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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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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들의 멋진 신 세계글 Ko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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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나에겐 정말 귀찮은 습관이 하나 있다
16-06-06 17:34
 
 

  눈을 감으면, 언제나 그때의 풍경이 떠오른다.


  ──저는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식사하고 있을 때나, 공부하고 있을 때나──


  공간을 가득 메우는 군중의 목소리.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선서와 같은 맹목적인 울림. 이것은 강요가 아닌 권유, 압박이 아닌 희망.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잊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끝도 없이 흔들리며 필사적으로 갈 곳을 갈구하고, 방황하는 자아의식을 붙잡아주는 명확한 이상. 그것은 고뇌와 망설임을 최대한 배제하고 소중한 자원이 쓸데없이 소비되는 것을 막아주는 가이드 라인과도 같다.


  ──'에덴의 뜻'에 따라 인류의 부흥과 재건을 위한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을──


  이 순간, 자신이라는 틀을 벗어나 공동체의 톱니바퀴로서, 하나의 부품으로서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정신은 그 형태를 바꾼다. 자신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인가, 그 모든 고민을 말끔히 날려버리고,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며 그 답을 추구하는 소모적이고 낭비적인 과정을 말끔하게 소거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완벽하게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사회와 주변 세계에 적합한 형태로 변모시킨다.


  ──지금 이 순간 엄숙히 선언합니다.──


  언젠가부터 뇌리에 각인돼어 있는 이 문구는, 매일 매일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 빼놓지 않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대체 어느 순간부터 이 문장을 알고 있었는지, 외우는 것에는 얼마나 걸렸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처음 들었던 그때와는 달라졌겠지. 마음도, 몸도 성장해버리고, 모든 것에 익숙해져 닳고 닳은 내 정신에 깊게 자리한 이 말이 내 무의식에서 모든 행동에 관여하고 있었다 해도, 절대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 하나.


  나는, 소중하다.


  모든 고민과 번뇌를 던져버렸던 그 시절에도, 네가 알려준 것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지금도.

  그때, 네가 말해준 것들이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난 그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잊을 까보냐, 빌어먹을.





※ ※ ※



 



  나에겐 정말 귀찮은 습관이 하나 있다.

  언제나 그것은 이유도 없이, 근거도 없이 내 마음을 옥죄어 온다. 이쯤이면 괜찮겠지, 편해져도 좋겠지, 하고 안심하고, 납득하고, 받아들이고 싶지만, 어느샌가 정신과 육체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그것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경각심'이라 불리는 무의식의 경고. 그것이 제시하는 의문은 언제나 내 정신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정말 그대로 괜찮아? 이걸로 되겠어? 그걸로 끝이야? 계속해서 되묻고 생각하며 예시의 답을 내놓고 분석해 기각하는 과정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도록 강요한다.

  하루를 끝내고 피곤에 전 몸을 강제로 일으켜서 마지막으로 더  해야 할 일이 없는지 굳이 생각하게 만들고, 잘 지내던 친구 관계에서 뜬금 없이 불신감을 느껴버리고, 진심으로 기쁜 순간에도 이건 결국 오래가지 않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업신여긴다.

  덕분에 나는 언제나 안주할 수 없었다. 현재에 만족하며 행복을 찾는 것도, 미래의 가능성에 걸고 맹목적으로 충실해지는 것도, 슬픔에 몸을 맡겨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난 예전부터 그 무의식의 경고를 무시해버리고 싶었다. 애써 멀쩡한척하면서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안도감에 젖어 편안해지고 싶다. 하지만, 마치 나라는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그 경각심에 대응하지 않으면, 그 무언의 경고는 나 자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나를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 아닌지 테스트하는 것만 같았다.

  사족이 좀 길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경각심에 의해 끝도 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최대한 죽이기 위해 '휴식'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 무엇과도 부딪히지 않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접촉이 없다면, 문제도 없고, 문제가 없으면 변화도 없다. 변화가 없으면 예의 그 습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 안에 자리한 괴물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선 그것뿐이었다.

