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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심심풀이 단편
글쓴이: fictionist
작성일: 16-05-16 19:34 조회: 512 추천: 0 비추천: 0



“선배, 여기서 뭐해요?”

“앉아 있잖아.”

“그건 알아요.”

“그럼 뭘 묻는 건데.”

“거기 앉아서 뭐하고 있어요?”

“숨 쉬어.”

무성의한 대답을 들은 소녀는 학생들이 돌아가 텅 빈 교실에서 의자 하나를 드르륵 끌고 와 소년 옆에 앉았다.

“저리 가.”

“싫어요.”

소녀는 웃으며 말한 뒤 소년을 보았다. 아까부터 소년은 그녀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교실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십 초, 이십 초, 1분이 지나고 5분이 되자 소년은 드디어 창에서 눈을 떼고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한 앞머리와 하얀 피부. 고운 붓처럼 늘어진 검은 머리는 어깨에 사라락 소리를 낼 것처럼 걸쳐 있고 옆머리엔 꽃모양 머리장식이 달려있었다. 쌍꺼풀이 있는 커다란 눈은 반짝반짝거리며 소년의 무뚝뚝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기르는 개나 고양이가 재롱을 피우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듯 소녀의 분홍빛 입술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소년이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집에 안 가?”

“선배 가면 같이 가려고요.”

“너네 집 우리 집이랑 반대 방향이잖아. 교문 나가자마자 난 서쪽, 넌 동쪽으로 가야 한다고.”

“알아요.”

소년은 운동장에서 시선을 조금 더 먼 곳으로 옮겼다. 교문에 검은 자동차가 한 대 서있었다.

“저거 너 기다리는 거 아냐?”

“맞아요.”

“가봐야 되는 거 아냐?”

차 옆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가 학교 쪽을 바라보며 다리를 떨고 있었다. 한참 밖을 쳐다보던 소년이었다. 그는 남자가 손목을 들여다보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괜찮아요. 절 기다리는 게 일인걸요.”

“성격 안 좋네. 일이라고 해서 나쁜 처우를 받아도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 뭐라고 언질을 주든가 해야지.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게만 해선 심술이나 마찬가지라고.”

“선배만 하겠어요?”

소년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것을 본 소녀가 ‘후후’하고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아.”

소년이 한숨을 쉬며 책상 옆에 걸어놓았던 가방을 집어 드는 것과 동시에 소녀가 의자를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텅 빈 복도에 두 사람 분의 발걸음소리가 울렸다. 소년은 여전히 입을 꼭 다물고 있었고 소녀는 여전히 흐뭇한 얼굴로 소년 옆에 바짝 붙어 걸어갔다. 툭, 툭. 자신의 왼편에서 걷는 소녀의 팔이 자신의 팔에 반복해서 부딪치자 소년이 또 한숨을 쉰 뒤 입을 열었다.

“좀 떨어져서 걷지.”

소년의 어깨 옆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싫어요.”

“자꾸 부딪쳐서 걷기 힘들잖아.”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소녀가 소년의 왼팔과 옆구리 사이 빈틈에 자기 오른팔을 넣으려던 순간 소년이 휙 거리를 벌렸다. 그 동작은 마치 그녀의 행동을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재빨랐다. 소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 볼을 부풀린 채 소년의 무표정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떨어지면 되는 거였어.”

소년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보폭을 늘려 뚜벅뚜벅 걸어갔다. 소녀는 그 뒤를 쫓았지만 자기보다 키가 큰 소년을 따라잡긴 쉽지 않았다. 소녀의 종종걸음은 더욱 빨라져 어느덧 달리기가 되어있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소년 역시 가방 끈을 양손으로 꼭 붙잡은 채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저항은 금방 끝나고 말았다. 학교 본관의 정문을 빠져나가는 순간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소년의 양팔을 각각 붙잡았다.

“……하아.”

소년은 길게 한숨을 쉬며 양옆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쩐지 낯이 익은 왼편의 남자는 소년의 팔을 붙잡은 채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있었고 오른편의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년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타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소년은 몸에서 힘을 뺐다.

“고마워요.”

남자들에게서 소년을 건네받은 소녀는 저항하지 않는 소년과 팔짱을 끼고 교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소년이 다시 도망가는 것을 막기라도 하듯 두 사람 앞뒤에서 같이 걸어갔다. 앞서 걷던 남자가 차의 문을 열었다.

“타시죠.”

소년은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까 자신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던 사람이었다.

“성의는 감사하지만 저희 집은 걸어서 3분도 안 되는 곳에 있습니다. 굳이 차로 데려다주시지 않아도…….”

