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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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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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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 Roude 프로젝트글 시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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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오프닝 페이즈] - 1 -
14-10-25 03:09
 
 

-신세를 졌습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방의 글씨로 그렇게 한 줄을 쓴 뒤, 그 다음은 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결국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바람에 그대로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반쯤 열린 침실 문틈 사이에서 곤히 잠든 노부부의 태평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 평화로운 얼굴들을 눈에 새기고 싶었지만, 괜히 잠을 깨우는 것도 미안했다.
[미국 총각, 젊은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몸 건강하고 사지 멀쩡한 게 가장 큰 재산인겨. 너무 험한 일 하고 댕기면 자기만 손해여.]
처음 노부부를 만났을 때, 갑옷 아래 드러난 자신의 상처투성이 몸을 보고 안타까워하던 그 시선들을 떠올렸다. 이 세계의 언어를 전혀 모르던 때라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뉘앙스로 자신을 나무라고 있다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이 순수하게 친절한 마음에서 나온 충고라는 사실 역시, 충분히 전해져왔다.
낯선 세계에 떨어져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혼란스러워 하던 자신에게 손을 뻗어준 그 두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충분히 있었다. 가능하면 한동안 여기 남아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마음도.
그렇지만, 결국 그는 이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투쟁하고 살아왔다는 증거---이 세계에 오며 잃어버렸던 그의 소울을 되찾고, 그를 낯선 세계로 소환했던 건방진 누군가를 찾아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서는.
숱한 전흔을 남긴 갑옷과 투구, 그리고 거대한 검과 방패. 처음 이 집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의 차림으로, 율리우스는 노부부의 안락한 집을 나섰다.
이 근처의 지리는 이미 지식으로 알고 있다. 해가 진 탓에 주변은 어두컴컴했지만, '가로등'이라고 부르는 불빛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덕분에 안전하게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이 세계에 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갖춘 상태였다. 사방에서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는 저 상자들이 '자동차'라고 부르는 이 세계의 운송수단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그 중 특정한 표식이 있는 상자는 금전을 지불하면 탑승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었다.
대략 한 달동안 여러 종류의 단순한 육체 노동을 한 대가로 그는 이 세계의 금전, 알록달록한 종이들을 상당량 갖고 있었다. 아직 그게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는 잘 와닿지 않지만, 숫자를 보고 올바른 금액을 지불할 수는 있었다.
길가에 서서 손을 내민 율리우스의 앞에 택시 한 대가 정차했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전철역."
뒷문을 열고 좌석에 앉자 푹신한 시트가 갑옷의 무게로 움푹 꺼져들었다.
출발한 뒤에도 한동안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던 택시 기사는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묻고 말았다.
"저기 손님, 그 갑옷 혹시 진짭니까?"
"코스프레다."
사실 스스로가 내뱉은 단어의 의미는 아직 모르지만, 경험상 이 세계의 인간들은 그가 그렇게 말하면 그 이상 질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외워두고 있었다.
불사의 저주를 받은 기사를 태운 택시는 오랜지빛 궤적을 남기며 황량한 밤의 도시 속을 빠르게 달려갔다.


