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대학교 졸업하고 힘들게 취업한 뒤 결혼하고 아이 낳고 환갑을 맞이하며 늙어서 편하게 죽은게 아니라.
그냥 죽었다.
왜 죽었는지 기억도 안 날 뿐더러 아픔도 고통도 일절 없었다. 분명히 죽음이 가까워지면 지난 추억이나 기억들이 한순간 확 지나간다던데, 내가 경험한 것은 그저 갑작스런 새카만 암흑.
여기서 내가 유추할 수 있는 건 죽기 전에 의식을 잃어 고통 없이 죽었거나 인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죽었거나.
결론은 죽었다는 거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냐고?
그야 당연한거 아니겠어? 조O라 같은 인터넷 소설 연재 사이트나 양판소에서 흔히 사용하는 소재인 환생! 그런 소설의 주인공들은 환생하면 엄청난 능력을 가진 영웅으로 태어난다든가 어느 부유한 귀족이나 왕족으로 태어난다든지 전생에서 생각도 못할 인생을 펼치게 되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데.
환생을 했으면 최소한 내가 어느정도 노력을 해서 성공할 밑거름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만들어줘야지. 스스로 돈을 벌어 검술 학원에 들어가 온갖 역경을 견뎌내며 명망 높은 기사가 되는 것처럼.
아니, 그런 것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평범한 가정에 태어나 평범하게 살 수 았다면 좋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빌어먹을) 신은 나에게 Big 엿을 먹여주셨지.
나는 어느 농노의 집안에 태어나게 되었다.
'노예도 아닌데 왜 그렇게 불평하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을 정정해주기를 바란다.
농노는 일단 신분상으로 평민…은 맞다. 응, 분명히 평민이다. 농노 아래에는 저 최하위 계급인 노예가 있으니 말이다.
근데 농노도 어찌보면 노예나 다름 없다. 농노는 '농장 노동자'의 약자라고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상 영주에게 종속되어 있는 농민이라 노예까지 합쳐서 농노라고 하는 거다.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는 호화로운 성 안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는 반면에 우리 농노들은 그런 영주를 위해 온갖 잡일를 하며 그런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도록 피땀을 흘려야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외부 적으로부터의 보호와 일단 살기 위한 의식주 정도다.
21세기에 시장경제체제와 자본주의가 자리 잡은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나는 이 생활이 너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영주가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아야지 뭘 어쩌겠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단두대 아래에 내 목이 놓일텐데.
그래도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영지의 영주는 그나마 정상적인 편이라 삶이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 소식을 들어보니 다른 영지에서는 모든 것을 쥐어 짠다더라. 탈탈 털린 농노들은 반발하다 단체로 저 세상을 가거나 굶어 죽던가.
그러니 그나마 나은 형편에 감사하도록 생각하자. 우리 영주는 그쪽들과 다르게 그렇게 또라이는 아니니까.
일단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세금도 과도하게 가져가는 편도 아니고, 무리하게 건축 같은 대형 공사에 동원되서 농사를 망칠 일이 없다. 그러니 굶어 죽을 일은 없다. 그래서 우리 영지는 다른 곳에 비해서 평화로운 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으그그…."
나는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 기지개를 켜며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오늘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 오후까지 일해야 하는데, 이제서야 해가 중천에 떠있다. 즉, 최소 5시간 정도는 더 일해야 들어가서 쉴 수 있다. 하아, 빨리 들어가서 저녁 먹고 자고 싶다아….
근데 농사라는 것은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올해 내 나이가 16살이니까 10살 때부터 일을 거두기 시작했으니 벌써 6년째다. 이쯤이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싫증이 난다. 전생에 한국에서 살아서 그런가. 거긴 정신 노동을 너무 시켜서 짜증났고 여긴 육체 노동만 너무 시켜거 피곤하고.
에라, 다 때려치고 싶네.
