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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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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단편제 90회차/3] 시종장의 고민.
글쓴이: IYAGI
작성일: 13-12-28 22:31 조회: 1,245 추천: 0 비추천: 0
 
 
  “그냥 고민하지 말고 덮치시죠.”
  “……나가아아아앗!”
  긴 꼬리를 남기는 외침이 왕궁 안을 쩌렁쩌렁 메운다. 새벽녘 이름 모를 꽃에 맺힌 이슬만큼이나 고운 목소리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것은 명백한 분노. 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완벽하게 뒤로 돌아 그대로 척척 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당연히 방 밖이다.
  그런 내 등 뒤로 방금 전 외침과 똑같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앙칼지게 터진다.
  “진짜 꼴도 보기 싫어!”
  “예이, 예이.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불성실하기 짝이 없이 대꾸한 뒤 방문을 닫았다. 검소함의 끝을 달리는 문이 교양 없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지만 신경 쓰진 않는다. 어차피 소리를 없애려 문을 바꾸려고 해도 예산집행이 허가되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아직도 방문 너머로 구시렁구시렁 흘러나오는 에리카 왕녀님의 불만이다.
  “에휴.”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긴 복도를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었다.
  역시 연애에 대한 훈수는 둬봐야 본전도 못 찾는 것 같다. 연애를 할 때는 잠시 생각이라는 걸 그만둬도 좋을 텐데 말이지. 평소에는 고관 귀족들에 전쟁 영웅조차 벌벌 떨게 할 만큼 대단한 여장부이면서 연애에서는 왜 그렇게 숙맥인지 모르겠다. 전직 용사고 뭐고 이젠 그냥 평범한 소년일 뿐인데 그냥 덮쳐서 기정사실로 바꾸면 간단한 것을.
  뭐, 아무리 정답을 말해줘 봐야 에리카 왕녀님 또한 봄 날씨만큼이나 제멋대로인 마음을 가진 소녀라는 데서 소용없겠지만.
  긴 복도를 빠져나와 왕궁의 중심부, 중앙 홀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단정한 왕성 예복을 갖춰 입은 남자들과 차분한 메이드 복을 입은 여자들. 왕성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다. 대부분은 동선을 이탈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동선 위로는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귀족들이 보였다. 손에 꼽을 정도지만 사제들도 있다. 중앙 귀족들인 그들은 정국 운영에 필요한 일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시간에 왜 이렇게 다들 홀에 몰려 있지?
  “아, 벌써 점심시간 때인가.”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해보자 벌써 정오가 넘어가고 있다. 눈 뜬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마왕이 쓰러지고 난 후 세계정세가 일 분 일 초가 아쉬울 정도로 빠르게 격변하고 있는 지금, 대륙의 중심에 있는 크라운 왕국의 왕성인 이곳이 한가하다면 이상한 일일 테다. 그리고 나는 이 왕궁의 안주인이나 다름없는 ‘시종장’으로서, 언제나 이 왕궁이 완벽하게 그 기능을 다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 가끔은 파업이라는 걸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시종장! 왕궁의 안주인! 이 왕궁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최고책임자다. 나부터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이 왕성은 그 기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일단은 저 손님들의 식사부터 해결해야…….
  그렇게 식사 준비가 어떻게 되어가나 확인하기 위해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나는,
  “아——.”
  탄식이나 다름없는 짧은 비명을 터뜨리며 우뚝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떠오른 한 사람의 실루엣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이윽고 그 실루엣은 등골이 오싹한 한기를 남긴 채 신기루처럼 사그라졌다.
  동시에, 나는 미친 사람처럼 내달렸다. 소매 끝이 붕붕 소리를 내고,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휘날려 툭 튀어나온 이마를 드러내든 말든, 복도에 잔잔히 가라앉아 있는 먼지들을 일으키며 바람처럼 내달렸다.
  시종장으로서의 품위? 품격? 그딴 게 뭐냐? 오늘 점심 식사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만약 이 가정법이 현실이 된다면, 중앙 홀에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귀족들의 분노가 왕성 곳곳에 메아리 칠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꿈은☆이루어진다.
  예, 그런데 이딴 꿈이 이루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주방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은 화재(火災)가 일어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끔찍한 상황이었다. 도대체 불 조절을 어떻게 했는지 밥이 익고 있어야 할 거대한 솥이 불길에 휩싸인 채 맹렬하게 불타고 있었다.
