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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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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단편제 76회/3] 무제
글쓴이: 12월32일
작성일: 13-06-20 22:14 조회: 1,431 추천: 0 비추천: 0
 
 
  “안녕?”
  자각몽인가.
  눈앞에 개나리꽃만큼이나 노란 털에 빨간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는 곰이 보였다. 동물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곰과는 확연히 다른 그 녀석은 품 안에 작은 단지를 안고 있었다.
  곰돌이 푸우.
  자각몽이든 뭐든 간에, 지금 내가 나이가 몇 개인데 이 녀석이 나타난 걸까. 물론 나이로만 따지면 나보다 훨씬 형님이겠다만.
  “꿀 좋아해?”
  푸우의 귀에 걸릴 듯 커진 미소에, 일요일 8시면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기 위해 칼같이 기상했던 유년기의 추억이 떠올랐다. 곰돌이 푸우도 그 만화세상에서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였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다정한 친구.
  그리고 내겐, 만화 속 세상의 푸우만큼이나 긍정적인 다정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녀석은 푸우의 화신이 아닐까 싶을 만큼 참 꿀을 좋아했었다. 백날 설명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할 꿀의 대한 예찬론을 펼치기 바빴었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꿀로 사업을 한다고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그래서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아니, 싫어해.”
  사인(死因)은 교통사고였다. 트럭운전수가 졸음운전을 한 실수의 결과였다. 너무나 흔하게, 너무나 빤한 이유로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었다.
  벌써 3년도 더 된 일인데도 아직도 녀석의 죽음은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꿀을 좋아할 수 없다. 꿀만 보면, 녀석이 생각나니까.
  푸우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울상을 짓고 있는 푸우라니.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네 인간 친구와 함께 놀라구. 나는 이제 꿈에서 깨어나야겠으니.
 
  눈을 감는다. 셋까지 세고 다시 눈을 뜬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옅은 살구빛의 베개 커버였다. 늘 반쯤 얼굴을 파묻고 자는 내게 있어 가장 먼저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지금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디즈니 만화동산은 모두 끝났을 시각이었다. 어렸을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늦잠.
  ‘지금은 TV를 틀면 뭘 하더라?’
  알 수 있을 리가.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다시 눈을 감았다.
  언제부터인가 일요일은 자연스럽게 늦잠을 자는 날이었다. 일주일의 노곤한 일정들을 소화하고 찾아오는 주말은 감히 황금 같은 돌덩어리에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시간이었다.
  토요일마다 찾아오는 이곳저곳 회식자리에서 끊임없이 불려 다닌 대가기도 하다만.
  “끄응.”
  침대에 누워서 하루를 날리는 것도 좋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일요일인데 개인적인 즐김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다시 두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핑―하고 눈앞이 크게 흔들렸다. 롤러코스트를 탄 것 마냥 수직 낙하하는 시선에 아찔함을 느낄 틈도 없이 두통이 밀려왔다. 딱따구리한테 쪼이는 것처럼 욱신거리는 통증은 관자놀이로 시작해 머릿속을 진탕으로 만들만큼 격렬했다.
  “아욱!”
  결국 머리를 감싸 쥐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도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앉았다.
  왜?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던가?
  아닐 거다. 어제는 회식 자리가 1차로 마무리 돼 자정이 넘어가기 전에 귀가했었다. 이래저래 사람들이 휴가도 많이 떠난 지라 참여인원이 적어 흥이 나지 않은 결과였다. 무엇보다 내가 고작 숙취에 쓰러질 리가 없었다. 새벽 2~3시까지 마시고도 이런 적은 없었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코가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애도 아니고 베개에 코 좀 박고 있었다고 막히는 건 아니었다.
  “킁!”
  코를 세게 들이키고 침을 꿀꺽 삼키자 목구멍 너머로 무언가 훌쩍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살짝 끈적거림이 있는 느낌이 침은 아니다.
  “젠장.”
  잠시나마 뚫렸던 것 같은 코가 다시 꽉 막혀버린 변기 같아지는 것을 느끼며 지금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가 분명하다. 요 며칠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어젯밤 술김에 에어컨을 예약 맞춰놓고 잔 게 화근이 된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푸엣취!”
  자각하기 무섭게 기침이 튀어나왔다.
  흘러나오는 콧물을 대충 손등으로 슥 닦아내고는 다시 편한 자세로 누웠다.
  집에 사 놓은 감기약이 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감기에 걸렸다고 약 따위에 의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고개를 슬쩍 돌려 방을 살폈다.
  10평 남짓한 원룸. 침대 너머 세 걸음도 채 되지 않을 거리에 서랍장이 있었고, 몸을 일으켜 가서 약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보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감기라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 몸뚱이는 총파업 태세였다.
  “하아.”
  손을 들어 이마를 짚어보았다. 고작 그런 행동을 했을 뿐인데도 떨어져 나갈 것만큼이나 팔이 무겁게 느껴졌다는 데서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 닿은 손으로 전달되는 온기는 필요이상으로 뜨거워 심상치 않은 느낌을 사실로 바꿔주었다.
  나지막하게 욕설을 토해내며 이불을 끌어올렸다. 잠이나 자는 게 좋을 듯했다. 한기까지 느껴지며 온몸이 으슬으슬한 게, 감기에 걸려도 된통 걸린 게 분명했다.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픈 거 보다, 일요일을 날려야 한다는 사실에.
  그래도 어쩌겠나. 어쨌든 샐러리맨으로서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 오늘은 고스란히 포기하는 수밖에.
  아픈 몸을 이끌고라도 일요일을 만끽하기에, 나는 지독하게 현실적인 녀석이었다.
 
