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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고요한 크리스마스트리의 별
글쓴이: H망플
작성일: 14-12-12 16:37 조회: 1,077 추천: 0 비추천: 0

  -  1  -


  "어~ 춥다."

  종석은 추위에 부들부들 떨면서 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도 시릴 정도로 올 겨울은 무척 추웠다. 두 손바닥에 입김을 불었더니 뽀얀 입김이 까만 도화지 위 물감처럼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덕분에 안경까지 뿌옇게 변했지만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겨울밤은 언제나 그렇듯 일찍 찾아오기에 벌써 어둑어둑했다. 특히나 방학을 맞이한 학교 주변은 인적이 거의 없어서 가로등에 의지해야 했다. 이렇게 홀로 있다 보면 으스스한 분위기에 자기도 모르게 옷을 더 조여 맸다.

  "다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추워 죽겠네."

  교문 앞에 서서 얼마나 기다린 지 잊어버릴 정도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제자리 뛰기로 추위를 잊어보지만 점점 한계에 가까워 왔다. 이러다가 오늘 약속했던 동창회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종석아~!"

  통화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멀리서 여자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면을 바라보니 가로등 불빛 아래 남자와 함께 두툼한 봉지를 든 여자가 보였다. 종석은 콧바람을 뿜으면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여자는 시윤, 곁에서 같이 걸어오는 등치가 건장한 남자는 병관이었다. 둘 다 친구사이로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교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뭐하다가 늦었어? 기다리다 동상 되는 줄 알았다고."
  "동상 걸려서?"

  종석의 불평에 소나무처럼 시원한 단발머리를 한 병관이 껄렁껄렁하게 대꾸했다. 무심코 개그를 당한 시윤은 심사위원 흉내를 냈다.

  "아, 이건 20점짜리네요."

  썰렁한 개그를 완성되자 둥글게 모인 세 명은 동시에 '씨익' 웃어보였다.
  이어서 병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사람을 찾았다.

  "흰지는 어디 있어?"
  "흰지? 아직 안 왔는데."
  "여태? 우린 먼저 온 줄 알았는데. 너랑 둘이서 이야기 좀 나누라고 일부러 미적미적 댔는데 헛수고잖아."

  시윤이 팔꿈치로 병관의 허리를 세게 찔렀다.

  "거짓말을 해요, 거짓말을! 날 호텔로 꼬드기느라 늦은 주제에 뭔 소리야? ……종석아, 내 말 좀 들어봐."
  "어, 야. 그 이야기는 하지 마."
  "회사에서 오는 길에 말야 이 녀석이랑 만났는데. 내 교복차림을 보더니 갑자기 눈깔이 확 돌아버리는 거 있지."
  "앗차……."
  "최근에 무슨 교복물을 봤길래, 경찰에 신고해서 전자 개목걸이 좀 채워줘야 할 것 같지 않니?"
  "야야. 네가 이뻐서 그런 거 아니냐."
  "웃기지마. 예쁜 건 사실이지만 교복차림으로는 절대 네 상대 안 해준다는 거 알아 몰라? 알면서도 하악하악 거린 주제에."
  "그래서 아까부터 계속 미안하다고 빌었잖아. 계속 운전대만 붙잡아서 스트레스 때문에 그랬나봐. 좀 봐줘라, 응?"

  오자마자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기 시작하고 병관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자. 보다 못한 종석이 말리고 나섰다.

  "아아, 아아, 알았어. 알았어. 두 사람 다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는 거 잘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겨우 말다툼이 멈췄지만 시윤이 정말로 화난 것처럼 보였다.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보란 듯이 발을 굴렸다. 종석은 병관에게 '너 왜 그런 짓을 했어?'라고 눈짓을 보냈지만 병관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기만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1년만의 동창회가 엉망이 될 것 같아 병관은 재치를 발휘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흰지는?"
  "아직 안 왔다는 말 그새 잊어버렸니?"

  시윤이 대신 대답했고 종석은 안경너머 친구에게 한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게 아니고. 내 말은 벌써 와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아직도 안 왔냐는 소리야."

  동창회는 언제나 종석, 병관, 시윤 그리고 흰지 네 명이 모였다. 이 소규모의 사적인 동창회는 언제나 모교에서 모였다. 그리고 모교에서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이 흰지였고, 그 다음은 다른 구에 사는 종석. 병관과 시윤이 가장 먼 서울 외곽에서 살았다.
  이 사실을 겨우 깨달은 시윤이 걱정스러워했다.

