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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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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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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세븐틴글 고물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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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세븐틴 (1/3권 분량 초고)
16-05-02 19:37
 
 

꽃 피는 세븐틴

 

<215>

[지민의 일기]

, , , 봄이 왔어요.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가 피어요. 상쾌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부드럽지만 약간은 드세서 바닷바람 같기도 한 봄바람이었습니다. 야아, 정말 기분 좋은 바람이다. 가슴이 탁 트여. 나는 배가 부풀 정도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아름다운 아침이었어요. 연초부터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요.

한편으론 묘하게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봄바람이기도 했습니다. 예전처럼 긴 머리였으면 예쁘게 찰랑거릴 텐데 지금은 단발이라 귀가 간지럽기만 해서요.

머리카락을 자른 건 집 앞의 검도장 때문입니다. 제가 손재주가 없는지, 아무리 머리카락을 잘 묶어도 머리치기 몇 번 하면 금세 산발이 되더라고요. 고심 끝에, 뭘 해도 야무진 동생을 시켜서 가위로 슥슥 잘라버렸습니다. 엄마는 이제 고등학교 들어가야 할 여자애가 뭐하는 짓이냐고 노발대발했는데...

하여튼, 그만큼 충동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검도가 좋았어요. 남들 다 가는 노래방도 안 가고 만날 만화책만 보던 제겐 각별한 취미입니다.

여전히 아침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검도장 문을 열려는 차에, 옆에 풀숲에서 그르렁거리는 고양이 소리가 제 주의를 끌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그만 웅덩이에 아기 고양이 하나가 다리가 부러져 죽어가고 있지 뭐예요? 안타까웠지만, 피투성이를 맨손으로 만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구르며 바라보고만 있었답니다.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보니 아릿한 기분이 들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어요.

그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돌아보니 제 또래쯤 되는 남학생이었어요.

엄마야.”

저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 남학생도 고양이를 보고 있었어요. 그 애는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혹시 손수건 같은 거 있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뇨. 없어요...”

그러자 그 애는 맨 손으로 고양이를 꼭 안더니 온 힘을 다해 인근 동사무소까지 뛰어갔습니다. 거리가 제법 먼데도 잠시도 쉬지 않았어요. 그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습니다. 저런 사람도 있구나. 뭔가 뜨끈한 감정이 파도처럼 몰아쳤어요, 그리고 잔잔하게 오래도록 잔물결처럼 요동쳤습니다. 정말로 착한 사람이구나. 멋진 사람이다. 이타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5분 지나서 다 했다고 배슬배슬 웃는데, 저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에 있던 물티슈를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아이 참, 나도 은근히 적극적인 면이 있나봐?

잠시 묘한 정적이 흘렀습니다. 서로 눈길을 피하고, 딱히 할 말도 없고, 핸드폰 번호나 물어볼까 하다가 마음 접고 도장으로 들어가려는데, 아니, 이 애가 도장에 뒤따라오는 게 아니겠어요?

여기 다니세요?”

남자애가 물었습니다.

.”

어제 등록했는데...”

그 때 직감했어요. , 이건 하늘이 이어준 인연인가보다! 새벽에 휘돌던 영산홍 꽃잎들이 생각났습니다. 얼굴에 핏기가 몰렸습니다. 가슴이 작고 빠르게 뛰었습니다.

이런 기쁜 일이 생기면 어디엔가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게 인지상정이죠? 도장에 미리 와 졸고 있던 동생을 깨웠습니다. 그 때 아마 제 얼굴이 시뻘겋지 않았을까? 저는 부끄러움을 타면 겉으로 표가 많이 나요.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뱉은 말이,

여기 괜찮은 남자애 들어왔어!”

동생은 잠이 덜 깨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확 도끼눈이 되었습니다.

뭐어?”

동생은 늘 그래요. 심지어 제가 TV에 나오는 아이돌에게 헤벌레해도 그럽니다. 수민이가 매번 저한테 하는 말은 토씨하나 안 틀리고 외울 수 있어요. 언니가 혹시라도 곰팡이 같은 놈을 만나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구! 아무 놈이나 만나기엔 언니는 아주 아까운 사람이라니까. 학교 성적은 고려대를 노릴만 하고, 누구한테나 싹싹하고, 기타도 잘 치고, 볼링도 잘 치고... 아들 있는 동네 아줌마 전부가 언니를 며느리감으로 노리고 있다니까. 어떻게 말하는 줄 알아?

지민이처럼 예쁘고 착한 애는 처음 봤어!

동생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쑥스럽습니다. 저는 흠이 많은 앱니다. 겁도 많고 나이에 비해 애 같아요. 노는 법도 잘 몰라요. 설거지도 안 하고, 재봉질도 못하고, 전기밥솥도 쓸 줄 모르고, 세탁기도 돌릴 줄 모르고... 게다가 가슴도 작고 키도 작아요. 우유 많이 마시는 데 왜 이럴까?

몇 살쯤?”

학생이겠지?”

성적은 서울대에 집안은 국회의원 급을 만나야 돼.”

누누이 엄마가 우리한테 한 말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중딩 주제에 까불고 있어. 살짝 문을 열더니 어디 관상 좀 봐야겠다며 그 애의 얼굴을 훑어봅니다. 에이, 깡패같이 생겼네. 저는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관뒀습니다.

언니, 저 사람, 도복 입은거 봐봐.”

?”

바지 한 쪽에 두 다리를 넣었어!”

웃음이 나왔습니다. 동생도 웃었습니다만, 저처럼 유쾌하게 웃진 못했습니다. 저런 덜떨어진 인간 어디가 괜찮아 보였냐느니, 얼굴 붉히는 건 뭐냐느니...

도복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그 애를 보고 명랑하게 말을 걸었습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로 고2.”

한 살 많으시네.”

그래요. 가 아니라 오빠였던 겁니다. 누구누구 오빠... 뭔가 어감이 좋습니다. 날 보고 지민아하고 불러주면 참 좋겠다! 달콤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정수리에 불이 붙어서 헤죽헤죽 웃었습니다. 표정 관리가 안 되더라고요. 통성명을 하려는 차에 관장님이 들어왔습니다.

댁은 초면인데.”

?”

쟤들 학부형이신가?”

어제 등록한 학생입니다.”

관장님이 농담을 해서 또 꺄르르 웃었습니다. 도사 같은 얼굴로 저렇게 너스레를 떨면 웃겨요. 동생은, 관장님 유머는 과장님 유머라며 재미없다고 그러는데 도통 이해가 안 되네요! 그리고 오빠가 당황한 표정이 그리 귀여울 수가 없었어요.

그 날은 또 운이 좋기도 했습니다. 관장님이 아침을 못 드셔서 30분 정도 제가 오빠를 가르쳤거든요.

두 발은 양옆으론 어깨 넓이보다 조금 좁게... 앞뒤론 주먹이 들어갈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해요. 두 발을 11자로 만들고, 왼발 발꿈치를 떼서 엄지발가락으로 몸의 체중을 버텨보세요.”

이렇게요?”

직접 따라 해보면 알겠지만, 익숙해지기 전에는 대단히 불편한 자세입니다. 앞으로 튀어나가는 타돌(打突) 동작을 할 때 왼발 엄지발가락의 힘이 매우 중요한데, 그냥 두 발로 뛰는 것이 더 빠르지 않냐 싶겠지만, 단발성 러시를 할 때는 이 자세가 확실히 가장 민첩하고 안정적입니다. ! 이래서 다들 교사를 선망하는구나! 남을 가르치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이라니! 씩씩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게 중단 자세에요. 칼끝은 상대의 목을 향하고, 팔꿈치는 느슨하게, 왼손과 명치 사이에는 주먹 하나 정도의 공간이 남아야 해요. 빨래를 짜듯이 손목을 안으로 비틉니다. 죽도를 잡을 때는 왼손 아래 세 손가락으로만 잡고, 오른손은 올려놓는 정도로만 약하게 잡아야 해요.”

관장님은 별 말 없이 땅콩을 까먹으며 우리를 재밌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한마디 말 나눔도 없었지만 마치 무슨 말이 오간 것 같은 것은 제 착각이었을까요.

마치 이것은...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아직 몰라

난 정말 몰라

가슴만 두근두근

그래요, 첫 만남부터 제 마음에 꽃이 피었어요. 도장 창문으로 꽃잎 하나가 슬그머니 들어와 죽도 끝에 떨어졌습니다. 아마도 영산홍 잎이었을 겁니다. 그것도 진달래에요.

일족일도의 간격은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거리란다. 기회와 위기가 공존하는 간격이야. 상대와 칼을 섞고 있다면, 한 발을 내딛는 가벼운 움직임마저 신중해야 한단다.”

관장님이 절 보고 한 마디 중얼거렸는데, 뭔 뜻으로 뜬금없이 말씀하신 건진 감이 잘 안 잡혔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그냥 씨익 웃어버렸어요!

 

[태영의 일기]

내 몸에선 어딘지 짠물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고. 내 옆에 있으면 봄바람조차 묘하게 바다 냄새가 난대. 고향이 인천 연평도 근처니까 어찌 보면 당연하지.

어젯밤에 전학 수속이 끝났는데, 개학까진 아직 시간이 많았어. 뭘 하면서 시간을 때울까? 몰래 담배피우면서 집 앞을 서성거리는데 검도장이 눈에 띄더라고.

검도, 검도라. 우리 섬에는 그 흔한 합기도 도장도 없었지. 무술 그런 거 한 번 해보고 싶었어. 남자다운 운동이잖아. 그리고 인터넷에 검색해보니까 검도장에는 예쁜 여자애들이 많다고 하더라. 여자한테 호신술로서 가장 적합해서 그렇대.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기억해두라고.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종교 활동을 하거나 체육관을 가.

, 청소년이 담배는 왜 피우냐고? 꼰대 같은 소리 하시네. 난 불량배가 아냐. 공부도 그럭저럭 잘 해. 일진이냐고? 아니. 난 일진들 패고 다녔는데. 집안 사정이 안 좋으니까 스트레스를 풀 거리가 별로 없어서 담배를 피는 거야. 니들처럼 피시방도 마음대로 못 갈 정도로 가난했어. 괜히 깡촌 섬에 살았겠냐. 덧붙여서 나는 고아야. 조그만 슈퍼마켓 운영하시는 외할머니 밑에서 어렵사리 자랐어.

