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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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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멍청이 이야기
글쓴이: iCaNiT.A.Cho
작성일: 15-07-22 00:03 조회: 1,093 추천: 3 비추천: 0

 

# 01.

우리는 그를 박멍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죠. 그가 멍청했기 때문입니다. 또 박 씨만큼 멍청이라는 단어가 깔끔하게 달라붙는 성씨가 없었어요. 김멍청, 이멍청, 조멍청, 황멍청. 그 어떤 성 씨도 박멍청만큼 입에 달라붙는 건 없더군요. 획 하나만 빼도 빅Big멍청으로 바뀌기까지 합니다. 마치 맞춤옷처럼 그에게 꼭 맞는 별명이었죠.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원래 별명이라는 건 유대감 형성에 좋은 영향을 끼치거나 친분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누가 그런 목적으로 별명을 붙이겠습니까? 적어도 학창시절의 우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거 왜 사내들끼리 흔히 그러잖아요? 친근감에서 우러나오는 짓궂은 무언가 말입니다. 물론 그건 이 사람이 내 친구다라는 안도감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릴 적 서로에게 별명을 붙일 때 그런 거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럴 시간에 우리는 박멍청의 행동을 멍청한 짓이라고 단정지어버리는데 집중했습니다. 한 놈이 놀림감이 됨으로써 그냥 웃고 즐기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 역시 그랬고, 우리는 저마다 우스꽝스런 별명이 하나씩 붙었죠. 전 작은놈이었고요.

아무튼 실제로 박멍청이 멍청했던 것은 아닙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시험으로 전교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고 대학도 우리 중에서는 나름 명문대학으로 제일 잘 갔습니다. 그는 그때마다 웃음을 지어보였는데 그게 그렇게 멍청해 보일 수 없었습니다. 군대에서는 문제가 좀 있었던 것 같지만 우리는 그것마저 그가 멍청해서 그렇다고 결론지어버렸. 박멍청은 멍청하게 2년을 잘 버텼고 멍청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제대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리끼리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조롱인 동시에 격려이기도 했으니까요.

 


# 02.

쓸데없는 이야기라뇨? 그쪽에서 편하게 박멍청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한 것뿐입니다. 그쪽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지 모를 만큼 전 멍청이가 아니니까요.

두 달쯤 되었습니다. 박멍청에게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죠. 똑똑히 기억합니다.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회사 관두려고.

그의 멍청함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힘겹게 들어간 회사였으니까요. 이름만 말하면 다 아는 그곳입니. 그런데 거길 관두겠다니. 저는 의아함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멍청해진 이유가 무엇일까. 지난번에 헤어졌다는 애인 때문일 수도 있었고 심심해서 질러본 로또가 당첨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선 걱정이 앞섰습니다.

나 지금 바쁘거든? 내가 전화번호 하나 보내줄 테니까 거기로 연락해. 나중에 보자.

통화를 마친 저는 그의 휴대폰으로 할아버지가 치매 예방을 위해 다니시던 정신병원 연락처를 남겼습니다.

얼마 후, 우리는 단골 술집에 모였습니다. 다들 짬을 내어 오랜만에 마련한 술자리였고 박멍청은 언제나처럼 시답잖은 농담에 웃어재꼈습니다. 정신상태가 악화되었다던가 하는 이상한 점은 딱히 보이지 않았죠. 제가 평소대로의 멍청함에 안도하고 있을 때, 그는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나 회사 관두려고.

우리 테이블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몇 년 전 그가 강기갑을 보고 이외수와 헷갈렸을 때보다 더 큰 웃음이었죠.항의가 들어올 듯 요란했지만, 마침 술집에는 우리뿐이었습니다.

진짜야. 다음 주에 그만둘 거야.

웃음은 잦아들었습니다. 그는 멍청하면 멍청했지 거짓말을 우길 놈은 아니었거든요.

로또 맞았냐?

걔랑 헤어져서 그래?

, 새로 차였을 수도 있잖아.

다른 녀석들 역시 생각하는 건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사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웃더군요. 청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순간이동 할 수 있다.

 


# 03.

한 번 가정해보십시다. 어느 날 개구리로 변하는 능력이 생겼다고요. 그 유명한 동화 속 개구리 왕자처럼 말입니다. 물론 저나 당신이 그렇게 잘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압니다. 혹시 애인이나 부인이 공주이십니까? 전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그렇다고 칩시다.

