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이 서문은 안 읽으셔도 됩니다. 열심히 읽겠다고 했는데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 이 너무 재밌어서 다른 소설을 읽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핑계죠. 당신과 나의 어사일럼도 재밌게 읽어서 평을 해야하고, 이것저것 볼 게 말 그대로 박스(지인에게 선물받은)로 쌓여있는데 열정을 잃었는지 잘 읽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니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고 싶군요.
2. 개괄적인 평가
취향이 독특한 사람은 좋아하는 작품을 찾기 힘듭니다. 자기가 자급자족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엔 자기만족에서 그칠 뿐 인기는 죽어도 못 얻죠. 그래서 취향이 독특한 사람은 깊게 파던가, 아니면 다른 작품들에도 맛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 와중에 정말 자기 취향에 맞는 글을 찾으면 엄청나게 기쁘죠.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처럼요. 사소한 단점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만날수록 기분이 묘해집니다. 이상적인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콩깍지가 벗겨진 거죠. 그래도 매력적이라서 계속 만나는데 결국 자기가 바라는 이상형과는 거리가 좀 있다는 걸 깨닫죠. 실망하게 되고 이전에 지나갔던 단점은 대들보만큼 크게 보입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걸까? 생각해보지만 결론을 내리게 되죠.
원래 이랬었네. 잘못된 건 작가와 글이 아니라 제 인식이었습니다.
3. 개선되지 않는 문제
넵. 이게 가장 큰 요인입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단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면 거슬립니다. 악화되면 이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 상당히 고질적인 병이라는 걸 알게 되죠. 작가 습관, 아니면 문체, 전개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생겨버리고 마는 문제.
제가 마검마탄 1,2권 평에서 가볍게 불평한 것이, 그리고 정말 사소해서 아예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 심각한 병의 전조증상이었습니다. 일찍 알았다면 기대하지 않았겠죠. 기대하지 않았으면 실망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4. 실패한 인물
사실, 아주 나쁘진 않습니다. 인물은 일관성있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어요. 아예 작가가 부여한 자기 역할도 못하는 작품도 있는데 이 작품의 캐릭터는 자기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역할이라는 게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거죠.
이 작품의 주인공은 조연을 표방하고, 이 글은 어디까지나 본편의 스핀오프라는 설정을 견지하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다는 이세계 갑질물 있죠? 그거에요. 이 작품의 모든 인물은 주인공을 띄워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흠, 이렇게 설명하면 안 되겠죠. 적절하지 못한 설명이었네요. 이 작품의 인물들이 무력하게 주인공에게 지는 것도 아니고, 인물간의 갈등이 적은 것도 아니니까요. 이렇게 말해야겠군요. 이 작품의 모든 인물들은 주인공의 설정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마검마탄의 주인공은 설정이 더럽게 복잡한데, 갈수록 새로운 설정과 면모가 나오고 있고, 거기에 더해서 그 설정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어요. 이 작품의 원동력은 오로지 설정입니다. 설정. 또 설정. 주인공을 제외한 인물의 정체성은 한줄의 설정으로 축약됩니다. 이건 컨셉이기도 하죠? 그런데 문제는 축약되는, 단편적인 캐릭터들을 만들고 죽이고를 반복하고 있어요. 그리고 주인공의 설정을 점점 더 늘립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죠.
5. 실패한 주인공
네. 얼마나 심각한지 아시겠죠? 정말 심각합니다. 그렇게 주인공한테 올인했고, 1인칭 시점에 주인공 주변 상황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아서 이 글은 주인공 말고는 믿고 갈 게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주인공이 너무 난해해져서 독자의 이해와 몰입을 방해합니다. 이 녀석은 과거도 너무 많고, 생각도 너무 많고, 비밀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너무 많고 얽힌 관계도 너무 많아요. 그런데 일단 그걸 작가에게도 주인공에게도 해소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떠안고 가요. 오히려 더 꼬고 있어요. 왜냐면 애초에 그런 설정 자체에 글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게 해소되는 건 이야기의 해결이 아니라 정체거든요.
사실, 주인공이 이해하기 힘든 성격이나 과거를 가진 건 아닙니다. 요컨대 용사가 마왕을 무찌를 때 우리들도 있었다의 주인공 론은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해가 안 돼요. 사실 그 작품의 캐릭터들은 전반적으로 이해가 안 되서 백치의 데몬 술탄 아자토스의 편린을 보는 것 같은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해 자체를 거부하는 위대한 옛 것은 아닙니다.
난잡해요. 그리고 많아요. 더럽게 많아요. 명쾌하게 딱 정리되는 게 없어요. 계속 추가하고, 늘리고, 꼬고, 그런데 주인공 자신의 해결책은 '다 때려부순다' 가 전부고요. 스토리는 '다 때려부숴'라는 게 전부에요. 싸우는 이유? 뒤에 있는 음모? 많죠. 하지만 본질은 그겁니다. 주인공아. 네가 갑질할 일을 준비해뒀단다. 필요한 만큼의 내면갈등을 한 뒤 박살내거라.
