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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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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미련(3)
16-07-19 00:29
 
 
                  ※

이민우는 영웅을 증오했다.
그 모순적인 단어가ㅡ너무나 혐오스럽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리 생각하게 된 건 스승이 죽은 그날부터일 것이다.

"가야 해."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 스승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오른팔은 전투 중에 찢겨 나갔고 왼팔 하나로 간신히 검을 들고 있었다.
"어째서? 이제 적은 없잖아. 돌아가도 된다고!"
이어진 대답은 너무나 모순적이었다.
"아직 사람들이 저 안에 남아있어."
이민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 꼴로 누군가를 구한다니, 되려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하지만 차마 '가지 말란' 말은 할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어쩌면 그건 그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이기적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때 자신도 저 영웅에게 구해졌지 않았던가.
무모하고, 자기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그였기에 그토록이나 선망하고 동경했던 게 아니던가.
단지 이제 다른 사람의 순번이 찾아왔을 뿐이다.
영웅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한다.
누구의 목숨이든 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로써, 자기의 목숨을 버리게 된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열 명이고 백 명이고 구해왔다. 그럴 때마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걸었지만 설령 실패한다 해도 손해는 아니다. 단지 겨우 한 사람 죽은 것 뿐이니까. 100과 1, 어느 쪽이 클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고로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울상 짓지 마라. 꼬맹이. 늘 하던 일을 하는 것 뿐이야. 꼭 돌아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스승은 이민우의 머리를 헤집어 놓고는 애써 미소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으나 이민우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불타는 건물. 그곳으로 향하는 만신창이 사내. 그 두 광경이 겹쳐져 마치 불길이 점점 더 커져 그를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뒷모습마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이민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붙잡았어야 했단 걸.
설령 그게 억지 투성이에 이기적인 행동이라 해도, 반드시 그랬어야만 했음을.

                  ※

"소장님, 저게 보이십니까?"
연구원이 다급히 유리창 너머 검사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언제 내 눈이 멀기라도 했던가? 당장 손 치워."
"아, 죄송합니다."
까칠하게 말했지만 소장도 꽤나 놀란 기색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목젖까지 길게 뿌리내린 흰 턱수염을 가닥가닥 만져 내려갔다.
"흥미롭군. 심장 박동 정상. 뇌파 정상. 감정의 기복 편차가 가장 저조해진 순간에... 찾아올 줄이야."
소년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저건 자연적인 어둠과는 상이하게 다르다. 애초부터 검사실은 총 8개의 형광등으로 그늘 질 곳 없이 환하게 밝혀지고 있다. 저렇게 어두워질 리가 없는 것이다.
"능력인 걸까요?"
"당연하지. 기록계를 체크해.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라고."
자기가 해도 되겠지만 굳이 연구원을 시킨 이유는, 저 광경으로부터 눈을 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능력이 아냐.
여지껏 수많은 실험을 거치면서 여러 능력자들을 상대해 왔던 소장이었기에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테스트 중에는 능력자들은 대개 정신을 잃은 채로, 그것도 아니면 수면제를 투여해 강제로 혼수 상태에 빠지게 한 다음 진행하기 때문에 능력이 발현한다 해도 보통 그 효과가 미미하기 마련이다. 불 능력자라면 검사기 주변과 바닥이 살짝 그을리는 정도고 냉기 능력자라면 공기가 차가워진다거나 유리벽 주변에 서리가 이는 정도다.
하지만 저 어둠은 다르다. 마치 방을 전부 집어삼킬 듯이 요동치고 있지 않은가?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오... 신이시여."
소장의 입꼬리가 가늘어진다. 그 광적인 미소를 뭐라 표현하면 좋으랴. 마치 타르타로스의 끝없는 굴곡 길을 걷던 중에 메시아와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소장은 광희狂喜를 느꼈다.
"더... 더 내뿜어!"