“타시지요.”

소년의 어깨에 두터운 손이 얹혔다.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였다.

“……네.”

소년은 순순히 차에 올라탔다. 방향제의 차분하면서도 향긋한 냄새는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기 딱 좋았으나 푹신한 시트 위에 앉은 소년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했다. 오히려 교실에 앉아있었을 때가 부드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선배,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요.”

소년은 고개를 돌려 자기 바로 옆을 내려다보았다. 널찍한 뒷좌석에서, 그것도 소년이 차 왼쪽 문에 딱 달라붙어 앉았건만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떨어질 생각을 않는 소녀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다시 돌려 교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창밖만 바라보았다.

진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승차감과 함께 소년과 소녀를 실은 차는 도로를 달렸다. 시간이 웬만큼 흐른 뒤 차는 도로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갔다. 소년의 눈에 기다란 담이 계속 스쳐지나갔다.

차가 멈추었다. 소년은 커다란 대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대문 뒤편에는 넓은 정원과 으리으리한 집이 있었다. 운전석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뒷좌석의 문이 열렸다. 소년이 앉은 곳과 반대편이었다.

“내리시지요.”

소녀가 열린 문으로 내리는 사이 소년은 자신이 앉은 쪽의 문을 벌컥 열었다. 소녀가 고개를 뒤로 돌린 순간엔 이미 소년이 전력으로 왔던 길을 거꾸로 달리고 있었다.

“선배!”

사냥꾼 손에서 달아나는 토끼와도 같은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소녀는 소리를 질렀다.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뒤에서 바삐 뛰는 발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숨이 차기 시작했을 즈음 소년은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횡단보도 신호등에 녹색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보행자들은 대부분 횡단보도 건너편에 다다른 후였다. 녹색등이 깜빡일 때는 기다렸다 다음 신호에 건너야 한다는 안전수칙 따위는 땀방울과 함께 날려버린 뒤 소년은 횡단보도를 달렸다. 그가 건너편에 다다르기 일보직전 신호등이 적색으로 바뀌었다. 소년의 뒤를 쫓던 남자들은 달리기 시작한 차들에 막혀 더 이상 그를 추격할 수 없었다.




“후우우.”

길디 긴 한숨을 내쉬며 소년은 뒤를 돌아봤다. 혹시나 싶어 한참을 더 달렸기에 소년은 호흡을 진정시키는 데 오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다가 아차 싶어 걸음을 멈추었다. 소녀는―그가 가르쳐준 적도 없었건만―소년의 집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집에 가봤자 그녀의 손에 다시 잡힐 것이 뻔했다.

벌써 며칠 째 소녀는 소년을 자기 집으로 끌고 가려 했다.

처음엔 집에 와서 공부를 좀 도와달라는 식의 말이었다. 소년은 소녀의 중간고사 평균점수가 더 높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소녀가 학년이 다르지 않느냐고, 미리 2학년 과정을 좀 알아두고 싶다고 하자 소년은 지나친 선행학습은 수업 참여 의욕이 낮아지기 때문에 지양해야 한다고 맞섰다.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소년이 부탁을 거절하자 다음엔 미끼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집에 오면 볼 것도 많고 놀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고 했다. 말만 들으면 집이 아니라 유원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소년은 별 흥미 없다는 말과 함께 공부 가르쳐달라고 해놓고 놀자고 하는 건 뭐냐며 전보다 더 차갑게 거절했다.

소녀는 그 다음엔 오늘처럼 차를 끌고 와서 소년을 데려가려고 했다. 7교시 때 창밖으로 교문을 내다보던 소년은 비싸 보이는 차가 서있는 것을 보고 종례가 끝나자마자 후다닥 달려 학교 후문으로 빠져나갔다. 뒤늦게 소년의 교실로 온 소녀는 당연하게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소녀는 무슨 수를 썼는지 아예 종례가 끝나기도 전에 소년의 교실 뒷문에 서있었다. 그리고는 종이 치고 담임이 나가고 청소가 끝날 때까지 서있었다. 초롱초롱 맑게 빛나는 소녀의 눈을 피해 문을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소년은 창밖으로 뛰어내릴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3층에서 뛰어내린 뒤 무사히 착지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소년은 해가 저물어 갈 때까지 버텨보았지만 달라진 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녀가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밖에 없었다.

‘지금 집에 가봤자 걔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지만 하루 종일 있을 수는 없을 테니 다른 데서 시간을 좀 보내다 가자.’

