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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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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단편제 90회차/1] 환상증 전문의-팰리스 증후군
글쓴이: 김아란
작성일: 13-12-28 23:37 조회: 1,977 추천: 0 비추천: 0
  바람에 흩어진 구름 사이로 햇빛이 잘게 부서졌다. 9월이 채 오기도 전이지만 축축한 자갈길 변에는 낙엽들이 잔뜩 쌓여 있다. 오후 내내 떨어져 쌓인 노란 잎사귀들이 돌 위에 세워진 회색빛 마을에 색을 칠한다. 강을 따라 나있는 도로 위로 거의 장난감처럼 보이는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다. 자동차는 천천히 달려 마을 광장으로 들어섰다. 광장의 끝에 다다르자 자동차가 속도를 낮추었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내렸다. 남자는 남성의 흰색 실루엣이 그려져 있는 초록색 긴팔 티셔츠와 뜯어진 청바지를 입고, 그 위에는 의사들이 흔히 입는 흰 가운을 걸친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여자는 흰 셔츠에 하늘색 가디건을 받쳐 입고,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에메랄드빛 스커트를 입었다.
  “굉장한 곳이네요. 17세기로 돌아온 느낌이에요.”
  여자가 대리석으로 된 바닥을 발로 쓸어보며 말했다.
  “지중해 연안에는 이런 곳이 꽤 있지. 그래도 완전히 산간 오지가 아닌 이상 문명의 혜택은 여기저기 스며들어 있어. 여기도 마찬가지고.”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스마트폰을 든 키 큰 남자가 그를 흘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남자가 들어간 가게에서는 최근 빌보드를 점령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좋은 곳이네요. 마치 영화의 배경 같아요.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잖아요.”
  “과연 그럴까? 과도기라는 단어에는 좋은 뉘앙스가 하나도 없어.”
  남자의 비꼼에 여자는 기분이 상한 듯 남자를 째려보았다.
  “선생님은 감성이 썩었어요. 게다가 과도기라는 단어에 좋은 뉘앙스가 왜 없어요? 과도기는 밝은 미래가 오기 전의 준비 단계라고요.”
  “좋은 뉘앙스가 있는 부분은 밝은 미래지. 과도기 자체에는 좋은 뜻이 없지. 혼란, 난장판, 엉망진창. 다 같은 뜻이야. 안 그래?”
  여자는 더 이상 말싸움을 하는 것을 포기한 듯 보였다. 선생님이라 불린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요즘 들어 포기가 빨라졌군. 좋은 현상이야. 그럼 내가 환자를 찾아오는 동안, 조수는 숙소를 잡아 두도록.”
  “네, 네. 분부대로 합지요.”

  남자와 아인은 광장을 나와 왔던 길을 되돌아가, 마을 외곽 쪽으로 걷고 있었다. 아인은 화려한 은장식이 달린 17세기 스타일의 건물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지만 남자는 그런 것들에 눈길도 주지 않고 앞만 보고 빠르게 걸었다.
  “너무 예쁘네요. 이런 곳에서 살면 정말 멋질 것 같아요.”
  “이 정도에 넋을 잃으면 안 돼.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은 이런 것들과는 상대도 안 될 만큼 멋진 곳이니까.”
  “어디로 가고 있는 데요?”
  아인은 호기심이 동한 표정이었다.
  “이 강을 따라 가면 숲이 있었지? 그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엄청나게 커다란 저택이 있다고 하더군. 우리의 목적지는 거기야.”
  “숲의 양옥집? 환자가 거기에 살고 있나요?”
  아인은 숲속에 외롭게 서 있는 커다란 저택을 떠올렸다. 어쩐지 오싹한 이미지에 아인은 살짝 몸서리를 쳤다.
  “환자가 거기에 있는 건 확실하지만, 거기서 살고 있는 건 아니야. 거기에 붙어 있지.”
  남자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아인은 자신이 들은 단어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붙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물론 그렇지만,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야. 진짜로 붙어 버렸다고. 흔한 경우야. 뿌리가 자라난다던가, 콘크리트와 동화된다던가. 붙어 버린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질리도록 많아. 내가 언급한 케이스는 조금 복잡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간단한 절제술이면 충분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것을 들어 보였다. 아인은 질색하며 남자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그래서 마을에서 톱 같은 걸 빌려 오신 거에요?”
  “메스로 할 수는 없으니까.”
  남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인은 한숨을 쉬었다.
  “가끔 우리가 의료인인지 고스트버스터즈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본질적으로는 똑같아. 미지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지키잖아?”