  "그러고 보니 항상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제나 추위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창백한 손을 하늘하늘 흔들면서 맞이하던 흰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났나?"
  "어디 아픈 거 아냐?"

  종석과 병관이 한마디씩 하자 시윤이 눈을 흘겼다.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 조용하다 뿐이지 약한 애가 아니라는 것 쯤 알면서. 쯧……, 문자 넣어볼게."

  곧장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써 넣었다. 세 사람은 스마트폰만 내려다보면서 얼른 답장이 오길 기다렸다. 전화를 하면 될 걸 굳이 이렇게 해서 기다리는 이유는 흰지의 고집 때문이었다.
  동창회 당일만 되면 흰지는 전화통화를 싫어했다. 이유를 물어도 절대 가르쳐 주지 않기에 세 사람은 왜 그런지 지금도 몰랐다.
  같은 여자인 시윤이 전화해도 절대 받지 않았고 통화가 끊어지면 그제야 반응이 왔다. 문자로.

  『버스가 고장 났어. 날이 너무 추워서 그런가봐. 좀 늦을 것 같아. 미안해』
  "라는데?"
  「알았어. 미안해 하지 말고 얼른 와♡」

  라고 답장을 보낸 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뒤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천사님께서 늦으신다는데 어쩔래?"
  "마음 같아서는 기다리고 싶지만……."
  "왜 기다리냐 멍청아. 당연히 먼저 들어가야지. 가자!"

  종석의 말을 끊고 병관이 앞장서서 학교에 먼저 들어갔다. 종석과 시윤은 서로 눈웃음을 교환한 뒤 뒤따라갔다.
  운동장에 들어서자 세상은 순식간에 깜깜하게 변했다. 가로등이 없는 학교 운동장은 그야말로 검은 바다와 같아서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골에만 있을 줄 알았던 깜깜한 땅이 도시 속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혹시 별이 잘 보일까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 기쁜 동창회이건만 날씨가 도와주질 않았다.
  교사 안에 들어간 세 사람은 곧장 당직실로 향했다.
  앞장 선 병관이 당직실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반갑게 맞이하시는 분께 인사와 함께 담배 한 보루를 건네 드렸다. 그런 다음 맡겨놓은 난로를 가지고 당직실을 떠났다.
  깜깜한 복도를 스마트폰 불빛으로 길을 내어 걸었다. 세 사람의 구두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계단을 오르고 교실 앞문에 걸린 명패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1-3반을 발견하자 그 교실에 들어갔다.
  전등 스위치를 올려 교실을 밝혔다. 적당한 자리에 난로를 놓고 불을 피웠다. 책상을 2개 붙이고 의자를 네 개 놓았다. 책상 위에 봉지에 든 먹을거리를 꺼냈다.
  감자칩, 초코파이, 빼빼로, 탄산주스, 치킨, 피자…….
  술과 안주, 담배는 없었다. 금연, 금주는 학생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교칙이자 상식이었고 네 사람은 모두 교복을 입었다.
  대충 모양새가 갖춰지자 세 사람은 책상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히힛, 역시 이런 분위기가 제일 좋아."

  신이 난 시윤이 콜라 뚜껑을 따 종이컵에 한잔씩 따랐다. 한 잔은 종석에게, 또 한 잔은 병관에게, 그 다음 잔은 당연히 자신에게, 마지막 한 잔은 빈자리에 각각 놓았다.

  "자, 모두 잔 들고~"

  병관이 먼저 팔을 번쩍 들었다.

  "제10회 동창회를 기념하고. 우리 흰지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면서……."
  "야, 말투가 왜 이리 노땅 같아."
  "어허! 신성한 선언 중에 끼어들지 마. 크흠, 아무튼 건배!"
  "영원한 우정을 위해!"
  "건배."

  세 사람 모두 구호 일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잔을 쭉 들이켰다.
  먼저 호쾌하게 잔을 비운 병관이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크! 역시, 이 맛이야. 술보다 더 맛있어."
  "네가 좋아하는 설탕 듬뿍 들어 있으니 맛있겠지."
  "내가 애들 입맛이란 거야?"
  "너 고딩때부터 술 못 마셨잖아. 아니라고 해보시죠?"
  "으씨! 감추고 싶은 기억을……."
  "양아치 출신이 술도 못 마신다니 웃기지 않니? 종석아."