  주방에서 하는 캠프파이어, 는 아니겠지. 응. 아닐 거야.
  현실도피를 시도하길 잠시. 고개를 돌리자 불길 앞에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 있는 메이드들이 보인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불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거야 이해는 된다. 그래도 그렇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정신 줄을 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데!
  “불 꺼, 불!”
  내 다급한 외침과 함께 그제야 메이드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커맨드를 입력해야 움직이는 인형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그 답답한 모습에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아예 까치집을 만들어버릴 기세로 벅벅 긁었고, 이내 불을 끄기 위해 물이 담긴 양동이를 들어 올렸다.
  다행이 불은 더 커지는 대신 어렵지 않게 제압되었다. 애초에 검소하게 생활하는 왕궁이라고 하더라도 주방의 위험성을 생각해 미리미리 불연재로 보강공사를 해둔 게 다행이었다.
  다만 문제는 검댕이가 된 메이드들이나 나나, 완전히 숯덩이가 되어버린 솥이나 정상인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부터 준비해서 새로 밥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간단하게 요약하자. 망했다.
  “……밥 담당은 누구, 아니 빤하겠죠.”
  사실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수준이다.
  아니나 다를까, 메이드들 사이로 한 자그마한 인영이 쭈뼛거리며 걸어 나왔다. 반쯤은 동료들에게 떠밀려서 나온 듯도 한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니까.
  아담한 체구에 양 갈래로 묶은 비단 같이 고운 흑발, 검게 그을린 얼굴에도 별처럼 반짝거리는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 올해로 열여섯 살이 된 메이드 일 년차의 아나스 제인이다.
  “휴우.”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에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제인 양. 오늘은 또 뭘 하고 있었습니까.”
  “……죄, 죄송해요. 살짝 졸았습니다…….”
  어쩌면 핑계마저 항상 같은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메이드들보다 더 까맣게 그을린 아나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땅바닥만 쳐다본다..
  다시 한 번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아나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흑진주 같이 깊고 까만 눈동자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작은 새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는 작은 어깨가 겁을 먹은 듯도 하다.
  그래도 나는 그들의 책임자로서 할 말은 해야 한다.
  “무슨 잘못을 한 건진 아십니까.”
  “죄송합니다.”
  “지금 왕궁이 무슨 시간인지 아시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말 외에는 못해요?”
  “……. ……죄송합니다.”
  개미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가 죄송합니다, 라는 말만 연발한다. 잔뜩 기죽은 그 모습에 나는 더 이상 잔소리 할 여력도 갖지 못하고 처벌을 선고했다.
  “가서 반성문 백 장 써 오세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에 서 있던 메이드들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날 쳐다보는 게 보였다. 왕궁의 점심 식사를 날려버린 것치고는 우습지도 않은 벌이겠지.
  반면 아나스는 폭탄이라도 선물 받은 것만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륙 전체가 전쟁 중이었던 탓에 왕궁에 들어온 메이드 중 몇몇은 글을 잘 모른다. 아나스도 그 중에 한 명이고, 그녀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안전’하고 ‘위험’한 처벌은 없다.
  참고로 여기서 안전은 왕궁의 안전이고, 위험은 아나스 개인의 것이다.
  아나스가 실수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다른 처벌을 내렸었다.
아직도 잊어지지 않는 건 첫 번째 처벌. 분명 나는 화장실 청소를 시켰을 뿐이다. 과정은 생략하자. 결과적으로 화장실은 폐쇄해야 했고 일주일 동안 공사를 벌여야 했다. 두 번째 처벌은 수십 벌의 메이드복 세탁이었다. 얼마나 열성으로 빨았는지 다음 날 메이드복을 수십 벌 새로 주문해야 했다. 세 번째 처벌은 왕궁 바닥 청소였다. 그냥 쓸기만 해도 됐을 텐데 광택까지 시도했다. 그날 국무대신이 걷다가 미끄러져 넘어져 허리를 다쳤다.
  그 외 기타 등등.
  처벌에서만 문제가 생기면 다행인데, 맡기는 업무마다 사고 친 것도 적지 않다. 왕족들의 방 정리를 시켰더니 비단 이불을 찢어 먹질 않나, 목욕물을 데워놓으라고 했더니 고깃국을 끓여도 좋을 온도에 맞추질 않나……. 그리고 이번에는 주방에서 가장 말단이 하며, 가장 쉬운 일인 밥마저 태워먹었다.
