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마이페이지
 
Q&A
[공지] 노블엔진 홈페이지가 …
[꿈꾸는 전기양과 철혈의 과…
《노블엔진 2017년 4월 2차 …
[리제로 10 + 리제로피디아] …
[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 전체 게시판 규정사항 *


1. 개인간 쪽지로 할 수 있는 용무를 글로 쓰는 것을 금지합니다.

2. 이용자 불특정 다수, 혹은 불특정 개인에 대한 불만글 역시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3. 상대방을 기분나쁘게 할 수 있는 욕설이나 폭언을 자제해주세요.

4. 연재 게시판에 한해 하루 새로운 제목을 가진 3개 초과의 게시글을 금지합니다.

5. 이용자 불특정 다수가 불쾌함을 느낄 수 있는 글 (예:성인향 글, 특정 정치성향을 포함한 글) 을 자유 게시판, 연재 게시판을 포함한 모든 게시판에서 금지합니다.


첨. 광고글, 저작권 위반 자료의 경우 경고 없이 게시물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참조 - http://www.novelengine.com/bbs/board.php?bo_table=free&wr_id=4427400

 
웅녀와 함께 춤을글 2루수는식빵
라이트노벨
 
 
첫회보기 관심
목록 이전
 
 
1장, 배부른 돼지의 궁핍한 변명
16-06-12 06:25
 
 
+ 1 +

오늘과 같은 난세엔 권력이 곧 부정이고 부패가 곧 권력이다. 서기 11xx년 현재, 두 단어 사이를 잇는 견고한 고리는 아직까지 개선될 기미조차 없다. 아니, 생각해보면 앞으로 200여년 간은 개선되기는 커녕, 되려 점점 더 심해지리라는 것이 타당한 견해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도 모든 권력자가 난세에 기회주의자나 간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정의가 탄핵받는 세상일지라도 어딘가엔 후대에 성인으로 칭송받을 인물이 존재한다. 예컨데 뇌물에도, 아첨에도, 또 간언에도, 어쨌건 모든 종류의 암적이고 부정한 이익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인간형은 역사적으로 확인 할 수 있을 뿐더러, 굳이 역사책까지 뒤져보지 않아도 살다보면 한 번 쯤은 만나볼 기회가 없지는 않을 터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살아내는 건, 꽤나 고단한 일이다.
안개가 자욱한 산 길 위에서 유일한 대화상대인 주선명을 상대로 그런 잡념을 털어놓았다. 잠자고 듣는 둥 마는 둥 마편을 잡고 말을 채찍질하던 선명이 여전히 정면을 주시한 채로 말했다.
"그럼, 이런 촌구석 마을 지방관을 자원한 이유는 그거냐, 고단한 삶을 살아보려고?"
음? 왜 그런 결론이 되나. 나는 되물었다.
"내가 성인군자가 되려 한다고? 아무렴. 그건 아닌데."
"그게 아니라고? 하지만 혁이 네가 한 말은 그렇게밖에 이해가 안 되는 걸.
뇌물도, 아첨도, 그리고 뭐가 더 있었지? 그래, 간언. 뭐, 그런데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원했다는 소리로 밖에 안 들렸다만. 적어도 내 귀에는."
"보고도 혹하지 않는 거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혹하지 않는 건 전혀 별개이지 싶은데."
이번엔 선명이 되물었다.
"뭐가 다른데?"
"수행이 안 되잖냐, 그러면."
불친절한 설명에 여전히 이해하지 못 한 얼굴이었지만, 선명은 비음을 흘리며 수긍하였음을 표명했다.
"그럼 대체 뭐냐. 성인군자가 아니면 신선노름이라도 하려고?
그것도 아니면 면벽수련 겸 달마대사 흉내라도 내보려는 거냐?"
난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죄다 아니다. 난 성인군자나 신선, 혹은 보살같은 인물상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인간이 되보려는 마음을 품어 본 적은 없다. 애초에 그럴만한 그릇이 못 된다. 스스로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뿐이다. 오해마시길.
사람들은 곧잘 인간의 성품을 표현하려고 할 때, 그릇에 비유해 표현하고는 하는데, 내 성품을 그릇으로 비유하자면 찻잔이나 술잔 정도이리라. 뭔가를 담으려고 하면 금새 흘러넘쳐버리는 아주 자그마한 그릇 말이다. 그러니 그 작은 그릇에 걸맞는 곳으로 왔을 뿐이다. 그뿐이다. 좀 더 구어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아. 그리고 그걸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냐. 내 분수에 맞게 사는 거."
내 평소 스타일을 잘 아는 선명이 답도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련하시려구."
그리고는 이어서 업신여기는 투로 말했다.
"내가 볼 때 넌 그냥 어지러운 세상이 싫어서 도망치려는 걸로 밖에 안 보여. 네 분수를 알아서가 아니라."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내 그릇은 나 하나 들어가기에도 벅차거든."
"그릇이 작든, 성품이 모자라다든 내 알 바 아냐. 그런 말은 변명밖에 안돼. 자신이 정한 일이라면 좀 더 가슴을 펴고 말하는 게 어때? 그런 어색하다 못해 궁핍한 변명은 집어치우고 말이야."
가슴을 펴고?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위축되게 들렸던건가. 살짝 기분이 상했다.
