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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가위바위보를 이기는 법.
글쓴이: 블루헤븐
작성일: 14-06-16 18:08 조회: 1,345 추천: 0 비추천: 0

<소심><신중><명찰>장민철

 

어두웠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레스토랑의 첫인상이었다. 눈에 보이는 창문마다 쳐져 있는 두꺼운 커튼 때문에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한줌의 햇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테이블 위에 비치되어있는 작은 촛불만이 주변을 밝혀둘 뿐이었다. 예약된 이름으로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테이블은 구석진 자리로 다른 손님들과 독립된 섬 같은 느낌을 주었다. 테이블 위 촛불의 춤사위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좋군. 나는 짧게 혼잣말을 하고 옆에 작은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지 말라는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어머니의 말씀이 잠시 생각났지만 정말로 잠시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난 활자의 노예이자 활자의 주인이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장민철 작가님.”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책에서 눈을 떼 고개를 들어보니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는 중절모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정확하시군요.”

왼손에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힐끗 보니 약속시간과 일분도 어긋나지 않았다.

,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게 저희 신조입니다.”

사내는 넉살좋은 미소를 지으며 중절모를 내려놓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올백으로 넘긴 검은 머리에 조각 같은 이목구비의 사내는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잘생겼다.

아직, 주문하시지 않으셨죠? 이곳 양요리가 정말 맛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저도 그것으로 하죠.”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사내는 이런 자리에 익순 한지 종업원을 불러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익숙하신가 봐요?”

?”

이런 자리가 익숙하신 듯해서요.”

사내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제가 하는 일이 일이다보니. , 제 소개를 안했군요.”

사내는 품속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작은 검은 직사각형 명함 안에는 아무런 직함 없이 라플라스라는 이름만 금색으로 적혀 있을 뿐이었다. 전화번호도 이메일도 적혀 있지 않은 이 명함은 명함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라플라스. 신미영 작가님 소개로 오늘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플라스.”

본명이 아닌 가명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풍겼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급한 건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었다.

그래서 오늘 절 부른 이유는 당연히 그것때문이겠지요?”

, ‘그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미영이가 제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흐음.”

사내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름 장민철. 1986215일생. XX대학 문예창작과 수석 졸업. 신춘문예에서 가을이 멈추는 곳이란 단편소설로 등단. 그 후 여러 장편 소설로 베스트셀러까지 석권. 천재 신인 작가로 이름을 알리며 각종 언론에 주목을 받다가 갑작스러운 잠적. 맞나요?”

“.......”

라플라스의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말 안에 내 인생이 정의 되는 기분은 별로였지만 그 말 안에 있는 내용은 전부 사실이었다. 한 때 잘나가던 작가였지만 지금은 잊힌 작가. 과거의 영광에 짓눌려 지금은 원고지 안에 단 한 줄도 쓰기 벅찬 소심한 새가슴 작가. 바로 나 자신이었다.

확실히. ‘그것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으로 보이긴 합니다.”

라플라스는 앞에 놓인 물을 마시며 말을 이었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일까요?”

라플라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 당황해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좋은 이야기라니. 정답이 없는 것이 아닌 오히려 너무 많은 정답으로 인해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여자 친구가 말하는 아무거나 와 비슷한 수준에 질문이군요.”

내 대답에 라플라스는 유쾌한 듯 큰소리로 웃었다.

그런가요? 그러면 이건 어떤가요? 매력적인 작중 인물과 좋은 이야기는 서로 불가결의 관계이다.”

그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하지만?”

방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왼편에 놓인 책을 짧게 스쳐보았다. 매력적인 인물은 쓰고 싶다고 쉽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매력적인 인물은 찾기 힘들죠. 여기서든 저기서든.”

그건 그렇죠. , 저건 신미영 씨 작품입니까?”

.”

아주 짧은 내 눈짓도 놓치지 않은 듯 라플라스는 테이블 한편에 놓여있는 책표지를 쳐다보았다.

그 책 주인공은 문외인인 제가 보기에도 매력적입니다.”

. 그렇죠.”