* * *

"공백차원?"
아프로 머리에 슈츠 차림의 키가 큰 남자, 디마리오 칙이 무심하게 되물었다. 딱히 상대의 말이 믿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올바르게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단말 화면 너머에서 그의 상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 주 전 본부 쪽 지구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들었겠지. 우리 요원들이 세 명이나 부상당했잖나."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딱히 대꾸하지는 않았다.
"바로크 아카데미에서 개발하고 있던 인공정령, 코드명은 '니알라토텝'. 의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탓에 추적하기 까다로운 타입이야. 일단 우리가 파악해둔 정보는 전부 보냈으니 읽어보도록."
전용 단말에 추가된 새로운 화면을 잠시 훑어보던 디마리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인공정령이 공백차원으로 도망을 쳤다라."
"어제 겨우 꼬리를 잡았지. 의도적인 건지, 단순한 우연인지. 하여튼 골치아프게 됐어."
공백차원이란 서류상으로는 훨씬 길고 복잡한 넘버링이 붙어 있는, 어떤 특이한 차원세계를 가리키는 별명이었다. 일단 코스모스 에이전시의 다중차원세계 목록에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막상 차원 정보 항목 쪽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텅 비어 있는 탓에 붙은 별명이 '공백차원'.
디마리오는 누군가가 그 공백차원에 파견되었다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에이전트들 중 비교적 호사가인 부류에서는 종종 화제거리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디마리오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다만 정보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임무 수행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위험이 있었기에 상당히 신경쓰였다.
"차원균열 탓에 관찰과 간섭이 어려워서?"
"그것도 있지만, 사실은 그쪽 차원에도 우리같은 차원 관리자들......'세이퍼'란 녀석들이 있거든. 그들이 작정하고 방해하면 이쪽에서는 손쓸 도리가 없지."
"처음 듣는데요."
"자네의 보안 레벨보다 높은 기밀사항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최고 수준의 기밀이라는 뜻이다.
"비공개 정보지만, 시공관리국 놈들이 공백차원으로 에이전트를 파견했다는 정보도 있네. 자칫하면 충돌할 가능성도 있겠지."
"그 옆동네 조직 말입니까. 목적은?"
"정보부 말로는 아직 조사중이라고 하더군. 말이 조사중이지, 결국 전혀 모르겠다는 거지만."
시공관리국이란 요컨대 코스모스 에이전시와 비슷하게 여러 차원세계에 간섭하는 일을 하는, 말하자면 그들의 경쟁적 동업자 같은 조직이었다. 이념과 목적에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는 데다 주로 활동하는 차원세계도 그다지 많이 겹치지 않았지만, 가끔 요원들끼리 마주칠 때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마찰이 일어나곤 했다.
디마리오의 경우 지금까지 시공관리국의 요원들과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발견 내지는 조우할 경우의 메뉴얼은 일단 숙지하고 있었다. 첫째 발견 즉시 보고할 것. 둘째 가능한 한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을 것. 셋째 들켰을 경우 최대한 접촉을 피할 것. 넷째 임무가 겹치거나 혹은 기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접촉해야 할 경우 먼저 우호적인 해결을 제안할 것. 다섯째 제안이 거절당하거나 불가능할 경우 전력으로 배제할 것. 물론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지킬 마음이 얼마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쉽지 않은 임무라는 건 인정하네."
드물게도, 걱정어린 말투였다.
"인선 과정에도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서 말이야. 추가 지원이나 연락이 어려운 상황에서 단독적으로 임무를 해결할 수 있는 요원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레벨이 높은 녀석들은 세이퍼들에게 견제될 위험이 있거든."
그래서 나에게 돌아왔다는 거군. 디마리오는 납득했다.
"출발은 언제죠?"
"전송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가능한 빨리. 그쪽 시간으로 7시간 내에 연락이 갈 걸세."
"그 전에 공백차원에 대해서 가능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만."
"오히려 내가 알고 싶을 정도라네. 최소한 내 레벨에서는 정말로 알려진 게 없어. 문명수준조차......뭐, 차원을 관리하는 조직이 있을 정도니 제법 높은 편이겠지만. 자네의 판단과 임기응변에 맡기겠네."
단말 접속을 종료하고, 디마리오는 수염으로 까끌까끌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공백차원, 거기다 시공관리국이라......."
평소보다 만만찮은 임무가 될지도 모르겠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나름대로의 보험을 준비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임무 달성 이전에, 목숨 보전을 위해서라도.