이미 시간도 점심 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 일단은 잠시 좀 쉬면서 점심이나 먹을까. 나는 어깨에 지고 있던 호미를 땅바닥에 내팽겨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환생한지 벌써 16년. 나는 태어나자마자 생전 처음 보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 기겁했다. 물론 아기였기 때문에 울음소리 밖에 안 나왔지만. 이왕 태어났으면 잘 사는 집안에 태어나고 싶었건만, 부모님의 옷차림을 보니 딱 봐도 가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자라는 동안 딱히 싫었다는 건 아니다. 부모님도 사는 형편에 비해 의외로 다정했으며 굶어 죽을 만큼 못 먹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영주가 그나마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북쪽에 있는 터러버린이라는 귀족이 있는데, 그 녀석 영주의 농노들은 아주 죽어간다더라. 거기서 태어났으면 나는 두 발로 제대로 걷지도 못한 채 죽었을 걸?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먹으면서(맛 진짜 없음) 그대로 쑥쑥 자라 6살이 될 무렵에 여동생이 태어났다. 가족 전체가 가지고 있는 은발과 청안을 가지고 태어난 여동생에게 붙여진 이름은 예시카 실버헤어(Yesica Silber). 참고로 내 이름은 조지 실버(George Silber)이다.
왜 하필이면 그 많은 중세 이름 중에 조지로 택하셨는지 부모님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알다시피 우리 계급은 농민, 더 나아가 농노다. 우리는 평범한 교육을 못 받는다. 그래서 부모님이 머리를 쮜어낸 결과 생각해낸게 그나마 무난한 '조지'라더라.
뭐, 이상한 이름이 아닌 것에라도 감사해야지. 이 시대에 살려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살기로 했다. 안 그러면 암 걸릴 것 같다. 정말로.
어쨋든 정말로 귀여운 여동생, 중요하니까 한 번 더 말하겠는데, 정말로 귀여운 여동생이 태어난 후 나는 10살이 되자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
땡볕 아래에서 10시간 정도 등 빠지게 일해본 사람은 21세기에 별로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때는 정보화 시대니 디지털 시대니 사람들은 컴퓨터 앞에서 숫자와 씨름하며 키보드를 타다다 치고 있겠지. 하루 종일 앉아서 사무일만 보는 것도 힘든데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농사하는 것은 지옥이냐.
농사하면서 그나마 좋은 게 몸이 만들어진다는 것 정도려나, 한국에 살았을 때는 머리만 사용하고 몸은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몸을 만들 시간이 없었지만, 여기는 생계를 유지하는 동안 저절로 식스팩이 만들어진다.
뭐,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10분 정도 걷다보니 저멀리서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집은 그렇게 크지는 않다. 4인 가족이 잘 수 있는 공간에다 부엌, 거실 정도다. 거실이랑 부엌도 작다. 그래도 작다고 불평할 수도 없는게 집도 없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 그나마 평화로운 이 영지 안을 돌아다녀도 노숙하는 사람들이 보일 정도다.
집 근처로 점점 다가가자 집 밖에서 빨래를 하는 여동생이 보였다. 나와 여섯 살 차이로 10살이다. 서양인 버프를 받은 나는 그렇게 못 먹었는데도 키가 175정도고 여동생인 예시카는 150 정도 된다. 멀리서 보니까 작은 모습이 쪼르르 돌아다니면서 빨래를 너는 것이 너무나 귀엽다. 정말로 귀엽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했다. 응, 너무 귀엽다. 이걸로 세 번인가?
예시카도 내가 오는 것을 알아챘는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나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고 곧 집에 도착했다.
"오빠아~!"
예시카는 쪼르르 달려와서 내 품에 뛰어들었다. 그동안 농사일로 단련된 몸은 예시카 정도는 거뜬히 받아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채 가뿐히 예시카를 안아 들 수 있었다.
"잘 있었어?"
"응! 엄마 도와주고 있었어!"
"역시 우리 착한 공주님이네~."
나는 싱글벙글 웃는 예시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여기서 나는 선언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심감한 시스콤이다. 아니, 누구나 이 귀여운 애를 보면 시스콤이 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21세기에 전생을 살았던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전생에서도 여동생이 있었다. 어릴 때는 졸졸 따라다니면서 '오빠, 오빠' 하더니 이 녀석이 중학교 올라가면서 확 변해가지고는 호칭이 '너'로 격하되었다. 그 때도 충실한 시스콤이었던 나는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모를 것이다.
그 충격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남아있었고 여기서도 여동생이 생기자 저 아래 묻혀있던 시스콤 잔해가 다시 떠올라 지금은 예시카를 아주 애지중지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예전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올바른 길로 인도 중이다. 이번 생에서도 여동생에게 무시당하면 정신붕괴가 일어날 것 같다.