"난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내 그릇은 이거밖에 안 된다고."
선명이 피식,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너 잘났다, 그래."
하여간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게 이 녀석의 흠이다.
뭐든지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지만서도.
말이 나온 김에 더 주저려보자면 이름 석자, 주선명이라는 인간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인간이다. 비록 난세에 가려져 빛을 보진 못했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대행수건, 대지주건 아무 문제 없이 치고 올라갈 터다. 산수와 계획을 세우는데 능하고,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나 물건을 관리하고 판매하는 능력도 훌륭하다. 상인으로치면 만능이다. 왜 이런 촌구석까지 날 따라오려는 지 알쏭달쏭 할 지경이다.
단지 조금 자존심이 세서 굽혀야 할 때 굽힐 줄 모르고 평소에 남을 막부리는 것이 난세라는 환경에선 크게 발목을 잡았다. 지금은 마차 위에 앉아있어서 확인 할 수 없지만, 키가 꽤 작고 덩치고 왜소한 편이라 상관의 말에 따박따박 토를 다는 녀석의 모습은 뭐랄까,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다.
뭣도 모르고 덤비면 자만이고 오만이지만 알고서도 덤비는 것은 용기라는 말도 선명에게는 예외가 아닐까 싶었다. 어떻게 예외인지는 잘 설명 못 하겠지만 어쨌든 열외다. 한참이나 위인 대선배한테도 자기 한 말은 하는 성격이니 나한텐 오죽할까. 더 해봤자 입만 아프겠다는 생각에 팔짱을 끼고 등을 뉘이며 화재를 돌렸다.
"잔 말 말고 말이나 잘 몰아라. 그나저나 이쪽 길로 가는 건 맞는거냐?"
"내 능력을 의심한다면 여기서부턴 걸어가면 된다."
괜히 시비 걸었다 축객령이 내려왔다. 잠깐만. 말에 어폐가 좀 있다만?
"이 마차는 내 돈으로 산건데 왜 내가 내려? 내린다면 네가 내려야하는 거 아니냐?"
"마차는 혁이 네 거지만 말은 내가 빌려 온 거다. 네가 말 대신 마차 끌고 가려고?"
찍소리도 못 할 반박이었다. 순순히 꼬리를 내리자.
"아니."
"아님 잠자고 퍼질러 주무시든가."
되로 주고 말로 얻어맞았다. 번번히 이렇다. 선명과 담소를 나누다보면 늘 마지막엔 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굳이 말싸움으로 이겨보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매번 이런 식이면 가끔 속이 언짢아지곤 한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그래도 내가 수령인데......"
옹알이 수준의 작은 불평이었지만, 녀석은 귀도 밝은 모양이다.
"예, 예. 그렇습죠, 나리. 저같은 놈을 차관으로 데려오신 건 크나큰 실책입습죠, 예."
비아냥도 수준급이다. 꺼져가던 호승심에 불씨가 붙었다.
"그러게. 갑자기 후회가 되네. 내가 왜 그랬는지."
"벌써부터 그렇게 자책만 하면 어쩌냐. 앞으로 적어도 5년은 같이 있을건데."
"끔찍한 소리 마라. 같이 근무를 하는거지, 퇴근해서까지 붙어있고 싶진 않다. 그리고 이왕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다만, 그 말투, 어떻게 좀 안 되겠냐?"
선명이 지겨웠는 지 살짝 하품을 했다. 우씨......
"내 말투가 뭐? 친구 사이에 존대하도 하랴?"
"그 정도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위계질서라는 게 있는데 계속 그런 말투면 근무지에서 내 위신이 어떻게 될 지 걱정되서 그런다."
대화하는 내내 정면만 주시하던 선명이 처음으로 고개를 틀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쳐다봤다. 뭐냐, 그 눈은?
"위계질서? 위신? 하하하하!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냐? 하하! 난 몰랐지. 네가 어디 평소에 그런 거 챙기고 살았었으면 또 모를까.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으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
선명은 다시 앞을 바라보며 한참을 더 웃었다.
대체 내 말 어디에 웃긴 구석이 있나. 언짢은 기분이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더 쌓이기만 했다.
"끙끙 앓은 적 없다. 그냥 좀 신경쓰였을 뿐이지."
"그게 그거지!"
아닌데. 다른 건데. 전혀 안 비슷한데. 항의의 말이 혓바닥 위에서 맴돌았지만 녀석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부질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나마 깨달았으니 됐다. 이제부터 쓸데없는 오기는 부리지 않으면 된다.
"됐다. 이 이상 말 안 할란다. 잠깐 세워."
"갑자기 왜? 상처 받았냐? 위로가 필요해? 하하하!"
"됐고, 물 좀 빼고 오게, 잠깐 세우라고."
싸늘하게 노려보니 그제야 웃음을 그쳤다. 얼굴은 여전히 웃고있지만.
"오, 알았어. 째려보지마라."
마차가 서자마자 짧게 한 마디만 남기고 내렸다.
"다녀오마."
"그러셔."