  이정도면 메이드 계의 언미다스(Unmidas)의 손이 아닐까.
  자, 여기서 내가 뭔가 처벌이라고 힘든 일을 시키면 그건 뭐가 될까? 그래, 폭탄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겠지. 그것도 열성적으로 일한 결과물이라 차마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온전히 내 책임이 되는.
  그러니까 이건 매우 합리적인 처벌이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써오세요.”
  “……네.”
  내 으름장에 아나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빙글 돌아서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반쯤 원망마저 섞인 시선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메이드들을 향해 돌아섰다. 당신들이 아무리 더 강한 처벌을 하라고 쳐다봐도 이게 한계라고.
  “흠흠. 여러분은 지금부터 샌드위치와 다과를 준비합니다. 점심 식사는 나가야 하니까요. 그 정도라면 금방 되겠죠?”
  “““……네.”””
  이구동성으로 돌아온 대답에 난 한 시름 놓으며 다시 돌아섰다. 어째서 다 같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는지는 생각하지 말자. 아무튼 아나스를 뺐으니 더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그나저나 점심 식사를 샌드위치 따위를 내놓았다고 난리 칠 귀족들은 어떡하지.
 
 
  다행이 귀족들의 점심 식사는 에리카 왕녀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귀족들은 샌드위치 따위가 식사로 나왔다는 것에 분노했다. 그런 귀족들 앞으로 왕녀님이 나아가 “내가 시켰는데?” 라는 말을 했고, 그 단 한 마디 말에 귀족들의 분노는 거품처럼 사그라졌다. 어쩌겠나. 차기 황제 앞에서 겨우 한 끼 식사 때문에 밉보이고 싶은 바보들은 없겠지.
  뭐 그 대가로서 또 귀찮은 일을 벌였다며 들들 볶이고, 연애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에 관한 논문을 작성해 리포트로 제출하기로 했지만.
  아무튼 점심 식사 사고 이후로는 큰 문제는 없었다. 드넓은 왕궁은 적재적소에 위치한 고용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잘 관리되고 있었다. 일일이 그 현장을 찾아가 관리 감독하는 것은 피곤했지만.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검푸른 밤하늘은 달도 뜨지 않아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수없이 수놓인 별빛들이 그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은 고요하고 적막하게, 또 아름답게 하루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 일은 끝나지 않았다. 내게 남은 일이라는 건 바로 순찰. 최근에 시작한 일로 특근이라면 특근이다. 덧붙여 평범한 순찰은 아니다. 경계근무와 같은 일은 근위대 소관이고, 내가 하는 순찰이란 바로 고용인들의 고충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메이드들의 숙소에 숨어든 상태다. 왜 고충을 듣는데 메이드 숙소에 숨어들었냐고, 혹시 변태냐고 묻는다면 난 절대로 변태가 아니라는 대답부터 하겠다.
  ……어쩔 수 없이 하얀 속살을 보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 흠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애석하게도 내겐 고용인들과 대면한 상태에서 직접 고충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도 그럴게 고용인들이 이 왕성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내 손에 달려 있다. 조금 권력을 남용하자면 내 마음대로 그들을 해고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보니 그들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내 앞에서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다른 방법으로 소원수리 같은 것도 있겠지만 글을 모르는 고용인들에겐 소용없는 일이라 효율성이 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들의 고충을 듣는 방법은 그들끼리 자연스럽게 하는 이야기를 엿듣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내가 메이드 숙소에 잠입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속살 같은 걸 보는 건 어디까지나 보너스 같은 거라고. 흠흠.
  그렇게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길 한참. 일 년 전만 해도 전쟁 중이었던 탓에 그들의 화제는 고향 집으로 돈을 부치는 일과 앞으로 올려 받을 급여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급여라는 건 내 마음대로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보니 안타깝지만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 방에 도착했을 때였다. 조금 큰 목소리가 방 문 틈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우, 정말 짜증나 죽겠어.”
  오오, 이제야 고충다운 고충이 나오는 건가! 이 일을 하는 보람이 있구나!
  나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문 틈 가까이 다가섰다.
  그런데——.