그 날 아침은 바람이 많이 불었어. 영산홍 꽃잎이 회오리칠 정도로. 그리고 난 검도장 대문 앞에서 그 애를 보았지. 처음엔 뒤통수만 보고 미친 앤줄 알았어. 풀숲을 향해 쪼그리고 앉아서 눈물을 닦고 있었으니까. 대낮부터 술 마셔서 토하고 있나...? 묘하게 궁금해서 가까이 가보니까, 이게 웬 걸. 다리가 부러진 고양이를 보고 울고 있었던 거야. 나무 위에서 떨어진 것 같아. 곧 죽을 것 같으니까 어미가 버리고 갔나봐.

그리고 나는 옆에서 그 여자애의 눈동자를 보았어. 맑은 눈동자에 핏기가 올라왔더라고. 도와주고 싶어서 등 뒤로 다가가 슬쩍 말을 걸었지.

도와줄까요?”

엄마야!”

그 애는 놀라서 넉장거리로 넘어졌어. 별로 보고 싶진 않았는데 속옷을 봐버렸네. 핑크색이었나. 하여튼, 한시 바삐 어린 생명을 구해야 했어. 불쌍하잖아. 피투성이 고양이였지만 이것저것 신경 쓸 시간이 없었어. 나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미친 듯이 뛰었어. 이런 애들은 보건소에 데려다주면 안 돼. 안락사 시킬 거야. 동사무소 같은 데 줘야 목숨을 건질 수 있어. 끼이, 끼이이, 피를 많이 흘려서 쇼크를 일으킨 것 같았지. 조금만 참아라. 아직 추운 날인데도 땀이 비오듯 쏟아졌어.

마침내 그 애를 데려다주고, 나는 담배 한 대를 물면서 흐느적흐느적 도장 쪽으로 걸어왔어. 그리고 그 여자애는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어. 그런 표정을 지으니까 되게 예쁘네.

고맙습니다.”

그리곤 품 안에서 물티슈 하나를 꺼내 내 이마를 닦았지. 그 애한테선 좋은 향기가 나더라. 무슨 샴푸를 쓰는 진 모르겠지만 꽃향기가 났거든? 티는 안 냈지만 엄청 설렜어. 이런 여자 친구 있으면 좋겠는데. 한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나는 이성교제에 자신이 없어서, 번호를 달라는 등 용기 있게 대시하진 못했어. 데이트 할 때 김밥천국에서 스페셜 정식도 못 사줄 놈인데...하고 가난에 대해 자격지심이 심했거든.

쿨하게 마음 접고 도장에 가려는데 아니, 이 애가 먼저 도장에 들어가네. 여기 회원이었나? 그 때 다시 한 번 설렜어. 앞으로도 자주 보겠구나. 마치 소설의 인트로 같은 첫 만남이었다고 생각했어.

도복을 입고 탈의실에서 약간 소리 내어 웃었지. 내가 지금 문장을 많이 절제해서 쓰고 있긴 하지만, 뜬금없이 가슴이 폭발할 것 같았어. 그 때 느낀 그 감정이 아마 첫눈에 반했다는 감정인 것 같아.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하까마 한 쪽에 두 다리를 넣었지. 무슨 일본 여자가 기모노를 입은 것처럼 종종걸음으로 다니니까 존나 병신 같았을 거야. 아까 그 애가 나를 한참 보더니 흣흣흣하고 참던 웃음을 터트렸어. 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는 무슨 이윤지 얼굴을 구기고 있었고.

도장엔 세 명. 창문이 전부 활짝 열려있어서 이따금씩 꽃잎이 마룻바닥에 떨어졌지. 아까 바람 타고 날던 영산홍 꽃잎이었을 거야. 그 애의 샴푸 냄새랑... 내 짠물 냄새랑... 바깥에서 불어오는 봄 향기가 섞어 약간 정신이 아득해졌어. 음악으로 치면 소나타들이 섞여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가 된 느낌이었지. 아직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행복하다고 생각했네.

그 향기에 취해 버렸나봐, 첫 만남부터 마음이 두둥실두둥실 부풀었어. 그 애는 표정이 늘 밝았어. 이모티콘으로 치면 항상 ^~^ 이런 느낌이었어. 아니지. 눈이 동그랗고 예쁘니까 (о゚~゚о)에 가깝겠다. 충동적으로 머리를 쓸어보고 싶었어. 나는 그렇게 봄과 어울리는 여자애는 처음 봤어.

죽도를 잡을 줄도 모르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파지법을 알려줬어. 스텝도, 칼을 뽑는 법도... 그래, 내 검도 커리어의 시작에는 그 애가 있었고, 내 우울했던 청소년기의 터닝 포인트에도 그 애가 있었네.

도장 창문으로 꽃잎 하나가 슬그머니 들어와 내 죽도 끝에 입맞췄어. 우연치곤 낭만적이었어.

<219>

[지민의 일기]

어쩐지 우울했습니다. 오빠는 연습에만 집중하지 저한텐 도통 의사소통을 하질 않았거든요. ,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멋있긴 하지만 말이죠. 어제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기 발바닥을 소독하는데, 가만 보니까 물집이 터지고 살갗이 찢어졌더라고요. 그걸 보니까 오빠가 거쳐온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제 가슴에 들어차는 거 있죠? 성실하고, 정도를 지키고, 노력하는 삶이요. 아줌마들이 툭하면 얘기하는, ‘자기 일에 집중하는 남자가 진짜 멋지다는 게 이런 뜻일까요? 나한테 소독을 부탁하면 탈지면 팍팍 뜯어서 예쁘게 소독해줄 수 있는데 아쉽다.

그나저나

왜 나를 쳐다보기만 하고 말을 걸지 않을까. 쑥스러운 건가? 아니면 소위 말하는 밀당을 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해서 온몸이 달아오르다가도, 혹시나 이 사랑이 내 착각은 아닐까 넘겨짚으면 등골이 싸해지는 기분이기도 하고... 사랑이란 건 참 복잡 미묘하더라고요, 눈물을 동반하나봐요. 흘끔거리던 눈빛을 떠올리며 행복감에 훌쩍거리기도 하고, 친구 MP3에 저장된 노래가 내 얘기 같아서 멍해지고, 사랑시를 찾고, 사랑 관련 글귀를 찾고, 로맨스 소설을 보고, 아아아, 사랑. 사랑. 상사병에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게 정말인가 봐요. 24시간 대부분 오빠 생각입니다. 문학 교과서에서 본 독수공방이 이런 뜻인가? 아님 말고요.

베개를 껴안고 오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아직 성씨도 몰라요. 입 밖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면 얼마나 짜릿할까요. 아직까지 통성명도 안 했다는 사실이 촌철처럼 제 가슴을 찔러댑니다. 그리고 이 놈의 상호 존댓말. 빌어먹을 존댓말. 오빠가 나를 지민아-’하고 터울없이 부르면 좋을텐데.

아아, 로미오, 어째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

지랄하네.”

동생은 아직 그 오빠가 탐탁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여자인데도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언니를 뺏긴다.’는지 영 모르겠네. 도리어 응원해줬으면 좋겠는데. 설마 얘가 날 질투하는 걸 에둘러 표현하는 건가?

백팔번뇌, 삼라만상, 구구절절, 밤을 지새우고 퀭한 눈으로 도장에 가서 반쯤 기절했습니다. 고작 봄방학이 일주일 남았....... 이제 나도 고등학생... 야간자율학습... 그럼 이제 검도장은 어떻게 다니지...

그렇게 한 30분 지났을까?

그런데서 자면 허리 아프실 텐데...”

으악.”

세상에, 세상에. 윗몸일으키기 운동기구 위에서 졸아버렸습니다. 입가엔 침이 흥건하고. 이런 꼴을 보이다니. 다 큰 여자애가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허둥지둥 일어나 머리카락 다듬고 세수하려 도망가는데, 앞에 있던 타격대에 발이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는 저를 받아주려다가 뒤로 몸이 꺾였고, 결국 두 남녀가 엉켜 넘어졌습니다. 아아! 시집 다 갔네! 저도 모르게 입에서 하고 신음이 흘러나왔는데, 이거 부끄러워서 어쩌지! 가슴이 엄청나게 뛰었어요, 쿵쾅소리가 거의 드럼소리 같았다니까요? 한 십 미터 떨어진 데서도 들릴 정도로?

무슨 순정만화처럼 둘이 누워서 눈을 바라본다든가 이러진 못하고 발딱 일어나 화장실로 도망쳤습니다. 물로 얼굴을 씻어내고 거울을 보니까 얼굴이 새빨개져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심장 저려서 죽어버릴 것 같아.

한 쪽 다리가 아파서 절룩거렸어요. 마치 좀비처럼 말예요. 그는 수줍게 걸어와 사무실에 있던 물파스를 전해주었어요.

괜찮아요?”

표현이 조금 거창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단순한 걱정의 한 마디는, 제 질척한 부끄러움을 말리는 햇살과도 같았어요. 덕분에 요 일주일동안 가슴에 생긴 하얀색 결정(結晶)이 제 입 밖으로 깨어져 나왔어요.

이름 좀 알려주세요.”

아아, 김춘수의 <>이 이래서 쓰인 시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검도 시간 내내 머릿속에서 이름을 수백번, 수천번 불러보았습니다.

아아, 너는 나의 꽃이야.”

(이 때 동생이 중얼거렸습니다. “...지랄하네.”하고요.)

말도 편하게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는 얼굴에 피가 몰리는지 코를 만지작거리다가, ‘응 그래.’를 말하지 못하고 다만 좌우로 손을 흔들었습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고 편하게 대해줬으니 저한텐 장족의 발전입니다.

저도 화답해야죠. 마치 백화점 직원처럼, 약간 우스꽝스럽게 무릎을 굽히며 좌우로 손을 흔들었습니다. 동생이 지켜보다가 약간 피식했어요. 그는 부끄러운 듯 계단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여전히 잠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태영의 일기]

아마 우리 둘은 서로 좋아하는 것 같아. 그렇지만, 내가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그렇다고 해서 너무 속 보이게 좋아하는 걸 티내면 그 애가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았어. 적당히 무관심한 척 하기로 했어. 우린 아직 친구도 되지 못했잖아. 아니, 친구는 커녕 서로 이름도 몰라.

그럼 고백부터 지르고 보라고? 만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일기 날짜를 좀 읽어봐라. 하여튼 만화가 애새끼들을 다 버려놓는다니까.