+ + +

간단히 볼 일만 볼 생각이었는데 마차를 세워놓은 길가에서 상당히 멀리까지 왔다. 아직 자존심에 붙은 불길이 다 식지 않아서 무의식 중에 더 걸어왔을지도 모르겠다. 뭐, 아무래도 좋지만.
적당한 곳에 자리잡고 적당한 표적물을 설정했다. 그래, 너로 정했다.
좀 전에는 선명과 말싸움에 열중하느라 말을 끝맺지 못 했다. 끝내 변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 때우기엔 적당한 주제다. 나는 왜 이런 촌구석 외지로 왔는가. 우문이지만 딱히 할 일도 없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엔 수 많은 부정부패를 일삼는 권력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 이분법적인 구분에 따르면 내 성향은 확실하게 후자는 아니다. 전자에 가깝다. 생각만 하는 거라면 몰라도 막상 현실적인 문제에 당면하면 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다. 이기적이고,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게으르고, 배타적이다. 아, 비리 저지르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20xx년대의 지식을 가진 현대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해당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저질러 버릴 수 있는 것'이란, '현재'를 바꾸어 '과거'를 개변시키고 결국엔 나조차 알 지 못하는 전혀 다른 '미래'로 끌려가는 일이다. 알고 있는 미래를 알지 못하게 되는 두려움이란, 정말이지 끔찍하다. 다시 말하는 거지만 내 그릇은 작아서 이런 건 감당 못 한다.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서 더 좋은 세상을 내 손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터무니없는 망상이고 오만이다. 뭘 모르고 지꺼리는 소리다. 설사 알고 있는 미래를 더 좋게 바꾸는데 성공한다 쳐도 그게 얼마나 가겠는가. 100년? 200년? 그 후에는?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 난 '더 좋은 미래'를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미래를 바꾸지 않기 위해서 내가 취해야 할 최선의 행동은 무엇인가. 방법론적으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가만히 미래를 바꾸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내가 섣불리 건들지만 않으면 역사는 자연스레 본래의 흐름을 찾아갈 터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약간 미흡한 구석이 있다. 나라는 존재를 역사라는 강 위에 떨어진 바위라고 했을 때, 그 바위는 존재만으로도 강의 모양을 바꾸게 될 지 모른다. 과하게 생각하는 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설마하는 순간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해서, 비로소 두번째 방법으로 속세를 떠난다는 답안이 제시된 것이다. 최대한 역사에 누를 덜 끼칠 곳으로, 인간관계의 외지. 세상과 격리된, 바로 이런 곳 말이다. 어차피 20xx년도의 서울에 비하면 고려의 수도나 촌구석 외지나 별반 다를 것도 없겠다는 생각도 한 몫을 했다. 
난 볼일을 마치고 목표물로 설정했던 개미집을 바라봤다. 표적 완전 침묵.
노리쇠 후퇴 고정. 약실 검사 이상 무. 좋아, 갈무리하고 돌아가자.

......하고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시선을 잡아끄는 그림자가 있었다. 잠시 집중해서 쳐다보니 소리도 들려온다. 말 소리가 아니라 쇠끼리 부딪히는 맑은 소리다. 종소리인가? 아니, 아니다. 좀 더 무수한 소리다. 그래, 방울 소리였다. 작은 방울 여러개가 일시에 흔들리는 소리였다. 그림자가 왼손을 흔들자 더 확실하게 방울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누구지?
관심이 생기니 발자국이 자꾸만 그림자가 있는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렸지만, 왼손에 손잡이가 있는 방울 뭉치를 들고 있다는 건 보였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그보단 길쭉한 모양의, 막대기는 아니고, 역시 안개 때문에 잘 안 보인다. 아마 검일 것이다. 빛이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줄기가 흩어지는 게 보였다. 검면을 반질반질 닦아놓으면 불가능 할 것도 아니다.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움직이는 게 꼭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춤이라......흠.
이쯤되니 그림자의 정체에 대해 대충 짐작이 섰다. 방울과 검을 들고 춤을 추며 하는 일이라면 두 가지 정도다. 제사 아니면 굿이다. 그렇다면 그림자의 주인은 무당인가? 아직 확정 짓기는 이르다. 뭘, 어차피 금방이다. 난 그림자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슬슬 시야가 걷히며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나려는 찰나, 돌연 그림자가 이쪽을 주시했다.
이런, 들켰나.

