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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9호실의 미호 프로토타입
글쓴이: 남루인
작성일: 13-05-15 19:45 조회: 4,931 추천: 0 비추천: 0

909호실의 미호를 쓰기 위해서 전에 쓴 프로토타입입니다.

이야기가 어느정도 진행되었다는 것을 컨셉으로 잡은 글입니다.

 

챕터 XX 고기 먹는 날

 

드르륵-’

 

아침의 여명이 창문에 드리우면서 방을 환하게 만들기 시작하자, 좀 더 쉽게 빛이 방안으로 침범할 수 있도록 창문이 열렸다. 다소 음울했던 방안은 누르스름한 이른 아침의 햇빛이 스며들면서 방 안을 잘 익은 살구 같은 노란 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바쁘게 움직이는 그림자는 창문뿐만 아니라 이 좁은 방과 세상을 연결해 주는 문이라는 문은 모두 열어젖히고 있다. 이제 5월 초순이지만 요즘 이상기온으로 아침 바람은 약간 서늘해서, 이 시간에는 당연한 듯 침대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어야 할 다른 한 명은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좀 더 완벽한 형태의 누에고치 같이 만들고는 싫은 소리를 징징거리며 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른 입술이 살짝 움직이면서 추워라고 말하는 것 같다. 팔자 좋게 자고 있는 한 사람이 뭐라 하던 먼저 일어난 인공은 오늘을 바쁘게 준비하고 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예정된 시간 보다 꽤 일찍 시작된 909호실의 아침 분위기는 평소와 남달랐다. 주민이라곤 세상의 불운이라는 불운은 모두 짊어진 듯한 인공과 그 식객, 짐덩이, 사고뭉치, 침략자, 바퀴벌레() 1마리-오해 없길 바라건대, 이 표현은 단 오직 한 명을 위한 표현이다-밖에 없는데, 오늘은 마치 5인 가족이 오늘 있을 소풍을 준비하는 것 마냥 소란스럽고 바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 방의 침략자는 그런 분위기에는 아랑곳없이 본능 안의 일정표대로 기분 좋은 아침잠을 청하고 있었고, 인공만이 진지하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태평스런 잠꾼이 만약 지금 일어났다면 깊이 자는 동안에 옛날 어디서 나온 TV 프로의 깜짝 쇼처럼- 침대 째로 어딘가로 옮겨진 것이 아닐까 착각을 할 만큼 방 안의 모습은 달라지고 있었다. 이 방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식이라 할 수 있는 너저분하게 쌓여 있는 책이나 이젤, 옷가지, 각종 잡동사니들이 신속하고 가지런히 정리되고 있다. 바로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유리창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파고들던 아침 햇살은 더욱 진해져서, 누우면 기분 좋아질 정도로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워놓아, 평소보다 이른 기상을 한 인공을 유혹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신경 쓸 상황은 아니었다. 굳이 신경이 쓰인다면, 앞으로 6월 이후에는 햇살이 눕기 좋을 정도로 따뜻하게 데워놓는 정도가 아니라, 한 여름 낮의 지옥처럼 뜨겁게 만들 것이라는 거다. 인공은 수년째 옥탑방 생활을 해 왔지만 매년 여름이 가져다주는 약속된 고난은 영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아무튼 그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방의 분위기였다. 오늘 누가 909호실로 찾아오는 것일까? 침대에 주욱 누워있던 빅 브라더는 가늘게 곁눈질 하며 인공이 하는 행동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인공은 지금 방 한 구석에 설치된 가스레인지 위에 오른 프라이팬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 프라이팬 위에는 익숙지 않은 냄새, 아니 향기가 풍겨오고 있다!

냄새 분자들은 콧구멍을 타고 들어와서 뇌를 자극하였고, 오래된 기억의 도서관 한 귀퉁이에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기억 중 하나를 책장에서 꺼내 먼지를 씻어내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두꺼운 양장본에 새겨진 표지의 제목을 드러내었다. 그것을 읽은 그녀의 뇌신경은 이런 시추에이션에 너무나도 당연히 약속한 듯한 고기에 대한 조건반사 스위치를 눌러 보였다.

 

고기!!”