얘기가 옆으로 샜는데 나는 표현은 절제하면서 최대한 검도를 열심히 했어. 여자들은 남자가 뭔가에 대단히 집중하고 있으면 매력을 느낀다며? 그래서 하루에 큰머리치기 1000번이랑 스텝 연습을 30분 추가했어. 발바닥이랑 손바닥에서 피가 나왔어. 그런데 이건 열심히 해서라기 보다는 어설픈 동작이라서 몸에 힘이 과다하게 들어갔기 때문인 것 같네.

여담인데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실 2주간의 얘기야. 나도 마찬가지로 고백을 하려면 최소 2주는 잡아야 하지 않나 생각했어. 1주는 무신경한 척, 남은 1주는 애정표현을 하며 은근슬쩍 고백하기로 했지.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을 할 거냐고? ,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으니까 더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네.

나는 집에 가면 밤마다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꼬았어. 그래, 미치도록 안아보고 싶었지. 키스도 해보고 싶었어. 그 작은 입술은 얼마나 부드러울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면 피가 얼굴에 몰렸다가 가슴으로 내려와 퍼졌지. 볼은, 이마는...? 팔뚝을 만져보고 싶어. 머리카락도, 허리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상상도 하게 되더라. 묘하게 죄책감이 느껴지더라. 미안했어. 그 애가 내 머리를 열어 내 생각을 볼 수 있다면 매우 실망할 거야. 여자애들도 이런 상상을 할까? 나는 모르겠네. 하여튼, 요 며칠간 계속 심장이 뜨거웠어. 고작 며칠 만에 사람이 이토록 변할 수 있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어.

나는 내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어. 나란 사람의 가치도 말이야. 나는 가난에 지칠 때면 가끔 지나가는 생각으로 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절대 죽고 싶지 않았어. 진심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게 생겼기 때문이야, 사랑을 하고 싶었어. 그 애만 생각하면 나는 슈퍼맨이 되는 기분이었지. TV에서 보는 가장들의 삶이 이해가 되었어. 고된 삶이지만 집에 돌아가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잖아. 이게 정신이 성장하는 건가봐. 피부로 느꼈어.

내가 너무 감수성이 많은 거냐? 오글거려? 웃지 마라. 진심이니까.

어느 날 아침이었어, 그 애는 도장에 되게 일찍 와서 윗몸일으키기 기구 위에서 자고 있었어. 새근새근. 그 단어가 굉장히 잘 어울렸어. 마치 천사 같다. 이상하게 그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지, 숨을 쉴 때 몸이 부풀었다가 말았다가 하는 그 템포마저 귀여워.

몰래 입을 맞춰볼까? 이런 생각도 잠깐 지나갔어. 무작정 깨워서 안아보고 싶기도 했는데 그건 안 될 일이야. 나는 그저 턱을 괴고 그 애가 자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어. 그러다 결국 뭘 했는줄 알아? 그 애의 한쪽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 도장을 찍었어. 뭘 약속하겠다는 건지 나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했어.

그런데서 자면 허리 아프실 텐데...”

으악.”

깨웠더니 허둥지둥 해. 반사적으로 침을 후루룩 삼키더라. 이 부분 만큼은 인터넷 용어로 표현하고 싶어. 난 속으로 ㅋㅋㅋㅋㅋㅋㅋ하고 웃었어. 그 애는 나에게 대충 인사하고 세수하러 움직이다가 타격대에 발이 걸려 넘어졌지. 넘어지는 꼴이 위험해보여서 나는 재빠르게 그 애를...

안아버렸어. 그리고 내 몸을 쿠션 삼으라고 뒤로 넘어졌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슴과 가슴이 닿았네! 쿵쾅거리는 박동이 심장에서 심장으로 직접 교환되는 느낌이었지.

그 애는 벌떡 일어나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도망쳤어. 나는 물파스를 들고 있다가 그 애가 나올 때 조심스레 내밀었지.

괜찮아요?”

그러니까 또 그 표정이 나오는 거야. 눈 동그랗게 뜨고, 입 꼬리만 올라간 미소를 하며 끄덕거렸어. 깊은 밤에 몇 번이고 떠올렸던 그 표정이다. 나도 모르게 그 표정을 따라했던 것 같아.

이름 좀 알려주세요.”

조금 뜬금없었지만 그 때 서로 이름을 알게 되었지. 지민이, 정지민. 이름조차 예쁘구나. 서로 말도 놓았어.

그 애가 나를 보고 오빠! 라고 부를 때 나는 전율했네!

 

<220>

[지민의 일기]

일족일도의 간격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뛰어들면 십중팔구는 두 칼이 엮이는 코등이싸움이 됩니다. 영화나 만화와는 다르죠. 칼과 칼, 몸과 몸이 맞대고 있는 두 힘의 균형을 깨려면 통찰력과 용기가 필요해요. 뒤로 물러서서 번개처럼 내려치느냐, 불처럼 더 밀어붙여 자세를 무너뜨리느냐... 결국 검도는 대련 경험이 가장 중요하답니다. 통찰력과 용기는 갑자기 솟아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서로 말을 놓고 바로 그 다음 날, 그는 용기가 샘솟았는지 이것저것 말을 붙였어요. 키가 몇이야. 158cm. , 나는 175cm인데. 아하. 어느 학교 다녀? 감곡 여자고등학교요. 나는 충청고등학교...

아하, 그랬군요. 남중남고 학생과, 여중여고 학생이었구나. 뭔가 극적이고 낭만적이지 않나요? 요즘 드는 생각인데, 진심어린 만남은 아날로그 감성이 필요충분조건이에요. 만날 카톡하고... 만날 둘 다 살결을 비비적대고... 이러면 오히려 마음이 식어버리지 않을까요? 무슨 말이냐, 옛날에 아이유는 이렇게 노래했잖아요.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

슬픔은 간이역의 코스모스로 피고 스쳐 불어 온 넌 향긋한 바람

그래요. 서로에 대해 어떠한 환상을 품을 겨를도 없이 쉽게 사귀는 사랑방법이 과연 아름다울지는 잘 모르겠네요! 적어도 제 며칠간의 경험에선 말이죠. 만약 그가 첫 날부터 조금의 주저 없이 저를 희롱했다면, 저는 그를 참 별거 아닌 사람으로 느꼈을지도 몰라요! 서로 마음이 성장할 시간이 있어야죠. 표현도 아끼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종교가 하나 생기는 것 같아요. 정말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제게 그는 예수님과 같아요. 그 사람이 했던 말, 행동, 그런 자잘한 것들이 하나하나 소중하고... 지금 이렇게 만년필로 일기를 쓰면서도 미열과 홍조가 멈추질 않아요. 항시 머릿속에서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되고, 생각하다 모자란 부분은 상상으로 메꾸고...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한순간의 실수로 잃고 싶지 않으니까 자기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요. 그는 진심으로 저를 사랑하기에 매사에 신중한 겁니다. 은유와 비유는 때론 정확한 언어보다 더 진실일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쓴 성경도 비유 일색이잖아요.

그런데, 그 감정이 확 꼭대기 끝의 롤러코스터처럼 내려간 적이 있어요. 그에 대한 제 연심이 미움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더라고요.

, 지민이, 혹시 나 부담스러워해?”

검도 연습이 끝나고 방긋방긋 웃으며 수민이에게 그런 말을 했대요. 제가 탈의실에서 핸드폰을 확인하던 때, 그는 아무 맥락 없이 수민이에게 이런 말을 했대요. 수민이는 그 말에 잠시 멍때리다가 입을 열었고요.

언니가요?”

.”

그는 눈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죠. 동생은 화가 나서, 집으로 가는 길에 씩씩거렸습니다. 순 나쁜 놈! 이러면서.

그게 정말이야?”

뻔뻔한 사람이라니까.”

이럴 수가. 공들여 쌓아온 바벨탑 같은 연심이 집채만 한 볼링공으로 깨어지는 느낌이었죠. 제 마음을 다 들여다 본 것처럼 말해서 깨는것은 둘째 치고, 중요한 것은 저의 연심을 다루기 쉬운 장난감마냥 생각했다는 점이 화가 났습니다. 부끄럽고 짜증나는 미묘한 감정이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퍼졌답니다.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제가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던 여자어()’을 해석해드릴게요.

나는 이렇게나 잘났는데, 너는 별 것도 아닌 게 나랑 시시덕거리니까 부담스럽지?’

순수한 모습은 다 거짓이었구나!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속으로는 나를 내리깔아보고 있었다는 거지? 이 상실감, 배신감, 무너진 영성의 잔해에 기름이 붙어 겁화(劫火)처럼 타올랐어요. 화가 나서 숨도 못 쉴 지경이었습니다. 나는 순정을 다 바쳤는데, 당신은 나를 무슨 장난감처럼... 동생이 거들었어요. 남자들은 다 그래.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어요. 정말 미워.

그날 밤, 지난 보름간의 나 자신을 돌아보며 베개를 꼭 안았습니다. 아쉬움, 난생 처음 심장을 뛰게 해 준 고마움. 그런 것들이 섞여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한 30분 지나니까 고작 그런 놈 때문에 이틀 동안 잠을 세 시간 잤다는 사실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습니다. 정지민, 등신, 머저리, 안목도 없는 년. 너는 욕 좀 처먹어봐야 해.

다음 날, 그는 또 순진한 표정으로 제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습니다. 나쁜 놈. 저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어요.

, 수민아, 저 사람한테 말도 하지 마.”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도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 나아쁜 놈.

그러자 그의 상태가 매우 안 좋아졌습니다. 시선은 좌우사방으로 흔들리고, 표정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고, 상체와 하체가 따로 놀고... 서로 칼을 주고받는데 이게 이쑤시개를 휘두르는 건지, 죽도를 휘두르는 건지 분간이 안 가더라고요. 제 눈치를 살살 보면서 기합도 못 내는 걸 보니 한 줌 연민이 생기긴 했습니다.

충격을 받았구나...? 날 진짜 좋아하긴 했나...?

, 진짜. 오른손에 힘 빼라고요- 무슨 도끼질하시나.”

, 으응.”

왼손목 힘으로 휘두르는 거라고요. 컴팩트하게. 몇 번을 얘기해야 아세요?”

동생은 그를 연격 시간 내내 타박했습니다. 그의 힘 빠진 모습을 보니 어쩐지 저도 조금 힘이 빠지더라고요. 나는 참, 변덕도 심하다...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까지 했는지 아세요?

