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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꽃이 피는 세상
글쓴이: 미카엘대공
작성일: 15-08-10 23:53 조회: 1,131 추천: 0 비추천: 0

 

  간밤에 또 꽃이 피었다.
  밤하늘은 별 하나 없는 칠흑이었고 사방은 캄캄했다. 자는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소리를 낮추어 옅은 빛(Dim Light) 주문을 영창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보라색 꽃이 유유히 흔들렸다.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꽃을 뽑은 뒤 비밀 화원에 가져다 심었다. 남은 뒷처리까지 끝내자 시계는 벌써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불 꺼진 기숙사에 활기찬 기상 노래가 울려퍼졌다. 숲 너머 회색산맥으로부터 아침 태양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미칠 듯이 졸리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이제 곧 등교시간이 시작된다. 말이 등교지 사실상 그냥 놀러나오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규칙은 지켜야 한다. 특히 그게 나라면 더더욱.
  나는 학생회장이니까.
 
 ========================================================================
 
  "Hello, Bonjour, おはよう, Gueten Tag! 안녕하십니까-?! 다들 맛난 식사들 하고 계신가요? 오늘 아침시간에도 어김없이 시작된 파울의 매지컬 펀펀 토크쇼! 진행자를 맡은 학생회장 파울 드 알론소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어, 고작 이름만 말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환호성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 하군요! 하하, 이놈의 인기란! 하지만 아무리 제가 좋아도 패밀리어로 러브레터를 보내는 건 이제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읽어도 읽어도 줄지 않을 정도로 감당 못하게 쌓여버렸거든요! 네? 거짓말하지 말라고요? 아무도 안 그랬다구요? 나 참, 벌써부터 시기와 질투와 모함이 들어오다니 감당할 수가 없네요! 하핫!"
 
  앰플리파이어(Amplifier)를 앞에 두고 목소리를 높이자, 눈앞의 수정구에 귀를 힘껏 막고 불평을 쏟아대는 학생들의 모습이 비춰졌다. 개중에는 도저히 참지 못해 음소거(Mute) 마법을 시전하려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될 리가 있나. 식당은 마법 사용 금지 구역이다. 그래서 내가 항상 일부러 식사시간을 택해 방송을 하는 거고. 
 
  "시끄러 임마! 밥먹을 땐 좀 조용히 해!"
  "말씀드리는 순간 누군가의 항의가 들려왔습니다! 밥먹을 땐 좀 조용히 하라는데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서야 되겠습니까? 누군진 몰라도 앞으로는 목소리 크기를 조금 줄여주시면 좋겠네요! 누군진 몰라도 말입니다! 근데 왠지 멋지고 잘생기고 인기도 많은 사람일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블루하트 왕립 마법 아카데미 (Blueheart Royal Academy of Wizardry).
  학생 총원이 2,087명에 달하는, 밝고 평화로운 우리들의 학교. 나라 예산의 10%에 달하는 거금을 쏟아부은 장소라 그런지 시설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당장 방송실만 봐도 100배율 앰플리파이어는 기본에 학교 전 장소를 볼 수 있는 수정구, 심지어 고성능 레코더까지. 입 터는게 특기이자 취미인 나로서는 여기만큼 이상적인 장소도 없을 정도다.
  좋아서 있는 건 아니지만.
 
  "에, 좀 더 여러분과 활발한 의견 교환을 하고 싶습니다만, 시간 관계상 오프닝은 여기서 끊겠습니다. 정말 너무너무 아쉽네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우우!) (지랄하지 마!)
  킥킥, 여하튼. 자 다음 코너는, 역시 언제나처럼 1빠로 시작된 스쿨와이드 모닝 뉴-스! 평온하기만 한 것 같았던 어제 하루도 역시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요. 개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화제의 인물은 다름아닌 2학년 B클래스의 사라 오스틴 양! 제보에 따르면 사라 양은 놀랍게도 어제 정오경 드디어 국소위치지정 컨트롤 파이어볼의 시전에 성공했다고 하는데요! 이건 다시 말하면, 드디어 우리 사라 양이 2년만에 4서클에 진입했다는 의미겠죠! 아, 저기 쑥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라 양이 있네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 한번씩 부탁드립니다! 와아아! 짝짝짝!"
 