뭐, 어쨌든 나는 시스콤이고 여동생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든든한 오빠…는 아니다. 놀아주거나 여러 일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우리의 신분은 농노다. 가질 수 없는 것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공부나 돈이 많이 드는 물건 같은 거라든가. 예시카는 꽤 똘똘해서 공부를 제대로 한다면 유능한 아가씨가 될 수도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알다시피 공부는 귀족이나 왕족, 또는 돈 있는 가정에서나 하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든 농노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건 맞다. 나는 전생을 살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연산이나 문자(물론 한국어랑 조금의 영어 뿐이지만)를 쓸 수는 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부모님 몰래 예시카에게 기본적인 연산이나 한글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시대에서는 딱히 쓸 곳은 없지만 둘이서 비밀 메시지를 주고 받는데 사용 중이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문을 열고 자그마한 우리 집에 예시카와 함께 들어갔다. 들어가보니 아버지도 방금 돌아왔는지 땀을 흘리면서 의자 위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부엌에 식사 준비 중이었다.
"그래, 돌아왔냐."
아버지는 나를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탁 위에 엎어졌다. 아버지도 나와 마찬가지로 농사일을 하고 계시다. 맡은 구역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서로 마주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그 구역을 같이 하던 친구가 아파가지고 요즘에는 혼자서 한다고 집에 올 때마다 뻗어 있다.
"돌아왔니?"
"응."
어머니는 포리지(Porridge : 죽 같은 거)이 담긴 접시 몇 개와 나무로 된 수저를 식탁 위에 놓으면서 인사했다. 어머니도 어렸을 때는 상당한 미인일거라 생각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힘든 삶을 살면서 그런 미모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유전은 살아있는지 그게 몽땅 예시카에게 흘러간 것 같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나는 의자를 하나 꺼내서 앉아 앞에 있는 포리즈에 덤벼들었다. 그냥 죽이라 특히 아무런 맛도 없고 영양가도 별로는 없지만 배는 채워야하기 때문에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예시카는 내 옆에 앉아서 먹기 시작했고 아버지도 음식 냄새를 맡았는지 어느새 일어난 채 허겁지겁 먹고 있었고, 어머니도 예시카 옆에서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수저가 그릇에 부딫히는 소리를 내면서 점심을 먹었다. 아니, 나와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하고 먹기만 했고 예시카와 어머니는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머니는 몸이 병약했기 때문에 농사일은 못하셨고, 예시카와 함께 집안일을 하거나 집에서 뜨개질와 같은 부업을 통해 생계에 보태고 있었다. 그래서 이 집 여자들은 그나마 힘이 남아있기 때문에 애기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아버지와 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몇 시간 동안 등 빠지게 일했기 때문에 말할 기력이 없는 것이다.
근데 '여기는 중세에다 농사가 중요한 시대인데 왜 우리 가족은 핵가족이냐'라고 할 수는 있는데, 그건 여러모로 사정이 있다. 알다시피 중세 시대에는 농사가 중요했고, 최대한 많은 노동력을 가지는 것이 필수였다. 그래서 농사에 종사하는 집은 대부분 대가족이다. 최대한 아들 딸을 많아 낳아서 노동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근데 우리 가족은 나와 예시카, 그리고 부모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중에서 농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나와 아버지 뿐이다.
그러면 왜 부모님은 으쌰으쌰를 해서 대가족이 되려고 하지 않을까? 그건 간단히 말해서 어머니가 병약한 것이 주원인이다. 굳이 몸이 허약한 어머니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 잘 살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어머니도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지도 모르고.
그러니 나와 아버지가 각각 2~3 사람 몫을 일을 하면서 살아가다 나중에 꾸준히 저축한 돈으로 어디론가 튀는 거다. 어린 예시카에게 이런 삶을 계속 살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나와 부모님의 공통된 의견이다. 대충 돈을 모으고 근처 마을에 정착하고는 생계를 꾸리는 거다. 나야 전생의 지식으로 대충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되고, 아버지도 손재주가 있어서 일을 찾을 수는 있을 거다.
"잘 먹었습니다."
나는 소매로 입을 쓱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한다. 이번에는 저녁 6시까지다. 오늘도 힘을 내는 거다!
"오빠 다녀와~."
"다녀오렴~."
아버지는 다시 뻗었네. 뭐, 알아서 잘 하시겠지.
은 쓰다말았던 동방 패러디 소설이라 그냥 올린. 생각해보면 처음 쓸때랑 비교하면 매우 많이 발전.. 예전에는 억지로 전개하려는 느낌이 강해서 딱딱했... 지금은 다음 공모전 대비 위해 하나 조금씩 쓰는 중이네요 ㅇㅅ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