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 간만에 나온 시드 신간입니다. 은둔마왕과 같이 나왔지만. 2달이 지나서야 읽습니다. 은둔마왕은 앞으로 1주일 안에 평을 올리도록 할게요.
제 기대치는 이 소설 보기 전에 한없이 높아진 상태였습니다. 온갖 작가들이 호평을 날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평을 선사했어요. 제가 이 소설에 대해서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상태였죠. 그리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책을 펴고 읽었습니다.
2. 개괄적인 평가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인물, 배경, 스토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필력. 그런데. 의외로 중요한 게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별로 신경쓰지 않는 부분. '연출'이죠. 영상물로만 가능한 게 아닙니다. 글로도 새로운 연출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참신하고 새로운 연출은 평범한 솜씨라도 글을 돋보이게 만들고, 지루하고 진부한 연출은 새로운 소재도 그냥 묻어버리죠.
그런 점에서 스프린티나는 초반에 가히 연출력의 종말을 보여줬습니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초반 2페이지, 아니죠. 1페이지만에 제 정나미가 완전히 나가떨어져서 이후의 모든 것이 단점이자 흠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죠. 진짜 심각했어요. 소재는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인물들은 그저 그렇고, 스토리는 너무 진부해서 프롤로그와 1장을 절반쯤 보고 난 다음 이야기의 결말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였고 아주 당연하게도 스토리 예상은 거의 빗나간 게 없었습니다. 필력은 괜찮지만 이렇게 연출력이 모자라서야.
한마디로 괜찮을 수 있었던 소재를, 스토리와 연출력, 그리고 인물이 잡아먹어서 그대로 늪으로 끌고 간 셈이죠. 처참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욕하면서 이 책을 봤는지 모르실 겁니다.
뭐 그래서. 이 정도로 형편없으면 깔 맛이 나겠군! 용마무우 이후로 간만에 나오는 풀파워 원기옥 각오하시지...... 라고 생각했던 게 초중반. 그런데 중후반에서 갑자기 전개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틀어지더니, 끝은 초반의 나쁜 인상을 싹 걷어낼 정도로 괜찮아졌습니다. 책의 인상이 이렇게 바뀐 원인은 결국 그거죠. 괜찮았던 소재와 필력. 일단 그게 밑바탕되어 있었고, 스토리가 살아나자 인물이 살아나고, 결과적으로 책 전체가 상당히 괜찮은 수준으로 올라왔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소설인 거죠.
그러니, 이번 평은, 실수하기 쉬운 일반적인 문제들을 지적하는 수준에서 그칠 것 같네요. 작가는 초반의 나쁜 인상을 제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뒤집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니, 한 번 그 부분을 살펴보고 갈까요?
3. 주제와 연결되지 못한 소재
일단 이 이야기를 하죠. 소재는요. 그냥 소재 좋다 하고 긁어오는 게 아니라 주제와, 스토리와 연관이 되어있어야 해요. 둘 중 하나만이라도 좋아요. 이 소재가 아니면 이 이야기는 못해. 이 소재가 아니면 스토리 자체가 유지될 수 없어. 정도의 조건은 충족시켜줘야 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전 이 이야기의 소재. 레이싱, 노바기어. 등등의 매력적인 설정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왜, 왜 그렇게 하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이 작품의 소재를, 유희왕 카드게임으로 바꿔도 이 이야기는 무난하게 굴러갑니다. 진짜에요. 유희왕 GX와, 5d's와 제알을 적당히 섞으면 듀얼도시에서 D휠을 타고 듀얼실력으로 학교의 대우가 바뀌는 배경을 짤 수 있고, 뭐 유희왕이야 듀얼로 온갖 사고 일어나는 게임이고, 주인공이 최약 계급에 있지만 사실 최강인 것도 문제없이 짤 수 있고, 노바기어와 디클레어는 덱과 자기만의 오리지널 카드로 표현하면 그만입니다. 몇 몇 대사들도 바꿀 수 있어요. 중반부에서 히로인이 무참하게 쓰러진 다음 자기 덱 들고 나서선 주인공이 열세에 '고작 라이프 7천 차이일 뿐이다.' 라고 하고 나선다던가. 레이싱이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승부를 가리는 그 어떤 것이라도 이 이야기에 적당히 쑤셔넣으면, 그냥 굴러갑니다. 예를 들면, 도박이라던가? 아니면 요리라던가? 퍼즐이라던가. 게임이라던가.......