* * *

"엣취!"
초등달이 걸린 저녁, 한 손에 장을 본 비닐 봉투를 들고 골목길을 걸어가던 야가미 하야테가 그다지 소녀답지 않은 성대한 재채기를 터뜨렸다.
"지금 누가 내 이야기 하고 있는 모양이데이. 나노하 쨩이가, 페이트 쨩이가?"
빈 손으로 코를 쓱쓱 훔치는 하야테에게, 어깨 부분에 머물며 공중에 떠있던 리인포스 츠바이가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마이스터, 품위 없잖아요."
"마 괘안다. 컴컴한 밤시라 아무도 안 보고 있구마."
"안 괜찮아욧. 하라오운 제독님도 말씀하셨잖아요. 모름지기 시공관리국 본국의 중령은 언제 어디서든 그에 걸맞는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리인은 대체 누구 편이고? 나가, 아님 크로노 군이가?"
"그야 물론 마이스터 편이죠."
"그럼 너그럽게 봐 달라 안 카나."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전 어디까지나 마이스터를 위해서 충고를......."
"체엣, 하나도 재미 없데이."
입술을 삐죽 내민 하야테가 어린애처럼 투덜거린다.
"이 나이에 동료도 없이 외딴 차원에 단신부임 온 외로운 마이스터한테, 조금 더 상냥한 디바이스였으면 좋겠구마. 리인은 옛날에는 참말로 귀여웠는데, 왜 이렇게 변해버렸을꼬. 엄마는 슬프데이."
"그, 그건......."
"이렇게 잔소리만 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기토 쨩을 데려올 걸 그랬구마."
"우웃."
이번에는 리인포스 쪽이 급격하게 침울해졌다.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하야테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농담이데이. 리인은 지금도 귀엽데이. 내 소중한 가족 아이가."
"마, 마이스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하야테에게 리인포스가 감격의 눈빛을 향했다. 훈훈한 장면이었지만, 그 손이 방금 전 재채기한 코를 훔쳤던 손이라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슬슬 이쪽 세계에 기반도 잡혔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기데이. 탐사 임무든 귀환 임무든."
아지트인 반지하 방(월세 40만 원, 보증금 없음)에 도착한 뒤, 시공관리국 마도사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온 하야테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이 세계에 대해서 관찰한 것만으로도 탐사 쪽은 충분하지 않나요, 마이스터?"
"마, 지금 이대로 귀환해서 보고서를 낸다 카면 정보부에서는 일단 받아주겠지만, 아마 칭찬은 못 들을 끼다."
'관리국 정보부 평행세계 탐사국'이라는, 임무 위험도가 제법 높은 부서의 임무를 맡기 전에 기동6과를 비롯해 다양한 보직을 거쳤던 현재의 하야테는, 이미 시공관리국이란 조직의 성격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었다.
"리인, 우리들이 이 세계로 오게 된 한 달 전의 그 사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능교?"
"그냥 평범한 차원표류 사고 아닌가요?"
"난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데이."
관리국 정보부란 부서는 시공관리국이란 광대한 조직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냉혹하고 무기질적인 부서였다. 때때로 대단히 우수한 요원들조차 비정한 방식으로 소모시키곤 했다.
탐 사국 요원으로서는 신출내기에 불과한 하야테에게 '차원세계의 중앙'이라고 불리는, 온통 수수께끼에 싸인 이 '근원세계'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뜬금없이 내려졌던 것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표면적 임무 이상의 숨겨진 사정이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 중 야천의 서에 무슨 오류가 일어났는지, 현재 하야테는 기록되어 있던 마법 중 상당수를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창천의 서 쪽은 다행히 건재했지만, 어쩔 수 없이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혼자서 대인전투상황 등의 응급상황에 빠진다면 무사히 빠져나올 자신이 없었다.
그 때문에 하야테는 우선 최악의 상황에서도 장기간 버틸 수 있도록 아지트를 비롯한 이 세계의 기반을 준비하기로 했다. 천만다행으로, 이 근원세계는 그녀가 원래 살던 차원의 지구와 비슷한 분지에서 기원했는지 별로 낯설지 않은 편이었다. 덕분에 적응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표류 한 달째, 그녀는 한 어학 학원의 임시 강사로 일하며 값싼 아지트와 기본적인 생활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돼요, 마이스터. 임무 도중에 차원표류를 당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잖아요. 차원폭풍도 일으키려 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게 아니고요."
" 그렇지. 우리들이 휩쓸린 차원폭풍 자체는 틀림없는 사고일끼라. 다만 하필이면 그 직전에 조사 임무가 떨어진 건, 하필이면 하고많은 차원 중에 귀환은커녕 미드칠더와 연락도 안 되는 근원세계라는 건, 그리고 하필이면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함구해야 하는 비밀 임무였다는 건, 즉......."
하나하나는 우연일지 몰라도 그것이 거듭되면 필연---즉, 누군가의 의도가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물 론 하야테도 두 손 놓고 그 의도에 삼켜진 것은 아니었다. 사고 직전, 볼켄리터에게 가까스로 짧은 메시지를 남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볼켄리터와의 마력 라인은 미약하게나마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설령 정보부에서 사고를 은폐하고 있더라도, 아마 나노하와 페이트 그리고 주변 인물들에게는 하야테의 상황이 대략적으로나마 알려졌을 것이다.
현 상황에서 순수한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은 어렵지만, 반대편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다면 희망은 충분히 남아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또 하나 있데이."
"뭐가요?"
"......목소리."
"목소리?"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인포스에게 하야테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차원폭풍에 휩쓸렸을 때 얼핏 무슨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데이. 도와주세요, 하고."
"환청 아닌가요?"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리인한테도 비밀로 했던 거구마. 여자애 목소리였데이."
"정말이에요, 마이스터?"
"귀여운 여자애 목소리는 한 번 들으면 안 잊어버린다 안 카나. 내 감이지만, 아무래도 우리들이 여기 오게 된 건 그 여자애랑도 관련이 있을까 싶데이."
그 녀가 받은 임무의 이면을 읽어내 관리국의 의도에 따른 탐사를 진행할 것인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조차 분명치 않은 그 목소리에 대해 조사를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리인포스와 그녀 자신의 무사 귀환을 우선시할 것인가, 혹은 전혀 다른 선택지를 고려할 것인가. 하야테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리인, 최근 주요 차원 사건 관련 참고인들이 외부로 구조 신호를 보냈다가 관리국원이 휘말린 사건이 얼마쯤 됐더라?"
"신력 기준, 작년부터 41건이었어요."
"그 중 대규모 차원 재해 발생이 뒤따른 건수와, 그에 따른 국원들의 귀환률은?"
"작년부터 관련 사건으로 12건이 차원 붕괴 혹은 인접 차원에 대한 재해로 이어졌고, 국원들의 경우엔......MIA(임무수행 중 행방불명)이 42%......KIA(임무수행 중 사망)이 25%......였어요......."
"흐음, 그렇구마......아, 리인. 오늘 저녁은 카레 괜찮나?"
도마 위에 당근을 송송 썰며 카레를 만들기 시작한 하야테의 표정은 평안해보였다.