  학생들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지더니, 곧이어 우레와도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 시리얼을 폭풍 흡입하기 시작한 사라 양의 모습이.
  아아, 아름다워라. 그래, 이런 낙이라도 있으니 계속 회장 노릇 하는 거지.
 
  "자, 그럼 다음 소식입니다. 어제 시이나 칼렙스 양이 제게 따로 찾아와 '대책회의실'에 들어가고 싶다고 문의를 해왔습니다. 원래 시이나 양 정도의 실력으로는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입니다만... 아, 죄송합니다. 비하하려는 건 아니고요! 뭐 그래도 다행히 선생님들께서 시이나 양의 열의를 높이 사셨는지라 이번만큼은 특별 케이스로 참가를 허락해 주셨다네요! 정말 잘됐지 않나요?
  다만 앞으로 시이나 양의 모습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유감입니다만... 그래도 그만큼 열심히 철야를 해가면서까지 상황을 타파하려고 노력하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이나 양의 용단에 모두 박수 한번씩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한번 분위기를 띄워 놓고 나니 이어지는 박수도 훨씬 잘 터져나왔다.
  휴우. 어쨌든 가장 큰 문제거리가 잘 해결됐군. 앰플리파이어에서 고개를 돌린 채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다음 소식입니다만. 이야, 이것 참, 제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러운 정보네요. 하지만 역시 언급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겠죠! 3학년 A클래스의 모범생이자 제 소꿉친구인 라일라 플로린 양에 대한 소식입니다! 평소 그 아름다운 외모와 고고한 마법 실력에도 불구, 고백해오는 남성들을 죄다 차버린 것으로 유명한 그녀인데요! 헌데 놀랍게도 최근엔 어떤 남성에게 반대로 구애를 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과연 분에 넘치는 영광을 쥔 그 남성 X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바로..."
 
  잠시 숨을 멈추고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예상대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곧이어 벌컥 열리는 문.
 
  "이 미친 자식이! 당장 헛소리 안 집어치워!? 누가 넘어갔다는 거야?!"
  "아아니?! 말씀드리는 순간 화제의 장본인인 라일라 양이 난입해왔습니다! 게다가 뒤에는 수많은 추종자들의 무리까지?! 이럴 수가! 언론 탄압의 현장입니다, 여러분!"
  "말도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들어주지! 어디서 공개적으로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어! 너 일로 안 나와?! 야!"
  "하지만 저는 이러한 외압에 굴하지 않습니다. 제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선서하건대, 파울 드 알론소는 언제나 거짓 없는 진실만을 방송할 것임을 약속합니다! 비록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아 이쯤에서 방송을 종료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여러분께 진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파울의 매지컬 펀펀 토크쇼 여기서 마칩니다. 모두 아디오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삑.
  앰플리파이어의 표시등으로부터 초록색 불빛이 사라졌다. 방송 종료. 이제 그 어떤 목소리로 이곳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분에 차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씩씩거리는 라일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는 몸부림치는 라일라를 붙잡고 난동을 막는 서너 명의 동급생들.
  나는 앉아있던 의자를 빙글 돌리고 미소지었다.
 
  "자, 그래서 무슨 일들이야? 어디 불이라도 났어? 아니면 드디어 나한테 고백하려고?"
  "집어치워! 몰라서 묻냐?! 이 나쁜 자식! 어디서 되도 않는 헛소문을......!"
  "아, 그것 때문이야? 미안미안~ 아무래도 제보 위주로 진행하다보니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어서. 화 풀어. 뭣하면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줄까?"
  "뭐?! 이 개자식이 진짜...!"
 
  라일라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팔을 붙잡은 여학생이 그녀를 제지했다.
 
  "라일라, 잠깐만! 진정해! 우리 이러려고 온 거 아니잖아! 우선 방송을..."
  "방송이 뭐?"
  "아..."
 
  라일라와 그 무리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나는 씩 웃었다. 앰플리파이어의 전원은 꺼졌다. 방송은 끝났다. 그것도 어색하게 중단된 게 아닌, 어디까지나 외압이라는 명분에 힘입어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꺼진 방송장비는 학생회장인 나 이외에는 누구도 활성화시키지 못한다. 
 