*
 
  「Remember yesterday― Walking hand in hand―」
  향수를 자극하는 낯익은, 그리고 그리운 멜로디.
  다시 잠들었던 탓에 그게 핸드폰 벨소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조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극히 소수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벨소리를 따로 지정해두지 않았다. 이렇게 벨소리를 따로 저장해둔 경우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전화를 받아야 할 사람들뿐이었다.
  허나, 이 벨소리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손을 더듬어 찾은 핸드폰의 액정에 뜬 이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윤희♡
  하트…….
  저절로 걸리는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갑작스러운 안면근육의 움직임 때문인지 또다시 두통이 밀려들었다.
  옛 연인이자, 첫사랑.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이름.
  죽어버린 친구의 동생.
  「I'd wanna hear you say― "I remember you"」
  핸드폰은 한참을 울리다 끊어졌다.
  윤희를 보면, 윤석이가 떠오른다. 그래서 차마 다가갈 수 없었다.
  윤석이가 죽은 날은, 내가 윤희에게 프로포즈를 한 날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녀석의 부고는 내 고백이 끝나고 윤하의 대답만이 남은 상황에서 전해져왔다.
  곧장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펑펑 우는 윤희를 달래느냐고 진땀을 쏟았던 게 기억이 난다.
  아들이라고는 녀석 하나밖에 없었던, 아버지도 일가친척도 전무한 그 집안에, 나는 친구들과 함께 상주역을 했었다.
어떻게 장례를 다 마쳤는지는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좋아했던 친구였기에 쉴 세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녀석의 장례의 상주였기 때문에 차마 소리 내어 울 수 없는 잔인한 시간일 뿐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윤희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윤희나 나나, 모두 윤석이를 잃어버린 충격이 너무나 컸다. 우리 둘이 행복하게 하하호호 웃고 지낼 수 없게 됐다.
  그렇게 지낸 게 3년 째였다.
  그러고 보니, 윤희는 왜 내게 연락을 해온 걸까?
  날짜를 되짚어 보았다.
  “다음 주구나.”
  윤석이의 제사가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고작 3년째인데, 벌써부터 날짜가 가물가물해지다니. 입안이 씁쓸해졌다. 감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며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런데 이 소식 때문에 나한테 연락한 걸까?
  그동안 녀석의 제사는 꼬박꼬박 참여해왔다. 나 홀로 녀석이 묻힌 무덤에 찾아가 조용히 인사하고 돌아오는 식이었다. 윤희나, 그 어머니를 만나는 게 너무나 힘들었던 탓이었다. 그들을 찾아 위로해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나는 비겁한 겁쟁이였다. 나도 힘든 데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위로해주기에는 내 그릇은 한 없이 작았다.
  그때, 전화가 다시 울렸다.
  역시 발신인은 윤희였다.
  받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딱히 어떤 결론을 내리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충동적이었다.
  「여보세요? 민이 오빠?」
  상념 때문이었을까? 윤희의 목소리는 밝았음에도 왠지 모르게 무겁게 들려왔다.
  “응. 윤희야. 나야. 무슨 일이니?”
  「……잘, 지내요?」
  “나야 잘 지내지.”
  애써 밝아 보이는 목소리길 바라며 대답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어떻게 감출 수 없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지푸라기 한 오라기 걸치지 못한 알몸으로 들판에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통화를 하는 게 무서웠다.
  「목소리가 아파 보이는데, 정말 괜찮아요?」
  진심이 묻어나는 걱정에 하하 웃었다. 내가 뭐라고, 윤희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다. 마침 적절한 변명거리도 있었다.
  “티가 나? 감기 때문일 거야.”
  「감기 걸렸어요?」
  “별 건 아니야. 약 먹고 쉬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래요……?」
  적절한 거짓말에 전화기 너머로 “다행이다.”라는 말이 들려온 듯했지만 조금 멍한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환청이라고 치부했다. 내게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연인도 뭣도 아닌 상황에서 그건 아직 놓지 못한 미련이 만들어 낸 환영이어야 옳았다.
  “응. 그런데, 무슨 일이야?”
  통화가 길어지는 건 달갑지 않았다. 용건만 확인하고 끊는 게 나를 위해서도, 윤희를 위해서도 좋을 듯했다.
  「아… 저기…….」
  왜인지 말끝을 흐리는 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그런 거라면―”
  그런 거라면 뭐?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
  「아,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오빠는 잘 지내나 해서…….」
  “응.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잘 지내고 있으니까…….”
  더 이상 대답은 없었다.
  뚝 끊어진 대화 너머, 윤희의 나직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윤희야, 너는 잘 지내니?
  라는 말을 할까 생각해보았다. 아니, 하고 싶었다. 별로 대수로운 건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는 어투로 안부 차원에서 물어보는 셈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해줄 것 같아서. 나에게는 그런 질문을 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서.
대화가 재개될 여지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더 이상 핸드폰을 잡고 있는 것도 우스워 그만 전화를 끊는 게 좋을 거란 생각에 알맞은 말을 찾고 있는데.
  「오빠, 살던 집 그대로에요?」
  윤희가 화제를 바꾸어 질문을 던졌다.
  “우리 집? 뭐, 살던 데 그대로 살긴 하지. 그런데 왜?”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혹시… 지금 찾아가도 돼요?」
  “……왜?”
  「이유는 묻지 마시구요! 그냥, 찾아가도 돼요?」
  막무가내에 가까운 말에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거절해야 한다는 건 분명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
  “저기, 오늘은 좀 그런데…….”
  「무슨 약속 있으세요?」
  “아니, 약속은 없어… 그냥, 오늘은 내가 좀 몸이 안 좋아서…….”
  마땅한 변명이 없었다. 거짓말로 지어내도 좋을 테지만, 우습게도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찾아가도 되죠?」
  “……그래.”
  「조금 뒤에 뵐게요.」
  통화가 끊어지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아직도 윤희가 좋은 걸까? 무슨 낯짝으로 그 얼굴을 보겠다고 승낙한 건데?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열이 더 오르는지 다시 눈이 감겼다.
  