  

  "고등반 베타(β) 클래스 2반 여려분, 내일이면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버디'가 정해질 거에요!"

  선생님의 목소리가 교실을 요란하게 울린다. 한껏 들뜬 선생님뿐만 아니라, 교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남학생들도 그 분위기에 가세한다.

  내 옆에 있는 녀석들은 이미 자신들의 눈앞에 놓인 일에 대한 생각으로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인지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난 그저 그 옆에 앉아서 들려오는 소음을 뒤로한 체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뿐.

  "와, 진짜 기대된다…… 대체 어떤 애일까? 예쁘겠지? 착하겠지? 팔방미인이겠지?"

  "기대해놓고 실망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을걸."

  "하지만 이 상황에 가만히 있는 게 말이 돼? 으아아악! 그냥 빨리 내일이 오면 좋겠다! 아, 그래 나 어제 지나가다가 어떤 엄청나게 예쁜 베타(β) 클래스 여자애랑 눈이 마주쳤거든? 분명 그건 운명의 복선이었을 거야! 그 애랑 버디가 될 거란 계시였을 거라고!"

  "꿈 깨라. 뭐, 확률이 없는 건 아닐 테지만."

  그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 속에 깃든 것은 순수한 기대감과 걱정. 결국에는 결정되고, 행해야만 하는 삶의 이정표에 대한 호기심.

  "버디…… 라."

  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그들의 수다를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버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에덴의 뜻'이 정해주는 운명의 상대. 앞으로 나와 교감하고, 사랑하며, 이해하고, 자손을 남길 단 한 사람의 파트너.

  17세가 된 이곳 학생들은 모두 그런 숙명의 상대와 맺어지게 된다. 너무나도 필연적인 그 인연은 쓸대없는 이성간의 관계나 사랑에 대한 갈등을 없애고 그저 우리가 단 한 사람에게만 온전히 집중하고 매진할 수 있도록 완벽한 결속을 실현시킨다.

 

  운명. 그 이름 아래 우리들의 특별함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 모든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에덴의 뜻'. 인생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의 올바른 해답을 제시하며, 우리를 언제나 옳은 길로 인도하는 선지자와도 같은 존재. 그 선지자로 인해, 우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살아간다. 진로도, 사랑도, 정체성도, 전부 운명이라 불리는 독보적인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 학생들은 그것을 필연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살아간다.

  고통도, 아픔도 없다. 청춘은 그저 빛나는 시간으로 온전히 자라난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순응하고 순탄한 계단을 오르고 싶다.

  이제 내일이면 내 운명의 조각 중 하나를 찾을 수 있다. 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을 아깝지 않게 여기며, 언제나 함께 하고 감정을 나눌 상대가 결정된다.

  솔직히, 딱히 원하는 사람이 있거나 한 건 아니다. 단언컨대 만약 버디 시스템이 아니라 자력으로 여자를 찾아 나서야 했다면 나는 아마 평생 솔로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나 자신을 신뢰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걸로 된거겠지. 난 이제 운명의 신부와 만나 사랑을 나눌 것이다. 서로 마음을 약속하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때로는 목소리를 높이고, 가끔은 싸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윽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걸로 된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걸로 된 것일까?


  경각심은 또다시 내 마음을 자극한다. 정말 귀찮아 죽을 습관이라니까.



※ ※ ※

  


  주변은 고요하다. 주변에서 언뜻언뜻 들려오는 활기찬 소음들이 귀를 간질이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한가로운 기분을 고조시켜서 여유로운 마음을 한층 더 편안하게 해준다.

  이곳은, 한마디로 빈 교실이다. 그냥 길게 말할 것도 없이 그저 학생들이 전부 하교한 뒤에 덩그러니 남은, 떠나간 이들을 그리워하는 듯한 적막감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교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하교하거나 집단 활동을 하는 것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고 과제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교실을 나서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아니,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확신 있게 나가 버린다.