  "설마 하이재킹을 노렸던 건 아니겠지? 뭐 우리 착한 모범생 라일라 플로린 양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진짜진짜 만에 하나 그럴 속셈이었다면 거 참 아쉽게 됐네. 이걸 다시 켤 수도 없고 말이지. 켠다고 해도 협박받아서 그렇게 됐다-라는 모양새가 되지 않겠어?"
  "이런 능구렁이 같은...!"
 
  라일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뭐, 시도는 좋았다고 칭찬해줘야 하나. 하지만 방송실에는 수정구가 있단 말이지. 기왕이면 밀고들어올 때 감시장비에 걸리지 않도록 투명화(Invisibility) 마법이라도 걸고 들어왔으면 좋았을 것을. 어쩔 수 없는 경험의 차이다.
 
  "당장 방송 다시 켜."
  "그럴 순 없겠는데."
  "당장 켜! 이 거짓말쟁이 자식아!"
 
  라일라가 내 멱살을 잡았다.
 
  "시이나가 대책회의실에 들어가?! 웃기는 소리도 정도껏 해! 성적 1위인 나조차도 만나면 엎드려 절해야 할 대마법사들이 즐비한 곳에 시이나가 끼어들어간다고?! 말이면 다야?!"
  "라일라, 방금 그 발언은 좀 도를 넘은 것 같은데? 세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 시이나를 지금 디스하는 거야? 아무리 너가 천재라고 해도 그런 말은..."
  "할 수 있지! 시이나는 우리 동료였으니까!"
 
  응? 뭐라고?
  라일라가 씩씩거리며 자신을 붙잡은 학생들을 떨쳐냈다. 그리고 놀란 내 얼굴을 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네. 하지만 사실이야. 시이나도 네 가식적인 언론 플레이를 의심하던 사람들 중 하나였거든?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평소 - 이런 말 하긴 좀 미안하지만 - 마법 실력도 특출나지 않았던 중위권 정도의 학생들이 갑자기 대책회의실 멤버로 선발되어 불려나간다?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그리고 일단 들어가면 연구에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나올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나뿐만이 아냐.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의심을 했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무언가 잘못됐다고. 그래서 한 가지 약속을 했지. 만약 우리들 중 누군가가 새로 '대책회의실'의 멤버로 선발된다면, 떠나기 전에 미리 그 사실을 알려주고 가자. 그게 불가능할 것 같으면 그냥 제의를 받아도 거절하고 도망쳐나와라."
  "......"
  "그런데 시이나는 사라졌지. '우리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은 채'. 변명할 게 더 있나, 파울?"
 
  라일라가 윽박지르듯이 말했다. 진실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는 눈. 좋은 눈이다. 자칫 넘어가버릴 정도로.
  하지만 나는 그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 점에 대해선 내가 뭐라 해줄 말이 없겠는데. 시이나는 대책회의실 멤버로 발령되어 들어갔어.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 5층 골방에 틀어박힌 영감님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몰라."
  "너... 그게 지금 변명이 된다고 생각해?"
  "못 믿어도 할 수 없지. 나는 정말로 아는 바가 없으니까."
 
  빠득, 라일라가 이를 갈았다.
  라일라의 손에서 다시금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5층을 개방해. 당장."
  "못해."
  "너라면 할 수 있잖아? 학생회장은 학교 시설의 전권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었어?"
  "그럼 내가 어휘 선택을 잘못했군. 못 하는게 아니라 안 해."
  "우리에겐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
  "하지만 학생회장을 협박할 권리는 없지. 떼쓰지 마, 라일라. 폭력을 휘두를 셈이야?"
 
  내 말에 라일라는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과연 모범생. 진심으로 남한테 위해를 끼칠 수는 없다 이건가. 착한 아이 답다.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라일라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너가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진실을 알아낼 거야. 포기란 없어. 진리를 추구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마법사로서의 삶은 끝이니까. 반드시 너가 쥐고 있는 걸 파헤쳐주고 말겠어."
 
  라일라의 눈빛이 바뀌었다.
  적의가 가득 담긴 불타는 눈도, 싸늘하게 쏘아보는 차가운 눈도 아니다. 눈앞의 역경과 고난을 반드시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깃든 눈. 일찍이 꿈과 이상을 좇아 인류를 도약시키려 했던 내 할아버지가 지녔던 눈.
 
