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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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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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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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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 Roude 프로젝트글 시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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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메인 페이즈] #2
14-11-15 13:32
 
 
외롭다는 감정은 엘사에게 낯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익숙했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는 것에도, 곁에서 시중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것에도, 그녀는 이미 적응한 상태였다. 그녀의 힘을 숨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는 안 된다. 아예 방을 나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는 오로지 아버지와 어머니 뿐이었다. 때로는 방문 너머로 안나가 말을 걸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엘사는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낯설지 않다는 것이, 익숙하다는 것이, 결코 견딜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아 무도 없는 언덕의 마을. 알아보지 못할 낙서와 기둥 사이를 연결한 천들만 남아 있는 이곳은 엘사에게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아무도 없어서 힘을 들킬 염려도 없었고, 귀찮게 쫓아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엘사는 벽에 등을 기댄채 하늘을 바라봤다. 모든 게 낯선 동네에서 별자리만 익숙했다.
엘사는 별을 연결하면서 애타게 찾는 얼굴을 그려보려 했다.
어머니는 어디 있을까. 안나는 어디 있을까.
안나는 언제나 사람들과 빨리 친해지곤 했지만, 여기서는 그게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모르는 남자가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하지는 않을까? 상상만 해도 가슴 한 편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꿈꾸는 소녀인 나이인데, 그런 안나를 겉으로만 그럴싸한 남자가 유혹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루만에 결혼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을까.
뛰는 가슴 위에 두 손을 올리다가, 화들짝 벽에서 멀어졌다. 그녀의 몸이 닿아있던 벽에, 바닥에, 웅덩이에 어느새 흰 서리가 얹히기 시작했다. 엘사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며 아버지가 가르쳐준 말을 떠올렸다.
숨기고, 느끼지 말고, 알게 하지 말라.
다섯 번째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퍼져나가던 서리는 잦아들은 상태였다. 엘사가 입김을 내뿜는 순간에도, 반경 5피트에 달하던 서리는 4피트로 줄어들어 있었다. 지금도 서서히 줄어드는 중이었다.
오직 엘사의 오른쪽 방향에서만.
엘사의 발이 움찔거렸다. 그녀 자신도 제어하지 못하는 능력을 다시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트롤도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제는 심호흡도 할 수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들숨과 날숨이 순서를 정하지 않고 나왔다. 올라프를 만들면서 놀았던 때보다 더 떨렸다.
무언가, 허공에서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혹시.
그 때 엘사의 마음을 감싼 건 하나의 희망이었다. 혹시 자신의 힘을 제어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나올지 모른다. 혹시 자신의 힘에 대해 아는 누군가가 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희망을 현실은 산산히 부숴버렸다.

엘사에게 '그것'은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사가 알고 있던 그 존재는 어디까지나 동화책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결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처럼 허리가 굽어있지도, 깃털이 빠진 피부에 물집이 잡히지도,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지도 않았고.
"Ke......te...ll."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뱉지도, 사람 키 정도의 혀를 덜렁거리지도, 발자국에 고인 피로 땅을 녹이지도 않았다.
온 몸이 불로 이루어진 새.
그것은 이야기 속의 우아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모습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악몽에 나올 법한 끔찍한 모습이었다.
어째서, 이런 게 있는 거지? 어째서 그녀에게 다가오는 거지?
"오......."
엘 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한 걸음이 다시 한 걸음으로, 두 걸음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서 하얀 얼음기둥들이 지면에서 올라왔다. 순식간에 엘사의 머리 위까지 솟은 얼음 기둥은 새의 열기는 막아냈지만, 피를 뚝뚝 흘리는 눈동자까지 감춰주지는 못했다.
"오지마!"
엘사의 외침과 동시에 새의 목 아랫부분에서 살점이 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엘사의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입가로 향했다.
훤히 드러난 구멍 뒤에서 소용돌이치는 무언가가 휘르륵 쌓이는 것이 보였다.
다가올수록 점점 커지던 불새의 모습이 바로 앞에서 사라진 직후.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얼음 기둥이 박살났다. 터져나온 파편들이 엘사를 덮쳤다.
기둥을 박살낸 것이 새의 거대한 부리였다는 사실을, 얼음의 파편들이 기적적으로 엘사의 몸을 스치기만 했다는 사실을, 그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를 엘사는 알지 못했다.
순수한 공포가 엘사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안나......!"
엘사의 발이 닿을 때마다 지면은 얼음으로 덮이고 순식간에 거대한 얼음기둥들이 솟아나왔다. 그녀를 쫓아오는 불새는 날개짓으로, 발톱으로, 그 열기로 얼음기둥들을 파괴해버렸다.
"안나, 안나, 안나, 안나......."
엘사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이가 몇 번이나 서로 부딪혔다. 하얗게 서린 숨결이 한치의 쉴 틈도 없이 그녀를 몰아세웠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길을 엘사는 그저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 앞에 있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있는 도시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 * *