아무리 쓰레기 나쁜 남자라도 이제부터 내가 잘 교화시키면 되잖아?

아이고 창피해. 잠시 쉬었다가 써야겠다.

그는 자꾸만 저를 쳐다보았어요. ‘What`s wrong with you?’ 딱 이런 느낌일까.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었죠. 마치 버려진 고양이 같은 표정을 보니 마음이 또 움직였어요, 방금까지는 칼을 받아주지도 않다가, 그제야 칼을 받아주었죠.

그의 칼끝에 실연의 슬픔이 느껴졌다면 여자애 특유의 지나친 감수성일까요? 체중으로 압도하지도 않고, 죽도로 때릴 생각도 없고, 오른발로 무게를 싣지도 않고, 그리고 왼 발로 제게 나아가지도 못했어요. 결국 저는 입을 열었죠.

씩씩하게 때리세요.”

애매한 미소 섞인 그 말이 뭔가 스위치가 되었을까? 그는 빠르게, 강하게, 길게, 제 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저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작은 체구로 당당히 내 칼을 받아 코등이싸움 자세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퇴격을 한다거나, 상대 칼을 흘린다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우리는 거의 이마가 닿을 정도로 칼을 맞대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코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끼리 다시 기세 싸움을 했을 뿐이죠. 그 때 그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지고 있었는데, 아마 나도 그러지 않았을까.

다시 서로 일족일도. 중단 자세. 솜씨 좋은 재즈악단이 서로의 템포를 맞추듯, 우리는 대련을 빙자한 칼춤을 추었습니다. 손목, 머리, 머리 받아 머리, 다시 머리 받아 허리. 둘 다 급소를 노리지 않고 흐느적거렸습니다.

대련을 마치고 서열대로 도장에 앉아 종례를 하려는 때에, 자꾸만 한숨이 나왔습니다. 애매한 기분이었어요. 그는 왼쪽에 앉은 저를 바라보다 말았다 했지요. 그러다 고개를 퍽 숙이고 제게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반말 쓰는 거... 마음에 안 들어? 부담스러워?”

. 아아. 아아아.

그 뜻이었나.

바벨탑이 무너진 건 건축자의 교만 때문이었죠! 천둥과 불꽃처럼 그는 제게 다시 다가왔습니다. 얼굴이 뜨거워졌어요. 공든 탑이 다시 세워지고, 아예 그 옆에 정원도 생기고, 소피아 성당도 세워지고, 타지마할도 생기고, 에펠탑도 생기고, 덕수궁 돌담도 생기고.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아니에요! 아니에요!”

붙타는 연심과 미안함이 마음속에 파도쳤습니다.

저기, 저기, 그러니까...”

뭐라고 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변명 같은 변명을 해야 하는데 문장이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다행히 관장님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어서 생뚱맞은 소리를 내뱉진 않았죠.

거기 두 명,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더니 도장 앞에서 저를 기다렸습니다. 딸기우유를 사준다고 했어요. 비온 뒤 날이 개서 흙냄새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제야 준비했던 변명을 하려고 하는데, 동생이 저보다 먼저 불쑥 끼어들어 말하길,

여자애들은 원래 주기적으로 몸과 마음이 아파요.”

그 말에 오빠는 당황해서, 미안, 미안, 하더니 어디론가 도망칩니다. 저도 만만치 않게 당황해서 집을 향해 도망쳤어요. 그렇지만 어쩐지 빙긋빙긋 웃음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그 우유팩은 잘 씻어서 화분으로 쓰고 있지요. 작은 화분에 제법 많은 열매가 자랐습니다.

 

[태영의 일기]

너무 일찍 말을 놓은 게 아닐까. 반말이 입에 잘 달라붙지 않았어. , 지민이는 애초부터 나한테 존댓말을 썼으니까 이런 불편함은 모를 거야. 머리에서 한 타임 거쳐서 말하니까 말투도 등신 같아지고 어버버거린다고.

인간관계에서 조심해야 할 점을 또 하나 깨달았어. 여자애들은 남자애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야. 깡촌의 남중남고를 나와서 몰랐던 점이었어. 마치 유리알 같아. 조심스럽게 밀면 아름답게 또르르 굴러가지만, 거칠게 밀면 깨져버려. 정확히 설명을 못 하겠지만 하여튼 그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어. 더더욱 말과 행동을 아끼고 절제했지. 남자애들 앞에서처럼 씨발이니 이니 지껄이다간 파토가 날거야. 담배도 도장에 가기 한 시간 전에는 절대 피우지 않았어.

때로는 편하게 대해보고 싶었어. 등 때리고 머리 잡고 흔들고 이런 거 말이야. 그렇지만 다음 장면이 어떨지 모르잖아. 진짜 친해지던가, 아니면 어색해지든가 둘 중 하나겠지. 그런 건 도박이야. 그래서 나는 차라리 모범생 같은 정석적 이미지를 만들려 노력했어. 엄격, 진지, 근엄한 거.

열심히 하겠습니다!”

요새 태영이 보기 좋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지민이가 지 동생을 보고 뭐라고 수군거려. 칭찬하는 내용이야. 걔는 특이한 게, 귓속말을 남이 다 들을 수 있게끔 크게 말하더라. 마치 나 들으라는 것처럼.

멋있어.’

그래?’

멋있다는 말에 나는 더욱 더 진지하게 검도에 임하지. 연기를 계속 하다보니까 정말로 내가 모범생처럼 느껴지기도 했어.

문제는 이 놈의 컨셉 놀이가 지나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진 적이 있어. 어느 날, 갑자기 그 애가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았어. 인사도 안 하고 말을 듣는 체도 안 해. 나는 머리가 멍해졌어. 내가 뭘 실수했나? 어디서부터 쟤가 나를 저렇게 대했나? 일단 어제 운동할 때는 아냐. 끝날 때 뭐라고 한마디 더 붙였는데, 그게 화근일지도 몰라.

가만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 것 같기도 해.

, 지민이, 혹시 나 부담스러워해?’

매너 있는 척, 모범생인 척 괜히 던져본 말이었어. 이 문장이 뭐가 잘못된 거지? 쓸데없는 사족이긴 했지만 맥락상 당연히 반말 쓰는 게 싫으냐고 물어보는 거잖아. , 잠깐.

부담스러워해?

나를 부담스러워해? 내가 부담스러워? ?

그렇게 들릴 수도 있었나? ‘내가 잘나서 부담스럽니?’ 걔 잘못이 아니라 내가 멍청하게 말해버렸구나! 대련 시간에 죽도와, 몸과, 고함소리가 요란했지만 나는 평소처럼 움직이지 못했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단지 멍청히 어제 한 말을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되뇌어봤어.

등골에 소금이 쫙 일었다고. 여자애들은 정말 유리알 같아. 말을 조심해야 해. 그 말실수 하나에 저렇게 변심할 수 있다니. 온 몸에 힘이 빠졌어. 지민이와 대련하는 때 나는 온 몸에 마비가 걸린 것 같았어. 눈을 바라볼 수도 없었지.

머리....

머리!

, 손모....

허리잇!

씩씩하게 때리세요.

지민이는 한숨을 길게 쉬다가 그 한마디를 하더라. 한심해 보였나봐. 나는 마음속에 불이 일었지. 그래, 까일 땐 까이더라도 가오는 살리자. 나는 본격적으로 그 애한테 달려들었어.

머리잇, 머리잇!

머리 받아 머리, 머리 받아 허리. 화려한 수준의 공방전이 이어졌어. 나도 나름 운동신경이 좋은 편인데 지민이도 은근히 만만치 않더라고. 몸은 느렸지만 칼끝이 매우 정확했어. 아닌 듯 아닌 듯 허허실실 내 머리를 때렸지. 반면 나는 발은 빨랐지만 타점이 불안정했고.

완전히 때리지 않고, 슨도메(寸止).

때릴 순간에 멈추는 자비.

때리더라도, 오른손에 완전히 힘을 빼는 매너.

반격할 수 있도록 의도되어 만들어진 허점.

살기 없이 내려 깔은 눈.

5분 넘게 대련이 이어지니까 이젠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어. 나한테 열 받은 건 아니구나. 그렇다면...

대련이 끝나고, 나는 호면을 벗고 그 애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말했지.

반말 쓰는 거... 마음에 안 들어? 부담스러워?”

그 말에 걔는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졌어. 만화처럼 효과음을 주자면 오잉?’이 어울릴 것 같아. 맞아, 이것 때문이었구나!

... 꼭 그것만은 아닌가? 잠깐만. 이것도 있었어.

끝나고 딸기 우유를 사줬는데 그 날이 재채기 하는 날이었대. 그럼 뭐야, 내 말 때문에 열 받은 게 아니라 그냥 신체적으로 상태가 안 좋아서 그렇게 대했던 거야? 뭐가 맞는 거야? 여자는 정말 정말 정말 알 수가 없어.

 

<31>

[태영의 일기]

씨발 인생 좆같네.

고백 비슷한 말 하려고 했는데 까여버렸어. , 빌어먹을. 도장 밖에선 얘기도 하기 싫단 뜻이겠지? 고작 카페도 같이 가지 못한다면 애초부터 걔는 나한테 마음이 없었던 거 아냐. 너무 열 받아서 오래간만에 담배를 좀 피웠어. 아 씨발, 씨발. 인생 좆같네. 완전 가슴 찢어지는 것 같잖아. 정말로 좋아했다고.

이유가 뭐야 씨발. 진짜 알 수가 없어. 뭐가 문제였지?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한 것 같은데.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이렇단 말이지. 걔는 날 친구로도 생각하지 않았던 거야. 지금 몸에 힘이 없어. 축 늘어졌어. 우울하다. 아니 씨발 나보다 좆같은 새끼들도 여자 친구 사귀는데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지? 그리고, 나랑 얘기는 하기 싫은데 자습서는 받겠다고?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김치녀란 거냐?

어쩐지 검도의 본 연습할 때 표정이 완전 썩어있었어.

아니 잠깐만.

말은 거칠게 하고 있지만 정말 미치겠어.

정말 좋았단 말이야. 내가 나이 먹어서 다시 생각해보면 이게 내 첫사랑이었을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긴 해. 첫사랑은 안 이뤄진다는 미신도 있잖아.

이유가 뭐야.

정말 모르겠어,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던 말들은 다 뭐였지? 멋지다며, 괜찮다며. 그것도 사실은 고도의 어장관리였던 거냐? 아니면 뭐야, 내가 뭔가 어설펐나? ‘연애 기술이 모자랐던 거야? 대체 그게 뭔데 씨발.