                  ※

끝내 스승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너진 건물 잔해들 사이에서, 시체가 발견되는 일 또한 없었다.
영웅은 영웅인 채로 사라졌다. 세상의 혼란에 맞서 싸우던 끝에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그가 남기고 간 건 소년의 손등에 난 표식 뿐이었다. 생전 그가 다루던 능력의 힘이 담긴 표식만이, 유일하게 그가 존재했음 알렸다.
구원받은 이들 중 누가, 목숨을 건진 사람들 중 누가, 영웅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던가?
이민우 외엔 없었다.
그들은 단지 살아남았음에 기뻐할 뿐이었으니.
소년으로서도, 가슴에 묻은 건 구원자가 아닌 스승으로서였고.
영웅이 아닌 한 사내의 인간상이었으니.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영웅은 없었다.
이상은 이상인 채로 처참히 산산조각 났고, 현실은 현실인 채로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제 나 말곤 당신이 구해준 어느 누구도 당신을 기억하지 않아."
시체가 없는 빈 무덤에다 대고, 이민우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또한 갈 길 잃은 증오에 이를 악물면서 중얼거렸다.
"난 절대 당신처럼 되지는 않겠어."
맹세는 쓰디 쓴 독이 되어 소년의 가슴 깊이 파고든다. 혈류를 다른 색의 것으로 바꾸어, 새 인간에 새 운명을 쓰게 한다.
손등에 새겨진 표식이 소리없이 울부짖는 순간이었다.

                  ※

오민지가 성묘를 마치고 공동묘지를 뒤로했을 즈음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부관에게서 온 것이었다. 쟝과 부관 그리고 요원들 끼리는 훨씬 예전부터 서로 긴급시를 대비해서 휴대폰 번호를 공유해 두었다.
문자의 내용은 간결 명료했다.
그렇지만 가볍지는 않았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둘러 기지로 돌아와 주십시오.'

"실험체가 폭주했단 건가요?"
기지로 복귀한 뒤 부관의 안내를 받아 검사실로 이동하면서 오민지가 물었다.
"폭주인지 아니면 계획적인 도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엄청난 능력적 에너지가 방 안을 가득 채웠고, 사태가 진정된 후에는 실험체도 사라진 뒤였습니다."
능력적 에너지란 연구원들과 내부 관계자들이 능력을 싸잡아 말할 때 쓰는 표현이었다. 능력은 그 종류가 너무나 다양해 구분짓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포괄적인 단어로 대체해 부르는 것이었다.
오민지는 검사실에 도착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변 벽들은 온통 칼집 투성이었다. 거대한 도끼로 단번에 내리치기라도 한 것처럼 이곳 저곳에 일자로 푹 패인 자국들이 여럿 나있었다.
"이건... 대체..."
방의 한켠에서 오민지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윤화야!"
바닥에 널브러진 채 숨을 몰아쉬던 차윤화는 오민지의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민지 누나..."
"괜찮아? 피가..."
옆구리의 상처가 꽤 깊었다. 검사실이 이 지경이 될 때 같이 휘말린 것일까.
"미안해... 괜히 내 대신 봐주다가..."
"그렇지 않아. 누나 잘못이 아닌걸."
차윤화는 애써 미소지었다. 무척 아플 텐데도 혹시나 누나가 죄책감을 느끼진 않을까 참는 모습이었다. 오민지는 차윤화의 그런 어른스러운 대처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도와주고 알려줘야 할 입장인 자신이 오히려 이렇듯 배려받다니.
누나로서도, 선배로서도 실격이지 않은가.
"부관님."
"예. 말씀하시죠."
차분함을 되찾은 오민지는 앞서 해야 될 일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그리곤 마침내 그것을 입밖으로 꺼냈다.
"윤화를 의료실로 데려다 주세요. 저는 실험체를 쫓겠어요."
"혼자 괜찮겠습니까? 이번 실험체는 다른 능력자들과는 뭔가 다릅니다.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오민지는 돌아보더니, 안쓰럽게 웃음지었다.
"원래 능력자는 다 그런걸요."
"..요원님."
부관은 이내 방금 전 자신의 발언이 실언이었음을 깨달았다. 눈앞의 저 소녀는 아직 어리숙하지만 9년 전 그 재앙을 실제로 겪었었지 않은가. 그런 그녀가 능력자를 과소평과 할 리 없다.
"알겠습니다. 다만 부디 조심하시기를."
"네. 어차피 '그게'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오민지였지만 살짝 거리낌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

