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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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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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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 Roude 프로젝트글 시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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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오프닝 페이즈] - 2 -
14-10-27 20:02
 
 

"아야야......엉덩이 아프네." 
어느 주택단지 안에 설치된 한 놀이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깔린 푹신한 탄성 포장재 바닥 위에서, 교복 차림의 소년이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박유하라는 이름의 그 소년은 뒤로 넘어진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까지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앤티크 풍의 가구들, 각종 기묘한 생물의 박제 모형들, 정체불명의 액체가 담긴 유리기구들은 전부 사라지고 대신 그저 평범한 야외 공공장소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유하는 땅바닥에 엉덩이가 충돌하기 전, 그러니까 이 놀이터로 이동하기 직전에 느꼈던 붕 뜨는 부유감을 상기해냈다. 그리고 상황을 이해했다. 
"또 실패네. 그러게 어차피 안 될 것 같다고 그랬구만." 
조건반사처럼 나온 말은 그 자리에 없는 상대, 그의 스승인 연금술사에게 향한 것이었다. 
연금술사라는 말을 듣고 대개 떠올릴 법한 허연 수염의 고색창연한 노인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유하의 스승은 늘씬한 다리에 청바지가 어울리는 미녀였다. 좋아하는 음식은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버터 비빔밥, 요즘 시대에 빗자루는 폼이 나지 않는다며 빨간색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를 몰고 다니는 여장부이기도 했다. 부업으로 큐레이터나 칼럼니스트 등등 다양한 종류의 의뢰를 받고, 심지어 변호사 자격증까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로 비범한 인물이었으나 정작 본업인 연금술사로서의 실력은 영 의심스러웠다. 지금까지 유하가 지켜본 연금술 실험들은 시도하는 족족 실패로 끝나곤 했다. 아주 가끔 성공하기라도 하면 호텔 출장 서비스를 불러서 자축 파티를 열 정도였다. 
어제는 차원보석인지 뭔지 하는 수상쩍은 물건을 어디선가 찾아와서 희희낙낙하며 새로운 실험을 고안하더니만, 아니나다를까 옆에서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보조하며 (덤으로 '이건 안 될 것 같은데' 같은 말로 초를 치며) 구경하던 유하가 엉뚱한 곳으로 떨어진 것을 보면 역시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다. 
"......아무래도 나만 휘말린 모양인데." 
연금술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서로 다른 장소로 떨어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유하로서는 그녀를 걱정할 마음따위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마존 오지에 맨몸으로 떨어져도 태연하게 두 발로 걸어서 돌아올 법한 인간이니까, 무슨 사고에 휩쓸렸건 백 퍼센트 무사할 터였다. 오히려 유하 자신의 처지나 신경쓰는 편이 나았다. 
"누나, 저 형 학교도 안 가고 혼자 미끄럼틀 타고 있어. 학교에서 쫓겨났나봐." 
"쉿, 조용히 해. 엄마가 저런 불량학생 만나면 눈 마주치지 말고 빨리 다른 데로 도망가랬어." 
놀이터 한구석에서 놀고 있던 각각 네다섯 살,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애와 여자애가 유하를 가리키며 소근거렸다.
이봐, 꼬마들아. 난 불량학생은커녕 오히려 그 정반대 쪽이거든? 전교 1등은 껌처럼 씹어먹는 우등생이거든? 스포츠 만능이거든? 배에 식스팩도 있거든? 173cm 루저라는 것만 빼면 딱히 꿀릴 것 없는 남자거든? ......하긴 그 마지막 단점이 살짝 크리티컬이긴 했지만. 
한숨을 내쉰 유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복의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다행히 지갑과 스마트폰은 멀쩡하게 주머니 속에 있었다. 일단 그의 스승에게 상황을 확인할 생각으로 스마트폰을 꺼냈으나......화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통화권 이탈? 여기 주택가 한가운데잖아? 
이리저리 이동해봐도 안테나 표시는 여전히 전부 꺼진 채였다. 하는 수 없이 유하는 근처의 버스역 내지는 전철역을 찾아가기로 했다.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만 알면 아틀리에든 집이든 찾아갈 수 있을 테니까. 

상황이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사실을 유하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약 십 분 뒤, 난생 처음 보는 지하철 노선도를 발견했을 때였다.