* * *

"......뭔가, 이미지대로 잘 안 되네."
하쿠레이 신사. 요괴 퇴치를 전문으로 하는 무녀가 있는 주제에 온갖 요괴들이 출몰하고 연회까지 벌이는 바람에 정작 마을의 인간들은 찾아오지 않게 된 묘한 신사.
그 툇마루에서 츠치키 료야는 머리를 싸맨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그는 모종의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다. 야쿠모 유카리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스키마를 료야 자신의 능력,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히는 정도의 능력'으로 흉내내보려 하는 시도였다.
유카리 정도의 대요괴가 가진 고유한 능력을 흉내낸다는 건 성공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데다, 만에 하나 정말로 성공하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지만, 사실 료야의 동기는 지극히 단순했다.
"도○에몽 주머니처럼 편리해 보이니까, 그거. 환상향에 앉아서 편하게 과자를 조달할 수도 있을 테고."
딱히 환상향과 바깥세계를 오가기가 귀찮아진 건 아니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 정도의 이유였다.
"스키마도 조용한 걸로 봐서는 딱히 위험한 시도는 건 아니......겠지? 응, 그렇겠지."
잘은 모르지만, 혹시 하쿠레이 대결계에 영향을 주느니 어쩌니 하는 이유로 해서는 안 되는 거라면 그 신출귀몰한 야쿠모 유카리가 진작에 튀어나와서 제지했을 테니 괜찮겠지. 설령 자기 자신에게 위험하다고 하더라도 뭐 봉래인이니 죽지는 않을 거고. 그런 식으로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는 료야였다.
"료야 씨, 나 잠시 외출할 테니까 그동안 신사 좀 봐줘."
겨드랑이를 드러낸 개성적인 홍백 무녀복 차림의 무녀, 하쿠레이 레이무가 신사의 마당에서 료야를 향해 말했다.
"알았어. 어차피 한가하니까."
"잘됐네. 그건 그렇고 료야 씨, 며칠 전부터 살금살금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해두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
딱히 료야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레이무는 훌쩍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으음......레이무도 저런 말을 하고, 역시 그만두는 편이 좋으려나."
그렇지만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견딜 수 없이 심심해진 료야는 결국 스키마 실험을 재개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가지를 뻗는 느낌으로 바깥 세계에 접촉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오옷, 방금 뭔가 손맛이 느껴졌는데."
바람이 조금씩 오가는 정도의 연결이지만, 틀림없이 환상향과 외부 세계가 연결된 것이 료야에게는 느껴졌다.
그렇다면 한 번, 하는 심정으로 이번에는 자신의 신체를 그 통로에 넣어보기로 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계인 영화의 한장면처럼, 자그마한 통로 입구에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가져가려 한 순간.
통로의 입구가 넓어지며 인간의 '손'을 닮은 형체가 불쑥 튀어나와 료마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마치 야쿠모 유카리가 항상 신출귀몰하게 스키마 속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뭐, 뭐야?! 스키마냐?!"
그렇지만 당황한 료야가 그 정체를 미처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 하쿠레이 결계 바깥으로 연결된 입구는 다음 순간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폭발하듯이 팽창했다.
"우와앗?!"
료마의 몸은 순식간에 빛 속에 감싸였다. 그 모습은 흡사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짐승의 입에 삼켜지는 광경과도 닮아 있었다.
잠시 후, 빛은 사라지고 하쿠레이 신사에는 정적이 되돌아왔다. 새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날아다니고, 툇마루 앞의 오래된 나무들조차 잎새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태연하게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와 비교해 아무런 이상도, 차이점도 없었다. 단 하나, 료야의 모습이 신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지극히 짧은 순간만 존재하고 사그러진 그 빛의 폭발을 눈치챈 자는, 환상향에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 * *