  특정 시간대에는 군중과 혼돈의 상징인 이곳도, 등잔 밑이 어둡다는 진리에 따라 조금만 시간 축을 비틀면 가장 조용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런 평화.

  그 무엇과도 접촉하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서, 경각심으로 나 자신이 고통받는 것을 막는다. 물론,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에 대한 경고는 원인을 따지지 않기에 이렇게 멍하니 있는 것만으로도 그 녀석이 마음을 찔러오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멍하니 있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마음의 핑계는 충분히 준비했다.

  멍하니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자 나른한 기분이 농도를 더한다. 어차피 오는 사람도 없으니, 이대로 시간을 좀 더 보내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책상에 엎드린다.

  

  ──고통스럽니?──


  아니,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건 그저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이다. 이대로는 괜찮냐고 계속해서 질문하는 것은, 내가 설 자리를 계속 망설이는 것은 분명 불안하기 때문이다.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이대로 계속해서 걸어가도 되는지 굳이 두들겨보며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이 무한정 반복되는 것일 뿐이다.


  ──끝내고 싶지 않니?──

 

  물론 끝내고 싶지. 하지만, 방법을 모르잖아. 알았다면 진작에 끝내버렸다. 그리고 평화에 몸과 정신을 맡기고 모든 것을 놓아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그렇게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고.


  ──고개를 들어봐.──


  뭐?


  나는 마치 마음속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듯한 메시지의 이질감을 이제서야 눈치채고는 고개를 든다.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일말의 인기척도 풍기지 않은 체 그것은 이미 내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부드럽게 살랑이는 긴 머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주변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것도 모자라 진실과 거짓을 완벽히 분리해 적출해낼 것만 같은 깊고 투명한 눈동자, 몸짓 한 번으로 주변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묘한 카리스마.

  그것은 분명 그저 한 명의 여학생이었다. 교복을 보아하니, 나와 같은 베타(β) 클래스의 여자반 학생이 분명했다.

  하지만, 단지 여학생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지는 격렬한 의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 젠장. 또다시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예의 경각심이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체 이 녀석은 뭔가. 이대로는 위험하다. 불안에 떨어라. 두려워해라. 경계해라.

  젠장, 그만해. 처음 보는 사람을 난데없이 위험 분자로 낙인찍지 말라고. 

  이렇게 된 이상 경각심이 내 의식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전에 스스로 이 녀석에 대해 알아내겠다는 일념으로 재빨리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급하게 붙잡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거침없이 내뱉은 말에도 눈앞의 소녀는 지극히 무감정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무시해버렸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 눈동자는 내 눈과 정확히 마주쳐 있다.

  그리고, 3시간과 같은 3초가 흘렀다.

  이윽고, 소녀의 입은 천천히 열린다. 굳게 닫힌 성문이 열리는 것과 같이 진중하며 엄숙했다.

  "T.W 인수……."

  소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표현한 내 이름이 눈꽃처럼 심장에 내려앉아 의식을 차갑게 식힌다. 그 음색은 분명 사람을 잡아끌어 붙잡아 버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나와 함깨하지 않겠어?"

  "뭐?"

  뜬금없이 뭔 말이지?

  "어머, 오해하지 말길 바래. 이건 결코 사랑 고백과 같이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권유가 아니니까. 과도한 상상력과 자의식으로 빈 공간을 메꾸며 멋대로 착각하는 건 내 입장에서도 좀 받아들이기 힘들어. "

  "무슨 소리야 지금? 그것보다 여기 남자반인 거 알아? 징계받고 싶어?"

  "그건 문제없어."

  "뭐?"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카리스마와 대조되게 헛도는 대화에 나는 급격하게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어차피 곧 의미 없어질 테니까."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한 나를 향해 그녀는 한 번 싱긋 웃음 짓는다. 그리고 그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미소에 나는 그만 정신이 팔려 앞으로 다가올 습격에 대비조차 하지 못했다.