* * *

"이게 바로 보석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토오사카 린은 자신의 손 안에 있는 마술예장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다듬지 않은 보석 원석의 형태를 한 단검. 실물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대사부가 남긴 이론서의 설명과 틀림없이 일치하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로우, 린."
에미야 가의 본체로 돌아온 두 사람을, 식탁 앞에서 정좌한 채 명상하고 있던 세이버가 온화한 미소로 맞이했다.
"땡큐, 세이버. 그런데 토오사카, 그 보석검이라는 건 혹시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라든가, 뭐 그런 거랑 관련이 있는 거야?"
이마와 목에 흥건하게 배인 땀을 세이버가 건내준 갓 마른 타월로 닦아내며, 그 검을 투영해낸 장본인---에미야 시로가 물었다.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아니 상당히 뛰어넘는 투영에 도전한 탓인지, 창고에 들어가기 전에 비해 부쩍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응? 그야 당연하잖아. 마도원수(슈바인오르크)의 마법, 제2법이 깃든 마술예장이니까."
"난 처음 듣는데, 그 설명."
그 말을 들은 린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앗차......그러고 보니 시로에게 설명하는 걸 깜빡했네. 미안, 벌써 말했다고만 생각했어."
"다짜고짜 설계도랑 이론서만 보여주고서 '자, 이걸 투영하는 거야.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라는 바람에, 난 토오사카가 내 마술 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시험하려는 줄로만 알았다고."
"......정말로 미안."
창피함에 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며 린은 시로에게 사과했다. 하필이면 대사부의 과제에 도전하는 중요한 타이밍에 그런 실수를 저지른 건 역시 토오사카 가문에 유전된 저주, 깜빡하는 버릇 탓이었을까.
"아니, 토오사카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뭐라고 할까."
뺨을 조금 긁적거리며 시로는 자신의 의견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 검, 최선을 다해 투영하긴 했지만 설계도에 비하면 한참 열화되었을 거라고 생각해. 원본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지금 내 실력으로는 그게 한계야."
"그렇겠지. 단번에 오리지널과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냈다면 오히려 믿지 않았을 걸."
린은 조금도 낙담하는 기색 없이 시로의 말을 선선히 인정했다. 시로가 투영한 보석검은 마도원수 젤렛치가 남긴 설계도를 린이 해석해서 전체적인 형태를 이미지하고, 시로가 다시 그 이미지를 전달받아서 투영해낸 것이었다. 린의 해석이 불완전했을 가능성은 물론이고, 시로가 린의 이미지를 전부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또 시로가 과연 이미지를 그대로 투영해냈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삼중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니 열화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출력은 물론 오리지널에 한참 미치지 못하겠고......십 퍼센트, 아니 오 퍼센트 정도일까? 그리고 지나친 부하가 걸리면 견디지 못하고 깨질 가능성이 있네."
팔의 마술회로를 통해 마력 패스를 연결하며 린은 레플리카 보석검의 성능을 어림잡아 봤다. 한 번에 낼 수 있는 마력의 출력은 과거 린이 성배전쟁에서 사용하기 위해 준비했던 열 개의 최상급 보석들, 즉 당시 그녀의 일 년 분 마력보다 비슷하거나 약간 높은 정도인 듯 했다.
"흐응, 그거 시로가 만든 거구나."
언제 다가왔는지, 자그마한 은발의 소녀가 세이버의 등 뒤에서 몸을 불쑥 내밀었다. 몇 년 전 후유키 시의 성배전쟁에 참전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아인츠베른의 호문쿨루스, 이리야스필 폰 아인츠베른이었다. 
"뭐, 토오사카의 도움을 받았지만 말이야."
시로의 말에 이리야는 잠시 눈을 빛내며 린의 손에 들린 보석검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시선을 돌려 시로 쪽을 향했다.
"그보다 시로, 나 슬슬 배고파졌어. 저녁밥은 언제야?"
"저도 동감입니다, 시로우. 오늘 저녁 메뉴는 뭔가요?"
재촉하는 두 사람에게 시로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오늘은 후지 누나랑 사쿠라가 쇠고기랑 다른 재료들을 이것저것 준비해온다고 했으니까."
한편 보석검을 내려놓은 린은 살짝 언짢아진 기색이었다.
"너희들, 시로에게 너무 응석부리는 거 아니야?"
"그렇지만 린의 중화요리는 이제 질렸는 걸. 날마다 먹으면 살찔 것 같고."
"저는 딱히 상관없습니다만, 가끔은 시로우가 만든 일식을 먹고 싶습니다. 런던에서는 대개 양식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남이 차려주는 걸 기다릴 생각만 하지 말고 가끔은 직접 만들어 보라고!"
그런 식으로, 변함없이 평화로운 일상의 한 페이지가 지나갔다.

그로부터 약 네 시간 뒤.
토오사카 저택은 너덜너덜해졌다.
산산조각난 가구들, 구멍이 군데군데 뚫린 벽과 천장, 곳곳에 생긴 재와 그을음을, 린은 그저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머리를 감싸안는 린에게 뻔뻔스러울 정도로 느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요. 나와 계약해서 마법소녀가 되면 이 정도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했을 텐데."
별 모양 장식에 핑크빛 날개가 달린 소녀 취향의 장난감처럼 생긴 물체. 장난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실은 젤렛치 본인이 만든 최고위의 마술예장이자 과거 린에게 영문도 모르는 트라우마를 안겨줬던 원흉인 카레이도 루비, 자칭 루비쨩이었다.
"시끄러워! 이게 다 누구 때문에 일어난......"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린은 눈앞의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조금 전 린의 보석마법에 의해 산산조각났던, 불길한 부정형의 슬라임 같은 반액체가 서서히 모여들며 다시 커지고 있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결국 또다시 토오사카 집안의 유전병 탓이었다.
불완전하게나마 대사부의 과제를 달성한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린은 보석검을 보관할 만한 적당한 케이스를 찾아 저택 여기저기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토오사카 저택의 한구석에 엄중하게 닫힌 채 놓여있던 미믹을 별 생각 없이 열어버린 것이다. 그 안에 어떤 물건이 들어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미믹의 뚜껑이 열린 순간, 십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카레이도 루비가 그 안에서 뛰쳐나왔다. 동시에 십 년 동안 억눌려 있던 제2법의 술식이 순식간에 해방되는 바람에 폭주해버렸다. 그 결과로 소환되어버린 크리쳐가 바로 지금 린의 눈 앞에 있는 거대 슬라임인 것이다. 파괴했나 싶으면 다시 부활하고, 때로는 뿔뿔이 흩어진 작은 파편들이 독립적으로 공격해오기도 하는, 성가시기 이를 데 없는 상대였다.
"다섯 번이나 산산조각난 주제에, 끈질기기는......!"
혀를 차면서 이번에는 룬의 마탄을 쏘아보냈다. 그렇지만 목표물이 잽싸게 피해버린 탓에 그저 복도 기둥에 구멍 하나를 추가했을 뿐이었다.
"어이쿠 무서워라. 나와 계약하면 그런 흉흉한 마술 대신 훨씬 더 큐트하고 프리티에 리리컬한 마술이......."
"그딴 마술 필요 없어! 누가 너같은 변태 취향 아이템과 계약따위 할까 봐!"
"아앗, 변태라니 너무해! 난 그저 퓨어하고 큐어한 소녀의 하트풀한 러브(♡)를 원하는 것 뿐인데!"
자칭 루비쨩은 영문 모를 대사를 과장된 연극조의 말투로 늘어놓았다. 그냥 창처럼 사용해서 저 슬라임을 향해 냅다 던져버릴까. 그런 선택지를 린은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카레이도 루비의 페이스에 휘말려서 바보같은 대화를 주고받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 지금 린은 매우 초조해하고 있었다. 간드는 명중시키기도 어렵고 슬라임과의 상성상 유효타가 될지도 의심스러웠다. 수중에 있던 보석은 전부 사용해버렸다. 방 안에는 쓸만한 보석들이 남아있었지만, 슬라임이 내뿜은 정체불명의 끈적끈적한 액체 탓에 입구가 막혀버렸다.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사이에 발이 묶여 당할 위험이 컸다. 같은 이유로 저택에서의 탈출 역시 힘들었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탓에 시로나 세이버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이제 대체 어쩔까. 린은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무기 둘을 새삼 돌아보았다.
이 수라장에서도 놓치지 않고 소중하게 들고 있던, 사랑하는 시로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 투영해 준 레플리카 보석검. 그리고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며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 이 사태의 원흉이자 수상쩍기 이를 데 없는 수다스러운 마법 지팡이. 결국 린은 괴로운 결단을 내렸다.
"......알았어. 그 계약인지 뭔지만 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나와야죠! 그럼 우선 마법소녀의 옷부터!"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걸까. 절망스러운 심정으로, 린은 카레이도 루비를 손에 잡았다.

