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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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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학창 곡선
글쓴이: 호밥
작성일: 12-10-31 22:54 조회: 1,770 추천: 0 비추천: 0

학창 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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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밤의 군청단-

0. 현재 시각: 2AM 현재 장소: 도둑네 방문목적: 도둑질

나도 정말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장갑으로 지문을 방지하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선글라스로는 시야를 가리……잠깐, 이건 왜 끼고 있던 거야?

나는 모범생이다. 성적으로 따지는 사회니까.

그리고 준법정신이 강한 편이다. 무단횡단을 논외로 친다면.

심지어는 지각을 해도 담은 넘지 않는다. 꼭 개구멍이 있어서만은 아니고.

……안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지금 야자를 땡땡이치고 위법행위를 저지르기 위해 담을 넘었으니까. ‘모범생은커녕 완전 범죄자잖아?’ 라고 해도 할 말 없다. 그래도 치졸하게 한 가지 변명을 해두자면 내가 도둑질을 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안다. 바늘도둑부터 도굴꾼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둑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하지만 난 그중에서도 불쌍한 케이스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그래 봐야 남 물건 훔치는 도둑이지만.

난 초보도둑이다. 애당초 타인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댄 경험조차 전무하다. 얼마 전, 갑자기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안 계시고 소년 가장이고 하루에 알바를 세 탕 뛰고 성적이 탑클래스인 것만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었으니까.

그런 내가 철사 한 줌으로 문을 딴다거나, 배수관을 기어 올라가 레이저로 창문을 도려 입구를 낸다거나, 아예 대놓고 총을 쏘며 협박을 한다거나 하는 전개가 있을 리 없다. 있을 수 없다.

부주의한 집주인. 잘 때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거나 잠겼다고 생각했으나 문이 열려있는 경우. 번호 키의 배터리가 모두 방전 됐는데도 방치해둔 경우. 1층의 창문을 여름이라 덥다는 이유로 열어둔 경우. 훔치는 것은 제쳐두고 그런 경우의 집이 아니면 난 현관조차 들어설 수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게 불과 일주일전인데.

“뭐하는 거지? 들어와라.”

지금 3층의 창문 너머에서 어정쩡한 낮은 목소리로 재촉하는 이 소녀. 꽉 찬 월광에 반사되어 푸르게 빛나는, 바라보자니 조금 눈이 부신 독특한 머리색을 가진 이 소녀와 맞닥뜨리며 확 바뀌었다.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예를 들자면…….

“허공에서 연료 낭비 그만하고 어서 들어와라.”

조금 조잡하게 생겼지만 이래봬도 시속 80Km로 한 시간은 거뜬히 날 수 있……다고 정체불명, 신원미상의 ‘브로커J’가 설명한 그녀의 야심작 「이글라이더7」을 등에 메고 있다는 점이라던가,

“으앗!”

“조심하라고요!”

후, 세이프. 방금 소녀가 놓쳐서 깨트릴 뻔한 동그란 유리창 조각이 초 고열 레이저로 절단한 것이라는 점.

“오? 너도 아주 가끔은 쓸모가 있구나. 블랙 치킨.”

“죄송한데 역시 코드네임인가 하는 건 다른 걸로 하는 게…….”

“후음~?”

소녀가 복면 위로 빼꼼 나와 있는 녹안을 가늘게 만들더니 허리춤에서 무시무시한 것을 꺼내 보인다.

“미, 미안합니다. 미스 마린.”

이미 몇 번이나 입에 담는 거지만 역시 손발이 사라지는 호칭.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그녀의 손에 들린 리모컨은 내 생명줄이니까. 클릭 한 번이면 내 등 뒤에서 불을 뿜고 있는 로켓 「이글라이더7」이 즉각 멈출 수도 있다.

“자알~, 했다.”

“이제는 애완견 취급인가요?”

“그럴 리가. 애완견은 주인에게 사랑받는 존재이다. 넌 아니니까 그 아래려나? 흠…… 갑자기 ‘판다라’한테 미안해지는걸?”

“애초에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라-!”