, , .

하지만 나는 끝끝내 지민이를 욕하고 싶지 않아. 까놓고 말해서 지금 약간 울고 있어. 그 배시시 웃던 표정이랑 지금 상황이랑 너무 매치가 안 돼. 인생 좆같네, 정말 좆같네. 다음에 도장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계속 좋아하는 티를 내야 되는 걸까, 아니면 서로 철저히 무시해야 할까.

난 아직도 걔가 너무 좋아. 가슴에서 불이 다 나고 있다고.

그치만, 뭘 해야 하는 거야. 이런 상황에선 뭘 해야 하는 거야.

씨발, 씨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울지 않았는데.

 

[지민의 일기]

70년대 유명 록 그룹 롤링 스톤즈는 ‘Time waits for no one’이란 노래를 남겼어요. 옆 나라 일본에선 그 노래 제목을 중심 소재로 삼아 시간을 달리는 소녀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죠. 봄방학이 하루 남은 이 때, 저는 만화 주인공 마코토가 되고 싶습니다. 나도 과거로 시간 도약을 하고 싶어요.

오빠는 제가 언제 개학하는지 몰라요. 제가 몇 월 며칠에 개학이에요.’ 이 한마디를 차일피일 미루다 끝내 말 못했기 때문이죠. 근데 부끄러운 걸 어째요? ‘시간 옮겨서 우리 계속 만나요하는 말과 다를 게 없잖아요? 연인 사이도 아닌데 그런 말을 꺼내기 쉬울 리가.

뭐라고 말을 꺼내지? ‘혹시 오빠네 학교도 야간자율학습 하세요?’ 이건 안 한다고 답하면 뒷수습이 조금 난감한데. ‘혹시 저녁 운동 좋아하세요?’ 이건 너무 나갔다. 여자애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고 새삼 느낍니다.

(언니 나 수민인데 그냥 언니가 소심한 거야)

(너 왜 맘대로 남의 일기장 훔쳐보고 낙서까지 해? 뒤질래? .)

결국 생각한 것이, 세 명이 모두 모였을 때 동생에게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오빠가 제 옆에 서 있을 때,

우리 학교 이틀 뒤 개학인데, 나 이제 정말로 고등학생 되는 거야...?”

하고 웅얼거렸습니다.

? 내일 개학이라고?”

그러자 그는 단번에 끼어들었습니다.

너 지금 자습서 같은 거 하나도 없지? 교과서밖에 없지?”

.”

내가 1학년 때 쓰던 자습서, EBS 문제집, 그런 거 줄까? 책 살 용돈 아끼고 좋잖아...”

야아. 감동받았습니다. (마치 준비한 멘트 같았던 건 둘째 치고,) 제 앞날을 걱정하셨다는 그 자체가 좋아서 저는 히죽히죽 웃었습니다. 장래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성장해주는... 그야말로 순정만화에 나올 법한 그의 마음. 헤헤, 이건 너무 확대해석인가.

주시면 감사하죠!”

그래? 잠깐만 기다려봐.”

그는 순식간에 사복으로 갈아입더니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돌아온 그의 한 손에는 쇼핑백이 있었는데, 안에는 온갖 자습서와, 유인물과, 모의고사 배치표와... 묵주(黙珠).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고맙습니다.”

근데, 이따 끝나고 잠깐 시간 있어?”

이게 무슨 말이지? 저번처럼 딸기 우유 사준다는 말씀이신가. 저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지요. 하지만 뒤에 딸려오는 말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너한테 할 말 있어가지고.”

? ? 귀를 의심했습니다. 잠시 사고가 멈춰버렸지 뭐여요. 사랑을 해보신 분은 그런 느낌 아실 거예요. 마음속의 전기 스위치가 딸깍 켜져서 온 몸이 저리고 마비되는 거요. 행여나 그 때 오빠가 제 머리라도 쓰다듬었으면 감전사했겠지.

할 말이라. 고백하시려는 건가? 공부할 때는 머리가 그렇게 안 돌더니 갑자기 머리가 빠르게 돌아갑니다. 이 상황은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됩니다. 급전개입니다. 클래식 지휘자가 양복을 집어던지고, 품 안에서 일렉 기타를 꺼내 연주하는 느낌이랄까. 저 단순한 한마디는 제 몸과 마음을 온통 꿰뚫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동의할지도 몰라요. 당황과 기쁨, 긴장과 용기가 혼재된 그 때의 그 마음.

머릿속으로는 어떤 말이요?’ 하고 뻔뻔하게 되물으려 하는데, 정작 입에서는,

“......?!”

기를 펼 수가 없었어요. 아아! 포도 주스가 되기 위해 온 몸을 짜이는 포도의 기쁨이 이런 걸까요? (아니다. 비유가 이상했네요. 세수 좀 하고 이어서 쓰겠습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너무 단 음식을 먹어서 도리어 머리가 아픈...? 하여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정체불명의 감정이었습니다. 사랑의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말이죠. 동생은 제 손을 잡고 저를 탈의실로 끌고 갑니다. 오빠가 뭐래. 이따가 할 말 있대. 진짜? 오빠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지? 사랑한다고?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탈의실 문을 살짝 열어 배꼼이 그의 얼굴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얘졌습니다. 불쑥 겁이 났습니다. 정말로 이상하죠. 심장이 두 개로 나뉜 느낌이었어요. 한 쪽은 터질 듯이 뛰고, 한 쪽은 쪼그라들고.

그래요,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단 걸 그제야 알아챘어요.

앞으로 있을 고백은 저를 영영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 그것이 무서웠어요. 고백 받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니, 정말이지 순정만화랑은 많이 다르군요. 베개를 끌어안으며 서로 포옹하는 걸 상상할 땐 언제고.

관장님은 모든 상황을 멀뚱히 바라보시더니, 오늘은 보호구를 벗고 검도의 본이란 걸 연습하자고 하셨습니다. ‘검도의 본은 쉽게 말해 약속대련입니다. 쟤들 끝나고 데이트 할 것 같은데 땀 흘리는 건 시키지 말자는 생각이셨을 거여요.

검도의 본은 무사가 진검을 차고 실전에 들어가기 전, 일격필살의 마음을 복습하는 단계입니다. 다시 말해 기본 중의 기본을 연습하며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단계입니다. 그의 칼은 무겁고 경쾌하게 제 머리를 노립니다. 반면 저는 당장 정신이 어지러워 검도의 본을 완벽하게 연습하지 못했습니다. 전쟁터였다면 수백 번은 죽었을 마음가짐이었어요. 단지 표정만 여유로운 척 허장성세. 등으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종례가 끝나자 가슴이 납덩이처럼 더더욱 무거워졌어요. 빨리, 빨리 옷 갈아입자! 언니...? 빨리! 그렇지만, 저 오빠는 어쩌고. 일단 나가서 생각할래. 어쩐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카페, 일단은 근처 카페로 가자.”

지금 튀는 거야?!”

몰라,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카페 앞에서 뜨거워진 얼굴을 잡고 주저앉았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근처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사고 있었어요. 웃고 있다. 기뻐하고 있어. 그는 두리번대다가 우리를 보고 이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카페 가서 커피 마실 거야? 이거 괜히 샀나?”

저는 두 쪽이 난 심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아무 말도 하질 못했죠.

내가 사줄까?”

또 한참 대답을 못했어요. 벙어리처럼 입술만 벙끗거리니까 보다 못한 동생이 끼어들었습니다.

오늘은 일단 집에 갈래요!”

?”

그렇게 됐어요!”

태영이 오빠는 어리둥절하다가 캔커피 3개를 들고 털레털레 집에 돌아갔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건 아닐까. 조금은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오늘, 개학을 하루 앞둔, 오늘,

저는 겁이 나서 도장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행동만 놓고 본다면, 오빠의 고백을 완전히 무시한 거죠. 그는 어떤 생각으로 오늘 아침을 맞았을까. 나를 어떤 기분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둑에 구멍 나듯 균열이 일어난 내 마음은, 어느 순간 우렁찬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오빠, 태영이 오빠! 자학감으로 쉬지 않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일기장에 얼룩이 생긴 건 처음이네요. 게다가 아침부터 급격히 쌓인 스트레스는, 저를 저녁 무렵 정말로 앓아눕게 했습니다.

상사병이 심해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가봐요.

마코토가 되고 싶어요. 만화처럼 시간 도약을 해서 어제 하루를 통째 바꾸고 싶어요. 우리는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만나더라도 서로 낯을 가릴지도.

 

<310>

[지민의 일기]

꽃샘바람이 불었습니다.

제 인생의 풍요로운 계절은 이제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작 열일곱 나이에 삶을 끝내버릴까 생각했죠. 제 감수성이 남에 비해 과한 걸까요? 무겁게, 끝없이, 저는 연못으로 침전하고 있었습니다. , 앞 문장을 진지하게 읽진 말아주세요. 제 마음이 그랬다는 비유니까요.

생각해보면 사랑이란 감정은 참 간사해요. 고작 한 달 만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였다가, 가장 분노했던 소녀였다가, 가장 밝게 빛났다가, 삶의 원동력을 잃은 폐인까지.

돌이켜보면 순정만화처럼 변화무쌍하게, 전광석화처럼 화려한 일들이 일어난 것은 아니어요. 오히려 남에게 설명해주긴 시시한 사랑이었어요. 지나치게 소박한, 그런...

눈이 마주쳤습니다.

칼끝에서 부드러움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건 입 밖으로 설명해봐야 남들이 이해하지 못해요. 남들이 들으면 에이, 그거 그냥 일종의 이잖아, 하겠지만, 그렇지만 저와 제 동생은 알아요. ‘보다 더 깊고 갚진 감정이 있었던 것을. 얼마나 그의 마음이 깊었는지, 또 얼마나 진실하였는지.

입학식 때 이유 없이 울었어요.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참고 또 참았지만 결국 질질 짰습니다. 밥도 먹지 못했습니다. 제 삶의 가치가 길가에 구르는 개똥만도 못한 기분이었습니다. 24시간 창문만 보며 지난 한 달을 회상하는 것이 제 일과의 전부였습니다.

마치 눈덩이가 언덕을 내려오며 찰나마다 크기를 달리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검도장에 가기가 겁이 났습니다. 그는 저를 미워할 겁니다. 쳐다보지도 않을 겁니다.

