나 좀 볼까?’

새 옷 생각에 들떠 린은 지갑을 펴 보았다. 직후, 용돈 사정을 깨닫고 순식간에 좌절했다. 그녀의 용돈은 고등학생 치고는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소비 또한 고등학생 치고는 스케일이 컸다. 금서는 비싸니까. 책을 사는 것에 후회는 없었지만 그녀는 이것 저것 달리 사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였다. 눈을 돌려 원망스럽게 애용하는 서점이 있는 방향을 바라본 그녀의 눈에 오락실이 들어왔다.

비블리오매니아의 옆 건물 1층에 있는 그 오락실은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름도 없이 ‘GAME CENTER’라는 간판만 달려있는 그 곳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새로운 게임을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뒤로 이어지는 유흥가의 입구와도 같은 곳으로, 그 오락실을 지나야만 다른 놀 거리를 즐길 수 있었다.

비슷한 의미에서 오락실의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카페, ‘바리스타도 먹자골목의 입구와 같은 곳이었다. 바리스타의 뒤로는 술집, 밥집 등 먹을 거리가 가득했고, 식사를 마친 이들은 바리스타에서 한 잔의 커피를 즐기곤 했다.

밥을 먹기도 전에 커피를 마실 생각은 없었던 린은 결국 오락실로 발길을 옮겼다.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며 혹시 늦는다는 연락이라도 오지 않았나 확인했지만, 답장은 없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소꿉친구, 시라키 이노리는 시간 관념이 허술했다. 하나에 집중하면 시간가는 줄 몰라 약속도 잊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녀와 10년이 넘도록 사귀어온 린은 바람맞는데 익숙했다. 몇 번 짜증내고 싸운 적도 있지만 그녀는 언제나 소꿉친구를 당해내지 못했다. 친구가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아쉬운 소리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도 남들보다 쉽게, 그리고 잘 해내지만, 그래서 빨리 질리며 벽에 부딪치면 금세 포기하고 마는 그녀는 이노리의 열정적인 면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걸 따라 하진 못하겠더라.’

씁쓸히 웃으며 문을 지나치자 오락실 특유의 소음이 귀를 가득 채웠다.

이 곳을 찾을 때 마다 즐겨 하곤 하는 리듬 게임 기계가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린은 그 앞으로 걸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지갑에서 100성 동전을 꺼내 기계에 집어넣은 후, 카드를 꺼내 인식시켰다. 마지막으로 아이팟에 연결되어 있던 헤드폰 잭을 뽑아 기계에 꼽으려는 순간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지?’

헤드폰 잭을 마저 꼽은 린은 의아함을 느끼며 핸드폰을 꺼냈다. 이노리가 제 시간에 약속 장소에 오는 일은 아주 드물었기에 두 사람은 항상 약속 시간을 여유롭게 잡았다. 그래서 린은 이 전화가 이노리의 연락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발신자 이름에서 시라키 이노리라는 문자열을 확인하고는 살짝 놀라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잠깐의 공백 후 그녀는 헤드폰을 벗고, 통화버튼을 누른 뒤,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리링~! 왜 이리 전화를 늦게 받아!”

전화기 속에서 귀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린은 친구의 목소리를 좋아했지만, 그녀의 기분에 따라 자신의 이름이 다양하게 왜곡되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가끔 투덜대 보았으나 그녀의 소꿉친구는 그녀의 항의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린은 머리가 아파졌다.

이번에도 소용 없겠지.’

리인! 왜 대답이 없어? 어라 분명히 받았을 텐데?”

수화기에서 이노리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자, 린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이노리.”

아 역시 받았잖아! 왜 말이 없었어?”

살짝 한숨을 내쉬고 린은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린이야, 예 린.”

그런데?”

이상하게 부르지 말라는 거야.”

에헤헤

얼버무리지 마!”

린은 다시 한숨을 쉬곤, 넘어가기로 했다. 이노리가 그만 두리란 기대조차 이젠 포기했으니까. 린은 왼 손으로 전화기를 바꿔 들며 오른 손으로 카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1-2-2-0. 그녀의 생일.

지금 오락실이야, 어딘지 알지? 여기로 와.”

오락실이라니? 우리 6시에 만나기로 했잖아. 지금은 정각 6시로 사료됩니다만 린 여사님?”

온라인 플레이, 레벨 별 정렬.

오랜만이니 9로 시작해 볼까?’

린 여 사 님?”

네가 약속에 정시에 나온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는 생각하고 말해.”

, 그래도-“

린은 매몰차게 말을 끊었다.

그래도는 무슨. 매칭 됐어. 끊는다.”

잠까-“

린은 전화마저 끊고 헤드폰을 다시 썼다. 눈 앞에는 4<!--[if !msEquation]-->_?xml_:namespace prefix = v /> <!--[endif]-->4의 정사각형이 있었다. 차오르는 물결에 맞추어 그녀는 손을 움직였다.

-3-

감이 많이 떨어졌네. 아무리 10레벨이라지만 A도 안 나올 줄이야.’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에 아쉬워하며 린은 헤드폰을 벗고 가방을 다시 메었다. 뒤로 돌아선 그녀의 눈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이노리가 비쳤다.

어깨를 살짝 넘는 검은 머리가 목 뒤에서 한 갈래로 살짝 묶여 있었다. 그 아래로는 검은색 윈드브레이커와 검은 추리닝 바지. 운동화마저 검은색이었다. 그 검은색 직선에서 하얀 얼굴만이 부각되어 있었다. 약간 화가 난 듯 올라간 눈꼬리,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노란 눈동자, 작은 코와 앙다문 입술이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지금은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린을 책망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6시에 만나자고 한 건 린, 너잖아!”