과연 뭘 할까요? 아마 저라면 조금 집안을 폴짝거리면서 돌아다닐 겁니다. 텔레비전 스크린 위에 앉아서 유명한 광고 흉내도 내보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컴퓨터 본체 옆에 붙어서 찜질도 좀 하겠죠. 그러다가 창밖에 붙은 파리를 보곤 입맛이 싹 사라져서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전 사람인데 그걸 어떻게 먹습니까? 그리곤 가끔 심심할 때 그렇게 혼자서 놀겠지요. 아무도 모르게. 이게 포인트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나 순간이동 할 수 있다.

그런데 박멍청은 멍청하게도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앞에서 사라져보였단 말입니다. 정말 자기 말마따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요. 우리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죠. 정신을 차리고 술집을 둘러봤지만 주방에 있는 주인 이모 외에는 우리가 전부였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술집을 나와 그럴 찾아 돌아다녔고 옆 건물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죠.

끝내주지?

우리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긴, 어느 누가 그 상황에서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싶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습니다. 확실한 건 그가 제 옆으로 순간이동을 해 담배연기를 내뿜었을 때에는 한 대 치고 싶었다는 겁니다. 주먹을 날렸지만 그는 곧장 3미터쯤 떨어진 자리에 나타나더군요. 마술 프로그램을 즐겨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회사를 관둘 거야?

제가 콜록거리면서 묻자 박멍청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이걸로 사업하려고.

무슨 사업?

배달.

전 제 귀가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드디어 멍청하다 못해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순간이동을 쓸 줄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이 고작 배달업을 시작하겠다니? 저라면 은행에서 돈이라도 빼왔을 겁니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있는데 이런 상상 누구라도 할 거 아닙니까.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닥치면 제 생각처럼 하기는 힘들겠지요. 그래도 배달업이라니, 정말이지 멍청한 소리 아닙니까?

정신 나갔냐? 멀쩡한 회사 놔두고 뭐? 배달?

조금 전에 봤잖아. 끝내준다니까 이거. 무조건 성공해.

성공은 개뿔. 아침 회의 때 지각 안 하는 용도로나 쓰면 되지 뭔 놈의 배달이야?

아냐. 된다니까?

우리가 아무리 만류해도 그의 대답은 변할 줄을 몰랐고, 결국 그는 배달업을 시작했습니다. 정말 멍청했죠.

 


# 04.

짐작하셨겠지만 처음엔 순탄치 않았어요.

크고 작은 기업을 대상으로 홍보를 시작했는데 며칠 째 아무런 연락 한 통도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죠. 세상에 어떤 미친 인간이 이렇게 수상한 곳에 배달 의뢰를 하겠습니까? 그도 문제를 직감하고 우리들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리고는 대상을 바꿔 개인 배달부터 하려했죠.

며칠이 지나고 어느 정도 홍보가 되었나 싶었는데 문제가 다시 발생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나도 보태지 않고 오직 장난전화만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순간이동이 문제였습니다. 기업이나 개인이나 마찬가지였던 거죠.

그는 다시금 우리들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손님이 몰릴까? 별의별 아이디어들이 오갔고 그는 그중 하나를 채택했습니다.

장난전화에 응하기로 한 겁니다.

코끼리 한 마리 배달되나요?

, 됩니다.

그 뉴스 보셨죠? 가정집에 코끼리가 들어왔다는 황당한 뉴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온갖 해괴한 주문들을 다 해내보였습니다.

우리에게 연락할 짬도 없이 박멍청은 유명해졌습니다. 상상으로나 있었던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뉴스는 물론 신문과 잡지사에서도 그를 인터뷰하느라 바빴고 외국에서 그를 보러 찾아온 수많은 과학자들이 순간이동에 대해 토론을 벌였습니.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고, 불과 일주일도 안 돼서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갈수록 단순 배달보다는 복합적인 일이 많아졌습니다. 점차 이사 관련 일이 들어오더니 어느날 그는 잃어버린 애완견을 찾아주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사람을 구하기까지 하더군요. 이런 봉사는 해외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언론에서는 이 시대의 영웅이라며 떠드는데 웃기는 소리죠. 박멍청 주제에.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습니다. 경찰서에 신고가 하나 들어왔죠. 한 아줌마 금 목걸이가 사라졌는데 집 안 어디에도 도둑이 침입한 흔적이 없더라는 거예요. 서랍 안쪽에 고이 모셔둔 게 분명한데 감쪽같이 사라졌다고요.