*
 
  “야 인마. 꿀이 얼마나 몸에 좋은데.”
  또 다시 자각몽.
  이번엔 푸우가 아니라 윤석이가 눈앞에 있었다. 살아생전 그대로, 두터운 뿔테 안경과 호리호리한 몸을 자랑하며 내 앞에 똑바로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양푼 가득 담긴 꿀을 들고서 너무나 생생한 얼굴로.
  “그러니까 먹어!”
  내밀어지는 꿀이 담긴 숟가락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난 단 거 싫어한다고. 너나 처먹어.”
  “처먹으라니! 네가 감히 지금 꿀을 무시하는 거냐? 잘 들어, 꿀이라는 건 말이지!”
  “때려 쳐. 인류 최초의 식품이니,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이니, 과거 신의 제사에 올리는 식품이었다든지 약품으로도 쓰일 수 있느니 그런 사실은 지겹다고. 나도 다 알아. 약효에 대해 설명하라고 해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다.”
  “잘 아는 놈이 왜 그런데 꿀을 싫다고 하는 거야?”
  이게 다 너 때문이거든.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자각몽에서 깨어나기 위한 준비였다. 셋을 세고, 다시 눈을 뜬다.
  그런데 깨지 않는다. 윤석이가 여전히 내 앞에 있었다.
  자각몽은 자각몽이라고 자각하는 순간, 일종의 약속을 통해서 충분히 깨어날 수 있었다. 경험을 토대로 한 만큼, 예측을 벗어나서는 안 됐다.
  그런데 왜?
  사실은, 일어나기 싫은 걸까? 그렇다면 여태까지 못 나눈 대화나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열이 올라 뇌가 반쯤 녹아내린 것 같다.
  “너, 거기서 잘 지내냐?”
  “잘 안 지내면? 만나러 올 거냐?”
  “그래줄까?”
  “미친놈. 지랄하고 있다.”
  “물론 농담이다.”
  죽고 싶단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는 게 행복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죽어버리는 결정을 가져야 될 이유도 없었다.
  더욱이 이건 꿈. 이렇든 저렇든 해도, 지금 윤석이의 모습은 내가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다.
  