밤하늘의 한 부분이 새하얗게 타오른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빨강, 주홍, 주황 등 모든 색의 불꽃이 칠해진 어둑어둑한 하늘의 배경을 막대한 양의 흰 수증기가 피어올라 메우고 있었다.
멀리서 본다면 반대편 하늘에서 곧 모습을 드러낼 태양과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초월한 신야의 눈에는 그 불꽃 안에 새의 형상을 한 괴물의 모습이 똑똑하게 보였다.
그 앞에서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한 소녀의 모습 역시. 한눈에 봐도 그녀가 불새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금방이라도 따라잡힐 것 같은 소녀를 구해주고 있는 것은 지면에서 솟아나오는 무수한 얼음의 벽들이었다. 끊임없이 불새의 시야를 가리고 소녀에게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얼음들. 불새가 그것들을 전부 파괴하거나 열기로 녹여버리는 사이 시간을 번 소녀가 달아나서 거리를 벌리곤 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소녀에게는 그 이상 도망칠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이미 한참 전에 바닥난 체력을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과 의지만으로 버텨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신야의 눈에 들어온 막다른 궁지에 몰린 소녀의 모습에, 그가 잘 아는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죽은 그의 여동생, 미유키의 모습과.
생각하기 전에, 신야의 몸이 움직였다.


* * *

화염과 열기. 귀를 틀어막고 싶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울음소리. 흩날리는 얼음 파편들. 폐를 짓이기는 차가운 공기. 바로 등 뒤로 다가온 섬뜩한 숨결.
결국 그 술래잡기의 균형은 엘사의 두 다리와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아......."
황급히 일어서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상반신만을 일으켜 두 손을 짚어가며 몇 센치 뒤로 달아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냥감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몰아넣는 조류의 습성처럼, 땅바닥에 넘어진 엘사의 등 뒤를 덮치듯이 불의 새가 떠올랐다. 그 썩어들어가고 있는 커다란 눈에 꼴사납게 넘어진 엘사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 보였다.
그렇지만 엘사의 마음에는 오직 절망조차 넘어선 무력감만이 떠올라 있었다. 
여기서 죽으면 혹시 안나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멍하니 했을 때.
뭔가 고깃덩이가 부딪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엘사에게 곧장 다가오던 새가 갑자기 머리를 높이 쳐들며 울부짖었다. 지금까지보다 몇 배는 더 높고 날카로운 그 소리에 엘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무릎에 파뭍었다.
"이봐, 도망쳐!"
소름끼치는 소리를 뚫고 남성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눈을 뜨자 어느새 다가와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 보였다. 그 붉은 눈동자가 엘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멍하니 있어! 어서!"
넘어진 엘사를 일으키려고 뻗은 청년의 손을 피해 엘사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 때, 지면이 쿵 하고 울렸다. 불의 새가 두 사람의 앞에 내려서 있었다.
엘사는 새의 한 쪽 눈동자에 철봉처럼 생긴 물건이 날카롭게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Keeeeeeeell!"
핏방울로 붉게 번진 불새의 눈에 떠오른 감정은 틀림없는 분노였다. 그 시선은, 엘사가 아닌 신야를 향하고 있었다.
"큭!"
날카로운 날개 끝이 신야가 서있던 자리를 찌르듯 덮친 것과 신야가 몸을 옆으로 날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몸을 구르며 다시 일어선 신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다시 날아오른 불새가 쫓기 시작했다. 넘어져 있는 엘사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로.
이름도 모를 청년의 도움 덕분에 자신이 구사일생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엘사가 간신히 실감한 순간, 밤새 불새를 피해 달리기를 계속해왔던 그녀의 의식은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 * *

