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자세연이 죽은 후 그녀를 살리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다가 좌절하고 흑화해서 세계정복을 노리는 인물”
손잡잤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미래 진자로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평가를 할 거라고 본다. 지금까지 필자도 그랬고. 근데 이렇게 생각하고 읽다 보니까 뭔가 좀 아귀가 안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한 번 생각을 바꿔 보았다.
사실 진자로가 자세연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정말로 자세연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기보다는 절망스러운 현실으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한 도피가 아니었을까?
1.
미래 진자로의 행동에 대해서 꾸준히 제기되어오던 비판이 하나 있었다. “얘 뻘짓하는거 아니냐?”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타임머신을 만든다고 해서 출산 중에 사망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그것도 출산 자체를 취소하지 않으면서? 물론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월한 미래 기술을 과거로 들고 오거나-혹은 임산부를 미래로 끌고 오거나. 하지만 이런 것들은 실현가능성이 낮은 극단적 방법이고, 타임머신으로 자세연을 구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진자로의 노력은 핀트가 빗나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하지만 이 노력을 자세연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진자로의 현실도피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진자로는 과학에 재능이 있다. 오로지 과학에만 재능이 있다. 거기에 진자임이나 하나봄, 진지혜의 등장으로 인해서 그가 미래에 타임머신이나 메이드로봇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까지 “증명”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타임머신을 만든다는 것은 “자세연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진자로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자세연의 사후, 진자로는 여러 가지의 현실적인 대처방안을 고르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통해 현실도피를 시도하였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만큼, 그 당시에는 자신이 현실도피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수준에서는 이게 헛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세연이 로봇을 분해하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현실도피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걸 깨달은 충격으로, 진자로는 자신의 행동의 목표를 “세계정복”으로 바꾼다.
3.
진자로가 세계를 정복한 이후에 한 행동이 자세연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연이 죽는 루프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필자의 추측은 또 다른 증거를 얻는다.
앞에서 필자는 타임머신을 통해서 자세연을 살리려면 굉장히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햐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극단적인 방법을 이용하면 타임머신을 통해서 자세연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세계를 정복한 진자로가 그 정도 방법도 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여기에서 진자로의 근본적인 목표는 “자세연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세연을 잃은 슬픔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자로가 세계정복을 하려는 목적은 세계에 대한 화풀이고, 이는 자세연의 죽음에 대한 진자로 나름대로의 애도의 표현인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자세연이 죽는 루프를 확정시키고, 그게 결국은 산 세연이를 묻어서 죽은 세연이를 추모하는 꼴이 될지라도.
4.
5권에서 나타나는 미래 진자로에 대한 묘사에서 또 다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미래 진자로가 자세연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묘사가 나온다. 필자는 이걸, 자세연이 자신의 결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을까 하고 진자로가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파악했다.
3에서 이야기했지만, 진자로가 하는 행동은 결국 세연이가 죽는 미래를 확정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살아있는 세연이를 계속 보고 있다보면 결심이 흔들리게 될 것이고, 이제 와서 결심이 흔들렸다가는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왔던 감정과 행동들이 헛짓이 될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았나 한다.
여러모로 과격한 해석입니다만, 한 번 떠올리고 나니까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더군요. 진실은 어떨까요... 전 그저 6권을 기다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