  잘 다져진 오솔길을 통해 숲으로 들어간 지 약 10분, 의사와 그 조수는 돌로 만들어진 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사자로 보이는 짐승이 조각된 커다란 조각상 두 개가 위엄 있게 서 있었다. 아치 모양의 입구에는 금박이 되어 있고 아치들이 2층을, 정교한 기둥들이 3층을 지탱하고 있었다. 건물의 윗부분은 완벽한 돔 형태였는데 햇빛을 그대로 투과시키고 있는 듯 했다.
  “저택이라기보단 왕궁이군.”
  남자는 짧게 감상을 표했다. 건물은 전형적인 중세 동유럽의 왕궁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런게 왜 여기 있죠?”
  아인은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곳이라 왕궁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었다.
  “글쎄, 아예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잊힌 채 방치된 거라면 모를까, 마을 사람들도 이것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고... 모르겠군. 게다가 보존 상태도 불가사의할 정도로 좋고. 흠, 알아보기 전에는 모르겠어.”
  남자는 문으로 다가가 두 손을 얹었다.
  “잠깐, 그냥 들어갈 거예요?”
  “당연하지, 집주인이 현관에 붙어있는 게 아니라면 어차피 문도 못 열어줄 거 아냐.”
  “그렇더라도 말은 하고 들어가야죠!”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화려한 장식이 된 붉은색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뒤에서 핼쑥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남자는 비단으로 된 튜닉을 입고 있었다. 집주인은 피곤에 찌든 기색으로 두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남자가 손에 든 물건을 보고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무슨 일이시죠?”
  아인과 입씨름을 하던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더니, 톱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집주인을 따라 널찍한 홀로 들어갔다. 아인은 남자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멀쩡하게 걸어다니고 있는데요?”
  “그렇군. 잘못된 정보였을까? 거짓말이나 미신의 징후는 전혀 없었는데.”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을 듣고 온 건데요?”
  “마을의 노인에게 들은 말이다만, 이 왕궁은 그 노인네가 어렸을 때부터 이 숲에 있었다고 해. 하지만 마을 어른 중 누구도 이 왕궁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고 여기서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고 하더군. 그게 너무 이상해서 한 번 여기에 숨어든 적이 있었는데, 마치 벽에서 뻗어 나온 가지라도 되는 양 사람이 붙어 있었다고 하더군. 혼비백산해서 도망친 이후로 여기에는 한 번도 접근하지 않았다고 해.”
  “무슨 말씀들을 그렇게 나누고 계시죠?”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은 집주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집주인의 발바닥을 살피고 있던 아인은 당황했지만 남자는 능청스럽게 답했다.
  “이런 훌륭한 석재 건물이 어떻게 이렇게 잘 유지될 수 있는지 감탄하고 있던 차입니다.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하셨을지 상상도 안 되는군요.”
  남자의 칭찬에 집주인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매일매일 새로 만든다는 기분으로 관리하고 있지요. 저는 페트로프라고 합니다. 손님이 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괜찮으시다면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마침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거든요.”
  “물론 감사히 수락하겠습니다. 제 조수도 기꺼이 받아들일 겁니다.”
  이번에는 남자가 눈치를 주었다.
  “그렇지?”
  아인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트로프는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판석으로 된 식당에는 50명은 앉을법한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식기와 유리잔, 와인과 물이 담긴 병들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가장 끝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남자는 페트로프가 거의 훌라후프만한 거대한 쟁반을 들고 걸어오는 것을 보며 잔에다 와인을 가득 채웠다.

  식사는 고급 레스토랑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호화로웠다. 남자가 식사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데 반해, 저민 송아지 요리와 토마토가 들어간 스프, 올리브 요리와 구운 오리를 양껏 먹은 아인은 만족스럽게 의자에 파묻히듯 기댔다. 아인은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멋진 식사였어요. 여기서 살고 싶을 정도에요.”
  페트로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원하신다면, 며칠 정도 묵고 가셔도 됩니다.”
  “그거 괜찮군요. 며칠 동안 당신을 봐야 할지 모르니까요.”
  남자는 와인을 홀짝였다. 페트로프는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의사입니다. 전공은 환상증(幻想症). 존재하지 않는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죠. 페트로프씨를 진찰하고 싶습니다만,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페트로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존재하지 않는 병이라고요?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군요.”
  “그런 얘기 자주 듣습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제 몸에는 아무 문제도 없고,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믿지 못하겠군요. 하지만 여기서 묵어가는 것은 괜찮습니다. 방을 준비해 드리죠.”