 

야수는 속옷 차림으로 괴성을 지르며 한달음에 주방 아니 가스레인지가 설치된 방의 구석 편으로 달려갔다. 오래되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온갖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여도 아깝지 않은 그 이름. 그래서 기억 속에 두꺼운 양장본으로 잊지 말자고 재본해서 눈에 띄는 곳에 꽂아 두었는데, 앗 하는 사이에 잊어버리고 있던 그 이름! 그것도 불에 구워서 그것이 가진 순수한 맛의 본질을 최상으로 살리는 조리법을 이용한!

인공은 서구에서는 베이컨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중독자와 배둘레햄의 통곡의 벽’(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부어오른 뱃살의 통칭)을 만들게 한 것과 유사한 돼지의 한 부위를 프라이팬에 올리고 열심히 굽고 있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삼겹살

인공은 그녀가 턱을 드밀고 벌집에서 갓 짜낸 꿀 같은 침을 흘리면서 자신의 어깨를 축축하게 젖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 아랑곳없이 고기를 굽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기름이 많은 삼겹살은 기름이 흘러내려서 고이지 않게 하는 불판으로 굽는 것이 제일이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있을 때문에 돈을 쓰기엔 너무 아까웠다. 소에서 사면 싸게 살 수 있기는 했지만 짐이 되기도 하고, 싸구려 불판이 주는 불신은 지금의 가는 실 같은자신의 건강에 지대한 위협이 될 거란 생각에 그만두었다. 뭐 고기를 굽는데 지금 쓰고 있는 프라이팬도 같은 곳에서 구입한 것이지만 말이다. 아쉬운 대로 요령껏 프라이팬으로 굽는 수밖에.

불그스름한 고기는 약한 연기를 내면서 서서히 회색빛으로 바뀌어가고 고기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치익소리를 내며 거품을 내고 튀기 시작했다. 아직 불이 닿지 않은 고기 윗면이 붉은 빛을 잃어가자 젓가락으로 빠르게 뒤집어 타지 않고 골고루 익게 하였다.

능숙한 솜씨로 먼저 익힌 고기 아래쪽이 모습을 드러내서 먹기 좋게 갈색 빛을 띠고는 식기 전에 얼른 먹으라고 그녀의 눈을 유혹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고기에 대한 본능이 더 빨랐던 것 같다.

고기를 뒤집기 무섭게 그녀는 맨손으로 막 뒤집은 고기를 빛의 속도로 집어서 입에 가져다넣었다. 먹는 다기 보다는 삼킨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씹는 기색도 없이 순식간에 고기는 이 식충의 식도를 타고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식도를 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뜨거워어어어어어~!!!!!!”

야야. 아직 다 굽지도 않았는데, 그걸 그냥 집어먹으면 어떡해? 조금만 기다리면 줄 테니까 저기 누워서 기다려.”

? 또 혼자 먹으려는 거 아니야? 나 주는 거야?”

 

그녀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짐승을 보는 듯한-일부는 짐승이 맞긴 하지만- 그의 얼굴을 평소의 얼빵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널 굶기기라도 했냐? 나 얼른 먹고 나가야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녀는 인공의 약속이 조금 못미더운 듯이 종종 걸음으로 침대 위에 올라가 양반다리로 앉아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가 일으킨 소동 때문에 순간 고기를 꺼낼 아주 적절한 타이밍을 놓친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프라이팬 바닥을 적시기 시작한 돼지기름으로부터 다 익은 고기를 건져내었다. ‘삼겹살이 아니라 돼지 튀김이 될 뻔 했네. 이거.’ 불판을 사둘 걸 하는 후회가 짧은 찰나에 스쳐갔지만 인공은 다시 상황에 집중하였다. 프라이팬으로 고기를 구우려면 약간 요령이 필요하다. 바닥에 고인 기름을 그냥 싱크대 배수구에 버렸다간 물과 만나서 미친 듯이 튀는 기름을 뒤집어쓰기 십상이라 키친타올 한 장을 뜯어 프라이팬을 닦아주었다. 키친타올은 이내 프라이팬 위에 있던 기름을 모두 흡수하여 누르스름하고 반투명한 상태가 되었고, 프라이팬은 다시 고개를 튀기지 않고 굽기 좋은 상태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고기를 굽는 지혜는 인공의 첫 사랑이 알려준 방법이다. 그는 순간 옛 기억에 멈칫 하는 듯 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어 기억을 날려버린 다음, 신중하게 다음 고기를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에 올렸고 고기는 맛있는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요리를 하고 있는 그를 향해 가늘게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가 오늘 갑작스레 이런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어. 평소라면 소나 말이나 먹을 식단을 가지고 브런치라고 내놓고서 자신을 괴롭힐게 뻔 한데, 오늘은 너무나 관대하잖아? 어쩌다 한번 아주 기분 좋을 때 내어놓는 양념치킨님정도 수준이 아니야. 이른 아침에 삼겹살이라니? ‘막돼먹은 ◯◯도 아니고. 혹시 나랑 한 약속은 저버리고 어디 도망이라도 갈려는 건가? 아니면 설마 날 잘 먹여서 어디다 팔아버리려고? 호두알 수준의 그녀의 두뇌로는 잘 이해가 안 돼는 상황이었다.