  "넌,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니?"


  그 순간 던져진 질문은 한순간 내 가슴을 둔기로 내려찍은 것과 같은 둔중한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에 나는 한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내 마음속 한구석에서 나를 자극한 무언의 경고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뭐가?"

  "망설였구나.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 것처럼. 뭐가 생각난 거니?"

  그녀의 말에 얻어맞았던 가슴을 다시 한 번 찌른다. 불쾌한 감각에 점점 마음의 발판이 불안정해져 간다.

  "넌 누구야?"

  "대답을 회피하지 말렴.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 남자잖니?"

  "……."

  너야말로 아까부터 대답을 회피했잖아. 

  대체 누군데 나를 이토록 거슬리게 하는 거지? 이 오만한 태도며, 따지고 보는 듯한 말투며, 하나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없다. 마치 자기가 내 위에 앉아있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후훗."

  말을 아끼며 고민하는 내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녀는 다시금 미소 짓는다.

  "윈스턴(Winston). 일단은……, 진로 동아리라고 소개할게."

  "뭐?"

  "현재 극심한 인원 부족이라서, 너 같은 한심한 인간이라도 언제든지 환영이야. 어차피 할 일도 없어 보이는 데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때?"

  "절대 사절이야. 애초에 권유하는 입장에서 그 오만한 태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리고, 나는 일부러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는 거야. 신념이라고. 그러니 거절이야."

  최대한 불쾌감을 드러내며 절대 사절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녀의 표정은 사소한 변화조차 없다. 아니 오히려 확신에 가득 찬 듯, 투명한 눈동자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미지의 은하는 더더욱 그 빛을 더하는 것만 같았다.

  "신념이라, 그런 얄팍한 현실도피와 자기합리화도 시야에 따라서는 신념이 될 수 있구나."

  그녀는 이내 웃음을 거두고는 말을 이어간다.

  "좋아, 잘 알았어."

  "……."

  말로는 납득한 듯하고 있지만, 내 마음속에서 여지없이 온 감각을 자극하고 있는 경각심은 말하고 있다. 절대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더 무언가 있을 것이다. 살펴보아라. 자각하라. 꿰뚫어라.

  그녀는 아쉬움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시원한 동작으로 문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와 동시에 비단결과 같은 머릿결이 춤추며 아름다운 궤적을 그린다.

  "내 이름은, H.F. 미레야. 기억해두는 편이 앞으로 도움 될 거야."

  "……그래."

  건성인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이내 다소곳하면서도 당당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에 담긴 그녀 특유의 카리스마가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이윽고 문 앞에 다다른 그녀는 마지막으로 입을 연다.

  "그럼 안녕."

  그 목소리를 끝으로, 그녀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의 존재 하나만으로 완전히 종적을 감췄던 교실의 적막감도 슬금슬금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잔향은 분명 아직도 내 마음을 울리고 있었다.

  "뭐야 저 녀석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의 존재는 마치 내 안에 자리한 성사긴 녀석과도 너무나도 닮게 느껴졌다.

  젠장, 겨우 찾은 평화를 완벽하게 헤집어 놓았다. 극도의 불쾌감이 마음속을 가득 채운다.

  더는 쉴 수 없게 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 ※ ※







  한적한 복도를 걷기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멀지 않은 거리에서 꾸벅, 인사를 건네고 다가오는 그녀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안정될 것만 같은 유순한 인상과 청순한 느낌을 풍기는 단발머리,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스러운 볼륨을 한껏 과시하고 있는 실루엣이 인상적인 여학생이었다.

  "안녕, 반리."

  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맞이한다.

  "돌아가세요?"

  "응. 넌 초등반 갔다 오는 길이지? 피곤하겠네."

  "아니요, 감마(Γ) 클래스 초등반은 손이 많이 가지만 그만큼 돌보는 보람도 크니까 괜찮아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오늘은 린시가 저한테 그림을 그려줬는데 얼마나 고맙고 귀여웠는지 몰라요."