특이한 지형이었다.
지면에서 수직으로 세워진 녹갈색의 벽.
아마 천 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고개를 한껏 들어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하늘을 덮는 높은 절벽이 그들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말야, 사이먼."
"왜?"
"정말 그렇게 간단하게 다른 차원으로 갈 수 있는 거야? 무슨 장치라든가, 능력 사용도 없이?"
"경우에 따라서는. 왜 옷장 속에 들어가든가, 강물에 빠진다든가, 트럭에 치인다든가 해서 이세계로 이동하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나잖아."
"아니아니, 그건 판타지겠지."
"원래 현실과 판타지는 종이 한 장 차이야. 중세 사람이 컴퓨터나 핸드폰을 보면 그거야말로 무슨 판타지처럼 생각할 걸. 초능력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우리들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고."
"하긴 그건 그렇지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은 두 명의 소년이었다. 체격은 비슷하지만, 한 쪽은 눈부신 백발, 다른 한 쪽은 칠흑같은 흑발로 매우 대조적이었다. 두 사람 모두 움직이기 편한 운동복 차림에, 백발 쪽은 빈손, 흑발 쪽은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굳이 타임머신을 만들지 않아도 우리는 항상 조금씩 미래로 가고 있어."
"어, 그거 어디서 들었던 말 같은데."
"마찬가지로, 굳이 차원이동장치나 차원이동능력 같은 게 없어도 우리는 항상 평행세계들 사이를 이동하고 있다고. 매 순간마다 결정한 선택들에 의해서 말이야."
"흐음. 그래서?"
"그 평행세계들 사이의 틈새를 찾아내서 침입하면 곧 다른 차원으로 가게 된다는 거지."
"그렇군."
"다만, 몇 번이나 말했듯 네가 가게 될 세계는 상당히 특별한 케이스야."
"다른 차원들과는 달리 평행세계의 분기가 전혀 없다는 거지."
"그래. 내 능력으로 '분기가 하나뿐이다'는 건 관측할 수 있었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어. 그걸 알기 위해서는 직접 그 세계에 가보는 수밖에 없으니까. 최대한 많은 것들을 조사해 줘."
"노력해 볼게. 아무튼, 저 구멍이 그 틈새란 말이지."
흑발의 소년이 손으로 가리킨 것은 그의 말처럼 구멍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동굴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거대했지만, 터무니없는 절벽의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아보였다.
"잘 봐."
사이먼이라고 불린 백발의 소년이 돌맹이 하나를 주워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돌맹이는, 동굴 입구에 다다른 순간 마술처럼 사라졌다.
"무생물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거야. 다만 생명체도 저 균열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어. 물질적인 구성은 유지되겠지만, 나올 때는 그냥 시체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그래서 일부러 나에게 부탁한 거잖아."
"부탁해, 동수."
"오케이. 그럼 나중에 보자."
동굴 앞으로 다가선 흑발의 소년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오직 사이먼만이 관찰할 수 있는 차원의 균열 너머로 우선 오른발이 사라지고, 상반신이 사라지고, 왼발이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배낭이 사라졌다.
천동수, 어떤 상처를 입어도 순식간에 회복시키는 초능력자 그룹 '사이킥'의 회복능력자는, 자신의 발로 직접 걸어서 근원세계로 향했다.
과연 그 세계에서 어떤 존재와 조우하고, 어떤 사건을 겪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틀림없었다.
그가 조금도 상처입지 않은 채 멀쩡한 모습으로 원래의 세계에 돌아오리라는 사실만큼은.


* * *

"대체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냐, 이 어리석은 녀석!"
"으음......?!"
귓전에 울리는 시끄러운 목소리에, 팔베개를 베고 붉은 털 망토를 이불처럼 덮은 채 누워있던 푸른 고슴도치가 눈을 떴다.
"겨우 정신이 들었느냐. 여전히 미숙한 녀석 같으니라고."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어두컴컴한 하늘을 배경으로, 한심하다는 듯 얼굴을 내려다보는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파트너이자 자아를 가진 검---에고 소드 칼리번이었다.
"기사 된 자는 식사 중에도 잠을 잘 때도 항상 언제 어디서나 경계를 풀지 않아야 하는 법이거늘, 이렇게 방심 투성이여서야 위대한 왕은커녕 견습 기사보다도 못하지 않느냐."
"이봐, 또다시 그 견습 기사 타령이야? 바람의 기사 소닉 경은 어디로 간 거야?"
"흥, 너처럼 미숙한 녀석에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어이어이......."
어린애도 어이없어할 억지를 부리는 칼리번에게, 그의 주인인 푸른 고슴도치---소닉 더 헤지혹은 눈을 찌푸렸다.
"이봐, 무슨 일이야? 오늘은 꼭두새벽부터 기분이 언짢은 모양인데."
"무슨 일이냐고 물었느냐? 그럼 네 두 눈으로 직접 살펴보거라."
"흐음?"
그제서야 몸을 일으킨 소닉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봐, 여기는 대체 어디지? 카멜롯이 아니잖아."
"겨우 깨달은 모양이군."
"잠깐만......그 전에, 브리튼에 이런 곳이 있었나?"
나무와 숲 대신 높은 건물과 자동차들이, 풀 대신 딱딱한 콘크리트가, 하늘의 별빛 대신 땅의 인공광이 뒤덮고 있는 도시. 그가 있는 곳은 그 중심부에 세워진 마천루의 옥상이었다.
소닉은 옥상을 둘러싼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그 아래에는 아직 채 끝나지 않은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도시잖아? 설마 자는 사이에 내 세계로 돌아온 건가?"
소닉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낯선 장소인 탓에 정말로 원래 그가 살던 세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잠들기 직전까지 있었던 브리튼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 말대로 여긴 브리튼이 아니다. 하지만 네 세계도 아니지. 네가 잠들어 있던 사이에 누군가에게 소환당한 게야. 또다른 세계로 말이다."
"또? 이러다 버릇이 될 것 같아서 무서운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소닉에게 칼리번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소환한 자가 너에게 적의를 갖고 있었다면 대체 어쩔 뻔 했나. 어딘가에 갇히거나, 아니면 꼼짝없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더냐."
"그랬다면 진작에 일어나서 그 녀석에게 한 방 먹여줬겠지. 너를 휘두르며 말야."
"우움, 그건......하긴 너라면 과연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자신만만한 소닉의 말에 칼리번은 반론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조금 쑥쓰러워 하는 것처럼도 들렸다.
문득 소닉이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일곱 개의 카오스 에메랄드를 꺼내들었다.
"어라? 이게 왜 이러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어야 할 카오스 에메랄드는, 어째서인지 전부 본래의 색을 잃은 채 칙칙한 잿빛을 띠고 있었다.
"뭐,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잠시 고민하던 소닉은 곧 대수롭지 않게 카오스 에메랄드를 도로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잠도 다 잤으니 슬슬 가볼까."
달리는 데 거추장스러운 왕관과 망토를 벗어던지고, 불멸의 검집을 허리에 차고, 건틀릿을 낀 손으로 칼리번을 검집에 집어넣는다.
"난데없이 어디로 간다는 게냐? 브리튼으로? 아니면 네 세계로?"
"그야 뻔하지."
소닉은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모처럼 새로운 세계에 왔는데, 구경이라도 실컷 하다 돌아가야지 않겠어?"
난간을 가볍게 뛰어넘어 마천루의 가장자리에 발을 걸친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푸른 고슴도치는 공중을 향해 몸을 던졌다.
동쪽부터 희미하게 밝아오는 도시의 하늘을 배경으로, 파란색 잔상이 바람처럼 자유로운 그 특유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 * *

