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 가운데 100% 자국어를 사용하는 드문 국가입니다. 인도나 필리핀에는 영어가 섞여 들어갔고, 아프리카에서는 불어나 영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들 중에서 국민 전원이 자국어를 사용하는 나라는 아주 드뭅니다.
하지만 역시나 일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현재는 한국어에 일본어가 유입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일본어를 제거하자는 것이 일어 잔재 청산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죠.
언어란 유용성만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히 동북아 3국의 경우 역사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언어 = 민족이란 개념이 자리잡고 있기에, 일어 잔재 청산 운동은 한민족의 자부심을 지키는, 필요한 사업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분별없이 이루어지면, 괜한 반일 감정만 부추기는 꼴이 됩니다.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야채.
야채는 들에서 나는 풀이란 뜻으로, 인간이 재배하지 않고 자연에서 자라나는 나물을 의미합니다. 도라지, 냉이 같은 것들은 전부 채소가 아니라 야채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야채란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인 野菜(야사이)에서 온 말이므로 야채를 채소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방송사들도 몇 년 전부터 연예인들이 "야채"라고 말해도 자막에는 "채소"를 달아두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채소상인까지 나서서 야채를 채소, 더 나아가서 남새라는 순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기고를 했더군요.
그렇다면 숫자 '천'을 '즈믄'으로 바꾸고, '산'을 '뫼'로 바꾸어야 하는 걸까요? 일어 잔재 청산 운동이 어째서 갑자기 한글 전용 주장으로 바뀌는 걸까요.
단적으로 말해, '야채'는 일본식 한자어가 아닙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사람들이 야채를 많이 먹어 탈이 심하므로 그만 두게 하여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그 빈도가 낮았을 뿐이지, 야채는 원래 한국에도 있던 단어였습니다.
오히려 일본어의 잔재는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하게 널려 있습니다.
"가방"은 일본이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말을 かばん으로 발음하면서 한국에 유입된 단어입니다. "구두"는 일본어 くつ에서 온 말입니다. "납득하다"도 일본식 한자어입니다. "승강장", "매장" 등은 전부 일본에서 온 말로, 원래 한국어에 없던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한국어로 되돌려야 하나요?
괜시리 멀쩡한 한국어인 야채를 가지고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채를 쓰지 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초밥을 스시라고 말하고, 왜나막신(혹은 그런 형태의 슬리퍼)을 조리라고 말하고, 라면을 라멘이라고 말하는 걸까요.
야채를 채소로 바꾸면서, 어째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되고 풍신수길은 안 되며, 오사카죠(혹은 오사카 성)은 되고 대판 성은 안 되는 걸까요. 지바와 치바가 같은 지명인지도 모르고, 큐슈를 일본식 발음에 가깝게 규슈라고 발음하면 틀렸다고 하면서 천엽과 구주를 사용하자는 주장은 수구꼴통 반일단체의 주장에 불과한 걸까요.
야채는 맹목적인 반일 운동의 상징입니다. 반일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죠. 굳이 분류하자면 지일파에 속하는 저도, 한일전이 벌어지면 일본을 욕하며 헐뜯으니까요.
하지만 목적이 없는 강한 에너지는 큰 폐해입니다. 맹목적인 반일에서 벗어나 넓은 시야로 미래의 한일 양국의 모습을 그리며, 적절한 수준의 라이벌 의식으로 일본과 경쟁하려고 할 때,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다.
"야채"가 일본식 표기라는 것에 대한 근원은 모호하다. 어떤 말이 생겨난 근원에 관련된 견해는 다양할 수 있으나 현재 둘 다 표준어로 보고 있는 ‘야채’와 ‘채소’에 대하여 ‘야채’가 ‘채소’의 일본식 한자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그 근거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