마침내 동생이 역정을 냈습니다. 이 멍청아, 뭘 하고 있어. 천장이나 보면서 뭘 만날 처 울고 있어. 당장 나갈 생각은 않고?

오빠가 언제 도장에 올 줄 알고. 오빠도 봄방학 끝났잖아.”

전화해서 물어봐. 관장님한테.”

안 돼. 무서워.”

동생이 한숨을 푹 쉽니다.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옆방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소리치며 그 애를 말렸지만 거침이 없었습니다. 5분 뒤, 돌아와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길,

매일 저녁 10. 야간자율학습이 끝날 때 온대.”

...”

그리고, 관장님이.”

?”

바꿔 달래.”

당장 나와라... 휴대폰에 귀를 갖다 대자 조근조근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여태껏 들어본 목소리 중에 가장 무서운 목소리였습니다.

뭔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계속 안 나오면 평생 후회할 걸.”

우물쭈물 도장에 들어오자 가슴이 천개 만개로 찢어집니다. 오빠는 말없이 제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어요. 손을 흔들며 터울 없이 인사하지 않았어요. 저는 살짝 입 꼬리에 힘을 주며 억지로 웃었지만, 오빠는 반응이 없었어요. 제정신일 수 없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에, 잠시 죽도를 내려놓고 구석에서 울먹거렸어요.

저녁 열 시에는 관원들이 여럿이군요. 노란 머리에 진한 화장을 한 여자애가 오빠에게 기본 동작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두 발은 양옆으론 어깨 넓이보다 조금 좁게... 앞뒤론 주먹이 들어갈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해요...”

내가 알려준 거잖아요? 새삼 기뻤어요. 다만 어째서 한 달 전처럼 제 눈을 훔쳐보지 않죠? 고개를 푹 숙이고 구석에 쪼그려 있었습니다. 이제, , 끝났어. 내 삶을 끝내버리고 싶어.

저는 초점 없는 눈으로 동생이 처음 보는 관원과 대련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일족일도의 간격은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거리란다.”

어느새 관장님이 다가와 저처럼 쪼그리며 말했습니다. 두 죽도가 요란히 엮이고 있습니다.

?”

기회와 위기가 공존하는 간격이야.”

일족일도도 아녜요, 이제...”

칼끝이나마 엮여있다면, 아직 해 볼게 많을 걸.”

머리잇-!

저거 봐라. 한번에 넓게 뛰면 머리를 딸 수 있는 거야.

저는 도장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눌러 말린 꽃잎을 만지작거렸습니다. 가슴속의 불덩이가 연료가 된 듯, 입 밖으로 뜨거운 한숨이 새어나왔습니다. 다들 아시나요. 그 날 휘날리던 영산홍의 꽃말은,

첫사랑.

꽃샘바람이 차게 불었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과열된 심장이 서서히 진정되고 점차 마음이 침착해졌습니다. 어쩌면 좋을까?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오빠를 대했지? 오빠는 나를 어떻게 대했지?

저는 우물쭈물 도장에 다시 들어와 발을 소독하고 있는 그의 옆을 알짱거렸습니다. 사무실엔 마침 우리 둘만 있었습니다. 관장님이 평소 같지 않게 자리를 비워서 다행이었습니다.

저번엔 죄송해요!”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고 당장 그 말부터 나왔습니다. 그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뭐가, 어떤 점이 죄송한데? 이런 식으로 추궁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정적. 파노라마처럼 그의 지난 일주일이 저에게 몰아칩니다. 왼손바닥과 죽도에는 시퍼렇게 피가 배여 있고, 왼발바닥은 물집이 터져있고... 얼마나 속이 쓰렸으면 이렇게 칼을 휘둘렀을까요. 저는 탈지면을 뜯어 터진 그의 상처에 손을 갖다 댑니다. 뻔뻔한 척을 해야 했는데 손의 떨림이 멈추질 않았어요. 그 때문일까. 엄청 아픈 곳을 만져대는 중이었지만 그는 저를 한마디도 타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요새 학교는 잘 다녀?”

그냥 시간만 보내요.”

혼난다, .”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자신이 차였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 때 겁을 먹었던 내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엔 그가 제 발을 소독해주었습니다. 저도 만만치 않게 피멍이 들어있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근처 공원을 미친 듯이 뛰곤 했거든요. 눈물 한 두 방울 참던 게 흘러나오는 저완 다르게, 그의 표정에선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파서 울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여전히 저는 제 감정을 끝끝내 용기 있게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주머니에서 젤리 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 주는 게 전부였습니다. 이거, 맛있어요. 내가 만약 순정만화의 주인공이라면, 정말로 3류 주인공이야. 그렇지만 오빠는 그 작은 행동에 의외로 동요했는지, 그제야 입꼬리로만 웃었습니다.

중간 쉬는 시간이 끝났습니다. 우리는 보호구를 착용하고 마주섰습니다. 대련을 할 차례였어요. 그는 저에게, 저는 그에게 칼을 겨눴습니다.

준비. 칼 맞추시고.

시작.

차분히 한 발 앞으로, 일족일도. 한 쪽이 파고들면 다른 한 쪽이 움츠리고, 자세를 무너뜨리고, 들이받고... 상대의 칼을 옆으로 아래로 치우며 기회를 노리고. 이제는 서로 얼굴을 맞댄 코등이싸움 자세. 저는 그의 어깨에 제 얼굴을 슬며시 기댔습니다. 만약 우리가 죽도만 없었다면 꽤나 로맨틱한 모습일 텐데. 저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습니다. 역시, 있는 힘껏 제 호면을 때리진 않는군요. 죽도로 하는 길고 긴 대화가 오갔습니다.

저는 저 스스로를 주술적 암시로 채찍질했습니다. 한 대만, 한 대만 번쩍 하고 포인트를 낼 수 있다면, 이 모든 게 다 잘 풀리진 않을까. 겨우 5분 움직였는데도 엄청나게 숨 차. 그렇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 성공한다면, 없던 용기가 솟아나진 않을까. 저는 온 신경을 죽도 끝에 집중했습니다.

저는 왼발을 옆으로 넓게 벌렸습니다. 그리고 오른발을 왼발 뒤로 물렸습니다. 몸을 대각선으로 틀어서, 팔꿈치 아래 그 작은 틈새로 죽도를 크게 휘둘렀습니다.

허리!

빠르게 뒤로 물러나서 다시 그의 가슴에 칼을 겨눈, 일족일도의 거리.

얼씨구.

드디어 그가 웃었습니다. 여자애한테 허리치기를 허용하고서도 말이죠. 그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칼을 높이 쳐들고 상단 자세를 했습니다. 상단 자세는 불의 자세라고도 부릅니다. 머리치기 한 번에 모든 걸 건 일격필살의 자세이자, 상대에게 허리를 완전히 보여주는 허점이 많은 자세죠.

그는 부드럽게 제 머리에 칼을 휘둘렀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빠르지도, 무겁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허리 한 번 쳐보고 싶어? , 여기. 저는 그의 칼을 열십()자로 받아, 다시 허리를 쳤습니다.

10분 뒤, 종례시간, 나는 다소 가라앉은 마음으로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봅니다. 나는 그가 차렷 자세로 관장님께 예를 갖출 때, 당연하단 듯이 그의 옆에 섰습니다. 다른 때는 쑥스러워서 그러질 못했어요.

아직 결정적인 용기를 내진 않았지만. 그러나 다만 그가 내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끔, 언젠가는 임계점까지 타오른 감정이 결국엔 터져오를 순간이 있게끔, 천천히, 아껴서, 수줍게. 저를 달궈놓을 테니,

그대 역시 당분간은 이전처럼 미열로 있어주길. 이기적이지만 어린 제 마음을 이해해주길.

 

[태영의 일기]

싫어졌다가 갑자기 다시 좋아진 건지, 아니면 그 날 급전개에 겁이 나서 도망쳤던 건지, 이젠 아무 상관없어. 지민이가 좋아.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 집에 가는 길에서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지. 도장에선 아무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칼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던 걸 너는 알고 있었을까.

하늘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탄 기분이야.

아까 종례시간에 그 애는 내 옆에 섰어. 거의 애인처럼 찰싹 붙어서. 행복했어.

이제 앞으로 밀고 나갈 타이밍이라고 직감이 왔어. 지민이는 두 번째 어프로치에선 도망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보통은 밥 먹자고 한다고 들었는데.

반에서 새로 사귄 친구한테 물어보니까 노래방에 데려가라고 했지. 노래방? 처음 만남인데 괜찮겠냐? , 여자들은 임재범 노래 불러주고, 트로트 좀 불러주고 하면 된다.

땡벌 같은 거?

그렇지.

난 노래 잘 못 부르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가사가 중요하다고. ‘나 너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이걸 어필하라고.

그게 고백이잖아 이 병신 새끼야.

하나 추천해준다. 김종국 한 남자’.

높아.

그럼 이승기 다 줄거야’.

확실히 효과 있다고?

그 다음 젖탱이 좀 만지고... 밖에서 맥주 캔을 좀 사와. 가방 가져가서 몰래 담아와.

더러운 새끼. 난 그런 거 안 할 거야. 너 같은 놈들이 제일 나쁜 놈들이야. 착한 애들 등쳐먹는 놈들.

그러냐. 후비적후비적. 어쨌든 잘해봐.

<315>

[지민의 일기]

히힛.

아까는 배슬배슬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그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네요. 오빠가 주말에 도장 사람들하고 같이 노래방에 가자고 했거든요. 그렇지만 그런 어려운 문제는 부모님의 승인이 필요한 일. 저는 조그맣게 말했습니다.

생각해볼게요.”

그리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도장에 뛰어 올라갔습니다. 엄마가 엄청 보수적이긴 하지만 아는 오빠랑 간다고 하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여차하면 그가 날 지켜줄 수 있으니까요! 기쁜 마음으로 오늘 일기를 마칩니다. 이제 물어보러 갑니다.

 

<316>

[지민의 일기]

도장을 관두라고요...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엄마가 엄청나게 화를 냈습니다. 고작 노래방이잖아요? 이게 베란다에 세워놓고 욕을 할일인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교 성적 문제까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직후 사설 모의고사는 올 1등급이었는데 3월 모의고사는 올 3등급이 나와? 없는 형편에 문제집이니 자습서니 사줬는데, 학원까지 보내줬는데 네가 감히 이럴 수가 있어? 엄마, 그건... .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오빠 때문이 아니에요. 제 잘못이라니까요! 게다가 단 둘이 가는 것도 아니에요.