"완성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뭐든지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긴장해 있던 험악한 얼굴에 순식간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본인으로서는 그저 순수하게 기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미소였지만, 거듭한 철야로 충혈된 눈과 퀭해진 뺨과의 조합은, 만일 누군가가 옆에서 봤다면 영락없이 무슨 위험한 중독자로 착각할 몰골을 형성하고 있었다.
"정말인지 오랜만에 철렁했잖아. 내 콜렉션 28호가 사라지다니."
'마키나'라고 자칭하는, 꽁지머리에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의 그 남성은 자리에서 일어서 굳어진 목을 우두둑거리며 양 옆으로 꺾었다. 만면에 희색을 띤 표정으로, 한 달간 몰두한 작업의 성과물을 흐뭇하게 내려다본다.
구석마다 곰팡이가 핀 상자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는 버려진 낡은 창고. 넓은 바닥 전부를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기계장치가 그 안에 누워있었다.
아 직 전기는커녕 화석연료조차 없었던 시대에 만들어졌던 최상급의 테크놀로지. 오직 태엽과 톱니바퀴라는 단순한 부품들만으로 태양과 달, 행성, 별자리까지 온갖 천체들의 운행을 재현시킨 정밀기계. 당시 '대학문'으로 일컬어지던 천문물리학의 모든 정수가 담겨있는 데다, 순전히 예술적 측면만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환상의 공예품. 다름아닌 오를로이(천문시계)였다.
그의 눈앞에 있는 오를로이는 일종의 복제품, 레플리카였다. 오리지널은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가 남겼던 필생의 과업물로, 현재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은 함부로 구경도 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과 거 마키나는 그 오를로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한눈에 반해서 꼬박 사흘을 관찰한 끝에 겉모습은 물론 내용물까지 완벽하게 복제해내는 데 성공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테크트리에 특별한 콜렉션 중 하나로 간직해두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이 창조해낸 장치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그로서는 파격적인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오를로이의 테크트리를 마키나가 분실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스스로 개발한 차원도약장치를 시험하던 중 예상 밖의 사고가 일어났던 탓이다. 원래 도약하려던 차원이 아닌 다른 세계에 도착하게 된 것은 별로 상관없었지만, 그 와중에 차원도약장치를 포함해서 테크트리를 상당수 분실한 것이 문제였다. 오를로이의 테크트리 역시 그 때 함께 분실하고 말았다.
그가 분실한 테크트리 중에는 보다 훨씬 실용적인, 이를테면 서바이벌이나 전투에 도움이 되는 장치들도 여럿 있었으나, 자신의 소중한 콜렉션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키나는 만사 제쳐놓고 우선 오를로이의 복구부터 착수했다. 그리고 이 세계에 도착한지 한 달이 지난 오늘, 마침내 완벽하게 복구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비 록 한 번 복제해서 대략 원리를 파악하고 있던 물건이라고 해도, 과거의 천재가 60년을 바쳐 설계한 정교한 장치를 한 달만에 완성해낸 것은 틀림없이 대단한 업적이라 할 만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저 능력의 낭비였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따로 없을 정도다.
차라리 그 시간에 차원도약장치를 복구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그는 원래의 세계에서 안락하게 커피나 홀짝거리며 새로운 기계를 구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키나 본인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그럼 콜랙션도 복구했겠다, 밥이나 먹으러 가볼까."
오를로이의 설계가 테크트리에 온전하게 등록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서, 마키나는 창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눈부신 태양빛 탓에 눈을 조금 찡그리며, 마키나는 무턱대고 낯선 거리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는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 * *

"이걸로 최후다, 블레이드!"
"이블......!"
푸르게 빛나는 지구와 오비탈 링을 배경으로, 두 개의 광선---블래스터화한 두 명의 테카맨이 내뿜은 볼테카가 격돌했다.
승부가 지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오로지 볼테카의 위력에 의해 우열이 결정되는, 평범한 인간은 파악할 수조차 없는 찰나의 대결.
아주 잠시 이루어졌던 힘의 균형이 무너져내린 것은---결국 블레이드 쪽이었다.
"드디어......이겼다......."
이미 붕괴를 견디지 못하게 된 육체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 의식을 끌어안은 채.
테카맨 이블---아이바 신야는, 볼테카끼리의 충돌이 일으킨 거대한 폭발 너머로 몸을 내던졌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그 누구보다도 증오했던 그의 형을 향해서.