  시윤이 입에 머금은 콜라를 분무기처럼 뿌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는 천박스럽게 깔깔깔 웃으면서 병관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불량한 애들과 갖은 술자리에서 병관이 난생처음 술을 입에 넣었을 때 반응을 재현해 보인 것이었다.
  종석에게는 술 못 먹는 사람을 종종 회사에서 보는 터라 별로 웃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온갖 똥폼은 다잡는 불량배가 술을 못 먹는다면…… 그건 음……. 풋! 상상을 하면 웃겼다.
  물론 시윤과는 웃음의 방향이 달랐다.

  "그만해, 이년아! 그 이후로도 술자리만 생기면 그 새끼들한테 놀림 당했다고. 그걸 10년이나 넘게 우려먹냐."
  "킥킥킥, 그치만 너무 웃긴걸. 하유~ 내가 양아치들이랑 많이 어울렸지만 술을 넣자마자 뿜은 건 네가 처음이었다구! 여자도 아니구 남자가, 으히히히……."
  "제길, 너라고 뭐 잘났냐?"

  과거를 놀림당한 병관은 애꿎은 종이컵을 뭉갰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 없었다. 그리고 같은 양아치 출신인 시윤이 날뛰게 놔두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다.

  "시윤이 너도 술 못하면서 마실 줄 아는 척 허세 부렸잖아."
  "그 뒤로 많~이 늘었네요, 너 보다."
  "담배도 못 피우면서 켁켁대고."
  "여자는 그대로 돼. 덕분에 사내놈한테 인기도 얻었거든?"

  시윤이 '네 공격은 안 먹히지롱.' 라는 표정으로 히히 비웃었다.

  "지롤. 그 대신 날라리년들한테 왕따 당했으면서."
  "뭐, 그건 그랬지만……."
  "그 뿐이냐. 날라리 이미지 때문에 반 애들하고 대화도 못했잖아."

  그 순간 두 사람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종석이 나섰다.

  "어, 야. 말이 좀 지나치다."
  "뭐 어때 사실이잖아."
  "그래도."
  "우씨, 나만 당하는 거냐. 그런 거야?"

  종석과 시윤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대화가 멈췄다. 세 사람은 과거를 상념 하는지 종이컵에 담긴 콜라나 천장을 바라봤다.
  시윤은 불량한 남자들에게 인기를 얻은 뒤, 시기하고 얕잡아 보는 여자 불량배 집단 속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평범한 일반 학생은 애초에 상대도 안 해줬다. 대화는 고사하고 눈길조차 마주쳐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불량배 애들은 상대라도 해줬기에 왕따를 당하면서도 계속 몸담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 집단에도 녹아들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1학년 때의 일이었다.
  병관은 시윤과 달리 1년을 더 양아치 집단과 보냈다. 체격도 컸고 여자들 특유의 시기도 없었던 데다 반대로 웃음을 선사해줬기 때문에 어울리는 건 수월했다. 하지만 어느 날, 하지도 않은 도둑놈으로 몰리면서 상황은 뒤바뀌었다. 불량배 가운데 한 녀석이 일을 저지른 뒤 병관에게 덮어씌운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같은 불량배들끼리 입을 맞춰서 아무도 변호해 주지 않았다. 먹음직스러운 거라도 먹었거나 단순히 술을 못 먹어 만만하게 선택한 걸지도 몰랐다.
  병관은 목 뒤로 깍지 끼면서 숨을 깊게 내쉬었다.

  "뭐, 결국. 나나 시윤이나 양아치가 될 재물이 아니었다는 거지."
  "후후."

  시윤이 얕게 웃으며 동의했다.
  종석이 대화의 바톤을 이었다.

  "자기반성은 끝났냐? 그래서. 과거를 청산한 두 사람은 지금 잘 지내고 있는가?"
  "물론이지." / "당연하지."

  병관과 시윤이 동시에 대답했다. 시윤이 먼저 말했다.

  "나는 요번에 대리로 승진했어."
  "어, 진짜?"

  종석이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응. 저번 달에 아들을 낳은 선배가 추천해 줬어."
  "잘됐다, 야."
  "고마워. ……어? 아이씨. 이거 흰지한테 맨 먼저 말해주려고 했던 건데. 너 때문에 허사가 됐잖아."
  "그래? 미안."
  "있다가 흰지 오면 앞에서 벌칙."
  "뭐?"
  "개인기 or 엉덩이로 이름쓰기. 뭘 할지 잘 생각해둬."
  "서른 다 돼서 엉덩이로 이름쓰기는 좀……."