저는 열일곱 살이에요. 어떤 사람을 마음에 둔 것이 그렇게 죄가 될 일인가요? 물론 제 앞날을 걱정하신다는 건 알아요. 우리 집이 사정이 좋지 않으니까 내가 언젠간 가세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것도 누누이 들어왔어요. 하지만 도장을 관두라고요? 지금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놓아버리라고요? 그럴 순 없어요.

왜 회초리로 때리는 거죠? 용돈 모아서 산 화장품을 왜 쓰레기통에 버리는 거죠? 엄마는 제 나이 때 누굴 사랑해본 적이 없나요? 진지하게 묻고 싶어요. 애초에 도장을 관두면, 내가 다른 일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도장에 찾아가겠다는 건 또 뭐야. , 관장님한테 화라도 내시려고? 고등학교 2학년짜리가 여자 꼬실 생각이나 하는 것 같다니, 그런 폭언을 하려고? 엄마는 내 사랑에 대해서 코딱지만큼도 이해 못해. 애초에 나한테 뭘 해줬는데? 서울에 공연 보러 간다고 했을 때도 이렇게 화를 냈어.

무엇보다 오빠는 나쁜 사람이 아냐. 아까도 그랬지? 갑자기 비가 내리니까 편의점까지 죽어라 뛰어가더니 우산을 두 개만 사오고...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남자는 가랑비 정도야 맞아도 괜찮아. 할머니가 힘들게 번 돈인데 아껴 써야지.”

이런 사람을 놓치느니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난생 처음 보충수업에 무단결석했습니다. 오빠가 처음 보는 아줌마한테 욕을 먹는 광경이 상상돼서 참을 수 없었어요. 그리고 도장 앞 호수에 해가 질 때까지 앉아있었습니다. 오늘 도장에 나오지 마시라고, 그 한마디를 위해서요. 핸드폰으로 연락하면 되지 않느냐고요? 안타깝게도 아직 번호 교환을 안 했어요. 남들이 보면 의아스러울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있는 미묘한 기류 때문에 그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어요. 오빠는 저번처럼 제가 당황해서 도망칠까 걱정하는 것 같고, 실제로 저는 문자를 야무지게 주고받을 자신도 없고...

? 너희 어머니가 오신다고...?”

“......”

그 황당해하는 표정에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도장 사람들 다 가는 거라고 설명했니? ... 그럼 왜 그러시는 거야? 모르겠어요. 예상 외로 차근차근 얘기가 오가긴 했지만... 관장님이 줄담배를 무는 걸 보니 마음이 조각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도장 10년 운영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인데.”

.

도장에서 네가 어떻게 지내는 지는 들었어. 집에 돌아온 엄마는 제게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아주 열심히, 모범적으로 운동한다고 그러더라. 그렇지만 일의 경중이 뒤바뀌면 안 되잖아. 너는 일단 학생이니까, 한 달간 시간을 줄게. 한 달 안에, 다시 성적을 만들어놔.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힘이 하나도 없어서 일기를 멋지게 끝낼 수가 없네요. 다음엔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서로 좋아하는 걸 아는데도 왜 이렇게 순탄치가 않을까. 이렇게 누굴 좋아한다는 일이, 원래,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나. 이토록 고단한 일이었나. 사랑 때문에 여러 문제가 생겨난다는 얘기는, 막장 드라마에서나 있는 줄 알았는데...

<317>

[태영의 일기]

지민이에 비하면, 난 쓰레기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피부로 다가왔어. 그 애는 멀쩡한 집에 태어나 멀쩡한 부모님 밑에서 곱게 자랐어. 부모님이 노래방도 못 가게 한다고...? 아버지는 뭐? 서울대 국문박사? 그 아줌마는 연대 컴공 출신이라며? 조선시대로 따지면 나는 백정이고 걔는 양갓집 규수겠지. 내가 애초에 걔보다 나은 게 있나? 너무 과분한 사랑을 하는 건 아닌가? 조금은 냉정하게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그 아줌마가 날 째려보는 눈빛을 기억해. 쓰레기. 못 배워먹은 놈. 둘 다 아니지만 남들에겐 그렇게 보이고 있는 거야. 그 애는 롯데 캐슬에 살고 나는 좆만한 빌라에 살지. 어른들은 그걸로 모든 판단을 끝내버려. 늘 그랬어. 난 그래서 섬에 살 때도 멀쩡한 친구가 없었어. 무슨 80년대 얘기를 하냐고?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있냐고? , 있어.

걔보다 공부를 잘 하나... 아니면 따놓은 상이라도 있나... 예술적 특기가 있나. 내 유일한 특기인 볼링도 걔가 더 잘할 걸. 난 걔에 비해 모든 면이 뒤떨어져. 시대에 어긋난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못해선 가오도 안 살아. 서로 여자친구 남자친구 부르는 사이가 되고 나서, 걔는 내심 나를 비웃을지도 몰라.

나는 간신히 인서울급, 그 애는 서연고급.

나는 피부 까맣고 병신같이 생겼고, 그 애는 귀엽고 예쁘고.

난 걔를 행복하게 만들 자신이 없어. 전혀. 예전 일기엔 슈퍼맨어쩌고 써놨는데, 이젠 현실을 깨달았어. 포기해야 하나? 괴롭네. 몸이 쪼개지는 것 같아.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말이 예전에는 정말 병신 같은 관용구라고 느꼈지. 하지만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진 말인걸.

하지만,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라느니... 그런 건 아냐...

다른 누구도 만나지 말았으면...

나는 지민이를 정말 좋아해.

내가 이 담에 커서 성공하면, 그 때 고백하면 되는 거 아닐까...

비현실적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네.

[지민의 일기]

당신이 나한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단 사실이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어요.

나는 점차 제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심각하게 방황하고 있습니다. 화가 나서 집에 있는 책을 모조리 찢어버렸습니다. 지겨울 정도로 괴로움만 계속되는, 꽃피는 4. 싹틀 무렵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는데 지금은 그저 영영 눈을 감아버리고 싶습니다. 하다못해 무지개도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이 있던데, 나는 왜 끝없이 내려앉고 있는 걸까?

공부 잘하는 모범생, 모두에게 사랑받는 예쁜 여자애, 그것이 독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열심히 살았을 뿐이라고요. 피아노를 치라면 쳤고 영어를 하라면 밤새 회화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그 대가가 고작 이런 건가요? 내가 왜 노력의 대가로 고통을 느껴야 하나요?

그 당황한 표정, 부담감이 역력한, 나를 피하는, 그러면서도 조금씩 흘기는 눈.

당신이 나한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단 사실이 저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어요. 왜 그러세요? 재차 말하지만 나는 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 거예요. 지금 내 감정을 어떻게 말로만 표현할 수 있겠어. 정말이지,

가슴이 아파요. 가슴이 아파요, 소리치면서 따라 적고 있어요. 혹시나 지금 우리집 주변에 있다면 제 이 찢어지는 비명을 들어주세요. 이 말 밖에 못 하겠어.

자꾸만 제 시선을 피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당신을 얕잡아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이 도장 밖에서 어떤 사람이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거예요. 설령 자퇴하고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더라도 말이죠.

내가 예쁘고, 공부 잘하고, 착하고, 그래요... 까놓고 말해서 주변에선 절 보고 완벽하다고 하는 거 맞아요. 나는 저 스스로를 일등 신부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제 자신감의 한 축이기도 했고요. 남들은 다 좋아하는 점을 왜 당신은 미워하세요.

이유가 뭐지? 약간 결함이 있는 애를 원하시는 건가요? 속내를 모르겠어.

아파요. 죽고 싶어요. 당신을 편협한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겁이 나요.

나는 당신을 절대무오의 남자로 봤는데, 당신은 오히려 나의 결점을 찾으려 혈안이었단 말이야? 가슴이 아파요. 당신을 끝끝내 비난하고 싶지 않아. 외부로 향해야 할 나의 화살을 전부 입 안으로 삼키고 있어요.

이거 실은 몰래카메라지? 그런 거잖아요. 갑자기 나에 대한 마음이 180도 변할 리가 없어.

지민아, 너 체력 완전 *괴물* 같다.”

1등급이라고? 보통 여자애가 아니라 *초인*이구나.”

되게 잘 먹는다. *몸집에 비해서*...”

전두환? 박정희? *어려운* 얘기네.”

넌 정말 *특별한* 애구나.”

상처주지 말아주세요. 나는 특별한 애가 아니에요. 그냥 보통 여자아이에요. 나는, 당신이 모르는 결점이 많아요. 저는 흠이 많은 앱니다. 겁도 많고 나이에 비해 애 같아요. 노는 법도 잘 몰라요. 설거지도 안 하고, 재봉질도 못하고, 전기밥솥도 쓸 줄 모르고, 세탁기도 돌릴 줄 모르고...

일기를 태워버릴지도 몰라요.

 

<320>

[태영의 일기]

그게 포용력이 없다는 거야!”

관장님이 호통 쳤다.

하지만 저는.”

열등감 뭉친 등신 새끼.”

관장님이 저에 대해 뭘 아신다고?”

지민이가 지금 무슨 심정이겠냐, 걔 요즘 도장에 안 나오는 이유가 뭐일 것 같아.”

모르겠습니다.”

너 때문이야, !”

그럴 리가요.”

넌 걔한테 상처를 줬어. 남자로서는 물론이고 너는 인간적으로도 못돼 처먹은 놈이야.”

저는 급이 딸려요. 나중에, 성공하면 다시...”

너는 진지하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

부끄러운 줄 알아라. 막말로 걔가 대통령이고 네가 시골 공무원이라도 넌 그딴 식으로 말하면 안 됐어.”

전 병신이라고요.”

처 울어? 뭘 잘했다고.”

걔한테 전 아무것도 아녜요.”

지민이 동생이 널 싫어했던 이유를 난 이제야 이해하겠다.”

.

죄송해요.”

쭉 마셔라.”

우욱.”

고기 한 점 집어먹고, 또 받아.”

이게 취하는 거구나...”

네가 완전히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야.”

관장님.”

처 울지마. 남자 새끼가.”

관장님.”

, 걔 연락처도 없지.”

.”

받아 적어.”

.”

다음에 걔 만나면 이렇게 말해.”