"신야!"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테카맨 블레이드의 품에 안겨 있었다.
"형......악몽을 꾼 것 같아......."
힘없이 미소짓는 신야. 이미 그의 육체는 한계에 도달했지만, 어째서인지 정신만은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신야, 너......원래대로 돌아온 거냐?"
그 말을 듣고 간신히 깨달았다. 테카맨 이블의 테크세터는 어느새 풀려 있었고, 그는 아이바 신야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저 멀리 시야 한구석에 곤충의 모습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라담의 모습이 보였다. 그걸로 신야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는 라담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블래스터화의 대가로 한계를 맞이할 그의 육체는, 기생생물인 라담에게 더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었으니까. 라담은 새로운 숙주를 찾아 그의 몸을 떠난 것이다.
"형, 이긴 거지......? 난......형을 이긴 거지......? 간신히......형을 이겼어......"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기력이 소모되었다.
"말하지 마, 신야!"
테카맨의 장갑 너머로 격정에 가득 찬 타카야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결국 형은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예전의 신야였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그 사실이, 지금은 그저 편안하게 느껴졌다.
"고마워, 형......진심으로 나와 싸워줘서......."
마지막 남은 기력을 모조리 끌어올려, 손에 쥐고 있던 크리스탈을 내밀었다.
"이걸로......달에 가도록 해. 켄고 형이 기다리고 있어."
서서히 흐릿해져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아 신야는 하고 싶었던 마지막 한 마디를 간신히 남길 수 있었다.
"미안......형......."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의식은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눈을 뜨자 푸른 하늘이 보였다.
"여긴......천국인가?"
무심코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가 정정한다.
"아니, 내가 떨어졌다면 지옥 쪽이겠지."
눕혀져 있던 몸에 힘을 주어 일으켰다. 사후세계치고는 이상하게 신체가 무거웠다.
사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체 뭐지, 이곳은?
그가 쓰러져 있던 곳은 도심 속의 작은 공원 같은 곳이었다. 담장 너머로 무표정하게 오가는 사람들과 우뚝 솟은 건물들이 보였다.
마치 지구, 그것도 아시아 계의 어느 나라처럼 보이지만, 그럴 리는 없다. 이미 라담수에 뒤덮인 지구에는 어떤 인간도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그가 알고 있던 지구의 모습과는 곳곳에서 미묘하게 차이가 있었다. 사람들의 복장도, 건물의 양식도, 곳곳의 간판에 보이는 언어도.
위화감은 또 하나 있었다. 이미 한 번 붕괴했던 그의 육체가 멀쩡했던 것이다. 지독하게 피곤하긴 했지만, 한동안 휴식을 취한다면 회복 가능한 수준이었다.
아르고스 호의 탐사원이었던 시절 익혀뒀던 다방면의 풍부한 지식이, 그에게 단 하나의 합리적인 가능성을 제시했다.
"차원이동......설마, 그럴 리가."
이론상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화는 빨라야 한 세기 뒤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던 꿈의 기술. 라담에게 침략당해 멸망 직전의 위기에 다다른 현재 인류의 상황에서는 이미 도달 불가능한 테크놀로지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유일하게 논리적인 설명이었다. 라담, 혹은 다른 누군가가 그를 원래의 차원에서 이 세계로 이동시킨 것이다. 차원전이 과정에서 육체의 세포들이 동결되고, 도착 뒤 동결이 해제되면서 붕괴하던 육체가 기적적으로 원래의 형태를 회복했다. 온 몸이 소립자 단위로 산산조각 날 가능성과 절반씩의 확률이었지만, 아무래도 신은, 혹은 악마는 그의 편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간신히 자신의 상황을 납득한 신야의 가슴 속에, 이미 한참 전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던 희망의 불씨기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형......!"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 다시 한 번 타카야를 만나고 싶다. 제대로 얼굴을 바라보며, 이번에야말로 속죄하고 싶다. 미유키에 대해서, 지금까지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서.
설령 그를 위해 운 좋게 얻은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생명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 * *