  "...뭐, 잘 해봐."
  
  그런 그녀에게, 난 그저 히죽 웃으며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일주일,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학교 바깥에서 안쪽으로 쏘아져오는 투사체의 갯수가 늘었다. 목표는 주로 학교 5층의 창문. 아무래도 창문을 깨서 그 틈새를 통해 5층으로 침입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이미 그 정도는 예상했어서 말이지. 미리 취약한 부분 전부에 강화마법을 걸어놓은 덕에 외부로부터의 충격은 쉽게 버텨낼 수 있었다.
  다음은 4층이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천장의 일부가 함몰되거나 녹아내리는 기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증언에 의하면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밤의 학교에 난데없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일단 쓸데없는 헛소문을 방지하기 위해 5층에서 뭔가 떠들썩한 실험을 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둘러댔다. 4층 천장과 5층 바닥 모두에 이중으로 강화마법을 걸어주자 곧 파괴시도도 사라졌다.
  그 다음에는 학교 앞마당에 커다란 구멍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이건 나도 뭔지 모르겠다. 굴착(Dig) 마법을 썼다는 것까진 알겠지만 대체 뭐하러 그런 시도를 한 걸까. 대책회의실은 지하가 아니라 5층에 있는데 말이다. 본인들도 무익함을 깨달았는지 한 두어 번 시도한 이후로는 더 이상 구멍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혼자 뭐해?"
 
  새벽 1시, 아무도 없는 복도에 대고 나는 말을 걸었다.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짐짓 머리를 긁적였다.
 
  "있잖아... 보는 눈을 피하기 위해 투명화를 시전한 것까진 좋은데, 그거 소리는 못 숨기거든? 분명 여기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 걸 들었는데 왜 시치미를 떼려고 해. 투명화 간파 (See invisibility)."
 
  캐스팅을 마치자, 아무도 없었던 복도에서 거짓말처럼 라일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당혹감과 수치심이 반쯤 섞인 표정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소리는 최대한 안 내려고 노력했는데."
  "예리한 감각(Keen Senses) 마법으로 청각을 강화했어. 허용마력을 전부 투자해서 가청범위를 있는 대로 늘렸고. 아마 지금 난 여자 기숙사 샤워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껄?"
  "...비유가 참 뭣같네."
 
  라일라가 팔짱을 꼈다.
 
  "그래서 어쩌려고? 날 무력으로 제압해서 데려가게?"
  "되겠냐. 마력을 전부 투자했다니깐? 게다가 내가 온전한 몸 상태라도 너한테는 못 이겨. 빌어먹을 천재 녀석."
  "그러면?"
  "뭐 있겠냐. 긴긴 밤 외로울 텐데 얘기나 하자. 어차피 그 철문에 걸린 잠금마법은 너라도 못 뚫을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직접 설치한 거니까."
  "그건 모르는 거야."
  "아, 그러셔. 그래도 어쨌든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
 
  나는 그대로 복도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일라는 그런 나를 모른체한 채 자물쇠를 해제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30분. 한참을 자물쇠랑 씨름하던 라일라가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차가운 복도에 그대로 주저앉아 드러누웠다.
 
  "도저히 못하겠어.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야, 이 자물쇠는?"
  "우리 할아버지 작품이니까. 블루하트 왕립 마법학교 교장. 마법으로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유일한 대마법사."
 
 잠시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곧바로 지웠다.
 
  "뭐, 그것도 옛말이지만."
  "......"
 
  침묵이 흘렀다.
  옆을 곁눈질해보니, 라일라는 적당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애쓰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데 말이다. 분위기가 어색해져도 나로서는 크게 상관은 없는데.
  잠시 후, 라일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있잖아, 파울."
  "응?"
  "너는, 너희 할아버지에 대해서,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냐고?"
  "으......"
 
  라일라가 우물쭈물하며 뒷말을 흐렸다. 나 참, 고작 그거 물어보면서 그렇게 긴장하냐? 별것도 아닌 질문이구만.
  나는 어깨를 쭉 펴고 복도 담장에 기대어 섰다. 창문 밖의 나뭇가지 사이로 초승달이 문득 비쳐 보였다.
 