“파트너. 방금도 그랬고 정말 잘해줬다.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만, 오늘이 우리가 파트너로서 호흡을 맞출 마지막 날이다. 그동안 네가 꼭 세 번 말했었지. ‘나 없으면 어쩔뻔했나요?’ 그 말 기억하고 있었다. 맞아.”

얘 갑자기 쑥스럽게 왜 이런데……. 하긴 원래는 상냥한 녀석이지.

아마.

“지난날을 돌아보며 훈훈한 결말을 맺기엔 아직 이르죠. 마지막 작전은 이제 시작이라고요?”

결코 갑작스러운 칭찬에 쑥스러워서 화제 전환을 시도하는 게 아니다.

“그동안 네가 꼭 세 번 말했었지. ‘나 없으면 어쩔 뻔했나요?’ 그 말 기억하고 있었다. 맞아. 너만 없었으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좋아. 마지막 작전을 성공리에 끝마치기 위해서라도 버튼을 눌러야겠어. 번지점프 해봤어? 그거보다 스릴은 없지만 아플 거다.”

그럼 그렇지! 이 녀석하고 감동적인 전개 따위 있을 리가 만무하지.

“하하. 농담이다.”

“…….”

“저기, 삐쳤나?”

“아뇨.”

“농담이라니까?”

이제 와서 뒷머리를 부비며 수습하는 이 소녀, 지금 자신의 집을 털려 하는 이 소녀는…… 그래 뭐, 현재로썬 내 파트너 되신다. 손을 잡은 지 고작 일주. 통념적으로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최근 5일간 있던 일은 알고 지낸 기간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를 믿게 만들어줬다. 뭐, 한쪽은 상대의 정체를 모르니 알고 지냈다기엔 무리가 있으려나.

“어?!”

나의 파트너는 뭔가 놀란 눈치다.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오른손을 한 번 쳐다본다.

“헤, 헤헤……. 그게, 모르고 눌러버렸네?”

얜 당황하니까 또 평소 말투 나오네. 그리고 파트너로서 신뢰한다는 말은 취소.

“…….”

여긴 3층 높이. 타고난 강심장 같은 걸 지녀서 추락하는 와중에도 소리조차 안 지르는 게 아니다. 도둑이라서 못 지르는 거지.

대락 2초 후.

영화처럼 지나갔던 주마등에 의한 체감시간으로는 18년 후에, 가까스로 다시 날아오르긴 했다. 어떻게든 스위치를 다시 누른 모양이다.

‘하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하고 가끔 생각했는데 방금 체감 상영시간 18년짜리 영화를 한 편 봤더니 또렷이 기억났다.

1. 군청단 탄생: 블랙 치킨

머릿속에서 어둠이 걷히고 의식이 돌아올 무렵, 눈을 뜨기도 전에 코에 와 닿은 익숙한 화학 약품의 냄새에 난 내가 누워있는 곳이 보건실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에…… 정신이 드십니까?”

안타깝게도 그 확신은 확실하게 빗나갔지만.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맞은편 벽에 걸린 낯선 아날로그 시계였다. 시침은 얄밉게도 딱 6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6시는 편의점 알바를 교대하는 시간. 망연자실할 틈도 없이 이불을 박차고 일어서려던 나를 막은 것은 팔뚝에 꽂힌 바늘이었다. 바늘이 연결된 줄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링거가 있었고 그제야 사태파악이 된 나는, 여기가 병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루 세 탕의 알바 때문에 과로로 쓰러져 보건 선생님께 자주 신세를 지던 나지만, 병원에 올 정도로 심각한 적은 없었다. 알바를 하나 줄여야하나. 사뭇 심각해져 있자니 구두 소리와 함께 방금 내게 질문을 한 잿빛 머리 중년 의사가 나타났다.

“조간호사. 보호자는 아직 인가?”

의사가 뒤이어 등장한 간호사에게 물었다.

보호자라……. 아마도 내 고모라는 개년과 고모부라는 개놈을 일컫는 말이겠지.

“보호자는 오지 않을 겁니다. 아니, 애초에 없습니다.”

잃었던 정신을 되찾고 입에서 내보내는 첫 말이 보호자의 존재 부정이라니. 내 인생도 참…….