  그녀는 진심으로 기쁜 듯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 모습에는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따스하게 만드는 순수한 빛이 깃들어 있다 확신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까지만 해도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던 불쾌감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그림? 나도 보여주면 안 돼?"

  "안돼요. 저한테 선물한 거니까 저만 볼 거에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새침하게 고집을 피우는 모습이 내 마음을 은근하게 자극한다.

  "이럴 땐 짜게 군다니까."

  "헤헤, 사실 그림이 초등반 교실에 있어서요. 보고 싶으시면 다음 저랑 같이 봉사 활동 가시는 거 어떠세요?"

  그녀가 묘한 기대감을 품은 듯한 표정으로 권유해온다. 솔직히 봉사 활동에 별로 가치를 두지 못하는 나에겐 고역이나 다름없지만,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내일 어때?"

  "내일…… 이요?"

  "응."

  이후 복도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뭔가 걸린다는 듯이 망설이고 있던 그녀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저기……."

  "왜 그래?"

  "그…… 내일이면, 정해지네요."

  "아, 버디 말인가?"

  "……네."

  버디인가. 역시 그녀도 그것을 신경 쓰고 있었겠지. 오히려 여자애들이 남자애들보다 더 심각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호, 혹시……, 버디로 정해지면 좋겠다든가, 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어온다.

  뭐야 이거 분위기 묘해지게 그러지 마. 

  "아니 딱히……."

  "그, 그런가요……? 하, 하지만 연애 금지, 애정행각 절대 금지인 이곳에서 '에덴의 뜻'이 정해주는 유일한 상대인데도요?"

  "그런 거 생각해봤자, 어차피 DNA 배열로 정해질 뿐이잖아."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돌린다.

  우리는 운명, 즉 DNA에 새겨진 유전 정보의 숙명에 따라 정해져 있는 상대와 영원을 약속할 것을 보장받는다. 그럼으로써 사랑의 상대에 대한 고민을 최소화하고, 탁하게 얼룩진 관계에 대한 갈등을 소거시킨다. 그와 동시에 인류의 DNA 보존을 위해 태어난 우리들의 사명을 수행시킨다. 그것이 바로 에덴이 행하는 버디 시스템의 근간. 

  "……예, 그렇죠."

  반리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기분 탓인지 얼핏 상기돼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젠장, 그러지 말라고 제발. 감당이 안 되잖아.

  "내일 보자."

  나는 애써 그녀를 지나치며 손을 흔든다. 어차피 내일이면 모든 것이 정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괜찮을까. 예의 습관은 다시 나를 엄습한다.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래, 분명 우연히 선생님의 지시로 초등반 베타 클래스의 지도를 갔었을 때였다.

  이곳에서는 상당히 희귀한 이성 간의 접촉 경험이 가능한 봉사 활동이었기 때문에 나름 기대했었고, 정말로 그곳에서 이성과의 인연을 만들 수 있었다. 분명 다른 점이 너무나도 많고, 서로 이성이 처음이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사람을 받아들이게 하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을 안심시키고, 자신에게 의지해도 된다며 필사적으로 표현한다. 그것이 내 마음속에 자리한 경각심을 잠재우는 것만 같았다. 난 분명 그것에 따스함을 느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정해질 것이다.

  모든 학생의 고민과 번뇌에 대한 말끔한 해답을 내주는 '에덴의 뜻'이, 내 운명의 상대를 결정해주고 나를 충실하고 바람직한 인생의 레일 위에 실어 달리게 해줄 것이다.

  절대 청춘이란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다. 결코 삶이란 문제의 난이도를 높이지 않는다. 그것이 에덴의 뜻.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예의 습관은 시도때도 없이 내 마음을 찔러왔다. 오늘은 쉽게 나를 풀어주지 않을 작정인 모양이다.

 
+ 작가의 말 : 디스토피아/포스트 아포칼립스/하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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