+ 2 +

"거기 누구죠? 몰래 훔쳐보지 말고 나와요. 금역에 침범한 죄는 무겁습니다."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먼저 말이라도 걸었으면 훔쳐보고 있었다는 오해는 사지 않을텐데 곤란하게 됐다. 그나저나 금역에 침입한 죄라니?
난 일단 궁금증을 접어두고 서로 얼굴이 보일 정도로만 더 다가가 말했다.
"훔쳐보려던 건 아니었다. 워낙에 경건한 분위기 같아서 적당히 조용히 있었을 뿐."
"제가 그렇게 물었던가요? 누구냐고 물었을 텐데요, 분명. 이 마을 분은 아닌 듯 보이니 외지인인 것 같은데, 뭘 몰랐다 하더라도 금역에 함부로 발을 들인 죄는 치러야 할 겁니다. 다시 묻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거죠?"
폭풍처럼 몰아닥치는 언어폭력의 폭연 속에서 당황한 나머지 내 입에서 어, 어어...하는 멍청한 소리가 났다. 아담한 키에 동글동글한 얼굴이 귀여운 인상 주는 반면, 날카로운 눈매는 사람을 찌를 것 같고 구사하는 말에는 입에 촌철을 문 것 같은 무자비함이 담겨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걸 보니 더 기가 죽는다. 저승사자같은 건 아니겠지?
좀 전에 보았던 방울과 검은 허리춤에 이미 잘 갈무리 되어 있었는데, 검은 묵빛이 나는 검집에 넣어져 등허리에 정확하게 합일자로 매여져 있었고, 방울은 허리춤에 매달려 잇었다. 방울의 형태는 팔주령 같았다. 방사상의 여덟개의 가지 끝에 각각 방울이 하나씩 달려 있다. 특이한 점은 청동이 아니라 황금빛을 띄고 있다는 점과 좀 전에도 봤었지만 손잡이가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손잡이 끝에 고리가 걸려있다.
허리에 얹은 조막만한 주먹이 그 위에 있었다. 쬐깐한 게 퍽이나 당당한 자태다.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 호흡을 고르고 대답했다.
"온 곳은 개성이고 가는 곳은 신석 마을이라는 곳인데. 왜, 문제가 되나?"
"신석 마을로 간다구요?"
"그래, 온 곳은 개성이고."
개성에서 왔음을 강조했지만, 소녀에게선 별 다른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촌구석이란......
"어떤 일로 가는거죠? 개성에서 왔다면 상인이거나 관리일텐데, 행상인처럼은 안 보이네요."
"상인이 아니거든."
"그럼 관리라는 얘기인데......유배를 당한건가요? 아님 좌천?"
하. 하. 하. 정말이지. 촌구석이란......뭐, 그야 당연히 이런 외지로 자원해서 올 관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탓 할 수 없다. 예상한 반응이다. 응, 당황하지 말자.
"둘 다 아니다. 자원해서 온 거거든. 신석 마을의 수령으로 오게 된 '가 혁'이라고 한다. 보아하니 이 근처 마을에 사는 것 같은데 뭐하나 부탁해도 되겠냐?"
이름부터 먼저 물었어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데 다음 반응이 정말 예상 밖이었다.
"돌아가요. 이 근처에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테니까."
데자뷰가 몰아친다. 또 축객령이 내려올 줄이야. 아니, 잠깐, 그보다도......
"돌아가라니? 설마 나보고 개성으로 돌아가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맞아요."
딱 잘라 말하는 소녀의 언행에 고의는 아니지만 내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이봐, 내가 수령이라니까? 그런데 돌아가라니?"
네가 뭔데,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별로 기가 눌린 건 아니다. 무당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어느 집 귀한 여식일 지 누가 알까. 내가 수령이긴 하지만 능력이 빼어나봤자 금수저 앞에서 까불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내 배려가 무색하게도 한층 시퍼래진 두 눈동자가 깜짝 않고 날 노려보고 있다. 그러더니 박력있게 입을 열었다.
"두 번 더 말 않겠어요.
거긴 수령까지 있어야 할 만한 마을이 아니에요. 지금까지도 그런 사람 없이도 박씨 가문에서 잘 다스려왔어요. 뭐, 농지 대부분이 그 가문 소유이니 당연한거긴 하지만, 어쨌든 특산물같은 것도 없고, 사람은 더 없어요. 수령같은 지방관은 불필요하다는 얘기죠. 그러니 그만 돌아가요, 그게 최선이에요."
얼토당토 않은 말을 들은 내가 펄쩍 뛰며 고함을 쳤다.
"그게 최선이라고? 이것봐, 내가 신석 마을 수령으로 발령된 건 합하의 명을 받드는 일이야. 그런데 여기서 어가도 없이 개성으로 돌아가면 내 머리가 몸이랑 이렇게 친하게 붙어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아니지!"
다소 언성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했으니 속이 후련한 것도 같았다. 그러나 소녀 측은 만족할 만한 답변이 아니었던 건지 아까보다 더 무섭게 변해있다. 몇 번 경험하진 않았지만, 경험으로 미루어 어떤 독설이 나올 지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는 내게 소녀는 손가락을 들어 내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사람은 아는 사람인가요?"
뒤에? 소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역시 안개 탓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단번에 누군지 알 수 있는 형태의 그림자가 보였다. 뭘, 망설이랴. 당장에 소리쳤다.
"선명이, 너! 몰래 훔쳐보지 말고 나오시지!"
"그건 당신 아니었던가요?"
소녀가 어이없다는 투로 끼어들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난 안개를 걷고 다가오는 선명에게 따져물었다. 얼버무리려면 지금이다.
"언제 여기까지 따라온거야?"
"언제긴 언제겠어. 네가 숲으로 들어가고나서 바로지. 생각해보니 나도 꽤 참고 있었지 뭐야. 하하하!"
그걸 생각해봐야 아는건가. 하여간에 생리현상에 둔감한 녀석이다.
선명이 이어서 말했다.
"이야, 그래서 나도 같이 물 좀 빼려고 숲으로 들어왔거든? 앞에 네 뒷모습이 보이길래 따라갔지. 근데 네가 그렇게 숲으로 깊게 들어갈 줄 몰랐어. 처음엔 뭐에 씌인 건 아닌가 걱정됬다니까. 뭐라고 말이라도 걸어볼까 생각은 했는데 무서워서 입이 안 떨어지더라. 특히, 네가 그 개미들을 무참하게...우읍!"
"여, 정말 무서웠겠어! 그래, 그거 참 무섭지! 개미가 옷 속으로 기어들어오면 막 섬뜩하지! 그렇게 무서웠더니, 말 다했다. 그치?"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말을 가로챘다. 처음보는 여자아이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잇는다. 재빨리 화제 전환을 하려던 탓에 말이 아무렇게나 생각나는대로 튀어나왔다.
"참, 아직 소개를 안 했었네."
난 소녀에게 선명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래, 원래라면 이게 정상 아닌가. 서로 인사라도 한 뒤에 친근감을 갖고 얘기를 하다보면 소녀의 적대감도 사라질 것이다. 아마도.
"이 친구는 나와 같이 신석 마을 관리로 발령이 난 차관, 주 선명이라고 한다. 말투는 이렇지만 부하다, 부하. 오해마라."
암, 부하는 영원히 부하지. 자신을 부하라고 소개시켜 주는 상관을 향해 야유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네가 어쩔거냐, 하고 눈짓으로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이쪽은...그러니까......흠."
그러고보니 아직 이 소녀의 이름도 듣지 못 했었다. 선명이 턱을 긁적이며 난처해하는 날 책망했다.
"여태 이름도 모르면서 무슨 대화를 그렇게 나눴던 겁니까, 도대체. 쩔쩔매고 있던데. 그새 약점이라고 잡혔습니까, 나리?"
말투를 지적했던 것이 어느정도 통했는 지, 선명의 말투는 존대식이었지만 존경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 보인다. 뭐, 그래도 소기의 성과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입가에 담아 말했다.