소년은 행선지를 몇 곳 떠올린 후 오락실로 향했다. 그의 수중에 돈은 얼마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 하는 것 구경만 해도 시간이 꽤 잘 가는 곳이란 생각이 그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어서 와요, 선배.”

오락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소녀가 소년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그는 곧바로 문을 닫고 뒤돌아 다른 곳으로 뛰어가려 했지만 어느새 접근한 남자 둘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소녀는 소년이 자기 몸 이곳저곳을 뒤적이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선배, 뭐하는 거예요?”

“내 옷에 추적기라도 달았나 싶어서.”

“하하하하, 무슨 만화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이미 그녀의 존재 자체가 픽션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소년이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어떻게 안 거야?”

“선배라면 바로 집으로 갈 것 같지가 않았어요. 도서관을 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조금 있으면 폐관 시간이니까 거기는 아닐 거고 영화를 보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다 돈도 얼마 없으니 영화관도 아닐 거고 그러면 돈이 얼마 없어도 그럭저럭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오락실이 아닐까 하고 찍어본 거예요. 아, 혹시 몰라서 선배 집이랑 여기서 역 두 개 정도 떨어진 선배 할아버지 댁에는 다른 사람들을 보내놓았어요. 선배에게 친구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저희 집 인력에는 제한이 있으니까.”

내게 돈이 얼마 없다는 건 어떻게 알고 있냐, 할아버지 댁은 또 어떻게 알았냐, 그리고 친구 없어서 미안하게 됐다. 소년의 가슴 속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목구멍을 툭툭 치고 올라왔지만 그에겐 그걸 내뱉을 힘이 없었다.

“자, 그럼 차로 갈까요?”

밝은 목소리를 내며 팔짱을 끼는 소녀를 피할 힘은 더더욱 없었다.




“대체 왜 날 그렇게 집으로 데려가려는 거야.”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소년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모르니까 묻지.”

“거짓말.”

소년은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소녀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거짓말 아냐.”

“그것도 거짓말.”

소녀는 손가락으로 소년의 볼을 쿡 찔렀다. 소년은 고개를 저어 소녀의 손가락을 떼어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선배의 거짓말에 답해주자면, 집에 있는 편이 가장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이것저것……편안하게 있을 수 있잖아요.”

“지금 뭔가 말하려다 말았지.”

“선배야말로 왜 그렇게 제 집에 가기 싫어하는 거예요.”

“……남의 집에 가서 있으면 배가 아프다 죽어버리는 병에 걸렸거든.”

“어머, 그거 큰일이네요. 얼른 저희 집으로 가서 고치도록 하죠. 오랜만에 병원놀이를 할 수 있겠네요.”

“넌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18살이요.”

“……하아.”

소년은 도저히 소녀를 꺾을 수가 없어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소녀는 그걸 보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비웃거나 자랑하는 것이 아닌, 주홍색 빛이 쏟아져 들어오던 교실에서 보았던 흐뭇한 미소였다.

“선배.”

“왜.”

그는 창밖을 보며 답했다.

“선배 저 싫어요?”

“어. 싫어.”

“즉답이네요.”

“사람이 싫다는데도 이렇게 억지로 끌고 가는데 좋아할 리가 있냐.”

“정말로 저희 집에 가는 게 싫었으면 경찰에 신고하면 되잖아요. 예쁘고 얌전하고 착하고 상냥한 여자애가 자꾸 날 자기네 집에 데려가려고 해서 곤란하다고.”

소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소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얄미운 미소였지만 도저히 흉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대체 왜 나야.”

“어머, 선배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너 같은 애가 왜 나한테 매달리는 거냐고. 격이 안 맞잖아.”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소년은 말을 이었다.

“왜 나야.”

“그게 그렇게 듣고 싶어요? 제가 선배를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하나 일일이 나열하는 걸 들으면서 ‘아, 내가 이렇게 잘난 사람이었구나’ 하고 자신을 위로하려는 거예요?”

“아니.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하나 일일이 반박하려는 거야.”

“아무리 반박해도 전 그 하나하나 일일이 들려오는 선배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척하면서 머릿속에 저장한 뒤 쓸데없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선배의 귀여운 모습을 자기 전마다 떠올릴 거예요.”

“변태 같아.”

“이렇게 귀여운 변태 봤어요?”

“지금 여기서 보고 있다.”

“너무하네요.”

소녀가 삐진 척 고개를 픽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팔짱을 낀 채였다.

잠시 뒤 소년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난 집에 쌓아둔 건 빚밖에 없는 서민 가정의 아무 잘난 것도 없는 인간이고 넌 티타늄 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부잣집 아가씨야. 나랑 넌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선배가 설마 이세계인이었을 줄은 몰랐네요. 초능력이나 마법 같은 것도 쓸 수 있어요? 아니면 외계인?”