지민아 보고 싶어, 사랑해. 내가 미안해. 난 내가 어른인 줄 알았어. 난 순 어린애였네. 내 모자란 점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포용하고, 마음을 넓게 가지는 게 진짜 어른이 되는 거였던 거야. 난 몰랐어. 난생 처음 술 마시고 추하게 울고 있어. 난 좆같은 새끼였어.

 

[지민의 일기]

벌써 일주일이 흘렀군요.

도장에 나가는 시간을 여덟시로 옮겼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쉬지 않고 타격대를 때렸습니다. 죽도가 부러질 정도로, 강렬하게, 온 힘을 다해서. 저는 작년 겨울의 말 잘 듣는 지민이로 돌아갔습니다. 엄마는 다시 저를 귀여워하셨어요.

매일 밤 꿈을 꾸면 행복한데 아침이 되면 허망한 기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일들이 아깝거나 후회된다곤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를 뒤흔들었죠. 지금도 코가 시립니다.

...수박씨 골라내듯 던진 한 마디도 어느덧,

자라나 그 사람 드리우는 덩굴이 되었는 걸

잎새마다 그리운 모습 기댈 곳도 없는데

위로만 자라나 다시 피어나는 꽃

사월의 벚꽃보다 무성한

치렁거리는 구차한 차양막이 되려나...

요새는 시도 쓰고 있어요. 보다시피 잘 쓰진 않지만.

오빠에 대한 마음을 접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이 있어요. 어제는 관장님께 오빠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았습니다. 연락을 하려는 건 아녜요. 가지고 있으면 복이 온다는 부적과도 같은 거예요. 언젠가 길고 긴 시간이 지나면, 문득 연락을 해 볼지도.

벚꽃 만개. 진달래가 지고 다시 세상이 분홍빛으로 물들었습니다. 화려하게 솟아나 원을 그리며 내려앉는 꽃잎들, 나는 그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래요. 한편으론 묘하게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봄바람이기도 했습니다. 이유는 다들 아시겠죠? 저번처럼 머리카락이 짧아져서 그렇다는 어린 이유는 아니란 걸.

진달래나 영산홍은 붉은 빛이 많아 타오르는 것 같은 분홍빛이었는데, 벚꽃은 은은하게 따스한 분홍빛이었습니다. 가지를 약간 꺾어 귀에 걸어놓으니 정말로 예뻤습니다. 나는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꽃잎을 하나하나 받아 세었습니다.

이어진다... 이어지지 않는다... 이어진다...

이미 끝난 일인데도 사랑의 점괘를 쳐봤습니다. 다시 하나 둘, 하나 둘. 세어보니 내 손에 있는 이파리는 일곱 개였습니다.

이어진다.

문득 핸드폰을 보았습니다. 메신저 맨 위에 오빠의 번호가 뜹니다. 가지고 싶었던 사진이 첫 번째로 보이고, 두 번째로 보이는 한 줄 글귀. , 어어어엇,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온 몸의 피가 전율로 울렁입니다. 확 달아오른 얼굴의 체온이 다시 하나 둘, 하나 둘, 촉촉하게 떨어집니다.

보고 싶은데

무슨 뜻일까요. 설마 나를? 아냐, 확대해석은 하지 말아야지. 그렇지만 심장은 뛰고 있었습니다. 벚꽃잎이 회오리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분홍빛으로 물든 학교 정원 한 가운데서 한 줄 글귀를 바꿨습니다. 한 줌 기대를 품고.

실은 나도.

하하, 이게 무슨 소용이야. 천만분의 일 확률로 오빠가 이걸 보더라도 답변으론 생각 안 할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오빠는 날 부담스러워 하잖아.

그런데 10분 뒤, 오빠의 글귀가 다른 말로 바뀌었습니다.

진짜?

설마, 설마, 휴대폰만 바라보았습니다.

.

고마워라.

착각일지도 몰라. 오빠가 내 번호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어. 글귀가 10분마다 바뀌는 건, 천만분의 일 확률로 어쩌다 겹친 거야. 그러나 나는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고 휴대폰에 집중했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벤치에 주저앉았습니다.

설마.

관장님... 저 지민인데요.”

.”

혹시 오빠가 제 번호 물어봤나요?”

아니.”

그리고 전화가 뚝 끊겼습니다. 수많은 벚꽃잎이 제 얼굴에 떨어집니다. 주머니에 있던 말린 꽃잎이 서서히 열을 뿜어내는 건 제 감수성이 만든 기적이었을까요? 나는 심호흡을 하고 메신저 글귀를 바꿨습니다.

나는 당신이 좋아요.

 

<325>

서로가 서로의 번호를 가지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한데도, 그에게서 문자 메시지는 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당연한 일입니다. 앞뒤를 자르고 보면 우리는 서로를 스토킹 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요. 참 비범한 일이죠, 우리는 지구에 사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 짤막짤막 이어지는 상태 메시지 대화는 매일 이어졌습니다. 상태 메시지란 것 자체가 공공장소에 붙이는 표어와 같은 것이기에, 저는 그 점에 기대어 저의 속마음을 대놓고 드러냈습니다. 그게 반드시 오빠를 향한 말이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마치 다른 산봉우리에 마주보고 앉아 메아리로 대화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운동 열심히 해.

아이 기뻐라. 저는 제 사진에 하트를 붙여놓고, 계정 배경에는 예쁜 사랑 시를 올려놨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는 정말로 기뻐했습니다.

으악 ㅋㅋㅋ」

그는 화답하듯 프로필 사진을 노래 가사로 바꿨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 된 부분이 저를 환하게 웃게 했어요. 숨을 쉴 때마다 네가 그립다. ! 점심시간에 밥을 먹다가 온몸이 간질거려서 혼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마음 한편에 걸리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왜 제 성적이나 주변 평판 등을 듣고 부담스러워했을까요? 저번에 눈으로 본 오빠의 표정은 어지간한 게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혼란스러운 때에 그는 갑자기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2주 만에 우리는 도장 안에서 마주했습니다. 관장님이,

네가 이 시간에 웬 일이냐하고 그에게 물으니까,

머리가 아파서 조퇴했다가 자고 일어나니 멀쩡해져서...” 하고 그는 답했습니다. 그리고 곁눈질로 저를 슥 쳐다보는데, 지금까지 메신저로 주고받은 말들이 확 떠올라서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안녕. 안녕하세요... 실은 애초부터 저 만나려고 조퇴하신 거 아닌가요. 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습니다.

요새도 타격대 치다가 넘어지고 그래?

...가끔...?

그는 메신저로 우리가 서로 대화한 내용에 대해선 일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조심스러웠겠지요. 저는 그 상황에 안타까운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감정은 임계점까지 타올랐는데 대놓고 감정표현을 할 수 있는 명분은 없고. 그저 형식적으로 주고받는 말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강렬하게 남은 말은,

저번에 한참 동안 두통 때문에 검도를 못 했다.”

내가 싫어서 도장에 안 나온 게 아니었구나! 그 점만큼은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듣고 싶어. 보다 더 직접적인 걸, 그 때 왜 그렇게 기분나빠했는지. 입술을 간신히 뗀 그 순간 도장 안의 타이머가 삐삐 소리를 냅니다. 대련 시간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칼을 뽑았습니다.

우리는 칼을 겨눌 뿐 조금도 발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지는 거야’, 이런 룰의 싸움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의 죽도를 제 죽도로 가볍게 톡톡 쳤습니다. 그도 응답하듯 제 죽도를 칩니다.

톡톡,

톡톡,

탁탁탁.

중단이 굳건하면 그 자체로도 억제력을 갖습니다. 고급 기술의 대부분은 상대의 칼을 치우는데서 파생됩니다.

톡톡.

톡톡톡.

자기 칼의 통제력을 잃은 상태를 죽은 몸이라고 부릅니다. 체스로 치면, 체크메이트 상태죠. 상대를 계속 죽은 몸으로 몰아넣는 공방이, 그러니까 서로의 칼날을 엮는 것이 검도의 9.

그럼 이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상대의 칼등을 누르든가, 아니면 옆으로 때려서 치우는 거죠.

오빠는 갑자기 종례 직전에 제 손목을 잡고 도장 밖까지 끌고 나갑니다. 관장님도, 동생 수민이도, 그 광경을 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못 본체 연습만 계속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의 아귀 힘. 그 박력에 저는 완전히 압도되어 어쩐지 고분고분해진 느낌이었습니다.

건물 1, 작은 연못 앞에는 작은 가로등만이 힘겹게 빛을 태워내고 있었습니다. 꼭 사람의 심장처럼 일정한 템포에 맞춰 빛이 세졌다가 약해졌다가를 반복합니다. 그의 어깨도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합니다.

너 왜 안 나왔었냐?”

그 한 마디가 가장 먼저 나왔습니다.

혹시 나 때문에?”

“......”

, 난 너랑 운동하는 맛에 여기 나온다고.”

, 눈치 채지 못하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습니다. 가로등이 빛을 강하게 화악 뿜어냈습니다. 머릿속이 텅 비는 듯 꽉 차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거 반 쯤 고백 아냐?

성당 첨탑에 걸린 종이 울리듯, 저는 온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저번에 저보고 괴물 같다느니, 초인이라느니...”

?”

질질 울면서 눈에 쌍심지를 켰습니다. 진짜 나빴어! 나의 어린 심장은 정말로 예측을 불허합니다. 오빠는 제 반응이 예상 밖이었단 듯 저를 우두커니 쳐다봅니다. , 어떻게 대답하는지 들어봐야지.

진짜 나빴어. 제 성적 얘기 들을 때 얼굴 구겨지시고... 무슨 남존여비 사상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진짜, 진짜, 나빴어.”

너 당최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상처는 다 줘놓고 이제 와서 손목 잡고 나오라 그러고. 뭐야, 진짜.”

...?”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묘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 뭔지 알겠다.”

...”

뭔 오해를 한 거야, 대체. 상식적으로 그런 속 좁은 사람이 어디 있어? 필기한 거 돈 주고 팔려고 했더니 네 성적엔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런 건데.”

?”

졸라 소심하구나, .”

“......?”

왜 우는 거야. 공짜로 달란 거냐?”

나는 그의 등을 주먹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그도 제 등을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달밤 아래 오가는 강 스파이크, 정말 볼품없는 애정 표현이야, 그렇지 않아요?

 

 

 

 

 

 

 

 

 

 

 

 

 

 

 

 

 

 

 

 
+ 작가의 말 : 힘들어서 살 빠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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