  그러나 개인기도 약한 범생이기에 종석은 머리를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병관이 너는?"
  "나? 나라면 바지 내리고 엉덩이로 이름쓰기."
  "그게 아니라 근황 말이야."
  "근황이라 해봤자 운전하는 사람이 뭐 별거 있냐? 언제나 그렇지 뭐. 무사고 경력이 안 끊어졌다는 게 근황이라면 근황이다."
  "등치에 안 맞게 시시하네."
  "시시하다니. 자식이. 이 형님 몸 멀쩡한 게 얼마나 좋은 근황인데. 건강 무시 하냐? 나 안녕하다고. 인사해봐?"
  "차라리 콜라를 뿜는 게 더 낫겠다."

  콜라를 부은 종이컵을 병관 앞에 내밀었다. 간신히 웃음이 멎은 시윤이 그걸 보자 또 웃기 시작했다. ‘우리 종석이가 주워 먹는 개그를 다하네?’

  "성에 안 차나 본데. 좋아, 진짜 근황을 들려주지. 잘 들어."
  "어머, 야. 그건 아직 비밀로 하기……."

  병관이 별안간 시윤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우리 결혼한다."


  -  2  -


  "뭐?"

  한참 뜰을 들이다 종석이 되물었다.

  "내년에 시윤이랑 결혼하기로 했어."

  시윤이 이 인간 또 저질렀다면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병관은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친구 종석을 바라봤다.
  종석은 놀랐지만 조금 의미가 달랐다. 두 사람이 단순한 친구사이를 넘었다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10년 넘게 어울렸는데 해태 눈이 아닌 이상 분위기라는 게 느껴졌다.

  "너네 이제까지 그거 계속 미뤘잖아."
  "그러고 싶었는데 말이지. 부모님께서 하도 성화를 내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윤이 우물쭈물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병관이 끼어들었다.

  "개넘아. 네가 흰지랑 얼른 결혼 했으면 일이 꼬이지 않았잖아."
  "뭐? 내가? 왜 나야?"
  "그야 내가 시윤이랑 결혼하면 남는 사람이 너희 둘 밖에 더 있냐."
  "이유가 어처구니 없잖아……."

  시윤은 재빨리 병관의 입을 틀어막았다. 쓸데없이 일을 키우는 녀석은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다.

  "내가 이야기할게."

  사정은 이랬다.

  "원래는 흰지가 결혼하고 나면 그 뒤에 하려고 했어."
  "왜?"
  "흰지가 고등학교 때부터 늘 혼자였잖니.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10년이 지나도록 새 친구도 만들지 못했단 말이야. 우리 아니었으면 쭉 외톨이였을 거라고."
  "그건 그렇지만."
  "친구가 없다면 하다못해 짝이라도 찾기를 바랐어. 그래야 나, 아니 우리가 안심하고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웁웁! ……푸앗! 그랬는데 시간이 흘러도 네 녀석이 흰지를 꼬시지 않잖아!"

  시윤의 손아귀를 푼 병관이 일갈했다. 시윤은 아예 목소리가 안 나오도록 병관의 목을 졸랐다.

  "얘 헛소리는 듣지 마. 누구라도 좋으니까 흰지를 아껴 줄 남자랑 결혼하면 그걸로 돼. 이 녀석은 종석이 너 아니면 인정 안 하는 것 같지만."

  종석은 시윤의 마음 씀씀이를 이해하는 한편 싱숭생숭했다. 흰지는 착하고 조용한 친구이지만 뭐라고 할까…… 친구이상 가까이하기가 어려웠다. 이성으로서 마음에 안 든다는 게 아니었다. 뭔가, 이 이상 가까운 관계로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랬다간 흰지를 망가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서 연애에 관심은 있어도 이제껏 흰지에게 향한 적은 없었다.
  한참 생각에 잠기던 종석이 입을 열었다.

  "흰지는 왜 친구를 사귀지 않는 걸까?"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그것은 세 사람의 오랜 숙제이자 베일에 싸인 흰지의 모습이었다. 흰지는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어도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런 흰지를 어떻게 친구로 두게 됐는지 종석과 시윤과 병관은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했다. 네 사람이 친구가 된지 10년이 흘렀다.

  "아, 이거 흰지에게는 비밀이다. 알았지?"

  시윤이 입술에 검지를 대보이며 신신당부했다.

  "결혼한다는 거?"
  "응. 알면 분명히 빼빼 마를 때까지 눈물 콧물 흘릴 테니까."
  "축하해주는 거잖아. 좋은 일 아니야?"
  "아-니. 절대 그런 뜻으로 울지 않아."
  "그걸 어떻게 알아?"
  "직감이야. 경험이기도 하고."