"생각은 했는데, 물어 볼 틈이 없었어!"
"엄두가 안 났던 건 아니구요?"
무시하고 소녀를 보았다.
"그래서, 우린 아직 네 이름을 모른다만, 물어봐도 되겠냐?"
"영 대답하기 싫은 기분 나쁜 말투지만 두 사람도 제게 이름을 알려주었으니, 제 이름도 알려주는 게 예의겠지요. 성은 '나'이고, 이름은 '라리'예요. 근처에 있는 보웅사에서 수행 중인 동녀구요."
여전히 까칠한 대답이었다. 이름이 라리라고? 특이한 이름이군. 그러나 물어보고 싶을만큼 신경쓰이는 거라면 따로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선 선명이 나보다 빨리 입을 열었다.
"보웅사의 동녀라고? 보웅사는 절인가? 그리고 동녀라니? 그건 또 뭐고?"
친절하지 않은 자기소개 탓에 듣고도 이해 못 할 단어들이 넘쳐났던 것이다. 경험적으로 여기서 설명을 거부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라리는 순순히 추가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보웅사는 사당이고 동녀란, 웅녀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어린 여아를 말해요."
됐죠? 하고 몸으로 말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갈 수록 태산이라고 또 알 수 없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니,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단어는 아니었다. 그도그럴게 웅녀를 모르는 한민족은 없을테니. 알 수 없는 건 '수행을 해서 웅녀가 된다'는 설명이었다. 선명과 내가 서로를 곁눈질 했다. 말을 꺼낸 건 내 쪽이었다.
"웅녀? 100일 동안 동굴에서 마늘만 먹으면서 지내고 곰에서 인간여자가 됐다는 그 웅녀를 말하는 건가? 그게 수행을 한다고 될 수 있는 거였나? ......야, 너...아니, 실례, 라리 네가 사실은 곰이었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여자아이에게 곰인 거 아니냐는 질문이 적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했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곰이 아니고서야 웅녀가 된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눈 앞의 소녀는 아랑곳않고 내 질문에 단칼로 응대했다.
"거기까지 외부인에게 상세히 설명해 줄 의리는 없어요. 이제 통성명도 했으니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떤가요?"
또 그 얘기냐. 기피하고 싶은 화제를 두고 내 얼굴에 곤란함을 나타내는 억지웃음이 지어지는 걸 느꼈다. 선명한테 도움을 청해볼까?
마침 선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 아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겁니까? 돌아가라니, 어디로 돌아가라는 겁니까?"
억지웃음을 유지한 채 선명을 보았다.
"아무래도 우린 여기서 환대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다짜고짜 개성으로 돌아가라지 뭐냐. 난처하게 됐지."
내 대답에 선명이 인상을 팍 썼다.
"또 무슨 망나니같은 짓을 하신 건 아니겠죠?"
아니, 이거 서운하다. 즉시 항의했다.
"또 라니? 난 그런 적 없다. 전에도. 지금도."
"없긴 뭐가 없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면 무슨 조화이길래 초면에 여자애가 저토록 눈을 부릅뜨고 싫어하는 겁니까?"
도리도리. 난 고개를 저었다.
"낸들 아나."
".......하."
날 추궁하던 선명이 돌연 흠, 하고 깊게 날숨을 내쉬며 주먹을 쥐어 입가에 가져갔다. 선명이 생각에 빠질 때의 버릇이다. 십중팔구, 이 사태를 어떻게 헤쳐나갈 지 고민하는 것이겠지. 난 가만히 선명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지방관으로 파견된 지 아직 하루도 안 됬는데, 벌써부터 촌민들과 마찰을 빚을 수야 없지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우선 라리의 옷차림새를 보고, 또 오른쪽에 자리잡은 안개 낀 호수를 보고, 그 앞에 자리잡고 있는 제단을 보고, 마지막으로 제단 위에 차려진 제물을 본 뒤, 주먹을 입가에서 거두는 것과 동시에 라리에게 물었다.
"제사를 지내는 중이었나보군?"
이번에도 라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일순 내가 물었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탓이겠지.
"위령제를 지내는 중이었어요."
"위령제? 그건 매년 지내는 제사인가?"
다소 집요한 구석이 있는 질문이다. 라리는 일순 기분이 상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얼마간 선명을 지긋이 쳐다볼 뿐, 이내 별 말 없이 설명해주었다.
"매년 지내는 제사는 아니에요.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 할 만한 일이 생기면 신사에 공물을 받쳐오는데, 쌓아놓기만 하고 달리 쓸데가 없어서 제사에 쓰려고 지내는 거죠."
"불안해 할 만한 일이라...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라는 선명의 질문에 당황한 걸까. 라리는 말 없이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걱정은 단순한 기우였다. 라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방심하고 있는 내 귓가로 비수가 날아들었다.
"경건한 의식 중에 금역에 멋대로 들어와 작은 생명들에게 대량학살을 일삼는 악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있다면, 충분히 마을사람들이 불안해할만한 일이겠죠."
으음, 여기서 그 얘길 꺼낼 줄이야. 선명이 대꾸했다.
"그 점에 대해선 사과하마. 이 곳이 그렇게 중요한 곳인 지 알지 못하고 한 일이니 용서하거라. 뭐,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면 할 수 없다만. 하지만 우리가 오기 전에 이미 위령제를 지내고 있었으니 위령제를 지내는 이유가 우리 때문은 아니지 않으냐?"
침착한 대응이었으나, 바로 반박이 들어왔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위령제를 지내게 된 불미스러운 일이 앞날을 예견하시는 나선님의 경고라면 그 일이 있고 바로 다음 날, 이 금역에 침입한 외지인이 있다는 건 곱씹어 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지방관이라면 말이죠."
마지막 말에 언뜻 가시가 박혀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감상인 듯, 라리의 말을 몇 번이나 되씹어 본 뒤 나온 선명의 대답은 그저, 들은 사실을 요약한 것이었다.
"허면 네 말은 그거구나. 이 근처에서 얼마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직후, 금역에 침범했던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거다?"
라리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선명은 자세를 고쳐잡고 얘기를 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또한 합하께서 파견한 지방관으로써의 임무가 있으니,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구나."
라리가 뭐라 말하기 앞서 선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신, 이러면 어떠냐. 우리가 그 얼마전에 있었다던 불미스러운 일의 전모를 밝혀주마. 그럼 그 불미스러운 일이 네가 모시는 분의 경고가 아님이 밝혀지는 셈이니, 마을사람들도 이 일로 우리를 겁내거나 무서워하지 않겠지, 안 그러냐?"
"불미스러운 일의 전모를 밝히겠다구요?"
처음으로 라리의 표정에서 당황스러움을 엿보았다.