  “아나스 그 계집애 말하는 거지?”
  아나스? 아나스 제인?
  “그래. 오늘도 그 애가 밥 태워먹어서 얼마나 깜짝 놀란 줄 알아?”
  “그런 주제에 고작 반성문이나 쓰고 말이지.”
  “시종장님이 많이, 아니, 엄청나게 봐주고 있지.”
  “그게 불만이라는 거야. 아니, 상식적으로 귀족들의 점심 식사를 그렇게 망쳐놓고 고작 반성문이나 쓰라는 게 말이 돼?”
  “혹시 모르지.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 아냐?”
  낄낄 웃으며 떠드는 그녀들의 대화에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을 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그냥 아나스의 이름이 나왔을 때 자리를 떠야 했었다.
  나름대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내 입장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부끄럽고, 화가 나고, 허무한 기분을 들게 하고 있었다.
  “하긴 일 년 동안이나 그렇게 일을 엉망으로 했는데 안 잘리고 아직도 붙어 있는 걸 보면…….”
  “생각해보니까 진짜 그러네?”
  “그러고 보니 요즘 시종장님이 밤늦게나 숙소로 돌아간다는 소문이 있더라.”
  “아나스 그 계집애도 요새 밤늦게 돌아오잖아?”
  “어, 그건 설마……?”
  나는 더 이상 대화를 엿듣는 대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저 왕궁 안에서 흔하게 나오고는 하는 유언비어일 뿐이었음에도,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텅텅 비는 충격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신경 쓸 일 아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자.
  주문을 외우듯, 스스로를 세뇌하듯, 그렇게 되새겼다.
  왕궁은 기본적으로 폐쇄적인 성격이 짙을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것은 왕가의 핏줄들이니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당연할 수밖에 없는 성질이다. 당연히 고용인들은 왕궁 안에서 외부와의 접촉이 자유롭지 않다.
  그렇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은,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 단지 그 뿐이다.
  메이드들이 아나스를 타깃 삼아, 나까지 끌어들여 뒷담화의 소재로 사용한 것은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다. 나만 당당하면 된다. 그래, 나만 당당하다면 문제가 될 건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아나스는 여전히 실수투성이고, 나는 여전히 그에 상응하는 처벌로서 반성문만 쓰도록 했다. 평범하고 당연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마도 그날 밤부터, 나는 나를 쳐다보는 다른 고용인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유독 아나스에게만 차가워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하더라도 무시한다거나, 분명 하고 있는 일이 혼자하기 힘들어도 도와주거나 도와줄 사람을 붙여주지 않는다든가…….
  이게 웃기지도 않는, 치졸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행동했다. 그렇게 행동할수록 내 머릿속에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다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끔찍한 기분이 들고, 뱃속은 시도 때도 없이 메슥거려 토악질이라도 하고 싶어져도.
상황을 개선시켜보고 싶지만,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좋을 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시종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이 일을 오래 해왔다고 하더라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냥 이렇게 지낼 수도 없다. 결국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아나스나 나나 어딘가 망가질 것이다.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도움을 청할만 한 사람은 왕녀님밖에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다소 괴팍한 성격과 연애문제만 제외한다면 모든 면에서 완벽했으니까.
  그런 결정을 내리고 이틀 후, 나는 연애관련 리포트를 핑계로 어렵사리 시간을 맞춰 왕녀님을 찾아 뵐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말을 꺼냈다.
  물론 아나스에 대한 말은 아끼고 어떤 고용인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했다. 왠지 모르게 창피한 기분이 들어 차마 그 고용인이 아나스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장황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내 이야기가 끝난 뒤, 왕녀님은 더 없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날 뚫어져라 노려보았고,
  “……그래서 찾아왔다? 난 지금 학원 문제로만 해도 머리가 터질 거 같은데?”
  라며 시큰둥하기 짝이 없는 반응을 보였다. 순간 그 모습에 울컥한 나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학원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있는 용사가 문제겠죠.”
  “아니거든!? 학원 예산 만드느냐고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기나 해?”
  머리 뒤로 불길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왕녀님이 이쪽을 날카롭게 노려본다. 순간 푸른 수정 같은 눈동자가 더 없이 날카로운 창처럼 느껴져 오금이 저렸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난 있는 객기, 없는 객기 모두 끌어내 왕녀님과 맞섰다.