날개 끝에서 흩날리듯 떨어져 나오는 작은 불곷들.
아직 잠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비명같은 울음소리.
그 새를 자극한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특히나 아무런 능력도 사용할 수 없는 지금의 신야에게는.
"큭......."
소용돌이치듯 내뿜어지는 화염의 덩어리는 몸을 날려 피한다. 낚아채려 달려드는 날카로운 발톱은 몸을 굴려 피한다. 통째로 삼키려 다가오는 부리는 그저 반사신경과 도박같은 행운으로 피한다.
결국 새는 당초 쫓고 있던 소녀가 아닌 신야를 쫓아왔다. 정체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붙잡기 쉬운 쪽보다 자신을 상처입힌 쪽을 선택한 것으로 미루어보건데 그다지 지성이 높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신야의 분석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거리가 좁혀드는 바람에 치명적인 공격을 피할 여지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눈 앞의 상대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신야는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넣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미 기진맥진해서 쓰러졌을 정도로 전력질주를 오랫동안 계속했지만 아직 좀 더 버틸 수 있었다. 디제노이드 입자가 아직 몸에 남아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차원이동의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아직 그가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곧 신야의 노림수는 맞아떨어졌다.
주변의 풍경이 일전했다. 탁 트인 평원에서 인공물들로 가로막힌 장소로.
신야가 처음 이 세계에서 정신을 차린 뒤로 만 이틀 넘게 계속 머무르고 있던 도시였다. 그 중 한 번이라도 돌아다녀본 영역은 대략적으로 신야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저런 거대한 적이 움직이기 힘든 좁은 길이나 막다른 길이 어디쯤 있는지. 비록 도시 전체는 아니지만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도시에서 새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는 신야를 쫓으며 우왕좌왕거리기도 하고, 건물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잠시 멈추기도 하고, 좁은 골목 사이로 들어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고도를 높이기도 하는 등, 서서히 신야와의 거리가 벌어져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절망적인 상황은 어찌어찌 극복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적절한 반격 수단이다. 아까 전에는 아직 이쪽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습을 가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점이 성가시다. 어느 정도 위력이 있는 무기가 아니면 유효타를 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총이라든가.
아주 잠시 리스크와 이득을 저울질하고서, 신야는 넓은 길로 다시 빠져나왔다. 그 뒤의 상공을 불의 새가 곧장 날아 쫓았다.
부산하게 새벽을 준비하며 움직이던 사람들이 거대한 새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 하나둘씩 멍하니 멈춰서기 시작했다.


* * *


"역시 어느 세계건 보석은 비싸기 마련인 모양이네."
귀금속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에서, 토오사카 린은 방금 나온 가게를 힐끗 뒤돌아보았다. 유리로 된 진열장 뒤로 쓸데없이 완고해 보이는 표정으로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가게 주인이 팔짱을 낀 채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고 있었다.
돈을 내는 손님에게 결코 아양을 떨지 않겠다는 그 기개 넘치는 태도는, 린으로서는 어느 쪽이냐 하면 호감이 가는 쪽이었지만, 솔직히 장사에는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어쩐지 이웃한 가게들에 비해 구석구석 낡아 보이는 것도 기분 탓만은 아닐 테다.
어차피 남의 일이긴 했지만, 보석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비싸든 싸든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이 세계의 돈은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니까."
그녀의 등 뒤에서 카레이도 루비가 무례한 의견을 말했다.
"재확인했을 뿐이야. 지금의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막연한 추측이나 고정관념만으로 상황을 예단하는 건 어리석기 이전에 꼴사나우니까."
여 차하면 이 세계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돈을 벌어볼 생각이었지만, 그 정도 금액으로는 실전에서 쓸 만한 보석은 손에 넣기 어렵다는 계산이 나왔다. 딱히 처음부터 기대하지는 않았으니 낙담하지는 않았다. 그저 스스로가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재확인했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굳이 이렇게 모습을 감출 필요가 있을까요?"
카레이도 루비가 조금 불만스럽게 말했다. 일단 지금의 루비는 일반인에게는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카모플라쥬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제2법의 응용 중 하나를 사용해서.
"마법소녀틱한 지팡이가 허공에 둥둥 떠있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떠있는 게 아니라 한 손에 들고 다니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오케이일 텐데......."
"기각."
"에에~?"
루비가 과장되게 항의의 목소리를 냈지만, 린은 무시했다.
토라졌는지 한동안 입을 다물고 린을 뒤따르던 루비는 상점가를 벗어나갈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딱히 보석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강력한 마술예장이 둘이나 있으니까."
요컨대 카레이도 루비 자신과 시로가 만든 레플리카 보석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물론 린 역시 그 점은 이미 한참 전부터 의식하고 있었다.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나 실전용 보석을 구할 수 없을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말해두는 걸 깜빡했네. 그 둘 중에서 변태 지팡이 쪽은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야."
"변태 지팡이라니 저 말인가요?! 너무해! 대체 어째서?"
"이유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는 게 어때?"
린의 목소리에서 범상치 않은 기백을 느꼈는지, 루비는 이번에야말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 때.
"뭐지......?"
린이 발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고개를 들어 빌딩으로 덮인 하늘의 한 점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상당히 강력한 마력이네요.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거리는 대충 일 킬로미터 정도에요."
카레이도 루비의 목소리에는 조금 전까지의 장난치는 기색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인간인지 아닌지는 몰라도......최소한 온화한 성격은 아닌 모양이네."
마치 사냥에 나선 육식동물이 이빨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 존재는 강한 마력을 숨길 기색도 없이 공격적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지만.
"루비, 지금 다가고 있는 존재를 적으로 간주할 것. 계속해서 거리를 탐지해. 상대가 300미터까지 접근하면 나를 숨겨줘. 기척도 마력도 알아차릴 수 없도록 완벽하게."
"네엡."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린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차폐물이 많고, 가능하면 사람이 말려들지 않는 장소.
사방을 둘러보는 린의 표정은 어느새 냉정한 마술사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 * *