"......여기, 어디야?"
얼음장처럼 차갑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린이 물었다.
"다른 평행세계로군요."
"......이유를 들어볼까."
"아무래도 차원간섭 능력을 쓰는 건 오랜만이여서, 살짜쿵 제어를 벗어나버린 모양이에요."
"부숴버린다."
"데헷."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루비쨩에게 살벌한 말을 속삭이며, 린은 우선 눈 앞의 사람들을 향해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소는 만국 공용어다. 특히 미소녀의 미소는 효과가 발군이다.
"저기, 사진 찍어도 될까요?"
"저도 한 장 부탁드립니다."
"포즈는 고양이소녀 포즈로......."
"퀄리티 진짜 쩌네요. 무슨 캐릭터인가요?"
하나같이 커다란 랜즈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있는 안경 남성들이 연달아 다가온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어쩐지 다들 린의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믿기지 않게도, 그 주위에는 그녀 이상으로 화려하고 실용성 없는 옷차림을 한 여성들(혹은 남성들)이 여럿 있었다. 카메라 든 사람들은 그 사람들에게도 다가가 다양한 각도, 다양한 포즈로 촬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이 장소의 일반적 상식인 모양이었다.
마법소녀 카레이도 루비......아니, 토오사카 린이 제2법의 부작용으로 오게 된 차원세계의 그 장소는, 하필이면 특수한 종류의 이벤트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시계탑 지하 666층 위험 폐기물 처리장에 쳐박아줄게."
"아잉."
수백 장의 사진을 찍히고 난 다음에야 린은 간신히 그 장소를 탈출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좋을 작은 의문이 하나 남았다. 이쪽은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어째서 그들은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던 걸까?


* * *

은은한 비취빛을 띤 대리석 바닥에 흩뿌려진 붉은 색이 마치 점점이 피어난 꽃을 연상시켰다. 아주 약간, 덧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쪽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그런 감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음종하고 배덕적인 자세로 몸뚱아리를 얽고 있는 한 쌍의 남녀. 그 표정에는 죽음의 순간에 사로잡혔을 강렬한 본능적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한창 타오르던 정욕의 자취가 짙게 남아있었다. 
인간을 초월한 천인은커녕, 금수보다도 못한 존재---그런 경멸감이 세이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 경멸감은 세이가 자신에게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하찮은 존재들에게 운명을 희롱당했던, 그들에 대한 복수심을 끝내 삭히지 못했던, 그리고 결국 그들의 피로 손을 더럽히고 만 스스로에게. 
손톱을 피로 적신 그녀의 수족들이 남녀의 시체 근처를 유난히 서성거렸다. 마치 세이가에게 무언가를 묻는 것처럼. 그녀는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렴. 내가 너희를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허락이 떨어지자, 수족들은 일제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시체에 다가섰다. 목이 잘렸던 자들은 목덜미와 뇌수를 향해서, 배를 찔렸던 자들은 내장을 향해서, 사지가 으스러졌던 자들은 뼈를 향해서. 제각각 원하는 부위를 뜯어내고, 씹고, 삼킨다. 
곧 남녀의 시체는 무참하게 유린당했다. 백합처럼 하얀 뼈와 선홍빛의 내장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그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조금 전까지의 고깃덩어리보다 훨씬 더 인간다웠고, 훨씬 더 아름다웠다. 
수백 년만의 복수. 그럼에도 세이가의 기분은 결코 밝지 못했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되 넓고 넓어 새는 법 없으니---" 
어째서 그런 말이 튀어나온 걸까. 이제와서 스스로를 하늘의 대리인으로 자처하려는 구차한 변명은 결코 아니었다. 원한에 찬 비꼼이나 저주도 아니었다. 그저 옛 시절의 친우 한 명이 읊던 시 한 소절을 따라 읊어봤을 뿐이다.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조소를 내뱉으며, 세이가는 자신의 머리에서 봉잠을 뽑아들었다. 손 안에 거꾸로 쥐인 탓에 뾰족하게 드러난 그 끝이 세이가 자신의 목을 겨눈다. 
힘을 지닌 자들에게 심판을 받을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최후를 맞이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세이가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광경은, 천 년의 세월 중 찰나에 불과한 시간을 보냈을 뿐임에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그 이상향의 모습이었다. 
최후의 호흡을 가느다랗게 내쉬고서, 새하얀 목은 비녀에 의해 꿰뚫었다. 