“말 돌리지 마.”

“아, 혹시 다른 세계라는 게 미래나 과거…….”

“조금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귀족과 평민은 결혼을 할 수 없었다고. 지금도 별로 달라진 건 없어.”

“어머, 선배……!”

소녀가 얼굴을 붉혔다.

“저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젠장.”

소년이 입술을 깨물었다. 소녀가 또 ‘후후후’ 웃었다.

“선배, 걱정 말아요. 저희 집이 좀 부자긴 해도 저랑 선배는 별로 다를 거 없어요. 저도 김치찌개 좋아해요. 사골국물이랑 돼지고기 넣고…….”

“우리 집 김치찌개는 맹물로 끓이는데. 고기도 안 들어가.”

“……김치찌개를 맹물로도 끓일 수 있어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예요?”

“내릴래.”

“아, 기다려요, 선배! 농담이에요! 농담! 지금 내리면 죽어요!”

당장이라도 내릴 것처럼 문손잡이를 잡는 소년을 막으려는 듯 소녀는 소년의 팔을 강하게 껴안았다. 그러는 바람에 폭신한 가슴의 감촉이 보다 강하게 소년에게 전해졌다. 소년은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도 농담이야. 그러니까 팔 좀 놔. 빨리.”

“후훗, 왜요?”

소녀는 팔을 놓지 않은 채 웃었다. 소년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놀란 척한 것은 연기였던 게 분명했다. 이번에도 소녀의 승리였다.

“선배.”

조금 진지해진 말투였다. 그녀는 소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선배 말대로 선배랑 전 다를지도 몰라요. 자라난 환경이 다른 건 사실이고요. 하지만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사람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어요. 누구나 다른 부모를 두고 다른 환경에서 커요. 그렇지만 다들 어울려서 살아간다고요.”

“아니야. 어울리는 척을 할 뿐이야. 서로가 곤란하지 않게.”

“선배도요?”

“뭐?”

“선배도 저와 어울리는 척을 할 뿐인가요?”

“그건…….”

소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선배는 저희 집 재산이 탐나서, 아니면 제가 반반하게 생겼으니 절 꼬셔서 어떻게 해볼 생각인가요? 아니면 저와 붙어있으면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있겠지 하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절대 아닐 거예요. 그렇다면 저한테 이렇게까지 차갑게 대하진 않을 테니까요.”

앞좌석에 타고 있던 남자 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년은 그들이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진 나머지 머리를 창에 박았다.

“선배는 저와 어울리는 척을 하며 다른 걸 원하거나 하지 않아요. 오히려 아무것도 원하질 않죠. 그냥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할 뿐.”

어느새 소녀의 팔이 그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오직 선배만이 절 있는 그대로 대해줬어요. 가식도 없고 겸손도 없고 과장도 두려움도 속셈도 없이. ……그래서 친구가 없지만.”

“야.”

“농담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진실이잖아요.”

소녀는 또 웃었다. 소년은 발끈 성이 났지만 속으로 삭였다.

“난 그저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야.”

“그거에요.”

“뭐가.”

“제가 선배를 좋아하는 이유.”

소녀는 엉덩이를 살며시 들더니 소년에게 몸을 붙여 앉았다.

“물론 그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요. 선배 잘생겼잖아요.”

“얼굴이었냐.”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선배랑 같은 값인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역시 선배밖에 없어요.”

“살다보면 또 만날지도 모르잖아.”

“그럼 그땐 선배와 비교하고 결정할까요? 농담이에요. 화내지 말아요.”

“화 안 냈어.”

소년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차 안이 좀 더운 듯했다. 늦가을의 서늘한 공기가 안으로 들어와 소년의 얼굴을 식혀주었다.

“선배, 다시 물어볼게요. 저 싫어요?”

“……이 타이밍에 그 질문은 비겁하지 않아?”

“이 타이밍만큼은 지기 싫어서 그래요.”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솔직히 앞으로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순순히 인정하긴 싫었다.

“할 수 없지. 오늘은 공부만 가르쳐주고 바로 갈 거야.”

“선배, 제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닌데요.”

소년은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에이. 부끄러워하기는.”

소녀는 소년에게 달라붙어 팔짱을 꼈다. 본인은 볼 수 없었지만 소년의 귀가 조금 빨개져 있었다.

‘하여튼 너무 귀엽다니까.’

그녀는 정말 공부만 가르치고 가버릴 것이 뻔한 소년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있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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