소재가, 테마에 융화되지 못한 것 같아요. 레이싱이잖아요. 달리는 게임이잖아요. 그러면 이야기는 레이싱처럼 힘차게 달려나가야하는데 이 이야기의 경우에는 그냥 승부의 방법이 레이싱일 뿐. 이야기는 오히려 질척질척하고 지지부진합니다. 막판에서 치열한 레이싱을 묘사하지 않았으면 폐급으로 전락했을 정도로 소재와 주제의 융합도가 낮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레이싱은 작품의 모든 주제를 함축해서 나타내는 게 아니라, 그저 승부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리고 설정의 개연성도 없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주인공은 가장 낮은 계급. 토들러라서 학교에서 멸시받습니다. 심지어 교사한테까지요. 근데 이것부터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야. 토들러라는 그 계급은 고작 레이싱 순위에요. 에...... 말을 좀 바꿔볼게요. 지금 이 작품의 스토리는 말이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 이야기의 전반부는 리그 오브 레전드 전직 챌린저 1위(+패드리퍼)가 브론즈에서 즐겜하다가 시비 건 골드를 짓밟는 내용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요? 이야기의 후반부는 그 챌린저 1위가 자기 프로되고 싶다고 패드립 한 것 사과하고 마스터랑 탑빵대전하는 거라고요. 뭐 더 롤얘기로 끌고가자면 주인공의 실력을 보고도 의심하는 선생은 '너, 너 대리받았구나!'라고 열폭하는 놈인 거고, 히로인은 전직 챌린저 팀 코치였다가 팀 해체되고 멤버 다시 모으는 녀석인 거고요. 자. 이렇게 들어보니 알겠죠? 이상합니다. 이 도시가 아무리 레이싱에 혼을 판 도시라도, 그것과 학교 성적은 별개일뿐더러 학교에서 레이싱을 가르친다는 언급도 없습니다. 사람이 레이싱 좀 못할 수도 있는 거예요. 아니면 그것 자체에 취미를 못 붙이거나 열심히 할 의향이 없을 수도 있고요. 근데 그걸로 학교에서 차별대우한다는 게 말이 돼요? 저 이 설정을 정말로 이해 못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선 왜 레이싱이 전부죠? 롤로 대입해서 보면 얘네들은...... 뭐랄까. 고작 게임 가지고 사람을 무시한다는 이야기라고요? 레이싱이 세계의 운명과 연관지어져있다던가, 아니면 레이싱 자체가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위험하고 보상도 크다면 모를까...... 물론 작중에서 다리가 절단나는 사고를 겪은 여캐가 나오긴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더 웃기죠. 목숨이 걸린 위험한 스포츠를 남에게 강요할 자격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캐릭터들은 그걸 합니다. 설령 그렇지 않고 그냥 평범한 F1레이싱과 비슷한 수준의 위험성이라고 쳐요. 그러면 이 레이싱 자체가 말 그대로 순수 엔터테이먼트인데 왜 그게 세상의 유일한 잣대인 양 행동하죠?
4. 주인공의 딜레마
일명, 과거에 트라우마 있는 주인공의 딜레마!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면 이야기 진전이 안 되는데 트라우마를 극복하면 캐릭터성이 사라지는 마법! 비슷한 유형으로 열등감 가진 주인공의 딜레마, 사실 약한 척 하는 주인공의 딜레마, 떡밥을 가진 주인공의 딜레마, 약점을 가진 주인공의 딜레마 등등이 있습니다. 대충 무슨 느낌인지는 알 거예요. 흔하니까요.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그것에 상당히 얽매여 있는 상태에요. 그리고 1권 끝나는 시점에서 그 중 상당부분을 극복해버리죠. 즉, 캐릭터성이 고갈된 겁니다. 물론 좋은 작가라면 캐릭터성이 좀 없어져도 탄탄히 쌓인 걸로 해결할 수 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자신의, 트라우마를 가진 그 캐릭터성 외엔 남아있는 게 거의 없을 정도로 잠식당한 상태에요. 1권 시점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소재가 거덜난거죠.
5. 파멸적인 연출
전 이 소설 1페이지부터 정나미가 떨어졌습니다. 주인공이 특별한 존재라는 건 알아요. 사실 최강이었던 레이서, 러프 메이커죠. 그런데요. 그걸 주인공이 첫페이지부터 지입으로 떠들고 말합니다. 조금도 숨기지 못한 거죠. 그 뒤에는 아주 당연하게도 레이싱하는 장면이 나오고, 분명 주인공이 각성하면서 쓸 필살기에 대한 복선도 뿌려주고요? 주인공 따돌림 받는 장면? 근데 이상하게도 주인공에게 엮이는 여자들? 등등 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정석적인 전개에요.