확실히 미영이의 이번 시리즈물에 나오는 주인공은 매력적이었다. 아니, 개인적으로 매력적이다 는 말로는 부족했다. 마치.......

신미영 씨 작중 인물들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죠.”

라플라스의 말이 내 뇌리를 강타했다. 정확했다. 아지랑이처럼 책을 읽는 내내 느꼈던 알 수 없는 느낌이 라플라스의 말 한마디에 정리되었다. 살아있다. 미영이가 쓴 이 소설에 나온 모든 인물들은 매력적이다 는 표현을 넘어 살아 있었다.

장민철 씨도 살아있는 인물을 쓰고 싶습니까?”

당연하죠.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도 마찬가지일겁니다.”

당연하다라. 그럼, 우선 제가 요령을 가르쳐드리지요.”

자신의 입으로 문외인을 자처한 그가 그런 말을 하자 의외란 생각이 들었지만 미영이의 소개도 있고 해서 잠자코 있었다. 라플라스는 턱을 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직 입가만 짓고 있는 그의 미소는 촛불의 흔들림에 따라 일렁이며 알 수 없는 섬뜩함을 주었다.

가위, 바위, 보를 아십니까?”

요령을 가르쳐준다고 하더니 갑자기 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알지요.”

그럼, 가위, 바위, 보를 연속해서 열 판 이기실 수 있으십니까?”

열 판이요?”

한두 판도 아니고 열 판을 연속해서 이긴다니 확률상 말도 안됐다.

그건 힘들어 보이는데요.”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라플라스는 검지를 치켜들었다.

가위, 바위, 보를 연속해서 이기는 법. 첫 번째. 필요한 만큼 사람 수를 늘리면 됩니다.”

죄송하지만 이해하기 힘든데요?”

이런. 만약 저희 둘이 가위, 바위, 보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라플라스가 주먹을 흔들며 무언으로 가위, 바위, 보를 요구했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러자 라플라스는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양손으로 가위, 바위, 보를 했다.

, 비기거나 이기거나 지거나 셋 중 하나겠지요.”

, 결국 둘 중 한명은 지고 한 명은 이길 겁니다. 중요한 건 이거죠. 한 명은 반드시 이긴다.”

보자기를 낸 라플라스의 오른손이 바위를 낸 왼손을 이겼다. 라플라스는 승리한 오른손을 흔들어보였다.

만일 네 명이서 가위, 바위, 보를 한다면 어떨까요?”

.”

라플라스의 앞서 한 말을 그때서야 이해 할 수 있었다.

네 명 중 한명은 반드시 이기겠지요. 그것도 연속으로 두 판을.”

어떤 비법도 트릭도 없는 승자와 승자가 만나서 싸운다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토너먼트. 오로지 한사람만은 반드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1024. 그 중 반드시 한 명은 열판 연속으로 가위, 바위, 보를 이긴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그건 누가 될 줄 모르는 거 아닌가요?”

라플라스는 내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 같았다. 하지만 뒤에 들린 그의 대답으로 나는 그가 질문이 아닌 질문의 의도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장민철 씨 입장에서는 상관없으실 텐데요. 누가 남든.”

그게 무슨?”

살아남은 한 사람이 주인공이 될 테니까요. 그것도 가위, 바위, 보에서 열 번이나 살아남은 매력적인 주인공으로요.”

이해 할 수 없는 라플라스의 말에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음식이 나와 우리 둘 사이에 깔렸다. 둘 다 같은 음식을 주문해서인지 테이블 가운데에는 보이지 않는 거울이 세워졌다. 이쪽이 스프면 저쪽도 스프 이쪽이 양고기면 저쪽도 양고기. 차례대로 음식이 대칭되며 올라왔다.

우선 식사 먼저 할까요?”

레스토랑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질문이었다.