저번처럼 위험한 상황이라면 본능적으로 발톱을 드러내고 싸웠을 테지만,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기 냄새는 그녀의 본능을 밑바닥까지 누그러뜨리고 익숙지 않은 상황이 주는 위협으로부터 한없이 그 (좁은)마음을 관대하게 하였다.

 

고기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인공은 고기 굽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고기 1근반(800g)을 굽는데도 모자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표정에서 약간 베어나왔지만 평소처럼 그녀는 약간 둔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서 몸을 진자(振子)처럼 좌우로 흔들면서 얼른 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낡은 침대는 그에 맞추어 삐걱거리는 소리를 효과음 마냥 내고 있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아침밥을 고기로 먹는다! 이런 생각에 그녀는 식전의 배고픔을 전채요리 삼아 고기가 줄 행복감에 대한 무한한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밖에서 바람이 흘러들어 방안을 가득 매우고 있던 연기와 고기 냄새를 문 밖으로 몰아내고 있을 때, 접시 한 가득 채워진 고기를 가지고 인공이 돌아왔다.

 

상펴라.”

..

 

평소의 그녀라면 귀찮은 듯 온갖 싫은 소리와 저항을 했겠지만 오늘 아침은 내일 있을 크리스마스의 산타할아버지가 줄 선물을 기대하는 꼬마 마냥 매우고분고분하였다.

기대감과 긴장감에 손을 마구 떨고 있었지만 신속하게 상을 펴고서 곧 있을 선물에 대한 기대감에 부푼 표정으로 자리에 착하게 앉았다. 아아 위대한 고기님!

한 근반.

한 근도 아니고 두 근도 아닌 이 어중간함이 주는 매력.

두 사람이 아침에 먹기에는 다소 많은 양이었지만, 식욕이 왕성한 그녀 앞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공은 상위에 접시를 올려두고 냉장고에서 엊저녁에 사둔 파채와 쌈장, 마늘, 김치를 꺼냈다. 그리고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포도주스도 잊지 않았다.

그가 고기를 맛보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입은 침이 고이다 못해 홍수가 되어 터진 뚝 마냥 넘치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의 허가없이 상 위에 음식이 올라가자마자 원수를 만난 듯 먹어대었겠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고분고분하다. . 소박한 삶에 고기가 주는 마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혼자 생각하며 인공은 살짝 쓴웃음 짓고 상 위에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올렸다.

고기 먹는데 상추가 재격이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동네 정육점에서 서비스로 공짜로 주는 파채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니야.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진수성찬이잖아.

그가 먹으라고 살짝 눈길을 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생전에 고기를 처음 먹어보는 사람, 아니 귀신마냥 게걸스럽게 고기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밥 한 숟갈에 고기 한 점. 이런 황금 비율은 그녀에게 필요 없다. 오직 고기! 고기였다. 그녀가 식사하는 관경은 모 TV 프로에 내 보내면 히트 칠 정도의 괴기에 가까웠지만 인공은 평소보다 침착하면서 경직된 표정으로 즐겁게 고기를 탐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 고기가 위장으로 들어가자 속도를 먹는 조금 늦추고는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앞에 앉아있는 인공을 겨우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약간 의기소침한 듯한 표정과 뭔가 깊게 생각에 잠긴 표정의 복합체. 이건 인공이 뭔가 큰일을 저질렀거나 저지를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쇠 젓가락에 묻은 기름을 혀로 살짝 핥고는 다시 고기 한 점을 든 채로 그를 향해 한마디 말을 던졌다.