  "좋은 사람이었지."
 
  일단, 그런 촌평으로 운을 띄웠다.
 
 "뭐, 다른 사람들은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이라며 저주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그래.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진짜 어린애였던 나보다도 더 아이같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마법사는 본래 다 괴팍하다는 편견이 있지만, 그 사람만큼은 정말 누구보다도 순진했어.
  기억나? 한 6년쯤 전인가. 너랑 나랑 할아버지 실험실에 둘이서 처음 놀러갔을 때. 그때 할아버지는 사과에 일부러 애벌레가 꼬이게 하는 마법을 개발하고 계셨잖아. 내가 대체 왜 그런 괴상쩍은 마법을 개발하느냐고 물으니 할아버지가 그러셨지. 
  '어차피 사과는 벌레가 아주 조금이라도 파먹어도 사람이 못 먹게 되지 않느냐. 하지만 그렇다고 사과에 벌레가 아예 꼬이지 않도록 하면 벌레는 무얼 먹고 살란 말이냐. 그러면 아예 발상을 바꿔서 사과 하나를 벌레들이 잔뜩 파먹도록 놓아두면 어떨까. 그 사과에는 벌레들이 잔뜩 꼬이겠지만 다른 사과들은 안전하게 팔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었어. 뭐랄까, 바보처럼 쓸데없이 착하다고 해야 되나. 정작 청과상들은 그냥 부패방지 마법 걸어놓고 걱정 없이 잘만 사는데 말이지.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괜히 남을 돕지 못해 안달나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또 괜히 낙담하고...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선 피곤하지. 이건 뭐 나무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달래주자니 까다로우니 말이야."
  "......"
  "항상 어중간했어. 능력 문제가 아냐. 오히려 마법실력만큼은 누구나 인정하는 당대 최고셨지. 문제는 결과물이 항상 영 마뜩찮았다는 거야. 사과에 벌레가 꼬이는 마법 같은 걸 누가 쓰고 싶겠어? 그런 거야. 일종의 징크스라고 해야 하나. 그분이 열정을 갖고 임하는 일은 언제나 끝이 영 깔끔하지 못했거든.
  이번에도 그래. '세상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법' 이라니, 세살 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뭐야 그게? 그런 꿈은 보통 나이가 두 자릿수가 되는 순간부터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잖아. 그런데도 그걸 '평생의 꿈'이라면서 간직하고 있었단 말야. 바보같게도.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말릴 수 없었어. 우스운 이야기지만... 빛나 보였거든. 사람의 눈동자를 보고 경외감이란 걸 가졌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티끌 하나 없는 고귀한 열망. 순수한 이타심. 그런 건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거야.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라일라가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녀도 나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래뵈도 10년을 넘게 이어져온 인연이니. 비록 지금은 입장의 차이 때문에 대립하고 있지만, 그녀 역시 내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은 나 못지 않으리라.
 
  "있잖아, 나는..."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너가 달라진 줄 알았어."
  "뭐가?"
  "옛날의 너는, 뭐라고 해야 되나, 좀 더 인간적이었거든. 기쁠 땐 기뻐하고, 슬플 땐 슬퍼하고,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는 화를 내고.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잖아. 너도 분명 그랬단 말야.
  그런데 요즘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어. 분명 파울이라는 사람은 내 앞에서 똑같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는데, 도무지 그게 옛날 그 파울과 동일인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거야. 가면을 쓴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해도 나는 알 수 있어. 벌써 10년을 넘게 같이 지냈잖아. 어쩌면 그것 때문에 더 화가 났던 걸지도 모르겠네. 살아온 세월의 반을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에게도 공유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잖아."
  "그런가... 그럼 지금은?"
  "모르겠어. 나도 헷갈려. 넌 누구야?"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나는 빈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쩌면 너무 많이 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네 말이 맞아. 지금 난 옛날의 파울이 아냐.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무슨 소리야?"
  "그야 너는 모르겠지. 너는 천재잖아. 홀로 존재해서 홀로 완성되는 천재. 네 삶에는 딱히 외부의 도움이 필요 없어. 그냥 마법을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그러면 되는 거야. 그걸로도 충분하지. 사실 너뿐만이 아니라 여기 학생들 모두가 그렇긴 해.
  하지만 난 달라. 나는 학생회장이야. 학생회장이란 건 학생 없이는 존재할 수 없어. 나는 너희들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의미를 가져. 라일라가 성립되기 위해선 라일라 혼자만으로 충분하지만, 파울이 성립되기 위해선 블루하트 재학생 2,087명 전원이 필요한 거야. 따라서 나는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너희 2,087명을 지킬 의무가 있어. 그게 위치에 따른 책임의 차이라는 거야. 특히 이런 정신나간 세계에서는 더더욱 중요한."
  "......"
 