 

<유약><소심><집중>캐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자동차 앞 유리의 와이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빗방울을 걷어내고 있었지만 걷어내는 속도보다 앞 유리를 덮는 빗방울이 더 많았다. 마치 나의 과거처럼 걷어내도, 걷어내도 매번 제자리였다. 1024. 사물을 인지하기 시작한 어렸을 때부터 나를 둘러싸고 있던 조직에서 불렸던 내 이름이자 걷어지지 않는 내 과거였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정말로 끔찍했다. 살려달라는 비명보다 차라리 제발 죽여 달라는 비명 소리가 더 빈번했으며 훈련을 빙자한 고문은 성인조차 버티기 힘든 강도였다. 살아남는 법은 버티거나 이기는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끼이익.

빗길에 타이어가 미끄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왼쪽 비어있는 보조석에 둔 갈색 봉투가 흔들리며 속에 담고 있는 물품 몇 개가 삐져나왔다. 굵은 밧줄과 약품을 담은 작은 병들 몇 개가 봉투에서 나와 굴러떨어졌다.

젠장.”

좌석 밑으로 약품들이 굴러갔지만 운전 중이라 섣불리 주울 수 없었다. 지금은 말고 도착하면 다시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량이 흔들릴 때마다 들리는 약병들 소리가 자꾸 신경 쓰였다.

차르륵. 차르륵.

약들이 부딪치는 작은 소리가 내 귀에는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그래, 그때 들었던 소리와 비슷했다. 조직 내에서 같이 먹고 자며 놀았던 친구를 내 손으로 처음 죽인 그 날. 오늘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 친구의 시체 근처에서 주운 탄피를 주머니에 넣고 달렸던 바로 그 날에 들었던 탄피가 서로 부딪치던 소리와 흡사했다.

무려 10번이었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비 오던 날을 시작으로 나는 계속 싸워야만 했다. 이유도 모른 채 칼, 도끼, , 독약, 폭탄 등 훈련 받았던 여러 무기들을 들고 같은 훈련을 이겨낸 친구들과 싸워야만 했다. 한 명을 이기면 다른 한 명과 그 한 명을 이기면 또 다른 한 명과 싸웠다. 9. 9번의 결투 속에서 살아남은 내가 마주한 마지막 상대는 나처럼 9번의 결투를 승리한 능숙한 살인마이자 오래전에 사귀었던 내 단짝 친구였다.

오랜만.”

그래, 오랜만이네.”

인사는 짧았고 결투는 길었다. 9명을 잡아먹은 두 마리 괴물은 강했고 둘 다 살아남는데 특화되어있었다. 그 전투에서 내가 이긴 것은 마치 가위, 바위, 보처럼 단순한 운에 불과했다. 단지 한 명은 반드시 이겨야만 했고 한 명은 반드시 져야만 했을 뿐이었다. 난 살아남았고 죽어가는 친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미안.”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친구는 나를 올려다보며 나에게 사과했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한 말이 아니라 다른 9명의 친구에게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괜찮아.”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혹은 쓰러져 있는 친구에게 하는 말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내 말에 친구는 웃으며 숨을 거두었다.

끼이익.

급한 코너에 다시 한 번 타이어에서 요란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괜찮지 않아.”

핸들을 잡은 손이 떨렸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하는 거지만 어쩌면 그 친구는 지금 내 상황을 예측했을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전혀 괜찮지 않아!”

악에 찬 내 목소리가 차량 안을 가득 채웠다.

 

<소심><신중><명찰>장민철

 

라플라스의 장담처럼 양고기 요리는 훌륭했다. 양고기 특유의 양말 썩은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고 육질은 부드러웠다.

식사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 근래 먹은 식사 중 가장 좋았네요.”

다행입니다.”

나와 라플라스는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먹으며 대화를 게속 이어나갔다.

그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라플라스의 말을 듣고서야 오늘 만남의 목적을 상기할 수 있었다.

우선 그것이 무엇인지부터 말해 드리겠습니다. 아차, 죄송하지만 아까 드린 명함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플라스라는 이름 이외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명함이 갑자기 왜 필요한지 몰랐지만 명함지갑에서 그의 검은 명함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라플라스는 명함을 돌려받자마자 뒷면을 살짝 쓰다듬더니 다시 나에게 내밀었다.

,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 영문을 모르면서도 말없이 명함을 다시 받았다.

뒷면을 다시 보십시오.”