 

갑자기 왠 고기야

 

고기를 반 가까이 먹고 나서 하는 말로는 별로 적절해 보이진 않다.

 

. 어디 갈 데가 있어.”

..으응!?”

 

무심결에 답하던 순간 그녀의 표정은 자신에게 사탕을 주던 존재가 자신을 납치하려는 유괴범이라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유치원생 같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손에서 놓치지 않는 고기역시 대단한 집념.

 

나 혼자 갈 거니까 엄한 생각은 마.”

싫어!”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조건 반사처럼 터져 나온 소리.

 

오늘은 어디 혼자 죽으려고 가는 건 아니니까 정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와도 상관없어.”

 

그 답지 않게 오늘은 참 친절하다. 오늘 아침상에 올라온 고기만으로도 충분히 친절한데 말이다. 그가 약속은 지킨다고 했으니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했지만 지난 사건들을 비추어볼 때 그가 그걸 지킬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감시역인 자신이 따라가지 않으면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 따라가야지. 그렇게 그녀는 생각하면서 들고 있던 고기를 입 안으로 던져 넣었다.

 

기분 좋은 식사가 끝나고 인공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녀는 햇볕으로 따듯하게 데워진 장판 위를 기분 좋게 뒹굴었다. 뱃속에 1근 이상 들어갔던 고기는 벌써 소화가 되었는지, 식사 중에 남산 만하게 솟아올랐던 그녀의 배는 벌써 정상 수준으로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포도 주스를 PET병 채로 들고 나팔 불 듯이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 폐인이 따로 없다. 그 모양으로 마셔대는 꼴을 보고 평소라면 부아가 치밀어 발길질이나 폭언을 내뱉었겠지만-그럴 때 마다 그녀는 그만둬! 아이가 있어라며 배를 부여잡는 웃지 못 할 개그를 했다- 오늘의 인공은 신부님이나 고승(高僧), 크세르크세스 1세 마냥 관대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 평소답지 않기에 그녀는 그 꼴로 뒹굴면서도 그의 눈치를 살살 보았지만, 다른 신경 쓸 일이 있는 건지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가 관심 두고 있는 에 대한 질투가 살짝 일었다. 이제 주스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빈 PET 병에 혀를 넣고 할짝거리다가 싫증이 났는지 쓰레기통을 향해 슛 하듯이 던졌지만 빗나가면서 설거지 중인 그의 정강이를 건드리며 퉁명한 소리를 냈다. 별 대꾸가 없다. 정말 이상하다. 하지만 금붕어 수준의 집중력을 가진 그녀는 의문에서 벗어나 오늘 어디로 갈지에 대한 상상으로 가득 찼다.

지난번에는 바다에 갔었지? 이번에는 산으로 가는 걸까? 아니면 해외? 나 비행기 타 본적 없는데. 이런 철없는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인공은 설거지를 마치고 젖은 손을 수건으로 닦아낸 후, 옷장에서 짙은 남색 천으로 된 가방 하나를 꺼냈다. 가방의 지퍼를 열자 검은 색 정장 한 벌이 나왔다.

언제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니로 일색인 그에게 정장이 있었다니? 약간 놀라운, 그리고 살짝 드는 기대감. 남자라면 역시 슈트(Suit)라는데 인공이 정장을 입은 모습은 어떨까?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인공은 정장을 꺼내다말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제 나갈 건데 그 모습으로는 좀 곤란하니까. 좀 단정한 걸로 입고 있지 않을래?”

...정한 것으로?”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렇긴 하네. 츄리닝에 러닝셔츠 바람으로 정장 입은 사람이랑 같이 가긴 그렇잖아.’라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고 잘 개어진 옷 더미에서 자신의 옷을 찾았다.