아무런 흔적이 없는 상황에서 경찰이라고 별 수 있나요? 그냥 흐지부지 헤프닝으로 끝나려는데 이 아줌마가 박멍청을 지목한 겁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뿐이라고요. 물론 박멍청은 범인이 아니었죠. 증거도 없었고 알리바이도 확실했거든요.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겠는데, 점점 일이 커져갔습니다.

네가 내 돈 훔쳐갔지?

모르는 일입니다.

증거 있어?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증거 있으신가요?

여긴 심증이야 심증! 요즘 네가 제일 수상해!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박멍청을 지목하기 시작한 겁니다. 무언가 사라진 게 있으면 그를 의심하고 보는 거죠.

일주일도 되지 않아 여론은 정반대로 치달았습니다. 의심은 전염병처럼 돌았어요. 에볼라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습니. 소문이 커져가면서 일거리는 끊겼고 장난 전화라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죠. 온갖 계약이 파기되고 그를 찬양하는 방송과 기사 대신 의심하는 것들이 늘어났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멍청하다며 계속해서 응원을 보냈습니다. 응원 같지 않게 들리는 거 압니다. 하지만 이게 우리 방식이에. 한 밤 중에 몰래 만나 술을 마시면서도 박멍청은 웃었습니다. 진심으로 그가 멍청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후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그의 능력을 보고 세계 각국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죠. 박멍청은 좋은 연구재료이기도 할 거고 다른 나라를 견제하는 데에도 분명 요긴하게 쓰일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소설이나 영화 속의 내용이 현실이 되는 것이었죠.

호감이 불신으로 돌변하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셀로 게임을 연상케 했어요. 그런 식으로 세상의 중심에서 튕겨져 나가는 게 어떤 기분일지, 저는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원래 구석에서 멍청하게 서 있었던 놈이니 더 할 겁니다.

결국 언제부터인가 연락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하수구에서 그의 휴대폰을 찾았다며 경찰서에서 연락 온 게 전부였어요.우리는 고작 그것밖에는 해줄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직접 알고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집니다.

원래는 여기까지였어요.

 


# 05.

얼마 전, 박멍청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습지도 않게 당신들은 그를 보호하고 있다고 했죠. 그리고 면회 시간이 주어졌어요.

몇 주 만에 보는데, 다행이랄까 크게 변한 것은 없어보였습니다. 제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는데 그제야 살이 조금 빠진 걸 알겠더군요.

나가고 싶어.

그가 처음 내뱉은 말입니다. 웃기죠? 순간이동을 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렇게 자랑하던 능력 놔두고 뭐합니까? 저는 그 모습이 싫어서 발끈했습니다.

그럼 당장 나와 멍청아.

못해.

무슨 소리야?

못한다고 순간이동.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박멍청은 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제 뒤에는 들어오는 철문 하나밖에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나 순간이동 못해.

그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저를 바라봤습니다.

내가 어떻게 순간이동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의 물음에 저는 입술을 떼지 못했습니다. 짐작도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 되는 원인.세상은 판타지나 SF소설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생겼다고 한다면 어디에 가능성을 둘 수 있을까요?

제가 머뭇거리자 박멍청은 한숨과 함께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그냥 생겼어. 그냥. 퇴근길에 집에나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집이더라. 내가 해놓고도 믿기지 않았어.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이가 없었습니다. 순간이동은 생각보다 싱거운 능력이었던 거죠.뉴턴의 머리에 사과가 떨어진 일이나 만수르가 아랍 왕자로 태어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길을 걷다가 수없이 차이는 우연 중 하나죠.

그리고 지금은 그냥 사라졌어. 이제 난 순간이동 못해. 하고 싶은데, 못해.

다시 우연이 그를 뒤흔든 겁니다. 순간이동 능력은 더 이상 없었지만 세상은 그가 순간이동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

그게 문제였습니다.

순간이동 능력이 있었다면 여기에 잡혀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런데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그의 논리는 깔끔했습니다. 물론 그가 다른 꿍꿍이가 없다는 전제 하에 성립되는 것이었지만 그와 지낸 시간이 허투가 아닌 전 그를 믿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어떻게 그들에게 그가 더 이상 순간이동을 하지 못한다고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온 세상으로부터 받은 의심들을 떨쳐낼 수 있을까요?

저는 답을 낼 수 없었습니다. 면회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가 흐느끼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나가고 싶어.