  ―그런데 왜.
 
  “슬슬 일어나지 그러냐?”
  “그러려고 했는데, 안 일어나지네.”
  “무섭냐? 내 동생 만나는 거.”
  그런 건가? 윤희를 만나는 게 무서워서 그냥 잠들어버리려는 건가? 그래,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네. 야. 벌써 잊었냐? 네가 내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싹싹 빌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모르는 척 하겠다는 건데?”
  그랬었지. 윤희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로 작심한 날, 진짜 죽을 각오를 하고 윤석이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윤희,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나한테 보내주라.” 라고 했었다. 그리고 정말 비도 오는 그날, 먼지가 날 때까지 맞았었다. 대신 허락은 받았다.
  이젠 추억이 되어 버린 과거.
  “딱히 내가 책임질 짓까지 했던 건 아니잖아. 게다가 한 번 외면해버렸었어. 또 다시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차마 어떻게 그러겠어.”
  “그게 아니라 이 병신아!”
  그게 아니면 뭐?
  “왜 내 핑계를 대고 네가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하냐고. 내가 언제 너더러 나 추억하면서 살라고 했냐? 남자 새끼가 들러붙어 있는 거 끔찍하거든? 네가 애냐? 왜 징징대는데? 내 핑계대지 말고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아오, 진짜 쪽팔려서!”
  
 ―너는 내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 진짜 같은 걸까.
 
  그 날도 그랬었다.
  “네가 왜 내 허락을 맡아 이 병신아! 네가 좋으면 좋은 거지, 쪽팔리게 어디서 드라마 흉내 질이야? 미쳤냐? 남자답게 보쌈이라도 해 가, 그냥!”
  아아. 그래. 그때 나는 소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윤석이라면 두 말 없이 축하인사와 함께 승낙해줬을 텐데, 나는 지레 겁먹고, 지레 물러났었다.
  그 대가로 맞았던 거다.
  나답게 살라고.
  그래야 내 친구라면서.
  “나, 간다.”
  “늦지 않았길 바라주마.”
  환영이라도 상관없었다. 진짜 윤석이라면, 얼마든지 저렇게 웃어줄 것이다. 주머니에는 양 손을 꽂아 넣은 채, 언제라도 반갑다는 듯이 환한 미소로.
 
  다시 눈을 감는다. 셋을 세고, 눈을 떴다.
 
  윤석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윤희가 보였다.
 