수분이 지났을까 단정한 정장 차림에 넥타이까지 멋지게 맨 그가 욕실에서 나왔다. 새로운 그의 모습을 보자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정장은 별로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역시 남자라면 슈트라는 말에 대한 존경심이 솟아났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심 오늘 멋진 아침을 대접해준 보답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는 신혼집의 젊음 부인의 분위기를 한번 내볼까하고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넥타이 매는법을 검색하고 있었는데, 대실망이었다. 상당히 어려워 보이는 터라 일부러 자신의 머리카락을 넥타이 삼아 연습했는데, 넥타이를 미리 매고 나오다니. 너무해. 이런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순간 뭐가 떠올랐는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인공이 맨 넥타이를 풀려고 시도했다. 몸을 피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가락에 걸린 넥타이는 풀어졌지만 재미난 표정은 다시한번 실망스러운 시선으로 바뀌었다.

 

이게 뭐야?”

에헤헷. 내가 넥타이를 잘 못 매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그가 매고 있는 건 자동 넥타이었다. 순간 행복감에 젖었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사코 일반 넥타이로 묶어주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는 결국 처음에 매었던 자동 넥타이를 맨 채로 방을 나섰다. 그녀의 손재주로는 오늘 하루가 다 가도 윈저노트는 꿈도 못 꿀 것 같으니까. 그리고 유일하게 그가 가진 일반 넥타이는…….

 

909호실이라고 붉은 매직으로 써진 문을 닫고 집을 나섰다. 버릇처럼 행여 잊어버린 것은 없는지, 주머니 안에 지갑이랑 열쇠를 확인한 그는 먼저 앞서듯 나간 그녀를 따라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8+옥상의 계단을 다람쥐처럼 빠르게 걸어 내려가는 그녀는 발이 참 빨라서 잠깐 한눈을 팔면 한달음에 저 앞으로 가 있었다. 어디로 갈지 목적지도 전혀 모르면서 항상 이런 식으로 먼저 앞으로 가 있는 그녀는 기분 좋게 일찍 일어나 맞이한 아침 햇살 덕분인지 한결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니 아까 먹은 고기 때문일까?

하얀 비단 느낌의 나풀거리는 원피스 치마 위에 초록색 면으로 된 반팔 가디건을 걸친 그녀의 모습은 순간 예전에 인공이 잃어버린 기억 속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했고, 그것이 그의 표정을 조금 침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기분 아는지 모르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몸을 돌리고 따라오라는 듯 골목길에서 큰 길로 향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혼자 타려고 한 버스를 2인분이나 지불해야 해서 인공은 약간 심사가 뒤틀렸다. ‘짐덩이혹은 혹덩이’(혹은 그 둘 다)를 달고 온 기분이었다. 오늘은 잊고 있었던 이 무신경한 그녀로 인해서 생활비가 계획보다 빨리 소모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머릿속에서 떠오르자 그녀를 하루빨리 떼어놓는 것이 지금 정류장의 TV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지지부진한 2/4분기 국회예산안 통과 여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겼다.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시도해 봐야지. 반복된 시도는 성공률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혼자 왔으면 우등 고속 타고 갔을 건데라고 인공은 혼자 중얼거렸지만, 그녀는 주변의 익숙지 않은 환경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버스 안에서 간식거리라도 사가지고 갈까 했다가 비싼 정류장 주변의 바가지 물가에 좌절하고는 언제나처럼 그녀가 좋아하는 포도 주스하나만 사서 버스에 올랐다. 이 어린 애 같은 생물(生物)은 버스라는 세계의 당연한 클리셰처럼 먼저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입김을 불어 그림을 그리거나 커튼을 펼쳤다가 접었다가 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주변에 민폐를 끼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오늘은 평일이라 버스 안에 사람은 얼마 없었다. 하지만 건너편에 앉은 아줌마가 불편한 심기로 이쪽을 바라보자 인공은 죄송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녀를 달래보려고 애썼다.