“네? 방금 병원 입구라고 연락 왔는데요?”

간호사는 예쁜 얼굴로 잘도 내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어째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 그럴 이유 있을 리가. 그럼 대체 누가?

“제가 죽어도 장례식장에 올 사람이 없을 텐데 누가 온다는 거죠?”

두 번째로 꺼낸 말은 ‘지인조차 없음’이었다. 내뱉고 나니 좀 순화해서 말할걸, 싶다.

“마지막으로 통화하신 분께 연락드렸더니 누나분이 미국에서 바로 돌아오신다고…….”

간호사가 내 구식 핸드폰을 건네주며 말했다. 가장 마지막에 연락을 했고 미국에 있을법한 사람의 얼굴이 수면위로 올라왔다 가라앉았다 했다. 조금 더 노력하면 완전히 떠오를듯 했지만 머리가 복잡했기에 그냥 통화목록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일곱 건과 문자 열두 건에 관한 확인은 잠시 미루고.

-집주인-

“아…….”

머릿속이 하얘지며 탄식만이 흘러나온다. 나의 보호자는 사실상 없지만, 보호자 이상으로 내게 관심을 쏟는, 정정. ‘집착’을 하는 여자가 한 명 있었지. 하지만 미국에 있다면.

“미국에 있는 사람이 방금 병원 입구라 했다고요? 제가 쓰러진 지 몇 시간이나 되었다고-.”

<AM 06:03>

거기까지 말을 하다 흠칫해서 핸드폰의 액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P가있을 자리에 A가 있다.

음…… 그러니까…… 나 상당히 오래 잤나 보다. 시계가 가리키던 6시 정각은 편의점 알바를 시작할 시간이 아니라, 신문 배달 알바를 시작할 시간이었고 블라인드 사이로 옅게 보이는 햇빛은 지는 해가 아닌 떠오르는 태양에서 발한 것이었다. 늦지 않은 알바는 전단지뿐 인가. 아마 짐작건대 전단지 알바도 무리인 것 같지만.

그리고 또 짐작건대 집주인이 온다는 건 진짜겠구나. 이로써 빚이 하나 늘었다.

“하아- 하아-. 지, 진우- 흐윽……. 진우우-!”

헐떡이는 것을 보니 분명 어리석게도 엘리베이터를 두고 계단을 뛰어오른 것이리라.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고, 나를 걱정해서 조급한 마음을 못 참고 계단으로 온 걸 알지만, 이 여자 분명 운동신경 꽝이었지.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도중에 세 번 정도 멈췄더라도 타는 편이 빨랐을 것이다.

“흐아아앙~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하며 은근슬쩍 껴안아도 이번만은 눈감아 주도록 하자. 먼 거리를 날아왔다. 얼마나 급했는지 이런 차림으로.

“크흠-.”

의사 할아버지는 보기 민망한지 헛기침을 해대고 간호사 누나는 가린 듯 만 듯한 손 틈새로 열심히 관찰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한테 매달린 처자가 음…… 절대로 내가 느끼기에 그렇다는 건 아니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상당히 야한 차림이기 때문이다.

잠깐 외양 묘사를 하자면, 속옷 위에 걸친 옷이라곤 허벅지를 살짝 가리는 시스루 네글리제가 전부. 마찬가지로 급히 왔음을 알려주는 헝클어진 올림머리와 짝짝이 슬리퍼. -요 두 가지는 평소에도 해당 될 때가 많지만.- 그리고 이것 역시 내 생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때의 이야기인데, 동안이다. 중학생 같은 얼굴은 땀 때문에 이마에 달라붙은 저 머리카락마저도 귀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 뭍 남성들은 말하겠지. 얼굴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보디라인 역시 분명 중학생의 앳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전체적으로’ 그럴 뿐.

노출이 짙은 시스루와 그 뒤의 유치한 속옷 너머로 보이는, 존재감 충만한 그것은 ‘나도 어른이라구!’ 하며 주장하는 것만 같다. 이건 내 생각이다. 그러니 이제 좀-.

“에…… 환자분은 아직 안정이 필요합니다.”