+ + +

어리석었다.
누군가 내게 달을 보라며 손가락으로 저 하늘을 가리킬 때, 멍청하게 손가락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손가락 끝에 해답이 있음을. 오늘 처음본 소녀가 이상하리만치 적개심을 품고 있다고 느꼈다면  당연히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법하다고 추정해야 한다. 하지만 난 그러기는커녕 추궁하는 말에 변명하기 바빴다.
만약 그대로 계속 손가락 구경을 하고 있었으면 정말 쫒겨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야 내동댕이 쳐지진 않았겠지만, 문전박대 정도는 당했으리라. 그러나 내겐 다행스럽게도 유능한 부하가 있었다. 답답했던 상황을 헤메던 내 머리 위로 탄산수를 쏟아부어 줄 멋진 부하가 말이다.
정확하게 사태를 진단하고 깔끔한 해결책을 내놓은 선명을 향해 찬사를 보냈다. 내가 속으로 감탄의 말을 늘어놓고 있을 때, 타결안을 받아든 라리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지도 못 한 결론에 조금 넋이 나간 듯 했다.
"불미스러운 일의 전모를 밝혀주겠다구요?"
라리의 반응에 자신이 생긴 선명은 기세를 몰아 굳히기에 들어갔다.
"그래. 그 편이 너도, 마을사람들도 안심할 수 있고, 우리도 헛걸음 하지 않을 수 있는 절충안 아니겠느냐? 본래 우리 지방관이 해야할 일이기도 하니 말이다. 뭐, 우선은 그 불미스러운 일이란 게 뭔지 들어봐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즉답이 나오지 않았다. 난 좀 전의 선명이 그랬듯, 라리 또한 생각에 잠겨 있음을 알아챘다. 시선은 선명을 향해 있지만, 초점이 퍼져있다. 뇌가 시각 정보를 처리하고 있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골똘히 생각하던 라리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눈동자가 확고해지고 표정에서 결심이 섰다는 느낌이 왔다.
"좋아요. 얘기만 해주는 거라면 난처해질 걱정은 없겠네요. 하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그렇게 자신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솔직히 당신이 말한 전모라는 부분이 있는 지조차 미심쩍거든요."
말 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내가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괜찮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볼 터이니, 일단 말해 봐라."
"흠. 그것도 그렇네요. 고민한다고 해결될 성 싶지는 않지만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라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표정을 짓고 천천히 좌우를 훑었다. 시선이 멎은 곳은 호수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운을 뗐다.
"이 호수 주변은 이 근처에서도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는 금역이에요."
첫 마디를 들었을 뿐이었는데 벌써부터 궁금증이 치솟았다.
"나한테 처음 한 말이었지, 아마? 금역이 어쩌구 죗값이 어쩌구, 하면서."
라리의 표정이 구겨졌다. 알만하다. 내가 들었어도 얄미웠을테니까.
"법대로라면 태형 10대로 다스려야 마땅하지요, 흥!"
태형 10대? 나는 깜짝놀라 물었다.
"태형 10대라니? 무슨 법이 땅에 발만 붙였을 뿐인데, 사람 구실을 못 하게 만들어?"
선명이 거들었다.
"혹, 네가 말하는 법이 지역법이냐?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중죄가 된다. 이미 고려 조정에서 지역법을 금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그런 패단이 남아있다니. 통탄할 일이군!"
라리가 코웃음을 쳤다.
"훗, 걱정 말아요. 마을에서 정한 지역법을 말 한 게 아니니까요. 엄연히 국법으로 정해진 처벌이에요."
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통신보감의 내용. 대법전의 구절. 그리고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고려대법전까지 차례차례 떠올려보았다. 과거를 준비하는 고려의 귀족이라면 응당 숙지해야 하는 기본적인 서적들이었다. 고려에서 법을 논할 때, 꼭 빠지지 않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릿속에 저장된 활자를 더듬어보아도 비슷한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다. 심지어 '금역'이라는 단어가 있었는지 아리송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선명에게 물었다.
"그런 내용이 적힌 법서를 읽은 적이 있냐? 난 모르겠는데."
그러나 선명의 표정을 보아하니 마찬가지 같았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정녕 국법이 맞기는 하느냐? 그 법서의 제목이 무엇이냐?"
선명이 라리를 추궁했다.
라리는 자신을 보는 시선을 향해 여유로움 몸짓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사유지거든요, 여기."
"사유지?"
"그래요, 사유지예요. 호수를 둘러싼 분지 전부가 개국공신 가문인 천령 박씨가의 땅이죠. 고려대법전에 적힌 글이에요. '고려 개국공신 가문의 사유지에 함부로 침범한 자는 태형 10대의 벌에 처한다.' 그리고 예외는 따로 기술되어 있지 않거든요."
듣고보니 기억나는 것도 같다. 선대왕이 지방 호족들의 환심을 사려고 만들어놓은 법이라고 비난하던 한 무신이 생각났다. 남의 성인식에 와서 축하하는 말 한마디없이 술에 취해 날뛰던 장면이 아직껏 생생했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나씨 성을 가진 이 당돌한 소녀가 이 곳에 있으면서 저토록 여유인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호수 근처에 접근 할 수 있는 사람은 박씨 가문의 사람으로 한정될 터인데, 넌 나씨 성이 아니냐?"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요."
"적혀있지는 않지만, 예외가 있다?"
"그것도 틀렸어요. 따로 기술된 예외는 없어도, 이미 그 한 구절에 예외가 적혀있죠. 법에 명시된 문장은 '함부로 침범한 자는'이에요. 즉, 달리 해석하면 '함부로 침범한 자'가 아니라면 처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죠. 전 '나선부호'를 지키는 보웅사의 동녀로써 정당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요. '함부로' 들어온 사람이 아닌거에요."
흐음......납득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12xx년의 고려에서 '법해석의 여지'가 악용되고 있다는 부분이 거슬린다. 이런 촌구석마저 부정부패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 현실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따지고 들면 피곤해질 주제였다.
적당히 본론으로 회귀하기로 했다.
"요새 관리는 서로의 약점을 먼저 잡아야 출세한다면서요? 트집이라도 잡고 싶었던 모양인데, 아쉽게 됬네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사안은 따로 있으니 적당히 거기에 집중하기로 하죠."
"그, 그래. 그래야지."
또 바보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큼, 하고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털어내려 하는 날 무시하고 시선이 호수로 던져졌다.