피도, 통증도 없었다. 의식도 사라지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눈을 뜬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알지 못하는 낯선 장소의 풍경이 펼쳐졌다. 
"아아......." 
인간들. 인간들이 보였다. 천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인간들. 욕망을 쫓아 챗바퀴처럼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인간들. 눈으로 쫓을 수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는 인간의 세계. 
사후의 지옥인지, 죽기 직전에 보는 환영인지, 혹은---그녀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인지.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편하게 놓아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네. 아니면---재미있는 장난감으로 얕보인 걸까?" 
일찍이 많은 권력자들을 홀리게 만들었던 그 아름답고 단정한, 그렇지만 차가운 미소가 그녀의 입에 걸렸다.
만약 운명이란 녀석이 그녀에게 최후의 안식조차 허가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그 이상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몸이라면. 
원하는 대로 한바탕 놀아주도록 하자.
그것이 악행이든 선행이든, 내가 내키는 대로 마음껏. 

전에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이가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온갖 욕망들이 소용돌이치는, 인간의 도시를 향해. 
그녀가 지나간 발자취 아래, 두동강 난 비녀가 한박자 늦게 떨어져 내렸다. 


* * *

낙후된 슬럼가의 한 폐허 건물 안.
"어때요?"
바깥에서 시끄럽게 들려오는 총성과 간간이 터지는 폭발음을 신경쓰던 후드티 차림의 소년---케이츠(K.K)가 물었다.
"가짜로군."
무뚝뚝하게 대답한 것은 이름 없는 '탐정'을 자처하는, 낡은 트렌치코트를 걸친 중년의 남성이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던, 내용물이 훤히 드러난 회중시계처럼 생긴 기계를 내려놓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이백 년 전은커녕, 만들어진지 십 년도 안 된 새 물건이다. 겉모습은 어떻게 위장한 모양이지만 안쪽까지 속일 수는 없지."
"그럼......."
"함정이겠지. 차원이동 이야기를 포함해서 전부. 상대의 어리석음을 너무 과소평가했어. 설마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속임수 때문에 조직을 절반 가까이 투입할 줄이야......어지간히도 나와 네가 눈엣가시였던 모양이군."
자조 기미로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탐정은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평소대로라면 케이츠가 형식적으로 한마디 항의를 했겠지만, 지금만큼은 묵묵히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어쩌죠?"
"뭘, 여태까지 해온 것와 똑같지. 조금 성가신 녀석들이 내 레드 리스트에 추가될 뿐이다. 어차피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없어지는 편이 나은 녀석들이잖아."
평소와 다름없는 자신만만한 말투. 그렇지만 그다지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닌 케이츠도 그 말이 허세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너는 도망쳐라. 알겠냐?"
그러니까 그런 말을 듣고서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싫습니다."
"유감이지만 나도 이번 싸움만큼은 너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다."
매정한 거절의 말. 그렇지만 난폭한 방식의 친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케이츠가 문득 품 속에서 표지에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제 능력으로 그 가짜를 진짜 차원이동이 가능한 아티팩트로 만든다면......."
"관둬."
탐정이 케이츠의 말을 가로막았다. 쓰고 있던 모자를 깊숙하게 눌러 쓴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능력으로든 자신의 한계 역량을 뛰어넘는 짓은 불가능하다. 결국 능력에 먹혀버릴 뿐. 너도 지금까지 수없이 봐 왔잖냐. 나와 네가 상대해 왔던 녀석들의 말로를."
"지금까지 쓴 모든 이야기를 대가로 바친다고 해도, 저 자신이 능력에 먹혀버린다고 할지라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도박일 뿐이다."
"평범한 인생이라도 한 번쯤은 소설 속 이야기처럼 극적인 순간이 있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제 이름은 케이츠. 포기를 모르는 남자입니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케이츠는 즉석에서 떠올린 세계관을 책에 적어넣기 시작했다. 세계의 창조부터 시작해서 신들과 용들의 싸움, 거인들의 몰락, 위대한 정령들의 왕국, 거대한 악과 파멸의 시련, 운명에게 선택받은 영웅들, 숭고한 사랑과 희생에 의해 태어난 구세주, 그리고 마법이 걸린 한 시계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서사시.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위기의 상황에서 홀연 내려온 영감 덕분인지 지금까지 케이츠가 썼던 이야기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두 번 다시 그런 이야기는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구잡이로 휘갈겨 쓰듯 빠르게 움직이던 케이츠의 손이 우뚝 멈췄다. 마치 누군가가 글씨를 빨아들이듯, 책 위에 소년이 완성한 세계관이 서서히 사라지더니......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품 안의 권총을 꺼내든 탐정이 옷깃을 여미었다.
"이제 도망쳐라. 내가 양동으로 녀석들을 유인할 테니 그 사이에 탈출을......."
그 때, 탐정이 내려놓은 회중시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던 숫자판에 기묘한 문자와 보석이 나타나고, 하나뿐이던 바늘이 열 개 이상으로 늘어나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해낸, 건가......?!"
제멋대로 돌아가던 바늘들이 돌연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든 것들이 눈부신 빛에 새하얗게 가려졌다.
케이츠는 몸이 이끌리는 듯한 부유감을 느꼈다. 기억의 혼돈.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지나간다. 그 중 무엇이 과거이고 무엇이 미래인지 케이츠는 구분할 수 없었다. 신기한 가시감이 느껴졌다. 다음 번 눈을 떴을 때, 그는 홀로 외딴 산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그곳이 당초 그가 가려고 했던 다른 차원세계, '근원세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그리고 그의 능력---소설을 현실에 구현화하는 '스토리 텔러'의 힘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리라.
그것이 서서히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케이츠가 떠올린 마지막 생각이었다.