드래곤X프린세스X블레이드 이래 이렇게까지 정석적인 작품은 처음 봤습니다. 작중의 인물들이 뭘 하든 관심 외. 어차피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하는지도 알고, 이후의 전개도 예상이 갑니다. 스토리가 평범하면 그것에서 시선을 돌릴 미끼가 필요해요. 강력한 소재. 강력한 인물. 놀라운 필력. 그런데 그것조차도 평범하고 무난한 수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미끼의 역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어요. 기대감을 죽여버린 거죠. 이야기를 읽게 만드는 동력원 말이에요.
가장 병맛인 건 아무 복선도 떡밥도 없다가 갑자기 주인공 입에서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걸 메인으로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것. 너무 작위적인 연출 아닙니까? 다른 팀들도 이야기하다가 블랙리스트에 히로인이 반응한 거라면 몰라도 어떻게 그 이름을 그냥 바로 꺼내고 그걸 메인으로 만드냐고요. 너무한 거죠. 이건 작위적이라고 부릅니다.
6. 인물
위에서 언급한 주인공에 대한 문제는 주인공에 대한 문제죠. 아. 그런데 사실 이 부분은 호평입니다. 히로인들이 중반부까지는 솔직히 스테레오타입이었는데, 중반부 지나고 이 이야기의, 1권의 보스가 누군지 드러나자 히로인들이 갑자기 개성을 찾아서 부족했던 기둥을 세워줬어요. 가장 실망한 게 인물이었는데, 인물에 대한 점수를 이렇게 후반부에서 극적으로 만회하기도 힘들겠죠.
근데. 이 이야기는 해야겠어요. 주인공을 돋보여주고 발암을 일으켰다가 탈탈 털리는 역을 맡는 이 찌질이 자식이. 너무 발암이라서 답답합니다. 일진+찌질이+인성 글러먹음+분노조절장애+자기합리화+인지부조화+어정쩡한 실력+차별주의자+이중잣대+여자를 때림 이라는 기가 막힌 속성. 주인공이 이 녀석을 털긴 했는데. 그 정도로는 솔직히 부족하다고 봐요. 이 녀석은 패배로 인해서 자살하던가, 미치던가, 모든 기반을 빼앗기고 패망해버리던가. 아니면 달군 철판 위에서 사죄하던가 정도는 해야지 독자의 발암을 해결시켜줘요. 심지어 1권 끝에도 언급되는 걸 보면 2권에도 나올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암이 재발할 것 같네요.
7. 스토리
드프블과 스프린티나를 읽으세요. 그리고 소재를 바꾸고 히로인 속성을 살짝바꿔서 내면 당신도 라이트 노벨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정석에서 벗어나지 않는 건 너무하네요.
그게. 중반부까지의 평가. 전 주인공이 각성해서 찌질이 양아치 자식 털고 자기 실력 보여준다는 것 까지는 예상했어요. 근데 그게 결말부일줄 알았죠. 근데, 절반까지 온 시점에서 그러더라고요? 당황스러웠죠. 물론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인 것도, 완전히 집어던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런 장면이 나올 거라곤 예상했고, 그런 장면이 나와야 하지만, 솔직히 1권의 보스는, 당연히 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못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양아치 찌질이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독자의 눈을 좋은 의미로 가리고 속인 거죠. 이 녀석 말곤 악역은 없어...... 라고. 악역을 미끼로 삼은 겁니다. 악역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진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스토리 부분에서 변주를 줬다는 점에서 전 높게 평가하고 싶어요. 그 점이 이 작품의 평가를 끌어올린 원동력이고요.
8. 총평
훌륭한 책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쓰레기는 아니죠. 또 그렇다고 평작은 아닙니다. 이 작품에선 작가의 애정과, 노력이 느껴지고, 그것에서 멈춘 것에서 지나지 않고 막판에 평가를 뒤집어버렸습니다.
솔직히, 광고가 잘 뽑히지 않는 이상 2권을 사진 않을 것 같아요. 재미가 없어서는 아닙니다. 발암을 잘 시키는 작가는 발암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전 발암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합니다. 양아치를 보고 암에 걸렸습니다. 양아치자식이 좀 화끈하게 망했으면 2권 당연히 샀겠지만 그런 작가는 아닌 것 같아서요.
설정 부분에서도 미묘하게 템빨인 것 같은 부분도 있고, 그 외에도 미묘한 부분들 참 많지만. 재밌는 소설이었습니다. 분명해요. 기대치만큼은 몰라도, 이 책을 읽고 후회하진 않네요. 간만에 즐거운 신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