"재차 언급하는 거긴한데, 여긴 금역이에요. 그리고 그 사유는 호수 때문이죠. 호수의 이름은 '나선부호'라고 불러요. 뜻은 '나씨 성의 신선이 떠있는 호수'예요. 유래부터 얘기하자면 길어질테니 간단하게 이해를 돕자면, 마을 사람들이 공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는 신선이 사는 호수인 셈이죠.
그러니 호수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면 마을에서 곧잘 나선님의 경고라며 걱정스레 서로 모여 부산을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하지만 불행히도 겪어 보기 싫은 체험은 경험해보기 마련이고, 하필 이런 때에 눈에 띄어서 소문이 되거든요. 마치 보란 듯이 말이에요."
단번에 장광설을 늘어놓은 라리가 잠시 숨을 삼키고 한 박자 쉰 뒤 말했다.
"이틀 전, 이곳에서 나선님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가 있었어요. 참가인원은 매해 같은데, 여든 가구가 좀 넘어요. 그만큼 보는 눈이 많은 제사인거죠."
예외가 따로 적혀 있지 않는 법치고 예외가 참 많다. 뭐, 풍년을 기원한다니 이것도 '함부로'에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짙은 안개가 끼어있긴 했지만, 큰 장애는 아니었어요. 매해 이맘때면 호수 근처에 안개가 그칠 날이 없거든요. 이보다 더 심한 해도 많았죠. 어쨌든 그런 이유로 제사는 별 문제 없이 진행됐어요. 사당에서 제단을 가져와 지정된 자리에 앉히고, 치장한 후에 공물을 바쳤죠. 모든 차례가 엄숙한 가운데 매끄럽게 치뤄졌어요.
마지막으로 제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검기무'만 남은 상태였죠. 본래라면 이 차례에 웅녀님께서 나와 춤을 춰야 했지만, 요 근래 갑자기 병세가 깊어지셔서 제가 대신 '군왕검'을 차고 제단 앞에 서야만 했어요. 사건은 하필 그 순간 일어났어요."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라리는 입을 다물고 자신을 주모가고 있는 두 눈동자를 차례대로 훑었다. 처음엔 긴장감을 부추기려는 수작인가했는데 이내 다음에 이어질 말을 강조하려는 제스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서 등허리에 매여있던 검의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손잡이를 자세히 관찰해보니, 방금 전에 언급한 '군왕검'이었다. 손잡이를 감싼 피혁 위로 '君王儉'(군왕검)이라는 글자가 붉은 실로 수놓여 있다.
"제가 웅녀가 아니어서 나선님께서 심기가 불편하셨던 걸까요. 그래서 저희에게 당신께서 화가 났음을 알려주려고 하셨던 걸까요. 그럴지도 몰라요. 만약 그렇다면 나선님의 의도는 적중한 셈이니까요.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차마 다시 들지 못 할 정도로 큰 노성이었으니, 충분하고도 남았겠죠."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냐. 뜸들이지 말고 설명해 봐라."
좀처럼 다음 얘기를 꺼내놓지 않는 라리를 선명이 독촉했다. 그러자 라리도 더 시간 끌 생각은 없는 듯,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천둥이 쳤어요. 번갯불은 붙지 않았지만, 아주 큰 소리가 났죠. 그리고 잠잠하던 호수에서 물보라가 일어나, 제 발밑까지 물결이 밀려왔죠. 부지불식 간에 일어난 천재지변에 마을 사람 전부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나선님의 노여움이 가라앉기를 기도 드렸어요. 다행히 물보라는 금방 가라앉았고, 천둥소리도 얼마안가 멎었어요.
다들 숨죽이고 눈치보면서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안도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안도 할 단계가 아니라는 걸, 거기있던 모두가 고개를 들자마자 깨달았겠죠. 그만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이변이 사건 직후에 생겨난 거예요."
마지막 말을 앞두고 라리가 턱을 끌어당겼다.
"제단이 물에 잠겨 있었다는 불길한 이변이 말이죠."