  페트로프는 조금 불쾌한 표정으로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어떻게 된 걸까요? 이상한 점은 없어 보이던데.”
  아인은 잔에다 물을 따르며 물었다. 와인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백 살은 먹었을 노인네가 어렸을 때부터 숲에서 나가질 않은 인간이라고. 근데 저 남자는 서른 살도 안 돼 보여. 그보다 이상한 사람은 전 세계에 백명 안쪽일걸.”
  남자는 잔을 가득 채운 와인을 단숨에 삼켰다.
  “확실하게 진찰해 보는 게 제일이지만, 뭐, 정황만으로도 충분해. 페트로프라는 남자는 시간에 붙어 버렸어.”
  “미안해요. 뭐라고요?”
  “시간 고착증. 그래, 단순히 물리적으로 어딘가에 붙어버리는 것만큼 흔하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드문 일도 아니야. 사실, 시간 고착증은 그 하위분류지. 시간과 공간은 사실 같은 거라는 거 알고 있어? 저 남자는 어떤 식으로든 수백 년 전의 시간에 붙어 버린 거야. 그러니까 당연히 늙지도 않지. 아마 네가 먹은 그 음식도 수백 년 묵은 재료로 만들었을 걸?”
  회색 곰팡이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커다란 치즈를 작게 잘라냈다. 아인은 웃으며 비스킷 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농담하지 마요.”
  “그래, 나도 농담이길 바라. 난 식중독 같은 건 못 고치니까. 어쨌든 이제 환자를 치료할 준비를 해야지. 너는 지금부터 마을로 가서, 이 남자와 왕궁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뭐든 알아내 오도록.”
  남자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잘라낸 치즈를 입에 던져 넣었다.
  “하는 김에 톱도 돌려주고 오고.”

  아인은 땅거미가 지기 시작해서야 왕궁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와서 맨 처음 본 것은 문 앞에 서서 톱을 휘두르고 있는 남자였다. 아인은 한심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이거 갖다 주고 오라고 했잖아.”
  “누구한테 갖다 줘야 할지 말 안 해 줬잖아요. 게다가 그런 흉흉한 물건을 들고 다니고 싶지도 않고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네 여관 찾는 능력만 없었으면 난 당장 너를 집으로 돌려보냈을 거야.”
  남자는 톱을 옆으로 휙 던졌다. 톱은 사자 석상 앞에 떨어졌다. 아인은 그걸 잡아 손잡이가 위로 가도록 기대 세워 놓았다.
  “제가 가져온 정보나 듣고 나서 그런 말을 해요. 확실히 조사해 왔으니까.”
  아인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자는 상당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설명해 봐.”
  “우선 마을 사람들한테 왕궁의 존재에 대해 물었어요. 모두가 그게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이상의 관심은 전혀 없더군요. 그냥 있는 거 아냐? 정도의 반응이었죠. 안에 살고 있는 남자에 대해 아는 사람도 한 명도 없었고요. 그러다가 어떤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오, 최초 제보자를 발견했어? 너도 이제 꽤 제법이군.”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감탄했다. 아인은 짐짓 불쾌한 척 했지만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었다.
  “말 끊지 말아요. 아무튼 그 할아버지가 해 준 얘긴데, 이 나라의 어떤 역사책에도 그 왕궁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거예요. 단 한 권, 할아버지가 이 마을 교회에서 찾아낸 책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흥미롭군. 계속해 봐.”
  “그 책에 따르면, 600년 전에 이곳을 지배하던 왕국이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 침략자와 맞서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죠. 그리고 그 왕이 살던 왕궁에 대한 묘사가 있었는데, 정확히 이 왕궁과 똑같았어요. 아마 그를 패배시킨 침략자들이 의도적으로 기록을 지운 게 아닐까요?”
  아인은 의문형으로 말을 끝내긴 했지만, 자신의 추측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남자는 검지와 엄지로 턱을 매만지며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린 남자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몇 가지 걸리긴 하지만, 지금은 일단 네 가정을 채용하지. 시간 고착증의 원인은 명백해. 미련, 망집, 우리나라 말로는 한. 네 말대로라면 이 남자는 왕족이거나 그 후예겠지. 원인을 알았다면 더 이상 망설일 건 없지.”
  문을 연 남자는 마침 자신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페트로프를 보고 아인에게 씩 웃어 보였다. 남자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다가와 페트로프의 어깨를 잡았다.