  라일라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언뜻 훔쳐본 그녀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이러면 안 좋은데.
 
  "라일라. 너 위험해 보이는데. 혹시 우냐?"
  "설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님 됐고."
 
  곧바로 되받아치는 걸 보니 기운은 쌩쌩하군. 그나마 다행이다. 어쩌면 그냥 오기일 수도 있으니 아직 안전한 정신상태라고 보기엔 미묘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몸을 돌려,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그냥 웃으란 거야. 너무 심각해하지 말고."
  "......?"
 
  라일라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가끔씩 살다 보면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가 있거든. 이건 어쩔 수 없어. 아예 뇌를 비우고 살지 않는 이상 꼭 한번씩은 슬픔의 파도가 밀려올 때가 있으니까. 그럴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충고는, 그냥 웃으라는 거야. 그러면 돼.
  아까 인간다운 것으로 희노애락을 논했지? 그런데 그거 알아? 그 4가지 감정을 전부 표현할 수 있는 표정이 딱 하나 있다는 거. 그게 바로 웃음이야. 사람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즐거울 때도, 심지어 화가 났을 때도 웃을 수 있어. 뭐, 몇몇 웃음의 의미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웃음은 만국공통어야. 어디다 갖다붙여도 어색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웃어. 최대한 웃어봐. 언제나 삶의 밝은 면을 보려고 노력해.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시련과 마주하게 되면, 입꼬리를 최대한 올리는 거야. 그리고 반대로 더욱 더 쾌활하고 활기차게 떠들어대는 거지. 그렇게 웃으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새 걱정거리는 싹 사라지고 기쁨만이 네 곁에 남아 있을 테니까. 
  날 봐. 웃기 시작한 뒤로 얼마나 사람이 좋아졌냐. 성적도 오르고 얼굴도 잘생겨지고 인기도 많아지고..."
  "풋."
 
  라일라가 실소했다.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녹음해서 평생 옆에 놓아두고 듣고 싶을 정도로.
 
  "너가 하고 싶은 말은 잘 알겠어. 확실히 효과가 있네. 벌써부터 웃음이 나오다니."
  "...그건 좋지만, 사람이 말하는데 웃는 건 조금 화가 나는 면도 있는데."
  "아하하!"
 
  라일라가 '읏쌰-!' 하는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던 자물쇠를 내버려둔 채 현관으로 가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오, 드디어 포기했어? 그것 참 다행..."
  "그럴 리가. 내가 말했잖아. 포기하지 않는다고."
 
  뭐야, 괜히 좋아했네.
 
  "하지만 네 말은 잘 알겠어. 너가 뭘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모두 학생회장으로서 우리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는 거지? 그건 좋아. 난 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좋아하니까."
  "오, 방금 그거 뭐냐. 고백? 크, 드디어 라일라가 나를..."
  "하지만!"
 
  라일라는 내 헛소리를 들어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 나는 마법사니까. 우주의 진리를 파헤치고 세계의 법칙을 찾아내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마법사. 진실의 추구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자 내 존재 목적이야. 누구도 이걸 막을 순 없어. 설령 너라고 해도 말야."
  "...내가 평생의 부탁이라고 애원해도 안 돼?"
  "안 돼."
 
  라일라는 칼같이 내 청원을 거절했다. 그러나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뭐, 네 입장도 이해는 해. 그러니 앞으로는 동료니 뭐니 해서 다른 학생들을 끌어들이거나 하지는 않겠어. 이건 순전히 내 일이니까. 그것만큼은 약속할게."
  "......거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구만."
 
  어쨌든 나한테 계속 저항은 하겠다는 거잖아, 요 맹랑한 아가씨야. 절반의 성공이라고 순순히 기뻐해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물론 나도 라일라를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은 다 할 테지만, 과연 저 천재 녀석을 끝까지 막을 수 있을지는...
 