그냥 조용히 있다면 누가 봐도 호감을 느낄 정도로 이쁜 외모에 긴 머리칼을 가진 그녀의 적지 않은 오점은, 추레하기 짝이 없는 인공이 왜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적절한 변명이 되어주고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인공은 점점 밖으로 나오기 싫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꼭 나와야할 날이기에 각오를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런 각오를 쳐부술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았다.

부탁이니까, 도착해서는 제발 조용히 있어줬으면 좋겠어. 다른 건 바라지 않아.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이른 아침의 기상이 준 피곤함으로 버스 좌석에(옆에서 어떤 재난이 벌어지든) 몸을 누이고 잠을 청했다.

 

수 시간이 지나 정류장에서 정신을 차리고 잠에서 깬 인공은 그가 자는 동안 어떤 재앙이 있었던 건지, 주변의 당혹스러워 하는 시선에 집중 사격을 당했다. 옆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자신은 아무런 죄 없는 어린양인 것처럼 다소곳이 하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큰 사고를 친 것 같은데, 상상하고 싶지 않다. 으레 그녀가 저지르는 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고 있는 동안 얼굴에다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유리창을 거울삼아 봤는데 다행이도 얼굴은무사한 것 같다. 다른 걱정도 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렸다. 예상보다는 조금 일찍 도착했지만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인공과 그녀는 택시를 탔다. 이것도 평소의 그 답지 않았다. 목적지에 대해서 인공이 운전기사에 무어라 건넸지만 그녀의 집중력은 거기까지 닿질 못해서 재대로 듣지 못한 채로 택시는 출발하였고, 버스보다 약간 낮으면서 빠른 주변 환경에 그녀는 즐거운 듯 차창에 양손을 대고 집중하였다. 운전기사님은 유리창에 생기는 손자국에 약간 신경 쓰이는 표정이었지만, 그걸 말릴 수는 없었다. 그것도 그런 것이,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산과 들, 나무와 꽃들이 가득한 도로 가의 풍경은 지금 봐 두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보기 힘드니까.

 

택시가 정지하고, 인공은 돌아갈 때 탈 택시를 확보하기 위해서 운전기사님의 명함을 하나 건네받고 그녀를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사뭇 다른 주변 분위기에 약간 움츠러드는 것 같았지만, 이내 진정을 하였다. 약간 눈에 익은 듯한 광경. 도로 가에 가도를 따라 있는 보리밭을 지나자 낮은 산등성이에는 초록색의 봉분들이 가지런히 줄을 서 있었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 가족공원묘지]라는 표지판이 달려있었다. 평일이지만 같은 날 돌아가신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몇 몇 보였다. 대개 가족들이 함께 모인 것 같다.

그는 넓은 부지에 촘촘히 있는 봉분들을 지나 맨 위의 언덕 끝에 있는 커다란 건물로 향했다. 인공의 손을 약간 두려운 듯이 잡고 따라가던 그는 아까와는 다르게 호기심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이런 곳에도 호기심을 가지고 날뛴다면 오늘 버리고 갈려고 했는데생각하던 그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인공이 향한 곳은 납골당이었다. 바깥의 녹색 잔디로 옷을 입은 봉분들과 달리, 납골당 안은 차가운 콘크리트로 세워진 건물이다. 그는 납골당 안에서 2층으로 향했다. 처음 묘지 입구에 들어섰을 때의 느린 발걸음과 달리 조금 빠르게 재촉하는 듯한 발걸음으로.. 촘촘한 아파트 마냥 유골함들이 들어있는 납골당 벽 사이에서 인공은 한 자리에 멈추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유골가루가 담긴, 고인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로 된 상자가 유리문 안에 있었다. 한참을 그가 그러고 있자,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물었다.

 

“..누구야?”

“...”

 

대답이 없다.

유리문 안에는 유골함과 함께 사진이 한 장 들어있었다. 오래되어 빛이 바랜 나이든 여성의 사진이. 인공의 어머니라고하기엔 조금 나이가 많아보였다. 침묵하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약간 맺혀 있었다.

 

할머니야

...”

