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바지 아랫단이 젖으면서 최근 들어 남자도 치마를 입으면 비 오는 날 바지가 젖지 않아 편하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곤 했죠.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복 바지는 옅은 회색이라 물이 조금만 튀어도 검게 물드는 통에 비가 오는 날이면 학생 전원이 어김없이 아랫단을 검게 물들이고 다녔기에, 가끔 지나치는 근처 여고생들의 같은 색깔의 치맛단이 전혀 검게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볼 때마다 왠지 반칙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이젠 교복이 없으니 "그럼 반바질 입으라고오오오!"하고 외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신사적이라 한여름에도 절대 반바지를 입지 않으니까요. 집에서도 잘 입지 않으니까요.
우리 학교는 남고였기 때문에 남녀공학을 나온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상당히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체육시간 같은 경우인데, 축구를 하다 더워지면 웃통은 물론 아랫통(?)까지 훌렁훌렁 벗어 던지기도 했습니다만. 가장 절정인 것은 비가 오는 날로 우리 반에는 반 뒤쪽에 담임 몰래 낚시줄을 걸어 놓아 만든 빨랫줄에 양말이 여러 켤레 널려서 괴이한 냄새를 풍기곤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비에는 상당한 추억이 있는 듯합니다. 이제 몇 달만 있으면 지겹도록 싫은 비의 계절이 시작됩니다만, 사실 비가 오기 때문에 생기는 추억도 있겠지요.
그래도 필요 없습니다. 비가 오면 별을 볼 수 없으므로 비는 싫습니다. 눈도 싫습니다. 눈은 비가 변장한 겁니다. 사람들이 대개 비를 싫어하니까 비란 녀석이 눈으로 둔갑해서 내려오는 겁니다. 새하얀 풍경? 웃기지도 않습니다. 인도와 아스팔트처럼 인간에게 유린당하고 강X당한 눈밭은 새까맣습니다.
서리는 좋습니다. 서리가 내린 날은 밤하늘이 잘 보입니다. 원인은 모릅니다. 큰 일교차가 그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여름보다 겨울이 좋습니다. 날이 추울수록 별은 잘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