* * *

'그것'은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니, 이름은커녕 완전히 확립된 자아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허파~ 간~ 횡격막~ 십이지장~ 뒈져버려♪"
인간의 강력한 염원이 낳은 원념. 본래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 굶어 죽어가던 어린 소년이 최후로 남긴 '뭐든 먹고 싶다'는 원념에서 태어나, 자신과 비슷한 다른 원념들을 먹고 흡수해서 커진 존재. 
마치 유령이나 영혼처럼 실체가 없이 해파리처럼 둥둥 떠다니며, 오로지 스스로에게 새겨진 염원에 따라서 본능적으로 행동하던 존재.
그렇지만 수많은 원념들을 흡수해서 성장한 지금의 '그것'은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어린 아이 수준이기는 했지만 일종의 지성마저 갖고 있었다.
"빨간 피~ 노란 지방~ 뇌척수액 줄줄~ 개자식♪"
의미를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것'은 현재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푸른색 눈, 허리까지 늘어뜨린 화이트 블론드의 긴 머리카락, 더없이 어울리는 하늘하늘한 여름 원피스.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적어도 겉모습은.
"대퇴근~ 삼두박근~ 살코기~ 핑크색♪"
문득 노래소리가 멈추었다. 소녀는 타박타박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어두운 골목 한구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담벼락의 그림자 안,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털을 곤두세웠다.
"아핫♪"
소녀가 씩 웃어보이자 그 고양이는 길고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한 번 내고서는 골목 안쪽으로 후다닥 달아나버렸다. 
"무슨 일이니, 얘야?"
멍하니 서있던 소녀에게 한 남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짐짓 친절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소녀의 탐스러운 머리카락과 원피스 안에 비쳐보이는 가녀린 몸매를 핥듯이 훑어보고 있었다.
"외국인이구나?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을 한 것도 아닌데 사냥감이 스스로 먼저 접근해 온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소녀는 사냥을 할 때 인적 없는 장소를 골라 훌쩍훌쩍거리는 울음소리를 내곤 했다. 그러면 보통 한 명, 가끔 두세 명 정도 사냥감이 다가와 말을 걸었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처리할 수 있었다.
"오빠가 집까지 데려다 줄까? 아니면 밥부터 먹을래? 배고프지 않아?"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픈 것도 같았다. 자신의 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소녀가 고개를 들더니 눈 앞의 사냥감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방긋 웃어보였다. 그야말로 천사처럼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오 분 뒤, 고통에 가득 찬 남성의 단말마가 인적 드문 골목에 울려퍼졌다. 그렇지만 그것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원래 있던 세계에서 근원세계로 흘러들어온 것은 대략 두 시간 전.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이 차원이동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스스로가 어디 있는지조차 관심이 없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장소 따위 '그것'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까.
그저 먹을 수 있는 사냥감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 * *

도시의 한 번화가. 퇴근 시간이라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흐름의 가운데에서 한 남성이 팔짱을 낀 채 홀로 우뚝 멈춰서 있었다.
"흐음......그렇군. 이해했다."
시대착오적인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마른 체격의 남성이었다. 큰 길 한가운데에서 그런 옷차림으로 통행방해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끌기 충분한데, 한 술 더 떠서 이 남성은 허공을 쳐다보며 혼잣말까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언어로.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절반은 얼굴을 찌푸리거나 노골적으로 관찰하는 시선을 보냈고, 나머지 절반은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멀찍이 돌아갔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성은 계속해서 영문 모를 혼잣말을 내뱉었다.
"즉 네 핵에 해당하는 부분이 이 세계에서 유래했다는 거군.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지배된 순간 이쪽 세계로 전이했다......그런 말이지?"
무언가 중요한 의문이 풀린 것처럼 남성은 두세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아하니 다른 세계에도 '영'은 있는 모양이군.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서 이 세계의 위험한 영을 제령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팔짱을 푼 남성이 갑자기 주위를 휙 돌아보았다. 그를 힐끗거리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지만, 남성은 여전히 그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뭔가를 찾는 것처럼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후후후, 전생 이래의 재회로구나, 에스타도스!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실로 운명의 안배로다!"
갑자기 사람들 속에서 멀리까지 잘 들리는 높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마치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되는 오염물질을 피하듯이, 몰려있던 인파가 순식간에 둘로 갈라졌다. 그 안에서 한 여성이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발밑까지 내려뜨린 흰색 롱 드레스에 흰색 가디건을 걸치고 흰색 뾰족모자를 쓴, 온통 흰색으로 몸을 감싼 차림의 여성이었다. 얼굴이나 체격은 중고등학생 정도로 보였지만, 상식적으로 그런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학생은 없다.
"......내게 무슨 용건이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로 남자가 그렇게 묻자 여성은 크게 당황했다.
"아앗, 설마 라틴어?! 쳇, 그 발상은 없었네. 에 그러니까, 파툼 시니트 비데테 노스 에스타도스! 어......전생, 전생을 라틴어로 뭐라고 하더라? 비, 비타 안티쿠아?"
참고로 말하자면 고대 로마에는 사후세계와 영혼의 개념은 있었지만 인도에서 유래한 윤회나 전생의 개념은 없었다고 한다.
한동안 익숙하지 않은 고대의 사어를 더듬거리던 여성은 결국 포기하고 그녀의 모국어로 다시 돌아왔다.
"크윽, 내 패배다......환생한 뒤 개변마법이 한층 더 강력해진 모양이로군, 에스타도스. 그 짧은 시간에 대체 무슨 수라장을 헤쳐나온 거냐?"
보란 듯이 가슴을 움켜잡으며 과장된 몸짓으로 두세 번 비틀거리던 여성이 돌연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제7봉인을 해방시킨 건가? 그런 바보같은! 오천 년 동안 고작 서른일곱 명만이 손에 넣었던 경지에 다다르다니......! 과연 내 호적수답군, 에스타도스. 허나 착각하지는 말거라! 지금의 이건 고작해야 내 본래 힘의 삼십 퍼센트, 아니 오 퍼센트에 불과하다! 후후후, 다음에는 그대가 과연 얼마나 성장해서 나타날지, 재회의 순간이 실로 기대되는군."
제멋대로 떠들던 여성이 몸을 휙 돌렸다. 공기 저항 탓에 드레스 자락이 크게 뒤집히며 한순간 안에 입고 있던 하얀색 천조각이 남성의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아무런 흥미도 없이 그저 눈 앞의 광경을 무덤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잘 있거라, 에스타도스. 카오스 드래곤의 일레븐 나이트가 다시 모일 날도 머지 않았다. 과연 누가 끝까지 살아남아 나에게 올지 실로 기대되는군. 이 백색의 마녀공주 루시아나, 아방가르드 오클레르[절대예지]의 신전에서 그대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겠노라! 내 손으로 직접 너를 처치할 그 날까지 아무쪼록 힘껏 발버둥쳐서 살아남도록."
그런 말을 남기고서 여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움직이기 불편해 보이는 옷차림에 비해 의외로 잽싼 발걸음이었다.
호기심 때문에, 혹은 어처구니 없어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곧 흥미를 잃고 떠나갔다. 그 자리에는 가만히 서 있던 남성 혼자만이 남겨졌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세계로군, 여기는."
다른 세계에서 온 영술사, 로이 리는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영을 향해 그런 감상을 남겼다.