매력을 못 느끼겠어요. 1권에선 개 쩔었습니다. 주인공은 엄청나게 멋있었다고요. 말 그대로 다크 히어로였잖아요. 그런데, 2권에서 구질구질해지더니 3권에선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6, 완전히 실패한 영웅휘광의 크로스포인트
이거 분명 스핀오프라는 설정이었죠? 그런데 물읍시다. 본편의 주인공은 도대체 뭘 하고 있죠? 스핀오프의 주인공이 구르고 내적갈등하고 인생을 망치고 설정을 복잡하게 해서 독자를 질리게 만들 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냐고요? 1권에서는 대충 언급됐습니다. 바뀐 미래에서 조역 대신 본편의 정사를 진행시켰어요. 근데 2권에서는 거의 언급이 안 됐습니다. 그리고 3권은 더 언급이 안 됩니다. 얘 주인공 맞죠? 얘도 나름대로 싸우고 갈등하고 있지 않아요? 전 그럴 것 같은데? 설마 아닌가요? 작중에서 언급이 안 돼요. 지나가는 식으로도요. 영웅휘광의 주인공에게 온갖 등장인물이 꼬이고 그 인물과의 갈등을 외전의 주인공이 해결하는데 그 인물들이 왜 나오며, 영웅휘광의 주인공은 그로 인해서 무슨 갈등을 겪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상한 거라고요. 이럴거면 영웅휘광과의 접점 자체를 없앴어야죠. 지금 스토리 돌아가는 걸 보면 본편 주인공이 스핀오프 주인공에게 묶여있어요. 나름대로 전개를 예상해보지만 무슨 전개가 나오든 실망하게 될 것 같아요.
거기에 더해서, 영웅휘광의 히로인은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쪽 히로인이 둘 있는데 2명 중 마법소녀 쪽은 이번 권에서 대사 1번? 2번 정도 친 것 같아요.
7. 작위적이고 연계되지 못하는 사건
이건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소설 세계(주인공은 소설 속의 등장인물임을 자각하는 소설 인물이라는 설정)를 쓰고 있는 작가의 능력이 모자라다. 주인공 입으로 디스했으면 기가 막혔겠죠. 그렇지만 안 하고, 그 소설 작가는 결국 작가님 본인이잖아요. 사건은 연결점도 없고 적당히 클리셰스러운 걸 늘어놓기에 급급합니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든 깨려고 노력해요.
천문부 만드는 그건, 꼭 했어야 했나 싶습니다. 다른 방법 없었을까요? 정말 그게 유일한 해답이었을까요? 정말로? 3권에서 나온 것보다 더 세련되고 작위적이지도 않고 인물의 매력을 살릴 수도 있고 떡밥도 뿌릴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요?
8. 읽기 지친다
무거운 이야기. 무거운 소재. 진지한 내용. 생각 많은 주인공. 그러면 독자가 읽다보면 지쳐요. 달래줄 방법이 필요하죠. 이 작품은 대중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다른 쪽에 눈을 돌리게 하는 거죠. 섹스 어필(혹은 히로인의 귀여움 어필). 그리고 개그. 근데 일단 귀여운 건 뭐 적당히 넘어가는데 주인공은 그 와중에도 생각이 너무 많고, 개그는 전적으로 정말, 정말 알아먹기 힘든 패러디 개그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뭘까요. 뭐죠? 뭐냐고! 난 모르겠어! 패러디라는 건 짐작하는데 뭔지 전 모르겠어요! 정녕 이렇게 했어야 했나요?
9. 총평
기대가 크면 실망또한 더욱 커지는 법이죠. 그리고 이렇게 분량 많고 무게감있는 소설일 경우 다 읽고 나서 재미없으면 넋이 나갑니다.
지금 제가 그런 상태에요. 이게 객관적으로 별로인 건지 아니면 그냥 끝까지 높아진 기대치에 만족하지 못했을 평작인지 전 모르겠는데. 솔직한 감상으로 3권은 너무 재미없습니다. 류세린 작가의 엔딩 이후의 세계와, 당신과 나의 어사일럼도 '이전의 소설' '이전의 사건'이 있고 현재 소설은 그 후속작이라는 느낌이거든요? 모든 점에서 류세린이 상위호환입니다. 모든, 점에서요. 단 한 부분도 나은 게 없어요. 그 2개는 과거에 일이 있었지만 그건 그냥 배경이고 지금 독자가 읽는 그 소설에선 다른 이야기 한다고요. 과거에 얽매여서 모든 사건 전개를 과거의 사건에 의존하는 대신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