나이스 의사 할아버지. 그러니 이제 좀 떨어져 주시면 좋겠다. 이 사람이라면 그렇고 그런 생각 따위 전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코앞에 저런 게 있으면 부담스럽다. 집주인은 나와 선생님을 번갈아 보며 아쉽다는 얼굴로 고민 중이다.

“맞습니다. 보호자님.”

고맙게도 간호사 누나까지 거들어 주시니 구태여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지.

“성장기의 남학생은 아무래도 흥분하기 쉽고…….”

고맙단 생각은 취소.

“아! 지, 진우우- 그런 거야? 미안 누나가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 아니, 방금 말한 ‘거기’는 그 ‘거기’가 아니라……!”

“알아요!”

간호사와 집주인 누나의 배려 덕에 되려 조금 흥분되니 제발 그만.

……물론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의미다!

“크흠흠. 보호자님.”

의사 할아버지가 갑자기 자못 심각한 표정이 되어 집주인을 부른다. 이미 침대에서 잽싸게 내려간 상태인데 아직 주의줄게 남은 걸까?

“잠시 자리를 옮겨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두둥-! 놀랍도록 빠른 뇌의 반응 속도. 덕분에 머릿속도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여기는 병실. 자리를 옮겨 얘기하자는 사람은 의사. 제의받은 사람은 보호자. 이 세 가지 상황으로 말미암아 자리를 옮겨 나눌 이야기를 추측해보면 나올 답은 역시 그거다. 아침 드라마, 가족 드라마, 청소년 드라마, 성인 드라마, 의학 드라마 등을 포괄하여, 전 장르의 연속극에서 자주 나오는-.

“저…… 갑자기 이러시면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서…….”

백치미 스테이터스 +100의 집주인 누나도 예측하는 그 상황.

“고백은 좀 부담스럽고…… 무엇보다 전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그게 아니잖아요! 누가 봐도 이 상황은 심각한 병을 선고하는 거라고요!”

“에?”

정말 몰랐다는 눈치로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베베 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흥분된다.

……물론 답답하다는 이유로.

“그, 그렇게나 티가 났나요?”

이 할아버지는 수십 년간 이런 식이셨나 보다. 그리고 여기서 그렇게 말하면 인정해 버리는 게 되십니다.

“네. 그냥 말씀해주세요. 심각한 병인 걸 안 이상 모르는 게 더 스트레스 쌓일 테니까요.”

“의사 선생님, 우리 진우 어디가 아픈 거죠?”

의사는 입을 떼길 머뭇거렸지만, 보호자도 당장 말해주길 원했기 때문인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위암 2기입니다.”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마자 순식간에 위암 선고를 내리신다. 거 융통성 있게 뜸 좀 더 들이시지…….

위암, 위암이라…… 위암이란 말이지 내가? 아마 위암이라면 역시 그 위암밖에 없겠지?

“보통 ‘위선암’을 이르며 위장 점막 조직에서 발생한 세포가 선암성 변화를 보이면서 종양 덩어리를 만들거나 악성궤양을 만드는 암. 그 병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조금 숨이 차다.

“예? 마, 맞습니다.”

그리고 예상 못했을 내 반응에 돌아오는 의사의 뻔한 대답. 엄마에 이어서 이번에는 나인가.

○ ○ ○

혼자 쓰기에는 제법 넓은 방엔 조명 대신 은은한 햇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만약 햇살의 취미가 ‘그림자 만들기’였다면 햇살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방이다. 이 방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은 고작 세 가지 정도. 창문 바로 아래 있는 싱글 침대와 그 옆에 자리한 책상. 마지막으로 나.

지극히도 심플한 방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디까지나 햇살로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 적을 뿐이지, 있을 건 다 있다. 침대 밑 수납장 안에는 의류/잡화가, 책상 서랍 속에는 각종 학용품과 노트북 등이 있다.

뭐……. 이걸 해가 비추는 자리에 다 꺼내둬도 햇살은 여전히 탐탁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벽지도 장판도 명도의 차이가 있는 다크 그레이 색상이라 그림자가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림자가 조금씩 짧아지는 현상을 관찰하지도 못할 만큼 흐릿하게 보이는 건 아니다. 방해요소가 있다면 벽지와 장판보다는 소음이다.