* * *

흑색 교복 차림의 소년, 아리사토 미나토는 어둑어둑한 낯선 도시에서 당황해하고 있었다.
가장 직전의 기억, 모든 이들의 운명을 건 최후의 싸움을 떠올렸다. 분명 그는 이 세계의 생명 전부를 거두어가려 다가오는 뉵스를 스스로의 몸에 봉인하고......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교환했을 터였다.
아니, 또 하나의 기억이 남아있었다. 동료들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졸업식 날 학교 옥상에 올라갔던 기억. 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도착했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지만, 거기서 누군가를 만난 것만은 틀림없이 기억한다. 그로서는 잘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따뜻하고 그리운 감정을 느껴지게 만드는 누군가를.......
문득 가슴에 차갑고 섬뜩한 것이 찔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그가 여기 있다면, 뉵스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와 동료들이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건 끝에 지켜낸 세계는, 그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무사한 걸까?
그리고 미나토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가 가진 최후이자 최고의 아르카나---유니버스의 힘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약해졌다는 사실을. 그가 뉵스를 봉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 이상 네가 희생할 필요는 없어, 아리사토 군. 자,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는 거야.]
어디선가 그런 말이 속삭여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미나토는 동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몸 안에 '데스'를 품고 있던 탓에 보통 사람들보다 감정이 희박했던 그에게 그런 심한 동요는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미나토는 차분하게 사고를 가다듬으려 애썼다. 우선 그가 달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답은 금방 나왔다. 말할 필요도 없이 시간의 정원으로 돌아가 위대한 봉인을 유지시키는 것. 그를 위해서는 먼저 지금 자신이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내야 했다.
미나토는 장소에 대한 힌트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동아시아계처럼 보이는 사람들. 익숙하지 않은 언어의 간판. 계속해서 걷던 중 문득 미나토는 창가에 TV를 진열해 놓은 가전제품 매장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제각각 다른 채널로 맞춰져 있는 TV들 중 하나에서 유럽 역사에 관한 영어 다큐멘터리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단 한구석에 표시된 오늘의 날짜가 그의 마지막 기억으로부터 몇 년이 흘러 있었다는 사실도 약간 뜻밖이었지만, 그가 주목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다루고 있는 일부 역사적 사건들이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달랐던 것이다.
단지 같은 일을 두고 견해나 해석이 다른 정도의 차이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그의 기억과 다른 일이 일어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미나토는 도시 곳곳을 돌아다닌 끝에 결론을 내렸다.
특별과외활동부 동료들로부터 농담처럼 '천재 카리스마 사나이'라고 불리곤 하던 미나토의 명석한 지성이 내린 결론은, 스스로도 쉽게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이곳은 그가 원래 있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였다. 
다큐멘터라 방송 이외에도 사소한 위화감에서 중대한 차이점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그가 발견한 수많은 증거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정말로 이 곳이 다른 세계라면, 유니버스의 힘이 약화된 것 역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를 지탱해주던 인연의 힘, 그가 만나온 수많은 사람들과의 커뮤니티가 이 세계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뉵스의 봉인은 둘째치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페르소나의 힘을 사용한다면? 그렇지만 소환기도 갖고 있지 않은 지금의 그가 과연 이 낯선 세계에서 페르소나를 불러낼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었다.
순간 미나토는 다시금 가슴에 차갑고 섬뜩한 것이 찔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도저히 진정할 수 없는 느낌. 그제서야 미나토는 스스로의 변화를 눈치챘다. 지금의 그는 데스의 영향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인간적인 감정들을 다시 되찾게 된 것이었다.
요컨대 그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봉인에서 벗어난 뉵스가 다시 한 번 세계를 파멸시키기 위해 다가올 것을.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그의 동료들---유카리가, 준페이가, 후카가 페르소나를 처음 소환했던 때의 일을 떠올린다.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자기 자신을 겨눈 소환기를 든 손을 떨면서도, 결국 그 공포를 극복해냈던 그들의 모습을. 어쩌면 지금의 자신은 그 때의 동료들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미나토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이 공포를 극복할 차례라고.
차오르기 시작한 초승달이 내려다보고 있는 낯선 세계의 도시에서 미나토는 결심을 굳혔다.
다시 한 번 그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을 위한 싸움을 시작할 것을.
약해진 유니버스의 힘을 다시 되찾고, 시간의 정원으로 돌아가 뉵스를 가둔 위대한 봉인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행동을 시작했다.