*
 
  뒷모습뿐이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윤희. 하루 이틀 저 뒷모습을 봐왔던 게 아니기에,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여자들의 뒷모습에서 그 그림자를 좇아왔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윤희는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듯 분주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콱 막힌 콧속으로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향기가 느껴졌다.
  ‘먼저 말을 걸까?’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3년 만에 다시 만난 셈이었다. 그 흔한 문자조차도 어쩌다 한 번씩 할 정도로 소원해진 사이였다. 솔직히 지금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다시 이곳에 온 걸까?
  궁금증이 풀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분주하던 움직임이 잦아들며, 그녀는 찬장을 뒤져 작은 쟁반을 꺼내들었고 그 위에 무언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료가 담긴 잔을 올렸다.
  “어? 오빠. 일어났네요?”
  이게 꿈이 아닐까? 정말 거짓말 같았다. 환한 미소가 지난 3년 동안 전혀 못 보았던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익숙하게 다가왔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기에 멋대로 들어와 버렸어요. 괜찮죠?”
  “아.”
  그러고 보니 문을 열어준 기억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깊게 잠들었던 거지? 핸드폰을 슬쩍 건드려 액정을 열어보니 시간은 꽤나 흘러 벌써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비밀 번호는 주기적으로 바꿔야죠. 여전히―”
  윤희가 황급히 말을 삼키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미안. 잠들어버려서.”
  어색해질 것 같은 분위기에 못들은 척 하며 사과를 건넸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는 윤희의 생일이었다. 이 원룸에서 살게 된 것 역시 3년. 생각해보면 나란 녀석은 잘도 여전히 윤희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삼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희였다. 이쪽이 눈치 챘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앙다문 입술이 어지간해서는 다시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땐 먼저 말문을 열어야겠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
  “……별 일은 아니에요. 그냥 오빠가 생각나서 전화해봤을 뿐이에요.”
  “그렇구나.”
  담담하게 대답했다. 무언가 일이 없다는 게 차라리 안도할 수 있었다.
  “사실은…….”
  “……?”
  “아, 아니에요.”
  역시 뭔가 일이 있는 걸까?
  모르는 척 할까, 하다 조금 전의 꿈이 떠올랐다.
  “무슨 일 있는 거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 테니까 말해 봐.”
  “그보다, 오빠 왜 거짓말 했어요?”
  “……거짓말?”
  “약 먹고 잔다면서요? 오빤 감기 걸린 거에 약 먹으면 죽는다면서 절대 안 먹잖아요?”
  “아…….”
  그런 사소한 것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자요. 이거나 마셔요. 약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쟁반 위로 담아왔던 컵을 내밀었다. 컵 전체로 따스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한층 기분이 나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건 뭐야?”
  “벌꿀 레몬차요. 오빠가 감기 걸리면 항상 챙겨 먹던 거예요.”
  “……윤석, 이가?”
  “네.”
  차마 무슨 얼굴로 윤희의 얼굴을 봐야할지 몰랐다.
  말없이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약간 점성 져 있으면서 따뜻한 그것은 단 한 모금만으로도 부드럽게 목을 감싸며 뱃속 깊숙한 곳까지 뜨겁게 만들어주었다.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감기로 코와 목이 마비되어 있음에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런데도 꿀을 싫어한다니. 그럴 수 있을 리 없잖아. 미안하다, 푸우. 거짓말을 했었어.
  “사실은.”
  다소 긴장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때 못한 대답을 하러 왔어요.”
  어째서인지 윤희가 무언가 작정한 듯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억지로 짓고 있는 미소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직도, 유효해요? 그때 그 프로포즈.”
  “아…….”
  그러고 보니, 대답은 못 들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아니. 지금이라도.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안 돼.
  “오빠, 저는―”
  황급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윤희의 어깨를 붙잡아 잡아 당겼다. 그렇게, 나는 윤희의 얼굴을 내 가슴에 묻어버리는 것으로 윤희를 입 다물게 했다.
  “잠깐만. 그때, 대답. 지금 하면 반칙이야. YES든 NO든 말이지. 유통기한 지났다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역시 감기로 뇌가 반 이상 녹아버린 게 분명하다.
  그래도.
  “그러니까. 다시 시작하자.”
  가슴에 파묻은 윤희의 얼굴이 희미하게 위 아래로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디에서인지 모를, 위층인지, 옆집인지, 혹은 아래층인지 모를 곳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그래, 이 멜로디는 내가 프로포즈 하며 불렀던 곡이다.
 
 Remember yesterday walking hand in hand
 손잡고 걸었던 지난날을 기억해봐요
 Love letters in the sand,
 모래 위에 사랑의 편지를 쓰던
 I remember you
 난 당신을 기억해요
 Through the sleepless nights
 잠 못 이루는 밤과
 Through every endless day
 끝없이 이어지는 매일매일
 I'd wanna hear you say
 난 듣고 싶었어요.
 I remember
 당신이 기억한다는.
 I remember you
 당신이 나를 기억한다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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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사까지 총 60.2장인가 그랬더라죠.
노래 가사는 사실 넣어도 그만 안 넣어도 그만인데... 들으면서 하다 보니 왠지 그냥 넣고 싶어서 넣었음.
 
그나저나, 이거 제목은 뭘로 할까요.
1~2 제시어와 제시문을 다 통합시키기 위한 상황에 감기와 재회를 사용했습니다만... 딱히 마음에 드는 제목이 생각나지 않네요.
대략 5시간에 걸쳐서 막 휘갈겨 썼어요(...)
 
  굳이 작품해설:
  3년 만에 재회한 연인의 이야기.
  친구의 죽음으로 그 여동생과의 인연이 어이없이 어긋났던 한 남자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름날의 감기. 그리고 꿈에서 그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옛 연인. 그리고 꿈 속에서 친구와의 재회. 그리고 인연의 재시작.
 
 아닌거 같다고요?
 ㅌㅌㅌㅌ
 
 p.s.
 글씨 크기 12포인트입니다. 작은 글씨는 너무 불편해보여서..
 원고는 한글에서 10포인트 크기로 써서 60장..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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