점심 시간의 학교.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교실을 뛰쳐나와 식당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학생들의 레이스도 한바탕 가라앉고, 남들보다 일찍 식사를 끝낸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나 농구, 혹은 탁구 같은 운동을 즐기고 있을 무렵.
학생들의 출입이 통제된 옥상에 슈츠 차림의 한 여성이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틀림없어. <혼돈>과의 접속이 잘 안되는 건 누군가가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야."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약간 무겁기까지 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 여성은 이번 학기부터 이 고등학교에 새로 근무하기 시작한 신입 수학 교사였다.
학교에 온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활기찬 성격과 천진한 미소가 어울리는 앳된 외모, 그리고 흑심을 품고 접근한 학생들의 시시한 장난도 부드럽게 받아 넘기는 어른스러운 매력까지 겸비한 덕분에 순식간에 학교 남학생들의 인기 지분 절반 가량을 차지하게 된 여선생님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그녀는, 만약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본다면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 세계, 어느 시대든 소원하는 자에게 싸움은 필연이로구나."
하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의 검은 눈에 딱 한순간만 본래의 연보라색 빛이 감돌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위장이 잠시 풀린 탓이었다.
위장하고 있는 것은 눈의 색만이 아니었다. 단정하게 묶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원래는 은발이었다. 또 지금 그녀가 이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류가람'이라는 신분 역시 위조된 것이다.
그녀---가람(가명)은 차원여행자였다. 동시에 <근원>, <아카식 레코드>, <궁극의 진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혼돈>에 닿았던 초월자이기도 했다. 헤어진 연인을 찾아 수많은 차원들을 넘나들기 시작한 것은 약 천 년 전, 그러던 중 이 근원세계에 오게 된 것은 한 달 정도 전이었다.
본래 이 세계는 강력한 차원장벽으로 다른 세계들로부터 차단되어 있던 탓에, <혼돈>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가람도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차원이었다. 그러나 한 달 전, 어째서인지 견고했던 차원의 장벽에 틈이 생겨났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세계에 넘어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도착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이유로 <혼돈>과의 접속이 단절되고 말았다.
천 년에 이르는 여행에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적잖히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좋은 인연을 만나 이 세계에서의 생활 기반을 비교적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한동안 평화롭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방해자의 존재를 깨달은 이상, 가람의 짧았던 휴식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약간 낙담해서 살짝 처진 그녀의 등 뒤에서 끼익, 하고 계단으로 통하는 옥상 문이 열렸다.
"역시 여기 있었네."
목소리의 주인은 긴 생머리에 모델처럼 슬렌더한 체형의 미인, 가람과 함께 학교 남학생들의 인기를 양분하고 있는 국어 교사 정연화였다.
"가람 씨, 무슨 일 있어?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그다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얼핏 차갑게 느껴지기까지 한 어조 안에는 서툰 친근감과 신뢰감이 깃들어 있었다.
"글쎄. 별다른 일은 없지만, 마치 미뤄둔 방학 숙제를 개학일에 해치워야 할 처지가 된 학생의 기분이라고나 할까?"
평소보다 약간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인 가람에게 연화가 단정짓듯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네."
"아무 일도 없다니까."
"즉 나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는 거구나. 내가 위험해질까봐?"
"......."
정곡을 찔린 가람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가람에게 연화가 조용한 어조로 이어서 말했다.
"가람 씨는 내 생명의 은인이고, 내가 잘 모르는 신기한 힘을 지닌 사람이지만, 가끔 날 필요 이상으로 얕보는 것 같아."
"난......연화 씨를 얕보는 게 아니라 그저......."
"그렇게 지나치게 감싸주려 하는 거, 그게 바로 얕보고 있다는 뜻이야."
마치 틀린 답을 제출한 학생에게 정답을 가르치는 듯한, 기묘한 박력이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물론 가람 씨처럼 신비한 힘 같은 건 전혀 없는 보통 사람이고, 많은 세계를 돌아다닌 것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나름대로 27년 동안 치열하게 싸워왔다고? 태어난 가문만으로 나를 평가하려는 사람들, 겉으로는 웃으면서 내가 약점을 드러내기만을 애타게 바라는 친척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정하지 않은 내 운명을 상대로. 지금도 계속해서 싸우는 중이고."
"연화 씨......."
"내 은인이......아니, 내 친구가 곤란해 하면서도 나한테 아무 것도 부탁하지 않는 건 무리한 부탁을 받는 것보다도 훨씬 더 괴로운 걸."
쑥쓰러움을 감추려고 퉁명스럽게 내뱉은 그 말에, 가람은 마치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멍하니 연화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이해타산을 떠난 타인과의 우정이 그녀를 감동시켰다.
"알았어. 혹시 도움이 필요해지면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전부 부탁할게."
"응, 얼마든지 부탁해."
어느새 본래의 느긋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온 가람을 향해, 연화는 '얼음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남들에게 쉽게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 작가의 말 : 드디어 시작이네요. 노력하겠습니다^^

icedams 14-10-25 13:20
답변  
아아 신야 ㅠㅠ
사람은모두손님 14-10-25 15:09
답변  
료야는 료야다운 이유로 능력개발하다가 사고를 당했군요. 역시 헤타레(웃음)
     
icedams 14-10-25 15:56
답변  
무심코 진리의 문을 열어버린 에드워드(헤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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