  졸업식 날.
  시윤은 흰지를 꽉 껴안은 채 울었다. 졸업하면 집이 지방으로 이사 가기로 되어 있었다. 더 이상 만나기 힘들다는 사실에 시윤은 울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흰지를 본 순간, 시윤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뚝 그쳤다. 흰지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흰지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 날. 네 사람은 1년마다 학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세 사람은 콜라를 마시면서 빈자리를 조용히 바라봤다.

  "그런데 이런 굉장한 화제를 우리들끼리만 나누는 것도 좀 그러네. 주인공이 온 뒤에 소재거리 떨어져서 분위기 싸해지는 거 아냐?"

  분위기도 바꿀 겸 종석이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괜찮아, 신경쓰지 마.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걸 더 싫어하잖아.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좋아하니까 지금이 딱 좋아."

  병관이 손을 내저었다.
  시윤도 거들었다.

  "그리고 굉장한 화제라면 또 있어."
  "또 그게 뭔데?"

  똑똑.
  별안간 교실 뒷문을 조용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왔어."

  차분한 목소리가 깔리자 세 사람이 동시에 돌아봤다. 조용하고 얌전해 보이는 여자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보자 세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윤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직전에 종석에게 윙크하면서 굉장한 화제의 힌트를 주었다.

  "종석아. 너만 괜찮다면 내년부터 여름에 한 번 더 모이기로 하려고."

  종석은 반사적으로 오른쪽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시윤이 흰지를 와락 껴안았다.

  "어서와! 왜 이렇게 늦었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구."
  "미안. 평소라면 내가 기다려야 하는데."
  "으응. 잘못은 버스지 네가 아니야."
  "그런데 굉장한 화제라는 게 뭐니?"
  "아! 그거? 이거이거. 천사님이 좋을 때에 오셨네. 어서 앉아. 오늘 제10회 동창회는 재미있는 안건이 있어."

  안건이란 다름 아니라 모임을 여름에도 가지자는 것이었다. 겨울에는 추워서 여행 같은 곳을 가기 힘드니 여름에 모여서 바다든 산이든 가고 싶다고 피력했다. 물론 여행이라곤 전혀 안 가는 흰지를 생각한 안이기도 했다.
  10년이나 지난 지금에서 그것을 논하는 까닭은 종석에게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종석은 손목을 긋고 가장 높은 학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성적을 비관하다 못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운이 없게도 떨어지는 지점을 흰지가 지나가고 있었다. 주변의 외침을 들은 흰지가 얼떨결에 종석을 양손으로 받았다.
  종석의 둘도 없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로 선생님께 불려가 혼난 것은 물론이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 봐주셨고 부모님께 비밀로 하기로 합의해주셔서 더 이상 일이 커지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무리하게 종석을 받느라 흰지의 양팔이 다쳤는데 그 소식이 시윤과 병관 귀와 눈에 들어갔다. 종석은 그 즉시 두 사람에게 불려갔다. 병관한테는 걸레가 되도록 주먹으로 얻어맞았고 시윤에게는 귀가 막힐 때까지 설교를 들었다.
  그 후 두 사람에게 강제로 상담을 받았다. 종석은 흰지에게 사과했고 병관과 시윤에게 계속 불려 다니다가 자연스럽게 흰지와도 친구관계가 되었다. 1년 재수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쯤이었다.

  "종석이 넌 어때? 여름 모임?"
  "흠…… 흰지만 좋다면 OK."
  "좋아,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흰지 넌 어때?"
  "나? ……음, 여행, 괜찮아. ……가보고 싶었고."