"젠장, 여긴 어디냐고오..."
하수도에 잘못 빠지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앞도 뒤도 온통 길다란 터널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뭐 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길을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냥 전부 부숴버려서 새 길을 개척할까..."
다만 그러기도 망설임이 드는 게, 머리 위에 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가 지하이기라도 하면 무작정 천장을 부수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순간 매몰될 가능성이 있기에. 그렇다고 해서 벽을 뚫는다? 그건 터널을 더 길고 복잡하게 만드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방법을 몰색하던 중, 이민우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포착했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찾았다..."
돌아보자, 그곳엔 이민우 또래의 소녀가 서있었다.
가녀리고 유악한 몸집이면서도, 뭔가 단호함이 묻어나는 눈빛을 한.
아아. 이런 종류의 녀석,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거 같다. 그 뭐냐 초등학생 시절에 말이다. 왜 가끔씩 반에 하나쯤 있잖아? 왠지 첫인상만으로도 '안쓰러운' 그런 녀석. 가만히 있어도 넘어질 것 같고 자주 멍때리는 데다가 뭘하든 덤벙대는 녀석.
근데 또 뭘 하든 쉽사리 포기하진 않는 녀석. 말하자면, 천연계 노력파라고 할까. 딱 그런 모습이다. 그런 컨셉이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이 생긴 녀석이다. 진심으로.
이민우는 소녀를 보고서 단번에 그런 인상을 팍 하고 받았다.
"때마침 잘 됐네. 뭐 하나만 물..."
"포기해. 이제 더 이상의 도주는 무의미하니까."
"엉? 도주? 그건 또 뭔 개소리냐. 것보다 너ㅡ."
이민우가 다가가려 하자 소녀는 경계하듯이 뒤로 주춤했다. 그러면서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앞으로 내보였다.
그건 스위치였다. 무언가를 작동시키는.
"다가오지 마! 잘 들어. 실험체 021호. 너는 사회에서 범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이곳에 오게 되었어. 너는 오늘 이후로 우리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된 거야. 멋대로 행동하는 건 용납되지 않아. 알겠으면 순순히 이쪽 통제에 따르도록 해. 두 손을 깍지껴서 목 뒤쪽으로 모아. 아니면 난... 너한테 이걸 쓸 수밖에 없어."
"...그런 제도가 있단 얘긴 처음 듣는데. 애초부터 난 말야 형량도 결정되지 않았어. 그리고 여기서 뭔 짓을 당할지 모르는데 널 따르란 얘기냐?"
"질문은 허용되지 않아. 아직 네 상황을 모르는 것 같으니 하나만 알려 줄게. 네 목에 장착된 초커. 손으로 만져봐. 걸려 있지?"
"...진짜네."
"그건 말야 우리 조직이 실험체의 관리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생명 제어 장치야. 강도를 조절할 수 있어서 며칠 간 앓아 눕게 하거나, 혹은 단번에 숨통을 끊어놓는 것도 가능해. 그러니 안 좋은 일을 당하기 싫다면 부탁인데 저항하지 말아줘."
생명 제어 장치라. 거추장스러운 이름이지만 저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농담할 상황은 아니다. 이쪽의 생사 결정권을 저 녀석이 쥐고 있단 게 되니까.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억지로 벗을 생각은 마. 그 즉시 죽을 테니까. 그 초커에는 기폭 장치가 딸려있어서, 잠금이 풀리지 않은 상태로 벗겨지면 곧바로 폭발하거든."
치밀하셔라. 대체 어떤 녀석이 고안해낸 건진 몰라도 매우 악취미다.
"즉 너한텐 선택권이 없단 얘기야. 따르는 것 외에는."
"...확실히 이게 대단히 위험하단 건 알겠어. 근데 있잖냐,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냐? 그러니까 니 말에 따르면 나는 이 어딘지도 모를 좆같은 곳에서 형량도 모른 채 썩어야 된다는 건데, 그건 그냥 가축 아니냐고."