다시 본 명함의 뒷면은 놀랍게도 전처럼 검은색 일색이 아니었다.

스토리 메이커.”

뒷면 가운데에는 스토리 메이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인터넷 사이트 주소가 적혀져 있었다.

, 제가 팔고 있는 물건이자. 당신에게 절실히 필요한 그것입니다.”

푸딩을 먹던 스푼을 내려놓은 라플라스의 금색 눈이 빛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혹은 무의식적으로 착각이라 믿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상현실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라플라스의 엉뚱한 질문에도 이제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어느 정도라......”

아직 감각기관과 뇌파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 입출력 기관이 불안정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존에 시각과 청각만으로는 현실과 흡사한 가상현실을 만들기에는 부족했다. 오감의 완벽한 재현을 위한 뇌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고 앞으로 몇 십 년은 더 걸릴 예정이었다.

만일 이미 완성됐다면 어떻습니까?”

그럴 리가요. 만일 완성됐다면 언론에서 난리 났을 텐데요.”

, 그럴 리가 없지요. 사실 장민철 씨 말 그대로 완성은 멀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이미 완성이 됐지요.”

라플라스는 명함 뒷면의 사이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상현실. 아직 그곳 세상으로 우리가 들어갈 방법은 없지만 이미 그곳은 지금도 실존하고 있습니다.”

목이 불타는 것처럼 타들어갔다. 앞서 말한 1024명 또한 이제야 이해가 갔다.

관찰이군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라플라스는 내 반응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놀랍군요. 이렇게 빨리 눈치 채신 분은 없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을 그쪽 세상에서는 마음껏 확인해 볼 수 있겠군요. , 등장인물들 사이에 갈등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미리 알 수 있겠군요. 이건, 이건, 마치.”

, 그렇습니다. 장민철 씨 생각대로 작가는 더 이상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조건만 입력한 채 관찰만 하면 됩니다. 스토리는 그쪽 세상의 인물들이 알아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작가는 단지 보고 쓰기만 하면 됩니다.”

미영이의 작품 속 인물들이 살아있다는 느낌은 당연했었다. 정말로 그들은 그쪽 세상에서 살아있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순간 안 좋은 생각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더 이상 작가는 필요 없는 것 아닌가요?”

입 밖으로 말하자 한순간 다리의 힘이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관찰하고 쓴다니 이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라플라스는 두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가위, 바위, 보를 연속해서 이기는 두 번째 방법은 다른 사람이 낼 것을 미리 조작해 놓으면 됩니다.”

라플라스는 다시 한 번 주먹을 흔들며 가위, 바위, 보 자세를 취했다. 매번 갑작스럽게 화제를 바꾸는 그의 모습에서 이제는 과연 어떤 말로 나를 설득할 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묵을 내주십시오.”

나는 그의 말대로 바위를 냈고 그는 보자기를 냈다. 당연한 그의 승리였다.

아시겠습니까?”

라플라스는 웃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난 방금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간단합니다. 누구나 관찰하고 쓸 수 는 있지만 재밌는 관찰 결과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라플라스는 테이블 위에 놓인 미영이의 책인 캐빈을 가리켰다.

이른 바 조작이란 게 필요하죠. 주인공은 지면 안 되니까요. 소설로 말하자면 플롯이라고 할까요? 그런 면에서 작가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라플라스가 말하는 조작이 무엇을 뜻하는 지 얼핏 이해가 갔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극적으로 등장하는 필연을 가장한 우연들이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스토리 메이커를 계약하시겠습니까?”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가득 찼다. 양심에 대한 가책부터 시작해서 날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경제생활까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났지만 이 자리에 나온 순간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계약하겠습니다.”

흔들리는 불꽃 너머 라플라스는 처음으로 진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사이트 패스워드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패스워드는.......”

그 뒤 여러 대화가 이어졌다. 사이트에 들어가는 패스워드와 가위, 바위, 보를 연속해서 이기는 마지막 세 번째 방법. 그리고 스토리 메이커를 사용하는 방법까지 라플라스는 쉼 없이 떠들었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라플라스는 내려놓았던 중절모를 다시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했습니다.”