 

궂이 답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아침 일찍 부산을 떨며 아침을 먹고 온 것은 오늘이 그의 할머니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평소 그 답지 않게 침착하면서 다소 어른스러워 보였던 모습인 것은 할머니에게 조금이나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일까. 오늘 아침 일찍 먹는 고기도 그런 의미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그가 가진 슬픔의 에너지의 원천은 혹시 여기 담긴 사람으로 인한 것일까 궁금증이 들었다. 그런 그녀의 궁금증을 눈치 챘는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살아계실 때 엄청 싸웠지.”

“...”

너랑 실랑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

 

인공은 옛 기억을 더듬다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항상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할머니는 불만을 가지셨지. 타지에 와서 일하는 것도, 행동도, 연애도..”

우리 할머닌 큰 병이 있으셨는데, 자신이 죽기 전에 내가 결혼해서 자리 잡고 있기를 바라셨지만 난 거기서 도망쳤어. 이 나이에 벌써 무슨 결혼이냐고.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참견 말라고..”

그랬구나..”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깨달았어.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구나. 할머니가 이러신 거는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닌데. 알고 있으면서. .. 그랬는지..”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난.. 너무 멀리 있었어.”

 

그의 말은 점점 흐느낌처럼 바뀌었고, 눈가에 고였던 작은 눈물방울은 이내 강줄기가 되어갔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1년 뒤에 뒤늦게야 여자 친구를 데리고 올 수 있었지.”

“...예전에 헤어졌던 그 첫사랑?”

살아계실 때 뵙게 했어야하는데, 난 그 아이 생각만 하고 걔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단 한 번도 데리고 가지 않았지.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병실에 입원해 계실 때도.”

바보같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아이 생각만 하고, 바보..”

 

그가 가진 후회의 감정은 마음의 양심의 한 귀퉁이에서 그의 마음을 계속 좀먹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의 이른 기상과 그의 이상한 태도. 그것이 한 번에 설명이 되었다. 그녀는 인공이 자신과 한 약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아니 그 약속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그의 마음이다. 잃어버린 이에 대한 후회와 함께 그를 불행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한 떨어뜨린 첫사랑에 대한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이곳과 함께 이어져 있다. 하지만 그녀로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평소의 눈치 없는 장난은 그를 더욱 그곳으로 밀어 넣겠지.

할머니의 유골함을 바라보고 울고 있는 인공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은 이정도야.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그의 손을 평소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어깨를 두드린다거나 포옹이라던가, 그 보다 더 깊은 것을 인공에게 해 줄 수도 있었지만,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것 이상으로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없었다. 오늘 돌아가면 좀 더 진지하게 그를 위로해 줘야지.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해가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고 있을 때 인공과 그녀는 납골당 밖으로 나왔다. 그는 실컷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나서인지 조금은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그녀는 그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달래듯 앞뒤로 흔들며 함께 걸었다. 정오의 태양열로 달구어진 보리밭에서 풍겨지는 풀 냄새는 그 둘이 고향에 온 기분이 들게 하여 재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들을 진정시켜주었다. 천천히 도로가로 나오자, 긴장이 풀린 것처럼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인공은 평소와 같은 그녀의 뱃고동 소리에 웃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런, 우리 점심도 안 먹었구나. 나도 목이 마르네.”

.

여기 온 김에 뭐 먹으러 갈까?”

!”

 

그녀는 기쁜 듯이 답했다. 그래. 지금까지 쌓아둔 후회는 놓아두고 오늘부터는 좀 더 행복하게 지내자. 그런 다짐을 한 인공은 평소보다도 한 없이 넓어진 아량으로 그녀에게 베풀듯이 뭐든 말해이런 눈빛을 보냈다.

 

고기!”

고기? 오늘 아침에도 먹었잖아? 지겹지도 않니?”

고기이!”

 

이 오랜 만에 고기 맛을 본 육식동물에게 다른 것을 권하는 건 무린 거 같다. 인공과 그녀는 어린 아이처럼 서로 손을 잡고 흔들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 아니 거의 그녀가 그를 끌고 가는 것 같다. 배가 많이 고프구나. 그래 오늘은 마음껏 먹으렴.

 

 

 

 

그의 한 없이 관대했던 마음은 수 분 뒤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 그 몰래 주문된 고기들의 산을 발견하고 나서.

 

야아~!!”

에헷..”

 

귀퉁이에 방치되어있던 계산서를 보자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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