  "그리고 충고 고마워. 웃으란 말이지. 노력해볼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부디 그래줬으면 좋겠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
  왜냐면 너는 웃는 모습이 제일 예쁘니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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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밤에 또 꽃이 피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라일라가 일을 저질렀다. 그것도 내가 상상조차 못했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수정구의 기록에 의하면 비행(Fly) 마법을 통해 옥상 쪽으로 침입한 모양인데, 문제는 옥상 부근은 마법 금지 구역이라 일정 이상 날아서 접근하면 마법이 풀려 추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쪽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라일라는 그걸 커다란 매트릭스에 소형화(Shrink) 마법을 걸어서 들고 오는 것으로 해결한 듯 했다. 플라이 마법이 풀리면 몸이 추락하겠지만, 동시에 매트에 걸린 소형화 마법도 풀리기 때문에 그 위에 올라탄 채로 떨어지면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다- 뭐 그런 논리인 거다. 실패하면 그냥은 안 끝나는 도박수인데도 망설임 없이 감행한 걸 보면 역시 라일라는 라일라라고 해야 하나.
  뭐 일단 옥상에 들어오는 데까지 성공했다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겠지. 나 역시 위쪽에서 들어오는 루트는 생각도 못했기에 그다지 방비를 해두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다.
 
  "......"
 
  라일라는 마치 잠든 듯 그곳에 누워 있었다. 볼을 콕 찌르면 금방이라도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날 것처럼. 하지만 라일라의 가슴께에는 익숙한 모양의 붉은색 꽃이 피어 있었고, 그것으로 상황 종료였다. 
  라일라가 어떻게 이러한 결말을 맞게 되었는지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옥상을 통해 내려온 라일라는 아마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주변 환경에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분명 대책회의실에선 철야를 하면서까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을 텐데 말이지. 그렇게 초조함을 품은 채로 대책회의실 문을 열어젖힌 라일라는, 결국 이 아무도 없이 적막한 빈 공간을 보게 되었으리라.
  어쩌면 라일라는 거기서 이미 돌아가는 꼴을 대강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똑똑하기로는 비할 바 없는 녀석이니. 그러나 설령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할지라도 책상 위에 널부러진 연구일지를 본 순간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왜 선생님들과 학자들이 총집결해 있어야 할 대책회의실에 아무도 없는지를 대충 눈치채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곳의 개방을 기를 쓰고 막으려 했던 이유도 대충 알게 됐겠지.
  그럼 거기서 끝이다. 나야 이미 익숙해졌으니 괜찮지만, 라일라가 그 압도적인 절망을 견딜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최대한 웃으라고? 말이야 쉽지, 그게 자연스럽게 됐으면 세상에 고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법'이라..."
 
  논리의 힘은 위대하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는, 바꿔 말하면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살지 않는 세계'가 된다. 실로 악마나 킬킬댈 법한 말장난이었지만 이 세계는 그렇게 되었다. 행복하지 않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이곳에서 튕겨져나간다. 절망하면 죽는다. 우리 할아버지의 작품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몇 명이 순간적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정도였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친척들 역시 시체를 본 순간 '절망'했고, 장례식장에는 갑자기 새로운 시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연쇄가 계속되자 국가 역시 현 상황을 비상사태로 선포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사태의 원인이자 유일하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저주에 이미 '절망'한 뒤.
  아아, 할아버지 당신은 진실로 위대한 마법사셨다. 그가 남긴 최후의 마법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악마의 고리였고, 전국에서 모인 내노라하는 대마법사들 역시 그 난해함에 '절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단에서 한번 시작된 감정의 동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 분주하던 대책회의실에 말소리가 끊긴 것은 한순간이었다.
  살아남은 것은 나뿐.
 
  "......"
 