쓰러지듯 잠들어 있는 엘사의 얼굴을 부드러운 햇살이 간지럽힌다. 긴 속눈썹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아렌델에서는 일 년에 헤아릴 수 있을 정도밖에 볼 수 없는, 밤을 내몰며 떠오른 태양의 빛. 그 빛에 엘사는 간신히 눈을 떴다.
"아......."
눈을 뜬 순간, 지난 밤의 공포가 엘사를 엄습해왔다.
여기는 대체 어디지? 그 괴물 새는 어떻게 됐지? 난......살아있는 걸까?
그리고 간신히 모든 것을 떠올렸다. 악몽이나 다름없었던 그 도망치던 밤의 일들을. 쫓기고 있던 그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대신 희생한 청년까지, 전부.
그는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다음 일어났을 일을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평범한 인간의 신체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존재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 청년은 아마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엘사의 마음은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지금이라도 그를 구해야 해.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녀 따위는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얼음조차 간단하게 깨부쉬고 녹일 정도로 강력한 괴물을 상대로? 게다가 그 청년은 어차피 죽었을 텐데.
-그렇지만 생명의 은인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
-그래서 기껏 살아남은 목숨을 헛되게 버리려고? 어머니를, 안나를 찾는 건 어떻게 하고?
뇌리를 스치는 수많은 갈등과 번뇌가 그녀를 괴롭혔다.
비 틀거리며 일어서려 한 그녀의 발이 바닥에 남아있던 얼음의 파편을 딛고 휘청거렸다. 지면이 기울고 울퉁불퉁한 바닥이 덮쳐왔다. 눈을 감을 틈도 없이, 땅과 하늘이 몇 번 씩이나 뒤집히면서 턱과 어깨와 등과 다리를 구분하지 않고 두들겼다.
턱이 화끈거리고, 옷에 흙먼지가 묻었고, 어깨가 시큰거리고, 발목에 힘이 안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보다 마음이 아팠다.
난......너무 비겁하구나.
눈물로 흐려진 눈앞을 엘사는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스 스로에게 향한 죄책감. 평소의 엘사라면 견뎌낼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왕국의 제1공주로 태어난 것도, 언젠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는 것도, 자신의 힘 때문에 일어난 사고도.
그렇지만 지금 엘사의 마음은 꺾이고 말았다.
생 사조차 모르는 어머니와 안나, 낯선 세계에서의 두려움, 의지할 사람이 없는 외로움, 불과 사흘 사이에 두 번이나 코앞까지 찾아왔던 죽음의 경험. 흘러넘치기 직전까지 모인 물이 결국 한계를 맞이해서 둑을 무너뜨리듯, 그동안 계속해서 참고 담아두고 있었던 감정이 엘사의 가슴에서 흘러넘치고 말았다.
한 번 통제를 벗어난 감정들은, 그녀 자신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죄책감을 향해서.
"하아, 아아......!"
오 열하는 그녀의 눈물이 핏방울과 함께 손바닥에서 타고 내렸다. 검붉은 색이 뒤엉킨 핏물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흘러내리며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얼음은 마치 핏빛 수갑처럼 엘사의 손등과 바닥을 연결하고, 손을 타고 몸을 향해 올라왔다. 바닥의 냉기도 서리로 엉겨붙었다가 얼음으로 변하며, 엘사의 치맛자락을 타고 올라왔다.
얼음은 웅크린 몸으로, 볼을 덮은 얼굴로, 서서히 엘사의 온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 * *