* * *

그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뿜어내는 남자였다.
올백머리의 백발. 남들보다 머리 하나쯤 위로 솟이있는 건장한 체구와 그 몸을 목부터 발목까지 덮은 코트. 강한 의지가 드러난 삼백안. 마치 그 주위만 한층 고요해진 듯한, 범상치 않은 공기를 두르고 있는 남자였다. 
유럽의 어느 섬. 한때 이 섬의 영주가 살았던 거대한 성의 유적이 남아있는 마을에서 그 남자는 섬 특유의 고요함으로 뒤덮인 어두운 밤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미 해가 저문지 오래였기 때문에 인기척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고양이나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가끔 들리는 정도였다.
"이봐, 거기 잘생긴 형씨. 잠깐 나 좀 보지 않겠어?"
자그마한 예배당의 입구를 지나칠 때, 그림자 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의 난간 위에 한 청년이 그다지 단정하지 못한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너에게 용무는 없다. 사라져라."
눈길도 주지 않는 대답에 경박한 청년이 어깨를 으쓱했다.
"매정하네. 손해보는 일은 아니야. 오히려 이득 쪽이지."
"사라지라고 말했다."
두 번째 경고. 청년은 그것을 무시하고 일어나 다가오려 했으나, 순간 멈칫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목에 날카로운 금속, 검의 날이 겨누어져 있었다. 검신에 푸른 빛이 감도는 그 검의 자루는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던 남성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세 번째 경고는 없다."
남자는 여전히 청년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옆으로 검을 겨누고 있었다.
"어이쿠, 위험하게시리."
자신의 목이 잘려나가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 청년은 여전히 경박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과연 소문대로 가차없구만, 스파다의 아들." 
청년의 부른 그 호칭에, 남자---마검사 스파다의 아들인 버질의 눈썹이 꿈틀했다.
"힘을 원하지 않나?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힘.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 힘 말이야. 그걸 줄 수 있는데, 어때?"
처음으로, 버질이 청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뭘 원하지?"
청년이 히죽 웃었다. 버질에게 접근해 온 이 청년의 정체는 사실 인간으로 위장한 악마였다. 버질은 한눈에 그의 정체를 간파했으나, 상대의 의도가 읽혀지지 않았다.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인간으로 위장하는 악마치고 제대로 된 녀석은 거의 없다.
"별 건 아니야. 자그마한 물건을 운반해주기만 하면 돼. 다만 목적지 쪽이 조금 곤란하지. 이 세계가 아닌 곳, 인간계도 마계도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거든. 거기로 이걸 가져다 줘."
청년이 던진 물건을 버질은 한 손으로 낚아챘다. 나무를 깎아 만든 자그마한 상자였다. 세밀하게 세공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특이한 구석은 없어 보였다.
"아직은 열어보지 말고. 그쪽에 도착해서 전해줄 사람 앞에서 열어서 내용물을 건네주면 돼."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말을 한 기억은 없는데."
"아니, 댁은 틀림없이 그곳으로 가게 될 거야. 스파다 역시 그 세계에 간 적이 있으니까."
청년의 말에 버질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동시에 그가 내뿜는 위압감 역시 한층 짙어졌다.
"그게 정말인가?"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먼 옛날 이야기지만."
"넌 누구냐?"
"글쎄. 일단 스파다에게 빚을 졌던 이름없는 악마라고 해둘까."
"......받아들이지."
버질은 목에서 발목까지 덮는 긴 코트의 품 안에 상자를 집어넣었다.
"누구에게 전해주면 되지?"
"그건 가보면 알 거야. 부디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청년이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를 튕겼다. 마치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버질의 발밑에서 기하학적인 복잡한 문양이 나타나 빛나기 시작했다.
"아참, 깜빡했는데 내 서비스는 편도 뿐이라서 말이야. 돌아오는 건 자력으로 부탁해.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빛의 장벽 너머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버질의 몸은 차원의 틈새 너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때 그의 아버지 스파다도 향했던 차원세계, 일명 근원세계라고 불리는 차원을 향해서.


* * *

강인하고 경험 많은 선원들이 우왕좌왕거리고 있었다.
이미 돛을 내리고 돛대를 접었음에도 역풍은 배를 심하게 뒤흔들었다. 노잡이들의 등을 차가운 빗방울이 때렸다. 파도의 끝이 찢어져 갑판을 덮칠 때마다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짐을 전부 버려라! 서둘러!"
수십 년을 바다 위에서 살아온 선장이 명령을 내렸다. 그에게는 용골을 뒤흔들고 있는 진동이, 선체가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노를 젓거나 물을 퍼내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이 전부 동원되어 화물들을 바다에 내던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배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다. 점점 더 크게,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한 기세로.