  라일라의 가슴에 뿌리내린 붉은 꽃을 조심스레 뽑았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심장에 꽃이 피어서 죽는다는 건 어쩌면 최고로 로맨틱한 죽음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익사 소사 질식사... 뭐 이런 것들보단 낫잖아? 어쩌면 화사(花死)한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낙원이 따로 존재할지도 모르고 말이지.
  뽑은 꽃은 비밀 화원에 가져다 심었다. 그리고 화염구 마법으로 라일라의 시체를 태운 뒤 그 뼛가루를 꽃 주변에다 솔솔 뿌려주었다. 이건 내 나름대로의 의식이다. 별로 도움은 안 되는, 어찌 보면 자기만족의 요식행위에 불과하지만.
  남은 뒷처리까지 끝내자 시계는 벌써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불 꺼진 기숙사에 활기찬 기상 노래가 울려퍼졌다. 숲 너머 회색산맥으로부터 아침 태양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
 
  나는 가만히 돌 위에 걸터앉아, 어둠빛 하늘 위로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밤을 지새우는 모든 존재는 새벽에 대한 공포심을 느낀다. 영원히 검을 것만 같았던 하늘이 날 선 푸른색으로 변해갈 때, 그리고 그 속에서 일상 속의 건물들이 낯선 빛깔로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람은 무한한 이질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새벽은 운명처럼 진군해 들어오는데, 나는 그 변화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운 것이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새벽녘의 깊은 푸른색. 어쩌면 나는 이 경외감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죽음에 슬퍼하고, 다가올 새로운 죽음을 두려워하던 먼 옛날을.
  하지만 이제 그럴 수는 없다.
  나는 학생회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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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llo, Bonjour, Gueten Tag, おはよう! 안녕하십니까-?! 어라, 인사 순서가 좀 바뀌었나? 뭐 아무렴 어때. 여튼 다들 맛난 식사들 하고 계신지요? 여러분에게 행복을 전해드리는 파울의 매지컬 펀펀 토크쇼! 정겨운 아침시간의 친구! 오늘도 어김없이 힘차게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오늘도 시작 부분은 조금 농담따먹기를 하면서 보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럴 수가 없게 됐네요! 어제 저녁 정말 빅 뉴스가 도착했거든요! 다름아닌 대책상황실로부터의 알림인데요. 여기 쓰인 말에 의하면 현 사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열쇠가 되리라고 보았던 알론소 경의 연구일지가 드디어 1차적으로 해독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완전 해결이라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큰 진전을 보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죠? 모두 5층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을 위해 큰 박수 한번씩 부탁드립니다!"
 
  와아아-!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함성과 박수 소리. 식당의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뻐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아예 식판을 던져대며 환호하는 녀석도 보인다. 이왕이면 어지르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 다들 정숙, 정숙! 거기 난동부리는 너! 2학년 C클래스 그레이 슈미트! 그래 너 말이야. 자꾸 말썽피우면 너가 지난 7일 월요일 6시 30분에 체육관 라커룸 앞에서 했던 짓을 까발릴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학생회장이니까요! 하하! 월권이라고?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정당한 의무 행사랍니다!
  에, 여하튼 두번째 뉴스입니다. 아마 남학생들 여러분은 벌써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라일라 플로린 양이 시이나 양에 이어 추가로 대책회의실 멤버로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 연속으로 여자만 뽑히다니 솔직히 좀 질투가 나네요! 저도 솔직히 진정한 실력을 발휘하면 그 둘 못지 않은데 말이죠... 방금 야유한 놈 누구야?! 가만 안 둔다 임마!"
 
  푸하하, 깔깔깔,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순진무구하고 밝은 웃음. 불안이나 절망의 흔적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웃음. 나를 지탱해주는 바로 그 웃음.
  그래, 나는 이곳에 있다. 폭풍이 몰아치는 세계에 남은 최후의 불씨를 지키기 위해. 벼랑 끝에서 밀려 떨어지는 아이들을 구하는 마지막 파수꾼이 되기 위해. 언젠가 찾아올 기적을 기다리며, 그때까지 모두를 인도하기 위해 이곳에 서 있다. 
  그러니 웃자. 웃어넘기고 웃어넘기고 웃어넘겨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우리네 삶에 기쁨만이 가득하도록, 항상 희망만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자.
  우리에게 행복하지 않을 권리가 주어지는 그 날까지.
 
  "이상, 파울 드 알론소의 매지컬 펀펀 토크쇼였습니다. 모두 아디오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학생 총원 2,086명.
  이곳은 밝고 평화로운 우리들의 학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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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1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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