상 업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를 제복 차림의 젊은 남성이 의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푸른색 계열로 통일된 제복의 등 뒤에는 큼지막한 로마자로 'POLICE'라는 대문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경찰관이었다.
그 경찰관은 주위를 둘러보지도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마치 아무런 목적도 없이 정해진 길을 정해진 시간에 걸어갈 뿐인 듯한 태도였다. 이따금 생각났다는 듯 허리에 차고 있던 무전기를 손에 들고서는 짤막하게 한두 단어를 중얼거릴 뿐인 그 동작은 그야말로 공장의 자동 기계가 연상될 정도로 단조롭기 이를 데 없었다.
채용 시험에 합격해서 어렸을 적부터의 꿈이었던 경찰이 된 것은 대략 삼 년 전. 그 삼 년이란 세월은 의욕이 넘치던 신참내기 순경을 한없는 무력감과 권태로움에 찌들게 만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드라마 속에 종종 등장하는 그가 동경하던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외롭고 힘겨운 길을 고수하는 경찰'은 현실에 존재하기 이전에 애초에 존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경찰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선 맞서야 할 '악'이 있어야 하지만, 실제 경찰이 되고 보니 상대하는 적이란 그저 소소하고 일상적인 사소한 문젯거리들, 치졸하기는 해도 커다란 악의는 없고 음흉하지도 않은 범죄들 뿐이었다.
그 런 자잘한 사건들의 사무에 파묻힌 직장에서 정해진 대로 묵묵하게 출근하고 해야 할 일을 하고 퇴근하는 경찰의 업무는, 그저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조직의 톱니바퀴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거기서 어떤 보람도 흥미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냥 전부 때려치고 고향에 돌아가서 부모님 농사나 도와드릴까. 예전이라면 코웃음치지도 않았을 그런 생각을 최근에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빈도가 부쩍 늘어났다.
소에게 여물을 주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멍하니 걸어가던 청년의 귀에.
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TERRRRRRRRR!"
어떤 조류의 울음소리에 인간의 웃음소리를 샘플링해서 인공적으로 합성한 듯한, 기괴하고 불길한 소리. 그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현실이 비현실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온몸이 불타고 있는 거대한 새.
우왕좌왕거리며 정신없이 도망치거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경악한 채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정말로 살아 있는 생명체인지 아닌지도 모를 그 괴물에게 쫓기고 있는 한 청년.
속 도는 하늘을 나는 새 쪽이 압도적으로 위인데도 불구하고, 그 청년은 마치 헐리웃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지형과 차폐물을 교묘하게 활용하며 추격을 따돌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납작하게 짓눌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를 상대로,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로 불길과 발톱을 피하는 그 모습은 멀리서도 조마조마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하하하......."
메마른 웃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문득 멀리서 달리던 그 청년과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청년이 달리던 방향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거의 프로 스포츠 선수 수준으로 빠르게 달리면서, 청년은 어느새 급격하게 가까이까지 다가와 있었다.
"미안하지만, 잠시 빌릴게!"
그를 스쳐지나가는 순간, 유창한 영어로 그런 말을 남기고 청년은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져갔다.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한 박자 늦게서야 허리의 홀스터와 탄창 캐리어가 가벼벼워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 이봐!"
당황한 그는 허둥지둥 청년을 뒤쫓으려 했지만.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았다.
아직 괴물의 불길에 물들지 않은 푸른빛 하늘 속을 양분하듯 헤쳐가고 있는 붉은 색.
지면에서도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은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리본으로 묶은 은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흩날리는, 젊은 여성이었다.