소녀의 표정이 살짝이지만 흐트러졌다. 이민우의 예상대로였다. 아마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 거겠지. 사람 착해 보이는 녀석은 저렇듯 조금만 감성을 건드려도 그대로 얼굴에 티가 나는 법이다.
"넌 믿지 않겠지만, 난 말야 누명을 쓰고 여기에 왔어. 하루 아침에 저지른 적도 없는 살인에 연류돼서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고. 하다 못해 정당한 재판을 받을 기회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전혀 없었어. 너무 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불쌍해. 불쌍해. 불쌍해. 전체 말을 보면 그런 기운이 오는 느낌이지 않은가. 사람의 동정심이란 참 얄궂은 법이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일단 타인을 베이스로 삼고 보니까. 그게 큰 실수가 되리란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일단 그런 생각부터 하는 법이다. '아 그러게 그건 뭔가 좀 이상해.' 뭐 이딴 식의.
저 소녀가 딱 그랬다. 아까까지만 해도 긴장감으로 굳어져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가엾음'으로 얼룩졌다. 세상에 이런 양아치를 걱정해 주는 성녀가 있다니.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저 호구 같은 성격에 말이다.
"누명이라니... 그런..."
"그러니까 말야... 좀 도와 주면 안 되냐? 모르는 척 해줄 수도 있잖아. 한 명 정도 나간다고 해서 뭐 문제라도 생겨? 그럴 리가. 요즘 사회에서 문제 일으키는 능력자 녀석들이 몇이나 있는데. 나중에 나도 협력할 수 있는 일엔 협력해 줄 테니까. 기브엔 테이크 알지?"
그러나 소녀는 그토록이나 무른 인간이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그럴 순 없어. 네 말이 전부 진실이라는 확증도 없으니까. 미안해. 그렇지만 지금은 일단 날 따라줘. 나중에 내가 어떻게든 네가 누명인지 아닌지를 밝혀내 줄 테니까."
빠직.
아 이래서 열혈이 싫다니까.
나중에라니 존나게 기한 없잖아. 네가 내일 먹을 아침밥 메뉴보다 우선 순위가 낮잖아. 적금 넣어둔 돈 마냥 찔끔찔끔 흘러갈 게 뻔하잖아. 사람 속 터지게 만드냐.
알겠다 아니다 한 번에 하라고. 애매하게 말 할 거면 차라리 말을 말라고. 전부 말아먹을 거냐.
"그러냐? 그럼 됐어. 이제 어떡할 거냐? 뭐 수갑이라도 채우냐?"
이민우가 넘어온 척하자 소녀는 그제야 안심해 표정을 풀었다.
"아니. 안대만 씌울 거야. 어차피 능력은 시야가 가려지면 제대로 조준할 수 없잖아?"
"보통은 그렇지. 그럼 네 쪽에서 와서 씌워."
이민우는 두 손을 깍지 껴 뒷목으로 모았다. 그러자 소녀가 곧 이민우에게 다가와 호주머니에서 검은 천을 꺼냈다. 보통보다 더 검한 게 저것도 아마 능력자 전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게 아닐까 싶었다.
소녀는 천을 이민우의 눈가에 대고 씌웠다. 그러면서도 한손에 쥔 스위치를 놓지 않았다. 확실해 질 때까진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없단 걸 알기 때문일까. 마침내 이민우의 눈을 완전히 가리고 나서야 한 발자국 떨어져 선 소녀였다.
스윽.
무언가를 호주머니에 도로 넣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나마 들려온다.
지금 상황에서 넣을 만한 물건은 하나밖에 없다. 꺼낸 두 개 중 하나는 지금 이민우의 눈을 가리고 있으니.
"따라 와. 방향을 꺾을 땐 말해줄 테니까. 혹시 어두운 상태로 걷는 게 힘들다면 손 잡아도 돼."
"아니 전혀 필요없스. 너 근데 의외로 속 빈 강정이다?"
"응? 뭐가?"
그녀는 알 수 없었지만, 소녀의 등 뒤로 짙은 어둠이 일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발치 바로 근처에서.
"능력 중엔 말야, 개성이 강한 것들도 많아. 그중에서 지독한 몇몇은 말야 주인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날뛰기도 한다고."
소녀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뒤돌아 본 순간 어둠이 그녀의 몸을 집어삼켰다. 허공에 들어올려진 소녀는 호주머니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지만 몸이 꼼짝도 하질 않았다. 마치 무언가의 손아귀에 꽉 붙잡힌 것 같았다.