  “오, 페트로프 씨. 실례지만 잠깐 제 눈을 봐 주시겠습니까? 아주 잠시면 돼요.”
  남자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왼손을 뻗어 페트로프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잡은 손을 살짝 들어 그와 눈동자를 맞추었다. 그 상태에서 남은 오른손으로 딱 하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페트로프는 무너지듯 쓰러졌다. 아인은 감탄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남자는 웃으며 페트로프를 들쳐 멨다.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할 건가요?”
  두 사람은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인은 페트로프의 시체 같은 손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며 물었다. 남자는 축 늘어진 페트로프를 의자에다 기대 놓고 쓰러지지 않도록 이리저리 균형을 잡으며 대답했다.
  “이 사람의 과거를 들여다 볼 거야. 망각은 삭제가 아니거든. 잠들어 있는 기억을 통해서 뭐가 원인인지 찾을 거야. 자, 그럼 페트로프 씨. 당신은 5살입니다. 당신 앞에 무엇이 보이죠?”
  마치 시를 읊듯이 운율이 실린 남자의 말에, 페트로프는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토끼, 토끼들이 보여요. 산토끼들이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걸 잡아주셨어요.”
  “토끼?”
  아인이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도 당황한 듯 보였다.
  “음... 좋아요. 아버지 얘기를 해보죠. 당신은 지금 7살입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뭘 하고 있나요?”
  “망치를 들고 있습니다. 아마 농기구를 만드시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대장간에서 일할 때 제가 가까이 오는 걸 싫어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졸라대면 결국에는 허락해 주셨죠.”
  페트로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남자와 아은은 웃지 못했다. 페트로프의 과거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의 집안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 보았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페트로프씨가 왕족이 아니라는 건 확실한 것 같네요.”
  “그의 조상 중에 왕족이 있는 것 같지도 않군. 설령 있다 하더라도 어떤 복수심을 가질만한 에피소드도 전혀 없어. 추측이 완전히 틀렸구만.”
  “미, 미안하게 됐네요.”
  아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걸 보는 대신 고개를 저으며 페트로프를 뚫어져라 보았다.
  “아냐, 추측은 좋았어. 전제가 잘못되었으니 잘못된 추측이 나오는걸 탓할 수는 없지. 음, 좋아. 그럼 이렇게 해 보지. 페트로프씨. 당신이 그 시간에 고정된 날 이야기를 해 보죠. 당신이 생각하기에, 당신이 죽은 날 말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 질문에 페트로프는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내 페트로프가 침통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 그들이 왕궁을 태워 버렸어요.”
  이 말을 하면서 페트로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남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있는 채로 태웠다는 말인가요?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했죠?”
  “그들은 나를 쫓아내고 싶어 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왕궁 안에 있던 귀중품들을 전부 팔아버린 걸로도 모자라서, 아예 왕궁을 해체해서 석재를 팔아 돈을 벌려고까지 했어요. 저는 그걸 막으려고 했어요. 전 이 왕궁에서 농성을 했고 그들은 불을 지르면 내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군요. 그리고 당신은 죽었고요.”
  “맞아요. 그렇게 저는 죽... 어? 나는, 죽었...?”  
  “협조 감사합니다. 푹 주무세요.”
  남자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맞부딪혀 딱 하는 소리를 냈다. 혼란스러워하던 페트로프는 그대로 테이블에 푹 고꾸라졌다. 남자와 아인은 머리를 맞댔다.
  “어떻게 된 거죠? 마을 사람들이 이 왕궁을 해체하려고 했다면, 그걸 막으려던 이 남자가 죽은 후에 이 왕궁은 해체되었어야 해요. 그럼 이건 뭐죠? 왕궁 자체가 시간에 붙어 버린 건가요.”
  “설마. 시간 고착증은 오컬트 현상이 아니라 병이야. 무생물에겐 해당되지 않아.”
  “솔직히 말해서, 난 아직도 그 망할 ‘병’이 어떤 초자연적 현상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애초에 그것들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하지만 명백하게 질병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가 우리에게 어떤 환영을 보여 주고 있는 걸까? 뇌기능이 폭주하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 하지만 이건 분명히 실체가 있어. 단순한 이미지가 오감 모두를 속이는 건 불가능해. 이 돌바닥을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맡고 맛을 볼 수 있다고.”
  남자는 돌로 된 바닥 위에서 쾅쾅 뛰었다. 그 때 고꾸라져있던 페트로프가 신음소리를 냈다. 남자는 뛰던 동작을 멈추고 페트로프를 쳐다봤다. 그리고 한쪽 발을 들어 세차게 내리찍었다. 페트로프가 다시 신음을 냈다. 남자는 이마를 탁 쳤다.