* * *

"이거 참, 아무리 봐도 다 비슷비슷하단 말야......."
적당히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고도를 유지하며 구름 아래로 비행하던 츠치키 료야는 지상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방랑생활 나흘째.
일주일 전 료야는 스키마 실험 도중 뜻밖의 사고, 그것도 다분히 인위적인 듯한 사고 탓으로 순식간에 환상향에서 어느 낯선 장소로 이동해버리고 말았다.
꽤나 깊은 산 속, 그것도 일본이 아니라 이웃나라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경험이었지만, 그 뒤 밤새 바다 위를 날아 일본으로 간신히 돌아갔던 료야는 한층 더 경악하고 말았다.
일본은 그가 알고 있는 일본이 아니었다.
이래서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료야 자신도 무슨 짓을 당한 건지 알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다.
우선 료야의 방이 있던 맨션 일대는 송두리째 사라지고 대신 낡은 상점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타카야마 가의 저택이 있던 곳에는 고급 호텔이, 그의 직장인 고등학교가 있던 곳은 공립 공원으로 변해 있었다. ......딱히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덤으로 모리야 신사가 있던 곳에는 박물관이 들어서 있었다.
이상해진 것은 료야 자신인가, 아니면 이 세계 쪽인가. 어느 쪽이든 큰일이다.
이변을 깨달은 료야는 처음 자신이 정신을 차렸던 곳, 환상향에서 순간이동해온 그 산으로 다시 돌아가보기로 했다. 뭔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료야의 기억력은 난생 처음 본 지형, 그것도 외국의 한 장소를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지는 않았다.
결국 대강 기억나는 방향과 거리만으로 나흘째 그 일대를 돌아다니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이렇게까지 큰 일이 벌어진 걸 보면, 역시 스키마의 장난......은 아니겠지."
료 야가 처음 의심한 제1용의자는 물론 야쿠모 유카리였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대요괴의 이름을 붙이면 도라○몽 마냥 뭐든 납득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방약무인한 야쿠모 유카리에게도 일단 상식 밖의 상식이랄까, 나름대로의 규칙이랄까,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다. 적어도 료야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로 문제다.
"뭐, 그래도 위험한 장소에 떨어지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북쪽'에 떨어져 버렸더라면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할 뻔 했으니까.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까?"
아무리 내려다봐도 그게 그거 같은 비슷비슷한 지형만 아무 소득 없이 돌아다니는 걸 계속하다 보니 료야로서도 슬슬 지겨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다시 일본에 돌아가는 것도 조금 곤란하다.
다 행히 신용카드 등이 들어있는 지갑은 가지고 있긴 하지만, 당연하다는 것처럼 사용할 수 없었다. 설령 돈이 있다 하더라도 여권이 없으니 비행기나 배는 탈 수 없다. 결국 일본에 돌아가려면 어두운 밤을 틈타 레이더에 걸리지 않도록 저공비행을 하는 수밖에 없다. 죽을 염려는 없더라도 나름 위험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두 번 바다 위를 왕복하는 동안 세 번이나 바다에 빠지고 말았으니.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해볼까......."
크게 하품을 하며 일단 적당히 착륙할 장소를 찾으려 했을 때.
"어라?"
지면에서 햇빛을 받아 빛나는 물체가 료야의 시야에 들어왔다.
"......빙하?"
그럴 리가 없다.
해가 쨍쨍한 이런 계절에. 그것도 바다도 아닌 산 근처에.
하물며 그 안에 인간이 들어있을 리는 절대로 없다.
그렇지만, 분명히 있었다.
서둘러 지면에 내려선 료야는 그 얼음덩어리 곁으로 다가갔다.
열대 우림의 거대한 나무처럼 높이 뻗은 그 투명한 얼음 안쪽에는.
금발에 연남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분명하게 비쳐보이고 있었다.