별 말씀을요. 저도 공짜로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라플라스가 말한 어떤 내용에도 비용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 걱정 마십시오. 비용은 저희가 알아서 챙깁니다.”

도대체 어떻게 비용을 챙기는 지 의문이었지만 굳이 물을 필요성은 못 느꼈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계약이 끝날 때까지 라플라스를 보는 일은 없었다.

 

<유약><소심><집중>캐빈.

 

빗속을 뚫고 겨우 도착한 여관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비바람에 창문은 미친 듯이 흔들렸고 기름칠이 덜된 문은 열고 닫을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을씨년스럽군.”

보조석에 있던 갈색 봉투를 침대 위에 던져 놓았다. 날아간 봉투는 침대 시트에 부딪치면서 속에 있는 물건들을 차례대로 뱉어내었다. 치사량을 넘어서면 위험한 코카인, 헤로인, 메스암페타민 같은 마약 종류부터 예전에는 수면제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다른 약들로 대체된 바르비탈계 약들까지 침대 위를 가득 채웠다. 미처 나오지 못한 굵은 밧줄은 봉투 끝자락에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하아.”

나오는 한숨을 멈추지 않으며 침대 위에 놓인 물건들을 차례로 보았다. 집이나 차 안에서 혹은 비밀기지에서 발견한 이 물건들로 모두 아래쪽에 작은 표식이 있었다. 그 표식은 오직 나만 알아 볼 수 있는 표식으로 뜻은 간단했다. 중요한 물건. 하지만 분명 내 물건임이 확실한 표식이 불구하고 도무지 이 물건들에 관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악의가 가득한 이 물건들이 뜻하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자살.

빌어먹을.”

침대위에 걸터앉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확인할 길은 단 하나 뿐이었지만 그것이 오답일 경우 돌이킬 수 없었다.

젠장!”

첫 번째 의심의 시작은 별 것 아니었다. 조직의 추적을 피해 우연히 숨은 집이 알고 보니 조직에게 배신당한 이전 보스의 집이었고 이전 보스의 도움을 받아 조직의 추적을 완전히 뿌리칠 수 있었다. 그때는 하늘이 자신을 돕는 다고 생각했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에 조직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전 준비를 하면서 여러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직 밑에서 일할 때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던 조직에 대항하는 세력이 갑자기 나타나 도움을 준다거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들을 우연히 발견한다거나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예상치도 못한 도움이 찾아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 말도 안 되는 일들뿐이었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인생이었다. 끝없는 우연 속에서 죽지 않는 자신을 보며 한 가지 가정을 하게 되었다. 혹시 내가 소설이나 영화 속의 주인공이 아닌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가정을 한 뒤부터 객관적으로 내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 때부터 내 주변이 크게 변했다. 도대체 왜 샀는지 영문 모를 물건들이 주변에 넘쳤고 사람들이 말하는 나와 지금 나 사이에 괴리감을 느꼈다.

빌어먹을.”

만일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이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어리석다고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인생이라니.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세상은 존재하고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세상이 돌아간다. 웬만한 일로 죽을 걱정은 없었고 심심할 일은 죽는 순간까지 없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게 내 인생인가라는 의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정해진 순서대로 이미 짜인 플롯대로 연기하기만 하는 내 삶 속에는 과연 진정한 가 존재하는가.

이것만은 내 의지다.”

떨리는 손으로 침대 위에 놓여있는 아무 약병이나 하나를 집었다. 어차피 하나 같이 위험한 약이라 아무거나 집어도 상관없었다. 거칠게 약 뚜껑을 열고 입에 쏟아 넣었다. 잠시 후 점점 의식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또 보는군. 뭐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혼미한 의식 속에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소리 난 곳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안간힘을 써서 돌리니 흐릿한 시야로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로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중절모 밑으로 언뜻 보이는 금색 눈동자가 빛나 보였다.

난 수금할 때가 가장 좋다네.”