+ 3 +

라리가 이야기를 끝맺음한 직후, 난 입을 다물었고 선명은 영 미심쩍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말했다.
“지금 우리더러 그 얘기를 믿으라는 것이냐?”
스스로도 황당무계한 이야기임을 공감하는 지, 라리의 표정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예리하게 빛나는 눈을 보건데, 절대로 기가 죽은 것과는 달랐다. 그것을 증명하듯 선명의 말에 대답을 하는 라리의 말투는 여전히 공격적이었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들 자유이지만, 전 이틀 전 제가 본 그대로 전했다고 맹세해요. 그래도 믿지 못하겠거든, 그날 그 장소에 있던 사람을 불러줄게요. 마을 사람 상당수가 목도한 일이니, 의심이 간다면 몇 사람이든 불러 줄 수 있어요. 그럼 되나요?”
사람까지 불러 확인시켜 주겠다니, 아예 없는 얘기를 해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확실하게 해둘 필요야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부터 해보고 싶었다. 그러한 사유로 우선 난 라리의 제안을 받아두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해준다면야 믿지 않을 수도 없겠지. 하지만 여기서 사람을 부르러 가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테니, 정 사건이 풀리지 않으면 그렇게 하겠다. 그 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것도 있고 말이지.”
그러자 선명이 내게 따지듯 달려들었다.
“아니, 그럼, 가 수령께서는 저 얼토당토않은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내가 답했다.
“믿지 않으면?”
“하아! 답답하십니다, 그려!”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뭐가 답답한데?”
선명이 빠른 말투로 자신의 기분을 주워섬겼다.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 하시는 겁니까? 방금 들은 얘기 어디에 현실성이 있습니까? 호수에 사는 신선한테 제사를 드리는데 물보라가 일고 천둥이 쳤다? 언제부터 그렇게 미신을 믿으셨습니까, 예? 이것도 저것도 전부 지어낸 거짓말이잖습니까. 가 수령께서 이리도 순진하시니 제 마음이 답답하지 않고 배기겠냐는 말입니다!”
순식간에 몰아치는 음파를 마주한 내 동공에 동요가 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이 소녀는 설마 일부러 해결하지 못 할, 허구의 얘기를 지어내서 우리를 내쫒으려던 생각이었던 건가.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못을 박고 얘기를 꺼낸 것인가.
과연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아니다. 난 이런 뻔 한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려던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일부러 약점을 노출시킨 뒤에 장점을 보여 줌으로써 장점을 부각시키려는 노이즈 마케팅의 일종으로......그래, 나는 소녀의 속마음을 알고서도 현령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받아넘겨 준 거라고 말 할 수 있지 않나. 나는 동요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선명에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의심부터 할 게 아니지. 선명이 네 말대로 우리를 문전박대하려고 얘기를 꾸며댔을 수도 있지만, 그건 사건을 충분히 생각해 본 연후에 따져도 될 문제 아니겠냐? 현령으로써 그 정도 도량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나는.”
묘하게 떨리는 어조로 말하는 날 두고, 선명은 물끄러미 실눈을 떴다. 의심의 눈초리였다.
“무슨 생각하십니까?”
더는 머리를 굴릴 여지가 남아있지 않았기에 솔직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내 위신 생각.”
“위신이고 뭐고 마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 날 수도 있습니다.”
“설마 고려 조정에서 보낸 지방관을 진짜 내쫓을라고?”
한없이 낙천적인 내 진심을 듣고 선명은 그저 양말꿈치가 보이게 머리를 감싸고 하늘을 우러렀다.
“오, 천지신명이시여.”
선명이 더 따지고 들기 전에 얼른 라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작가의 말 : 아직 수정해야 될 부분이 많습니다. 그 점 참고하시고 부자연스러운 장면이 있다면 댓글로 신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휴문의 이용약관 개인정보보호정책
주소 : 인천광역시 부평구 평천로 132 (청천동) TEL : 032-505-2973 FAX : 032-505-2982 email : novelengine@naver.com
 
Copyright 2011 NOVEL ENGIN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