* * *

짧게 울리는 한 줄기 총성.
찢겨나가는 비명과도 같은 새의 울음소리.
불로 타오르는 날개에 생긴 육안으로 간신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 크기의 구멍에서 불꽃처럼 새빨간, 아니 불이 타오르고 있는 피가 뚝뚝 떨어지며 지면을 붙태웠다.
총소리 때문인지 마구잡이로 도망치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더욱 흐트러졌다. 절규에 찬 비명소리마저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총을 쏜 당사자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명중했는지조차 확인하지도 않고 곧바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냉정하고도 정확한 판단이었다.
콤마 몇 초 전까지 신야의 몸이 있던 자리를 강렬한 풍압과 날카로운 발톱이 찍어내렸다. 아스팔트 바닥에는 순식간에 지하의 수도관이나 고압선 따위가 보일 정도로 깊은 구멍이 파였다.
신야는 작게 혀를 찼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군.
괴물 새의 기세는 새벽녘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둔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추격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저런 상식을 벗어난 체격과 운동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열량이 필요할 테니, 계속 도망치며 따돌리다 보면 언젠가 제풀에 지쳐 퇴각할 거라는 계산이었지만, 아무래도 상대를 얕본 모양이었다.
지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슬슬 신야 자신의 체력이 버틸 수 있을지마저 걱정되기 시작했다.
신야는 새의 날개를 힐끗 바라보았다. 조금 전 총탄이 관통했던 상처는 어느새 흔적조차 거의 남기지 않고 아물어 있었다. 마치 불꽃을 총탄으로 꿰뚫었던 것처럼.
애초에 상궤를 벗어난 상대에게 상식적인 분석을 시도한 것부터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쪽 역시 상식을 버리지 않으면 잡아먹히고 만다.
그렇다면 지하로 피하는 편이 낫겠다. 신야는 방침을 바꾸기로 했다.
만약 저 새가 지하까지 파고들며 신야를 쫓아온다면, 이 도시에 미칠 피해의 규모는 지금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되겠지만 신야는 그런 사실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형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때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각오였으니까.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 텅 빈 주변 일대를 둘러보며 피하기 적당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을 때.
상공 언저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꽤 근성 있네. 일반인 주제에 '저런 것'을 상대로 여기까지 버티다니."
"누구냐?"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을 때.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야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
"솔직하게 감탄했어. 뭐, 뒷일은 나에게 맡겨 줘."
자신감 넘치는 그 말투의 주인공은, 화려하게 나풀거리는 붉은색 드레스와 망토를 걸친 은발 여성. 외견으로 보건데 나이는 아마도 20대 초중반 가량.
한 손에는 투명한 단검 형태의 물건을, 다른 한 손에는 옛날 애니메이션에서 나올 법한 메르헨 디자인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마법소녀 카레이도☆루비! 등장입니닷!"
"그런 쓸데없는 소개는 필요 없어!"
......대체 저건 아군일까, 그저 방해꾼일까.
자신의 지팡이와 말다툼을 시작한 린을 보며 신야는 상당히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당황했을 때는 우선 기본적인 상황부터 재확인한다. 환상향에서 나름대로 료야가 익힌 생존 테크닉이다.
"역시 인간인 것 같은데. 인형이라기에는 너무 리얼하고."
료야는 눈 앞의 얼음기둥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표면을 만져 보기도 하며 거듭 확인했다.
이런 얼음기둥이 자연적으로 생겨났을 리는 없다. 인간 한 명을 통째로 얼려버리는 건 파츄리 급의 마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일단 자연적으로 녹고 있기는 한 모양이네."
얼음의 표면은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마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마력의 공급이 끊기는 바람에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법을 펼친 데 비하면 뭔가 굉장히 어설프다고 할까, 컨트롤을 건성으로 한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이 정도 마법을 펼칠 수 있다면 이미 컨트롤이고 뭐고 필요 없는 레벨이겠지만.
아무튼 견습 마법사로서의 감상은 둘째치고..
"그냥 지나치면 뒷맛이 나쁘겠지......."
이대로 냅둬도 언젠가 얼음은 다 녹겠지만 과연 몇 개월이 걸릴지 모른다. 까딱하면 그 전에 겨울이 와버릴지도 모른다. 그냥 단순한 얼음이라면 몰라도, 안에 인간으로 추정되는 소녀가 갇혀 있는 이상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근데 내 힘으로 녹일 수 있을까......."
료야는 지갑에 넣어둔 스펠 카드를 꺼내들었다. 파츄리가 자신의 스펠 카드를 료야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낮춰서 설계해 준, 이른바 마법 연습용 스펠 카드다.
"화부 [아그니 샤인(초급)]!"
선언과 함께 스펠 카드가 발동하며 붉은 불길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파츄리의 원판은 그야말로 화산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오는 마그마 같은 스펠 카드였지만, 료야가 사용하면 그냥 용접용 토치 정도 위력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얼음을 녹이기에는 그 정도 화력으로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오옷, 녹는다 녹는다."
일부러 한쪽 방향으로만 집중시킨 불길은 얼음을 톱처럼 잘라내며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조각칼로 나무조각을 깎아내는 요령으로 료야는 정신을 집중해서 최대한 소녀에서 가까운 곳까지 얼음을 베어냈다.
스펠 카드의 효력이 끝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앉아 있는 소녀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베어내자 거대한 얼음기둥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크엇!"
반사적으로 몸을 낮춘 순간, 거대한 기둥이 쓰러지듯 얼음기둥의 잘라낸 윗부분이 지면으로 무너져내렸다. 지면을 뒤흔드는 굉장한 소리와 함께 얼음 파편들이 흩날렸다.
기둥이 완전히 쓰러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료야는 황급히 소녀가 들어있던 얼음 부분을 살폈다. 충격파 때문에 소녀를 덮고 있던 얼음들에도 새하얗게 금이 가거나 여기저기가 갈라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소녀의 몸은 무사해 보였다.
"이 정도면 마법을 안 써도 어떻게든 녹일 수 있겠네."
꺼내두었던 나머지 스펠 카드들을 다시 집어넣고, 료야는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히는 능력'으로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 정도까지 온도를 조절했다. 곧 쩍쩍거리며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녹기 시작했다.
소녀의 어깨, 허리, 팔꿈치 등에서 얼음이 덩어리째 떨어져 내렸다. 마침내 발 아래를 덮던 얼음마저 완전히 녹자 땅에 쓰러진 자세의 소녀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이봐, 정신 차려."
료야는 완전히 드러난 소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섬뜩할 정도의 차가움.
"맥박이 뛰고 있는 건가......?"
소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앴고, 새파랗게 질린 입술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는 건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어, 어쩌지? 이, 이, 인공호흡? 심장 마사지? 그거지? 필요한 거? 마우스 투 마우스?"
동요한 나머지 료야는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꼭 필요한 구조행위니까! 결코 절대로 음흉한 생각같은 건 전혀 없으니까!"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변명을 스스로 되뇌이며 료야가 소녀를 바로 눕히기 위해 들어올리려 했을 때.
쓰러져 있던 소녀의 몸이 움찔 움직였다.
"우왓?!"
튕겨나오듯 몸을 일으킨 료야의 당황한 얼굴을, 힘겹게 눈을 뜬 소녀가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 * *