  “오, 그런 거였군. 제길,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뭐, 뭔데요? 뭔가 알아냈어요?”  
  “그래, 이건 시간 고착증이 아니었어! 이걸 봐!”
  남자는 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톱을 세워 석재로 된 게 분명한 벽을 긁어냈다. 벽은 힘없이 손톱에 묻어나왔다. 마치 얇은 피부처럼. 남자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상에 어떤 건축물이 이런 식으로 부서지겠어? 봐봐, 이걸 보고 뭔가 연상되는 거 없어?”
  아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만은 아니기를 빌어요.”
  “훌륭하게 맞았어! 이건 시간 고착증이 아니야! 그리고 붙어 있는 남자는 더욱 아니지! 이 남자는 자라난 남자야! 아니, 이건 이 남자가 아니라 이 남자의 일부에 불과해. 이 집 전체가 이 남자라고! 벽에 붙은 남자를 봤다는 건, 아마 이 사람 부분이 막 자라나고 있는 장면이었겠지. 이 건물이 이렇게 깨끗한 것도,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식재료들의 출처도 명백해졌어. 음식 자체가 왕궁의 일부였던 거야.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 화상의 후유증일거야. 불에 타서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이 건물에 대한 강력한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지. 응, 처음 보는 사례지만 충분히 가능해. 전혀 이상할 게 없어. 이름을 뭐라고 붙일까? 심상발현계 이상변이형 과잉성장증? 좋아. 마음에 들어. 통칭은 팰리스 증후군으로 괜찮겠지!”
  “제가 아는 성장이라는 단어와 요만큼도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러니까, 이 사람이... 건물로 환생했다는 건가요?”
  아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벽을 주먹으로 때리며 페트로프가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남자는 두 팔을 과장되게 벌렸다.
  “환생은 아니야. 변화지. 이 남자는 아마 불에 탄 그 때 이후로 천천히 자라났을 거야.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네가 찾아본 역사책에 이 건물이 소실되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었지? 아마 계속해서 재건되는 건물에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겠지. 처음에는 이걸 없애려고 했겠지만, 코어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다시 자라났을 거야. 그래서 종국에는 완전히 이 건물을 무시하게 된 거야. 그렇게 한 세대, 두 세대가 자라나는 건물을 무시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끝이지. 기록도 남아있지 않으니, 관심을 가진다고 해도 알아낼 방법은 일절 없어. 흥미로워. 기록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역사왜곡이란 이렇게나 간단한 일이야.”
  남자는 일인극의 주인공처럼 열변을 토했다. 아인은 쓸쓸한 표정으로 쓰러진 페트로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에요? 혹시 토목학에도 조예가 있나요?”
  “설마, 난 의사야. 공사가 아니라 수술을 하지.”
  의사는 들고 들어왔던 톱을 집어들었다.  
  “당연히 절제술이지!”
  들쑥날쑥하게 솟아 있는 잿빛 암벽 사이로 위태롭게 도로가 뚫려 있다. 이 위를 조그만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다. 조그만 자동차는 앙증맞은 노란색인 것도 더해 마치 아이들 장난감 같았다. 자동차 안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의사 가운을 걸친 남자와 머리를 뒤로 묶어내린 여자였다.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던 여자, 아영은 질린 듯이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왕궁을 기억할까요?”
  “아니, 잊어버렸어. 한 이주일 만에.”
  남자는 마치 아인이 그 질문을 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기라도 했던 듯 바로 대답했다. 아인은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불만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어떻게 확신하죠?”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기억에 남는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고요.“
  ”네 말이 맞다면 사진은 발명될 필요가 없었지. 사라지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라지는 거야. 200년 묵은 사람 살가죽으로 된 성 같은 걸 누가 보존하고 싶어하겠어?“
  아인은 오뚜기 인형처럼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올라오지는 않은 채로 한숨을 쉬었다.
  “그럼 페트로프씨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남자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석양이 비치는 바윗돌 사이를 바라보며 운전을 할 뿐이었다.

  동유럽의 어느 강변에, 한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외곽에는 숲이 있는데, 이곳에는 어쩌다 생겼는지 모를 커다란 공터가 있다. 가끔 그것을 궁금하게 생각한 외지인들이 물어보면, 마을 주민들은 그곳에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고 대답해준다. 그게 어쩌다가 사라졌냐고 다시 물으면, 마을 사람들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뭐, 원래부터 공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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