세상을 떠나기 전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기><질투><짜증>신미영

 

인물이 살아있어요! 팬 미팅을 겨우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 이 순간에도 귓가에 맴돌 정도로 오늘 내내 지겹게 들은 말이었다. 이번에 출판한 세 번째 케빈 시리즈인 조직의 붕괴 편은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주인공 캐빈의 심리에 따른 시점 변화를 사용했지만 뇌 없는 독자들은 그런 면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오직 캐빈, 캐빈, 캐빈에만 목을 멜 뿐이었다. 빌어먹을 캐빈. 사람 죽이는 것 말고 제대로 할 줄 아는 일이 하나도 없는 그런 미치광이 살인광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열광하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잘 팔리면 됐지. .”

나는 스스로를 타이르는 혼잣말을 하며 컴퓨터를 켰다. 부팅이 완료되자마자 인터넷을 키고 즐겨 찾기에 저장 되어있는 주소로 클릭했다. 클릭하자 인터넷 창에 지구 모형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스토리 메이커: 패스워드를 입력하세요.]

“G,O,D”

세 글자 밖에 안 되는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내가 관리하고 있는 신미영의 세계를 불러왔다.

이런 망할 놈!”

불러온 세계를 보자마자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팬 미팅에서 귀의 딱지가 생기도록 지겹게 들었던 캐빈의 이름이 새로운 소식지에 올라가 있었다.

[캐빈이 사망하였습니다.]

이번에 사인은 또 뭐야.”

소식지를 클릭하자 그 밑으로 사인이 표시되었다. 약물 과다 사용으로 자살이었다. ! ! 또 였다. 이 망할 놈은 잊을만하면 자살해댔다.

! 네까짓 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스토리 메이커 왼쪽 상단에 불러오기 항목을 눌렀다. 누르자마자 그 밑으로 시간에 따라 저장되어 있는 여러 파일들이 보였다. 그 중 적당한 시간을 고르자 다시 세계가 흐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 세계와 달리 그 세계의 캐빈은 아직 살아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살려주마.”

자살에 대해 생각도 못하게 여러 사건들을 배치시켰다. 애인을 납치시키고 오랫동안 헤어졌던 부모님을 등장시켰다. 팬들이 열망하는 캐빈은 한동안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녀야만 했다.

이정도면 됐겠지.”

캐빈이 죽어버린 세계가 흔적 없이 사라지자 라플라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가위, 바위, 보를 연속해서 이기는 마지막 세 번째 방법. 진 경기는 세지 말 것. 가장 편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진 경기는 저장하지 않으면 된다. 오직 이긴 경기만 저장하면 결과적으로 연속해서 이긴 경기만 남는다. 이 얼마나 편리한 방법인가!

그럼, 신작을 기획해 볼까나.”

요즘 들어 캐빈의 자살 빈도가 너무 높아진 캐빈 시리즈에서 더 이상의 작품을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발매부수 또한 이전에 비해 시원찮은 면도 있고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지금부터 새로운 작품을 구성하는 게 좋아보였다. 나는 마우스 커서를 이동해 왼쪽 상단에서 새로운 세계라는 항목을 눌렀다. 시대는 적당히 21세기 중 아무 년도나 클릭한 후 랜덤 세팅을 눌렀다. 이전 작품들로 느낀 점이었지만 시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캐릭터가 얼마나 매력적인가가 흥행의 열쇠였다.

이번에는 좀 색다르게 가볼까.”

저번에는 1024명의 인물을 랜덤으로 만들고 그 중 살아남은 한 명을 주인공을 썼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한명을 잘 키워볼 생각이었다.

외모는 멋있어야겠지.”

외모에 멋있음이라는 항목을 클릭하자 수많은 얼굴들이 나왔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든 얼굴 하나를 골라 생성 버튼을 눌렀다. 외모와 체형이 완성되자 그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격을 선택하여주십시오.]

그래, 이게 가장 중요하지.”

저번 작품 때는 성격을 랜덤으로 설정하는 바람에 유약하고 짜증나는 녀석이 주인공을 차지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얼마나 플롯을 짤 때 고생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치가 떨렸다.

<><><>

세 개의 빈칸 안에 차례로 성격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무모><용감><배려>. 사건이 발생하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만한 성격을 집어넣었다.

완성!”

 

세계 한편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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