"......넌 누구지?"
청년의 물음에 린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토오사카 린. 지나가던 마술사야."
"마술사......? 잘 모르겠지만, 어서 도망쳐. 설마 저걸 못 본 건 아니겠지?"
접근해오는 불의 새를 가리킨 신야에게 린은 싱긋 미소지어 보였다.
"물론이지. 쓰러뜨릴 거야. 나와 상관은 없지만, 저런 게 설치고 다니는 걸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까."
옷 여기저기가 너덜너덜해지고 불길에 탄 청년의 모습에서, 린은 어쩐지 옛날의 시로를, 성배전쟁 때의 그를 떠올렸다.
마술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초짜 주제에 오로지 근성과 불굴의 의지만으로 다른 쟁쟁한 마술사들과, 심지어 서번트들과도 맞서 싸우던 그 모습을.
"아, 지금 야한 상상 했죠?"
"안 했거든?! 확 부러뜨려 버린다!"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지른 린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빠르게 날아오고 있는 적을 노려보았다.
루비의 바보같은 헛소리 덕분에 팽팽하던 긴장감은 딱 좋을 정도로 풀려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감사할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자, 이쪽으로 오라고. 친절하게 맞이해 줄게, 괴물 새 씨."
린의 도발이 전해졌을 리는 없지만, 불의 새는 신야와 린이 서있는 장소를 향해 급강하를 시작했다.
"큭......지금이라도 도망쳐. 내가 주의를 끌 테니......!"
신야가 재촉하듯 소리쳤지만 린은 여전히 불의 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괜찮아. 당신이 저 괴물을 끌고 다니는 동안 이미 준비는 전부 마쳤으니까."
50미터, 40미터, 30미터, 그리고 10미터. 거대한 눈동자에 맺힌 핏줄과 거기 박힌 긴 철봉의 얼룩까지 분명하게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Aktivieren(발동)---!"
린은 준비된 스위치를 누르는 영창을 발했다.
직후, 조금 전 건물들의 옥상을 오가며 설치한 결계용 마술진들이 일제히 작동했다.
사방에서 뻗어나온 수십 가닥의 빛줄기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마치 나뭇잎의 잎맥 무늬처럼 종횡으로 복잡하게 얽힌 빛의 광선들은 순식간에 거대한 그물의 형태를 자아냈다.
"Tell......Li......!"
괴물 새 역시 당황했는지 짧은 외침과 함께 수평방향으로 접근해오던 속도를 날개의 힘을 사용해 수직방향으로 전환하며 높이 날아오르려 했지만, 빛의 그물은 그 불꽃의 날개를 단단하게 조르며 놓아주지 않았다.
"잡았다!"
단단하게 붙잡힌 새의 모습을 확인하고 린은 주먹을 꾹 쥐었다.
"이제 마무리를......읏?!"
승리를 확신한 순간, 급격한 현기증이 린을 덮쳤다.
휘청거리는 몸을 린은 카레이도 루비를 지팡이처럼 삼아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어째, 서......?"
겨우 결계 하나를 작동시켰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소모된 걸까.
머릿속의 의문을 말로 내뱉을 기력마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봐, 괜찮아?"
아직 이름도 듣지 못한 청년의 물음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린에게 카레이도 루비가 변함없이 태평한 어조로 대답했다.
"흐음, 아무래도 빈혈이 아닐까 싶네요."
"빈, 혈?"
"그야 며칠째 아무 것도 안 먹고 마력으로만 버텼잖아요? 거기다 결계를 그리느라 피를 상당히 소모했으니 빈혈이 올 만도 하죠."
"그, 그런 바보같은 이유 때문에......."
챙그랑, 하고 손 안의 보석검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이 상태로 보석검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 그렇다면 남은 수단은......틀렸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결계 속에서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불의 새를, 린은 그저 분함과 체념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 작가의 말 : 모튼 님 작성하신 파트입니다. 불새 공격!

실피리트 14-11-15 20:30
답변  
순간적으로 쇼고스인 줄 알았습니다 --;;
실피리트 14-12-08 00:45
답변  
신야가 린과 마주치는 건가요... 그런데 그 전에, 진짜 생각해보니 얘네들 의식주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 걸까요?!
     
시탄산 14-12-13 20:21
답변  
일단 캐릭터마다 막연하게 생각해둔 설정은 있지만 소개할 타이밍이 잘 나오지 않네요^^;; 씬 진행하다 보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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