선실 안에서 엘사는 혼자 떨고 있었다.
엘사에게 추위란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한 것이였다. 마치 여름철에 바람을 즐기는 나무 그늘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엘사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추위 때문에 벙어리 장갑을 낀 적도, 뺨이 빨갛게 물든 적도 없었다. 아렌델 왕국이 추운 북쪽에 있어서, 혹은 그녀의 방 창문 밖에 일 년 내내 산을 뒤덮고 있는 눈이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타고난 힘, 얼음을 다루는 재능 때문이었다. 눈과 얼음은 그녀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여동생 안나가 그녀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며 놀고 싶어하다면 그저 손을 가볍게 흔들기만 해도 충분했다. 남들과는 다른 그녀를, 사랑하는 여동생은 무조건 좋아해주고 따랐다. 그 때문에 그녀는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릴 적까지는.
언제나처럼 눈과 얼음으로 놀던 도중 일어났던 사고. 그 이후 머리카락 한쪽이 눈처럼 하얗게 변한 안나를 볼 때마다, 엘사의 가슴에는 그녀가 저지른 실수에 대한 죄책감이 깊게 새겨졌다.
이미 추위는 더 이상 솜을 잔뜩 넣은 부드러운 이불이 아니었다. 오히려 안나와 그녀를 막는 철창이었고, 그녀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발걸음 하나, 손짓 하나도 항상 그녀를 겁먹게 만들고 구속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장갑을 끼고, 평정심을 유지하고, 참고,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고, 또 참기만 한다면......추위는 그저 외로움으로만 그칠 뿐이었으니까. 철창 너머로나마 안나를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 결코 그녀를 다시 상처입히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제 그녀는 깨닫고 있었다. 추위란 물방울에 실려 피부를 때리고, 젖은 손가락을 로프와 묶고, 입을 파도로 틀어막으며, 발을 살얼음으로 잡아채는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아렌델에서 가장 큰 범선도, 가장 능숙한 선원도, 가장 유능한 선장도, 가장 자상한 어머니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엘사 자신 역시.
그 순간 지금까지의 진동보다 한층 크게 선실이 기울었다. 선실 안의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엘사의 몸 역시 균형을 잃고 기울어진 쪽으로 이끌려가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을 그녀는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
간신히 배가 균형을 되찾게 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엘사는 선실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선실에 들어오기 전 선장으로부터 절대로 바깥으로 나오지 말라는 당부를 들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위험하더라도 상황을 파악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선실 밖에서 바라본 폭풍우는 상상 이상으로 크고 거셌다.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던 선원들은 아무도 엘사를 신경쓰지 않았다. 엘사는 아무에게도 제지당하지 않은 채 갑판의 둘레에 있는 난간까지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
"엘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엘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여동생, 안나가 반대편 갑판에 있었다. 그녀 역시 엘사처럼 선실 안에 있기 불안해서 갑판으로 나온 걸지도 모른다. 심한 흔들림 탓에 겁이 났는지 양손으로 배의 난간을 꼭 붙잡고 있었다.
"안나, 위험해! 거기 가만히 있어."
오직 안나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엘사는 흔들리는 갑판 위를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넘어지지 않게 애쓰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앞으로 십 미터, 오 미터, 삼 미터, 그리고 안나의 손을 붙잡기 직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배를 덮쳐왔다.
그 순간, 모든 것들이 느릿느릿하게 느껴졌다. 경악하는 표정의 선원들, 폭풍우 속에서도 뚜렷하게 들려올 정도로 커다란 고함소리와 비명소리, 명령을 내리는 것도 잊고 멍하니 파도를 바라보는 선장, 그리고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파도를 바라볼 뿐인 안나.
그 모습을 본 순간, 엘사는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엘사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은, 장갑을 벗고 들어올린 그녀의 오른손에서 뻗어나간 빛의 모습과, 배를 삼키려고 달려든 파도에 그 빛이 맞는 모습이었다.

모든 것들이 고요해졌다.
엘사는 눈을 떴다.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은한 달빛이 비추고 있는 푸른 초원. 아렌델에는 한여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근처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안나? 어머니?"
그녀의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고 허무하게 퍼져나갔다.
"안나? 어디 있니?"
방금보다 더 큰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불러보았으나,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물에 흠뻑 젖은 드레스가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엘사는 조금 망설이다가, 여전히 장갑이 벗겨진 채인 오른손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드레스가 한순간 빛에 감싸이더니 별처럼 작게 빛나는 얼음의 결정들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흩뿌려져 나갔다.
그 광경을 보며 엘사는 생각했다. 여기는 천국일까? 자신은 죽은 걸까? 안나는 어디로 간 걸까? 어머니는, 배의 다른 승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엘사는 오른손에 다시 장갑을 꼈다. 양 손 모두 안전하게 장갑에 감싸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엘사는 이 낯선 세계를 헤매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 아렌델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서.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무엇보다 사랑하는 동생 안나를 찾기 위해서.


 
+ 작가의 말 : 두 번째 프롤로그, 올립니다.

사람은모두손님 14-10-27 20:09
답변  
유하의 스승은 연금술 빼면 완벽초인이군요. 연금술 때려쳐도 잘 살 것 같네요.
     
시탄산 14-10-29 09:25
답변  
타입문 세계관의 아오자키 자매를 합해서 적절하게 반으로 나눈 것 같은 이미지죠.
icedams 14-10-28 12:09
답변  
그런데 결국 슬라임은 어떻게 됐나요......
.....뭐 세이버에 이리야에 시로도 있으니까~
     
시탄산 14-10-29 09:36
답변  
세이버 "힘내세요, 시로우. 제가 이 규동을 마저 먹을 때까지만!"
이리야 "파이팅, 시로! 우물우물."
시로 "큭...간장막야만으로는 무리야...아이 엠 더 본 오브 마이 소드..."

농담입니다... 아마 엑스칼리버 단칼에 썰렸을 듯.

세이버 "시로우가 만든 일식을 먹는 걸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
맘보 14-10-29 14:42
답변  
프롤로그가 끝나고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지 몹시 기대되네요
     
시탄산 14-10-2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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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준비해 둔 시나리오가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기대됩니다. ^^
icedams 14-10-29 20:19
답변  
로이! 지, 진지캐일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했던 개그캐였나! 에에잇, 가소롭다!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배꼽을 잡아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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