이민우는 천을 벗어 던지고는 소녀의 바로 앞으로 걸어갔다.
"속인... 거야?"
"아니. 애초에 난 순순히 따르겠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네가 어리숙한 거다. 뭐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타인을 쉽사리 믿는다는 점이.
의심은 할수록 좋다. 의심은 끊이지 않고 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의 원리니까. 의심하기보단 속는 게 낫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순 개소리다. 믿기만 하는 녀석은 호구 취급 당하다가 끝내 버려질 뿐이다.
속일 수 있는 녀석은 속이고 믿음이 가지 않는 녀석은 믿지 않는다.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극히 정답인 올바른 잣대가 아닌가.
이민우는 소녀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스위치를 꺼내 들었다.
"이게 없으면 너도 날 어쩌지 못하잖아? 난 여기서 썩을 생각 없어. 너도 걍 귀찮게 나 따라다니지 말고 다른 할 거 해라."
"기다려... 기지를 나가면 안 돼...."
"아직도 그 소리냐? 귀찮으니 기절시켜 둘까..."
그때였다.
소녀의 등 뒤에서 갑작스런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민우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것은 그의 가슴팍에 날아들어 꽂혔다.
"컥...!"
그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이내 털썩 쓰러졌다. 그러자 오민지를 포박하고 있던 능력도 눈치를 살피듯 꾸물거리다가 사라졌다.
"위험했어. 그보다 너 실험체를 붙잡겠다고 가서 역으로 당하면 어쩌잔 건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오민지는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실험체에게 뛰어가더니 그의 상처를 살폈다.
"죽인 거야?"
오민지를 구해준 동료 요원ㅡ차혜린의 표정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자길 죽이려고 한 능력자의 걱정 따윌 하다니.
"...마음 같아선 실탄을 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저녀석한테 쓴 건 마취총이야. 소장이 꼭 생포해 달라고 부탁했거든. 그 인간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다른 수가 있겠어? 그보다 너 말야!"
차혜린은 오민지에게 바싹 다가서더니 멱살을 붙잡고서 소리쳤다.
"작작 좀 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단 거 몰라? 능력자는 네 적이야. 그니까 그녀석들을 동정하거나 걱정해 줄 필욘 없다고. 그놈들을 의심하고 물리치는 게 우리의 본분이고 마땅히 해야 될 일이야. 편애하는 게 아니라.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아는 건데."
"미안..."
오민지가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차혜린은 더욱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그녀를 바닥에 내쳤다.
"난... 정말로 널 이해하지 못하겠어. 오민지. 우린 같은 아픔을 겪고 일어난 게 아니었어? 그날 우린 가족을 잃었어. 능력자 놈들 때문에. 그러니 미워하고 증오하는 게 마땅해. 근데 넌 왜 그러지 못하는 건데."
대답은 없었다. 오민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목 끝으로 곱씹을 뿐이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부모님을 죽인 건... 능력자이기 이전에 인간이었잖아?
다수에 속하기 이전에, 한 명의 개인이었잖아?
단지...
단지... 일부분일 뿐인데도.
그걸로 모두를 미워하는 게 맞는 거야?
"넌 너무 이상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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