문이 닫히기 전 들린 박멍청의 목소리에 저는 그가 처음으로 제 앞에서 어떤 멍청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설마 똑똑해진 건 아닐 겁니다. 그랬다면 제가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죠.

 


# 06.

박멍청이 왜 배달을 시작한 건지 아십니까? 저는 그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에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왜 하필 배달이야?

?

왜 많잖아. 순간이동하면 생각나는 것들. 온갖 만화랑 소설에서 나오던 일들 말이야. 적들의 비밀 기지에 침입하고 국회의원 비자금 가방을 훔쳐내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미녀를 낚아채는 그런 거.

그는 제 예시가 너무 조악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겉으로 질색하는 표정이 다 드러났거든요. 하지만 저는 꽤 뻔뻔한 인간입니다.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죠.

너 어릴 때 동화책 읽어봤지? 아름다운 공주가 마녀에게 잡혀있고 왕자는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서 공주를 구출하는 거. 너 거기서 공주에게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생각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말에 정답이 들어있었으니까요.

왕자.

그렇습니다. 공주는 갇혀있는 상황이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왕자가 그녀를 구출해주어야만 합니다. 박멍청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럼 왕자한테 필요한 요소는?

용기, 우정, 사랑,

애들 만화 좀 어지간히 봐라. 그런 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잖아. 공주를 구출하러 가는 왕자한테 필요한 거라니까.

뭔데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 대답보다 훌륭한 대답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제 고민이 길어지자 박멍청은 웃음을 지우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백마.

이런 답변 예상이나 하셨습니까? 전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들으면 야하게까지 들리는 그 말을 그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보다 더 뻔뻔한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생각해봐. 공주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우선 갇혀있는 곳으로 가야할 것 아니야. 왕자가 걸어서? 아니야. 왕자는 백마를 타고서 나타나. , 백마는 왕자를 공주에게 전해주는 배달부라고 할 수 있지. 세상에 있을 수십의 왕자 중, 공주를 구하러 가는 왕자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백마란 말이야. 알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멋있지 않아?

저는 그 멍청한 웃음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멍청하다는 말이 입 아플 정도로 멍청했던 모양입니다. 그에게 현 상황을 되짚어줄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 치기로 회사까지 다 때려 친 거야?

치기라니. 꿈이라고 해. 꿈이라고. . 어감 좋잖아.

꿈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럼 그냥 사업하는 것 보다 택배회사 비장의 무기로 취직하는 게 더 낫지 않았냐? 안 그래도 우리나라 택배 빠른 거 찾는다고 아우성인데.

그러게. 이번 일 망하면 그거나 해볼까.

박멍청의 말처럼 지금 그는 망했습니다. 백마가 된 그에게 이 상황은 마녀가 내린 고난과 역경일까요? 그렇다면 그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휘해줄 왕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적어도 저는 왕자가 아니었습니다.

 


# 07.

그가 잡혀 들어간 후, 세상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박멍청을 믿는 쪽과 믿지 않는 쪽. 극단적인 이분법이라고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에 중간은 없어요. 그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차이죠. 당신은 후자일 겁니다. 저는 전자고요.

먼저 전자는 극소수였습니다. 저처럼 박멍청을 아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구는 정부가 감추려는 것이 있다고 소리쳤고, 누구는 지저인과 외계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몇몇은 박멍청의 오른팔에 잠든 흑염룡이 깨어날 거라고 말했죠. 내용은 다를지 몰라도 온갖 허황된 주장을 펼치는 자들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저를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믿음은 필요에 의한 행동입니다. 진심으로 박멍청을 믿는 건 우리네뿐이에요.

역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넘쳐났습니다. 지금 제 눈앞에도 있고. 과장 조금 보태면 갓 말을 시작한 아이까지 그를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죠. 광신도들은 악마의 자식이라며 외쳐댔고 각국 요원들은 그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선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자기 능력을 세상에 보인 것이 잘못입니까? 물론 그게 멍청한 행동이었다는 데에는 저 또한 격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멍청한 건 죄가 아닙니다. 아는 게 힘이며 모르는 게 약인 오묘함 속에서 균형을 맞추는 건 누구도 제대로 못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 균형이 무너지게 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에게 진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야.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용의자로 몰렸을 때일 겁니다. 살면서 뜻하는 대로 흘러가는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세상은 그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였다면 멍청한 소리 그만 지껄이고 더 노력하라고 입 발린 말을 했을 텐데, 저도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라고.