  “아무튼 도와주실 겁니까, 말 겁니까?”
  왕녀님은 한참이나 더 나를 노려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해결방법이 어렵진 않네.”
  “있습니까?”
  내 반문에 왕녀님은 더없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시원하게 대꾸했다.
  “잘라. 그 애를.”
  “……네?”
  “해고하라고. 그럼 간단하게 해결되는 일이잖아?”
  “아, 아니. 잠깐만요? 그건 좋은 해결책이 아니지 않습니까?”
  해고라니? 참 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정말 좋지 않은 해결책이다. 그건 마치 없던 치부를 사실로 인정하는 모양새가 아니던가.
  “그게 싫으면 뭐, 네가 나한테 해줬던 조언대로 하면 되겠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녀님은 조금 전보다 더 밝은, 태양조차 녹여버릴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가서 덮쳐.”
  “…….”
  “가서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려. 그럼 아무도 너한테 그런 말 못할 거 아냐?”
  설마 아직도 저번의 일로 꽁해 있는 건가. 아니, 그 전에 당신 왕녀님 아닙니까. 뭐 이렇게 막 나가!?
  “표정이 매우 아니꼽다는 거 같은데, 불만이라도 있어?”
  “……아닙니다.”
  별로 좋은 대답은 바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 판단을 세운 나는 왕녀님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바쁜 시간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빙글 돌아선 나는 방 밖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결국 이 문제는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할 거 같다.
  그렇게 막 방문을 나서는 순간.
  “시종장.”
  “예, 왕녀님.”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왕녀님이 조금 전과 다른,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의 표면처럼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 너무 아나스 그 애만 끼고 돈 네 잘못이야. 알아서 처신해.”
  “……예.”
  방을 빠져 나온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문 너머로 왕녀님의 “……멍청하긴.” 라는 혼잣말이 들렸다. 그 너머로 무언가 종이뭉치를 찢어버리는 듯한 소리도. 아마도 내가 건넨 리포트를 찢어버린 거 같은데…….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시 업무로 복귀하기 위해, 나는 하릴없이 복도를 걸어 중앙 홀로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나는 한 가지 뜨악한 사실을 깨달았다.
  고용인 중에 한 명 뿐이라고 했을 뿐인데, 왕녀님이 정확하게 아나스라는 이름을 말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아나스 제인이라는 고용인을 해고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는 시종장이다. 이 왕궁의 안주인인 셈이다. 고용인들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다. 고용인들의 공로도, 잘못도 모두 내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내 업무를 하라면 계속해서 잘못하는 고용인은 해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난 그러지 않았다. 주변의 눈총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그런 주제에 고용인들의 뒷담화 한 방에 무너져 내렸다. 공명정대하다고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실수투성이인 아나스를 해고하지 않는다.
  아나스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노력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그녀의 노력이 해고하지 못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나는 배회하는 유령처럼 왕궁 안을 계속 걸었다. 목적지 따위는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대로 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걸음이 멈췄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그 이상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메이드 복 차림에, 손걸레를 든 채 제 키보다 훨씬 높은 창틀을 닦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는 작은 소녀.
  아나스 제인.
  창문 하나 제대로 닦지 못하는 고용인이라니. 왕성에서 고용하기에는 정말 최악의 선택이다.
  그런데도 난 시종장이면서도 그런 아나스를 해고하지 않는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딱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무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사람 마음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게 내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조금씩 알아가 보자. 내가 어떤 이유로 아나스를 해고하지 않는 건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조금 더 나중에 알게 되지만, 아나스가 밤늦게까지 사라졌던 이유는 다른 메이드들이 왕궁에서 일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을 모르는 그녀는 독학으로 글을 공부하고 있었다.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자신은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 위해서.
 
***
 
 61.2 장.
 허용범위 2장 이내니까 ㅇㅋ.
 글씨 크기는 가독성을 위해 그냥 키웠는데 이건 상관없겠죠 'ㅅ'...
 사실 본문은 5기 공모전에 제출해 광탈했던 이야기의 번외편 같은 내용으로 작성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느낌으로 썼으면 1차 광탈은 안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그래서 리메이크 하고 있지만(...)
 
 p.s.2
 들여쓰기 수정만 추가로 했는데...
 이런 수정도 안 되던가요 ㅇ _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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