  그 일로 인해 종석이 흰지와 친구가 되었지만, 그 때는 이미 병관, 시윤이 흰지와 친구사이가 된 이후였다.
  병관은 도둑질 누명을 벗는 계기로 친구가 되었다. 도둑질 현장을 흰지가 목격했고 증언해주는 덕분에 살아났다. 하지만 비록 은인이었어도 그 뒤 대화다운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양아치이자 먼저 양아치 생활을 털어버렸던 시윤이 흰지와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자 자연스럽게 끼어들게 되었다.
  시윤은 흰지와 짝이 되는 바람에 친구가 되었다. 양아치 집단에 계속 몸담았던 시윤은 자리를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흰지와 짝이 되었다. 흰지는 침착하고 말 수도 무척 적었다. 언제나 책을 읽는 문학소녀 같았다. 고상하고 조용해 보이는 소녀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수업시간, 시윤이 떨어뜨린 지우개를 흰지가 책상 밑으로 들어가 주워 주었다. 그 이튿날에는 숙제한 공책을 걷는다며 말을 건넸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유인물을 나눠주는데 본래 앞사람이 줬어야 할 것을 흰지한테 떠넘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흰지는 그 즉시, '이거, 깜빡한 프린트.'라는 말과 내밀었고 시윤은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그리고 미술시간. 짝꿍을 스케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시윤은 곤란했지만 반면 흰지는 스스럼없이 시윤을 그렸다. 분위기에 떠밀려 같이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흰지는 단 한 마디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놀라우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지는 답답하기도 했던 시윤은 참지 못하고 말을 걸고 말았다.
  그 날, 용기를 얻은 시윤은 말 거는 횟수를 점차 늘려갔다.

  "헉헉. 이제 됐어?"
  "한글판으로 만족이 되겠냐. 이번에는 엉덩이로 이름쓰기 영어판. 아메리칸 스타일로 쎅시하게~!"
  "꺄하하하! 엉덩이 좀 봐. 흰지야, 웃기지 않니?"
  "후후후……♬."

  회의가 끝난 뒤에는 학예회가 열렸다. 종석은 벌칙대로 엉덩이+다국어 버전으로 이름쓰기를 했다. 그 뒤 병관이 1인 개그를 했고, 시윤은 노래를 불렀다.
  모임은 다함께 교가를 부르는 걸로 끝났다.


  -  3  -


  "와아, 눈이다!"

  모임을 마치고 학교를 나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운동장을 매끄럽게 만든 눈이었다. 깜짝 등장한 손님에 시윤이 반갑게 외쳤다.

  "매년 오면서 눈이 오는 건 처음이다. 그치 않니? 흰지야."

  흰지가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맞으며 운동장에 쌓인 눈 위를 걸었다. 뽀드득 소리가 날 때마다 어린아이마냥 기분이 들떴다.

  "좀 더 일찍 왔으면 2:2 눈싸움 했을 텐데 이제 오냐!"

  시윤이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바닥에 쌓인 눈을 뭉쳤다. 이제 막 쌓이기 시작한터라 모래가 잔뜩 묻었다. 눈덩이를 저 멀리 던졌다.

  "더 오래 있고 싶었는데 아쉽다."
  "응."
  "있지, 흰지야?"
  "응?"
  "기념비스러운 눈도 내렸는데 이번만큼은 너네 집까지 바래다주면 안 될까?"

  흰지는 헤어질 때만 되면 이상하게 먼저 가버리곤 했다. 시윤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붙잡지를 못했다. 이유를 물어도 가르쳐 주지를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흰지가 말했다.

  "음…… 좋아."
  "어, ……정말?"

  설마 했던 승낙. 나란히 걷던 종석과 병관이 이채로운 시선으로 흰지를 바라봤다. 흰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흰지야!"

  시윤은 흰지의 팔짱을 꼭 앉았다. 그리고 걷는 내내 떨어질 줄 몰랐다. 흰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애써서 보지 않았다.
  이윽고 교문을 벗어났다.

  "미안. 역시, 그만둘래."

  흰지가 상냥하게 시윤의 팔짱을 풀었다. 시윤이 멍하니 있는 사이. 몇 발자국 떨어져서 세 사람을 바라봤다.

  "오늘 재미있었어. 그럼, 다음에 만나."

  흰지는 웃는 얼굴로 가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친구들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에 먼저 몸을 돌려 달렸다.
  뽀득. 뽀득. 뽀득.

  "안녕~! 잘 가~! 다음에 보자~!"

  시윤의 외침이 등 뒤에서 들렸다. 흰지는 뒤돌아보지도 않았고 손을 흔들어 답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시윤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뛰어갈수록 소리가 점점 작아져갔다.
  뽀득. 뽀득. 뽀드득. 뽀드득.
  이윽고 눈 밟는 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을 때.
  흰지는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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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애니메이션 에비텐 주제가 - 미래빛 약속
(
えびてん - 未来色の約束)
http://www.youtube.com/watch?v=er-SvU2zYgs

듣다가 영감을 받아서 씀.
처음 떠올랐을 때는 무시했는데 며칠 지나서 듣자 또 생각이 나서 결국 썼습니다.

가사와 번역은..... 검색하면 바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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