시끄러워. 전화부터 받아.

저런 식으로 다음 전화나 받으라고 성화만 내는 게 전부였지요. 사람이 그렇게나 무기력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 장염에 걸려서 앓는 정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렇다고 우리가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박멍청을 감옥에서 끄집어낼 방법을 궁리했죠. 날밤을 새가며 온갖 생각들이 나왔다 들어가고 결국 한 가지 수를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멍청했지만 그보다 덜 멍청한 수는 없다고 생각될만한 것이었습니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어요.

 


# 08.

뭐라고?

. 그는 그렇게 되물었습니다. 우리가 만든 계획에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이었어요. 제가 그를 만날 수 있었던 두 번째 면회였고 그 바로 다음날, 그는 이례적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청문회에 나가야했습니다. 말이 좋아 청문회죠.

그가 세계의 사랑을 받을 때나, 세계의 의심을 받을 때나 돈 욕심이 있는 자들은 그를 이용하려 들었습니다. 이번 청문회도 그런 식일 것이 분명했습니다. 전 세계로 생중계된다면 그 메스컴은 떼돈을 벌 것이었죠. 그들이 우리를 이용하려 드는데 역으로 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계획은 그 청문회를 기회로 삼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미 박멍청의 위상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으며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로 그를 설득했습니다. 어차피 위상 같은 건 원래 있지도 않았고 다행히 그의 멍청함이 제때 돌아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청문회에서의 일은 가장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바로 어제니까요. 커다란 홀에,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있었습니다. 카메라와 방송계 인사들도 많았고 세계 각국의 인사들이 모였습니다. 그 한가운데서 박멍청은 시선들을 홀로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분명 무거울 텐데도 나름 청문회라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정장은 구김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갖은 질문들이 날아들던 중, 드디어 제 차례가 왔습니다. 저는 일어나 박멍청의 앞으로 가 곧장 그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조절한다고 조절했는데 생각보다 묵직한 소리에 저도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전에 때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복수심도 조금 들어있었던 모양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제 행동에 깜짝 놀랐을 겁니다. 삽시간에 시끄럽던 내부가 조용해졌습니다.

뻘겋게 부어오르는 뺨을 감싸고 노려보는 시선을 무시한 채, 저는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우리들 중 제일 안면이 두껍다는 평가에 의해 오르게 된 자리였습니다. 다행히 저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래간만에 사람을 굴복시켰다는 쾌감에 젖어 조금 흥분한 상태였죠.

이것 좀 보십시오. 순간이동을 가진 자라면 이런 공격쯤 아무렇지 않게 피해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꼴을 보세요. 어딜 봐서 그에게 힘이 있다는 겁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감옥 안에 갇혀 있겠습니까? 욕망에 충실해 온갖 것들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는 사람이 얌전히 있다고요?

우리의 멍청한 계획이 뭔지 이제 눈치 채셨을 겁니다. 그래요. 계획이랄 것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박멍청을 두들겨주자. 그리고 낯짝 두꺼운 제가 준비해온 온갖 말들로 그를 치장하자. 무식한 방법이었습니다. 끼리끼리 논다, 그게 박멍청과 함께하는 우리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제 행동은 꽤 큰 인상을 주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많은 의견이 오갔고 서서히 크고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그가 수없이 말해도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들이 그가 같은 인간임을 적당히 내세우자마자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꼭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가지는 않습니다. 저는 분명 그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대중은 다수의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이고 우리는 누구 하나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개성을 표출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것이 있는 법이겠죠.

그렇게 안도하는 사이, 총격음이 들렸습니다.

 


# 09.

설마 주먹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걸까요. 사람들이 내뱉은 비명과 고함에 총격음은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다급하게 총을 쏜 사람을 찾건 말건 저는 곧장 박멍청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의 가슴께는 피로 젖어 붉게 물들어가는 중이었습니다. 저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피를 한 움큼 뱉는 걸로 그걸 대신할 뿐이었습니다. 제 뺨에는 그의 피가 튀었습니다. 한 대 맞은 기분이 들더군요. 끝까지 지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멍청하게 그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

나가고 싶어.

그는 그때도 바랐을까요?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야.

그는 후회하고 있었을까요?

끝내주지?

그는 이렇게 말하려던 건지도 모릅니다.

만약 제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그는 아직까지 감옥 안에서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까요? 잖아요? 그는 그냥 조금 멍청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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