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들이 단절된 공간에 모였는데,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는 설정은 듣기만해도 재밌고 흥미로워보였는데, 실제로도 이런 설정에서 기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잘 살려줘서 좋았습니다.
배경에서 오는 오묘한 분위기에, 주인공의 생각이나 독백이 폭풍전야같은 '불안감'을 수시로 만들어내는 느낌이라, 몰입이 잘 됐어요.
주인공의 말재간도 즐거운 요소 중 하나였는데, 다른 분들이 주인공의 허세를 보며 '헛소리 시리즈'(니시오 이신)를 떠올린 반면, 저같은 경우는 '하얀 늑대들'(윤현승)의 카셀 울프가 생각나더군요. 우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말솜씨 하나만으로 뭔가를 한다는 점 때문에 그랬나봅니다.
'1부'에 해당하는 전반부에서의 반전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놓쳤던 부분에 대한 재발견이나 어떤 말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를 이용한 것이었는데, 이런 것들 또한 주인공의 말솜씨와 잘 어우러져서 좋았습니다.
특별히 두껍지도 않은 분량 내에서 1부, 2부로 나뉘어서 마치 1,2권을 합친듯한 느낌을 주는게 특이했어요. 마치 쌍쌍바를 먹고있는 듯한 느낌.. (먼산)
특이했고,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구성과 전개가 크게 거슬리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1부도 결국은 '주인공의 기억상실을 해소하기 위해선 명탐정을 만나야되고, 그러려면 저학년으로 가야된다' 는 이유 때문에 이뤄진 전개였고 엔딩이었기 때문에, '자, 이제 눈 앞의 문제를 해결했으니까 명탐정을 만나러 가볼까' 라는 흐름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그냥 1부를 좀 늘려서 한 권으로 만들고, 2부는 2권 에피소드가 됬어도..'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1부와 2부 각각의 텐션과 반전, 그리고 시리즈 첫 권의 의미를 생각해봤을 때는 이런 선택이 차라리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2부 시작 후에 곧바로 '명탐정 사망'을 빵 터뜨려서 시선을 집중시키고, 모두를 의심하고 추리해야 한다는 '상황'이 주는 분위기를 잘 살렸기 때문에, 이런 1,2부 구성에 대한 어색함을 느끼기도 전에 새로운 사건에 몰입해버렸어요.. OTL
'추리'라는 카드를 활용하는 점에선 '고식'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뭔가 '추리'를 해야하는 상황은 그 상황 자체만으로도 흥미롭고 몰입하기 쉽고, 고식에서는 '정말로 독자가 트릭에 감탄하거나 함께 추리해나가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자들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빅토리아라는 캐릭터를 돋보이게 만드는 '도구'로서 사용되는 경향이 강한데, 이 작품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엎어얘기하자면, 정통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읽으면 곤란하다는 것 (..) '추리'는 이 작품의 메인이 아니라 보조역할에 더 가까우니까..)
추리과정이 주는 흥미로운 분위기는 주인공이 매그니튜드7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열었던 재판에서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의 분위기와 반전이 정말 좋았어요.
......하지만 그 이후의 전개는.. 으음.. -.-;
사실, 갑자기 벌어지는 '본격 이능배' 자체에는 큰 거부감이 없었어요. 이미 1부에서부터 '이능의 힘'같은 것들을 은근히 보여주기도 했고, 배경이 주는 분위기 자체가 거기에 잘 부합되는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 연출의 온도 차이는 대체.. orz
바로 직전까지는 나름대로 심리물에 추리물 비슷한 것이었던 작품이 갑자기 열혈 이능배로 변해버리니,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능배 요소가 들어갔다는 것 자체보다는, 그 연출의 정도가 너무 심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장면에서 폭주해서 달려오는 누군가를 그린 그 일러는 정말이지.. OTL
'조수'와 '명탐정'에 얽힌 마지막 반전에 대한 연출도 아쉬웠습니다. 내용 자체는 '...어!?' 하고 놀랄만큼 의외의 방향에서 잘 찔러들어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연출이 그냥 밋밋했어요. 연출이랄 것도 없이 그냥 설명하는 정도라..
1,2부 모두, 반전에 '작위적인 요소'가 많이 사용된 점 또한 아쉬웠습니다.
원래 이렇게 생각지 못한 허점을 찾고, 뒤통수를 치는 반전에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차단하거나 하는 식이 많지만, 그래도 아쉬운건 아쉬운 것.
뭔가 막힐만하면 '사실은-' 하면서 새로운 것이 나오는게, 나중에는 마치 '반전을 위한 데우스엑스마키나' 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신선하고 좋은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장점과 단점, 색깔이 확실하다는 점이 좋았던 작품.
숨덕부처럼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스테이터스를 가진게 아니라, 여기저기 허점많고 단점이 있는 대신에, 어느 한 지점을 향해 팍-! 치고나가는 느낌의 작품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강점'은 '몰입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입부부터 몰입하게 만들고, 끝날때까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몰입감과 기세는 최근에 읽은 작품들 중에서는 느끼기 힘든 정도라서 인상깊었습니다.
설정 설명도 불친절하고 허점이나 단점도 분명하게 있는데, 그런 단점에 눈을 돌리지 못할 정도로 시선을 확 휘어잡고 기세좋게 앞으로 폭주해서 달려나간다는 느낌의 작품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