연극 연습이 일찍 끝났나 봐?”

린은 이노리의 항의를 한 귀로 흘려버리며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금 샤워를 했는지, 살짝 촉촉한 머리결의 감촉이 아주 좋았다. 이노리도 금세 표정이 풀어졌다.

에헤헤, ! 오늘은 너랑 연극 보러 간다고 지난 주부터 이야기를 했거든. 그랬더니 일찍 보내 주셨어. 샤워도 하고 왔지롱. 이 아니라 말 돌리지 마!”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치우고 다시 화를 내 보려 했지만, 이미 이노리의 말에는 박력이 없었다. 본인도 그걸 깨달았는지 금세 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오락실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노리도 쪼르르 뒤를 따랐다.

, 당연히 늦을 거라고 생각해서 미안. 하지만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

문자가 왔을 때 씻고 있었어. 뭐 아무렴 어때. 나 배고파. 밥 먹자.”

오락실을 나선 두 사람은 길을 건너 먹자골목으로 들어섰다. 음식점이 모여 있는 거리로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이 골목엔 전국적으로 유명한 음식점부터 싸고 맛있는 맛집까지 없는 게 없었다. 흔히 접하기 힘든 외국의 음식점들도 이곳 저곳에 있어, 여행 온 외국인들도 자주 찾곤 했다. 수 많은 먹을 거리로 가득한 그 곳은 한창 자랄 나이의 소녀들에겐 너무나도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젊은 세대를 위해 싸고 맛있는 요리를 파는 집도 한 가득 있었기에 그녀들은 중앙청사에 나올 때 마다 이 거리를 찾았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이노리는, 이 거리를 특히나 좋아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여긴 너무 먹고 싶은 게 많아!”

올 때마다 그 소리. 뭐 먹을래?”

물어보기는 했으나, 린은 명확한 대답이 돌아오리란 기대를 하진 않았다.

글쎄, 지난 번에 돈까스는 먹었으니까 이번엔 스파게티를 먹을까? 고기도 먹고 싶기는 하지만 란 언니도 없으니 오늘은 넘기고. 추우니 따뜻한 걸 먹고 싶기도 한데. 설렁탕이나, 아니면 닭갈비? 아 아니면 회를 먹을까? 회 먹은 지도 오래 된 것 같은데. , , 어쩌지, 어쩌지?”

이노리는 걸음을 멈추더니 다양한 음식 이름을 쏟아냈다. 일관성이 전혀 없는 음식의 나열에 린은 머리 속으로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하나만 정해.”

역시 그냥 린이 정해줘. 난 도저히 나를 기다리는 수 많은 진미들 중 하나만 고르는 잔인한 짓을 할 수가 없어. 난 아무거나 좋아!”

여느 때처럼 결정권은 린에게 넘어왔다. 이노리는 선택을 망설이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먹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도 우유부단했다. 그래서 메뉴의 결정은 항상 린의 몫이었다. 외식을 할 때나, 장을 볼 때나. 다행히, 혹은 당연하게도 이노리의 입맛은 까다롭지 않았다. 무엇이든 잘 먹고, 또 맛있게 먹었다. 그래서 린은 부담 없이 자기가 먹고 싶은 걸 고르곤 했다. 무엇을 먹을까, 린은 머리 속으로 몇몇 후보를 떠올리며 이노리에게 물었다.

배 많이 고파?”

이노리는 아담한 몸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조금. 점심을 일찍 먹은 데다 오늘은 몸을 많이 움직였으니까, 양이 많다면 좋을 거 같기는 해.”

그럼 초밥 뷔페로 가자.”

초밥, 좋아! 헤헤 초밥 초밥~”

이노리는 뛸 듯이 좋아하며 린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자주 가는 초밥 뷔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린도 끌려가듯 그녀의 뒤를 따랐다.

주말 저녁이라 거리에 사람이 가득했다. 평일에도 사람이 많은 곳인데 지금은 주말, 하물며 저녁이었다. 인파 속에서 이리 저리 부대낀 후에야 둘은 겨우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약간은 후미진 곳에 있는 초밥 뷔페 스시야는 위치 때문에 처음 오는 손님이 많은 식당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이 곳을 찾은 이들은, 그 맛과 가격에 반해 높은 확률로 다시 찾곤 했다. 뷔페임에도 회전초밥집과 같은 인테리어인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래서 스시야안은 항상 단골 손님들로 가득했다.

사람이 많은 장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노리가 투덜댔다.

"이 동네는 주말엔 너무 혼잡해. 주말엔 특히. 평일엔 학교 때문에 나올 수 도 없는데. 문제는 달리 연극을 볼 데가 없단 말이지."

린은 피식 웃었다.

"연극을 뺀다면 달리 놀 곳은 많지. 그러게 왜 연극에 빠져서 날 여기까지 불러내?"

"연극은, 내 운명이야! 연극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어! 연극, 그대는 왜 연극인가요!"

이노리가 연극에 빠진 후 입버릇처럼 하곤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린은 이노리의 말을 무시하고 음식점 입구 쪽으로 발을 옮겼다. 직후, 그녀는 어떤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뷔페는 시간에 따라 가격이 변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주말 저녁 시간대의 뷔페는 학생에겐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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