병원에서 그 길로 곧장 집에 돌아왔다. 중간에 엄청난 만류가 있었지만 더 이상 누나, 아니 누나라고 생각하지 말자. 자꾸 그렇게 생각하니까 도움받는데 익숙해지는 거다. 더 이상 집주인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다. 눈치 없는 의사 할아버지 덕에 그녀가 한국까지 날아온 것 외에도 돈을 더 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듣자하니 간호사에게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날 샅샅이 검사하라 했단다. 보호자 동의 사인도 없이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 집주인이 본인 입으로 늘 있다고 주장하던 ‘능력’을 발휘한 거겠지. 어쩌면 지금까지 예상했던 범주를 가뿐히 돌파할 만큼 대단한 사람일지도.

내가 쓰러진 이유는 평소보다 정도가 심했을 뿐 ‘과로’였고 집주인의 요구가 아니었다면 응급실에서 깬 뒤 알바를 하러 갔을 것이다. 몸속에 암 덩어리가 있는 것도 모른 체. 이걸로 벌써 몇 번째 은혜를 입은 건지 셀 수도 없다. 오도 갈데 없이 방황하던 나를 받아준 3년 전 그날을 시작으로 해서 지금까지 입은 은혜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돈으로라도 갚을 거다. 3년 전부터 공부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도 그걸 위해서고.

“진우! 문 열어~!”

이젠 가족처럼 익숙해진 목소리. 집주인의 목소리다. 쿵쿵, 문을 두드리며 내가 직접 문을 열길 요청하는 건 나에 대한 배려겠지. 내 은인의 백치력을 고려한다면 자기가 늘 손목에 걸고 다니는 마스터키를 잊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긴 하다. 그치만 그런 사람이 은인이면 ‘그런 사람’을 은인으로 둔 내 입장도 좀 곤란해지니 배려라고 치부해두자.

“……혼자 있고 싶다거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면 그렇다고 대답이라도 해줄래?”

다행히도 배려였나 보다.

“네.”

“역시 안에 있었구나. 문 열어!”

배려가 아니었던 건가! 아니, 그보다도 나 이런 바보한테 낚였어?

“……역시 안 여는 거니. 진우. 그래, 생각할게 많을 테니 이번에는 넘어갈게. 대신-.”

순간 목소리 톤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진지 모드로.

“대신 그…… 내가 말이야 멋대로 말이야아…….”

거기에 급 소심모드?

“진우가 알바 하는 곳에 전화해서 오늘부터 안 나간다고 못 박아 버렸는데 말이야…….”

……김빠져라…….

“그……, 수술비 내가 내는 거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시간 얼마든 가져도 좋으니까 알바만은 오늘부터 안 나가면 안 될까? 방세 이번 달은 안 내주면 안될까……?”

내 집주인은 이런 사람이다. 내게 끝도 없이 도움을 주는 사람.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는 사람. 내가 자신의 배려를 받아주기를 부탁하는 사람.

“그런 걸 왜 부탁조로 말하는 건데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우가 또 거절 할 테니까…….”

“……알았어요. 전, 언제나 폐만 끼치네요.”

“그렇지 않아. 진우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는 거야.”

여기서 ‘저 같은 거 없었어도 아니, 없었으면 더 잘 지내셨을 거예요.’라고 말하면 화내겠지.

“…….”

“그럼…… 쉬어.”

발소리가 멀어지며 인기척이 사라졌다. 햇살이 뿌옇게 스며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핸드폰을 열어 본다.

<AM 06:40>

뜻하지 않게 확인을 미뤄뒀던 부재중 전화 일곱 건과 문자 열두 건이 보인다. 그대로 핸드폰을 닫아버린다. 머리 아프다. 하지만 다시 주섬주섬 화면을 연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을 찾다가 착신 목록을 봤기에 대충 누구에게 연락이 왔었는지는 파악하고 있다. 나는 곧 학교에 가야하고 교실에 들어서면 언제나처럼 내게 문자를 보낸 녀석이 있을거다. 그러니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문자를 확인해두는 편이 좋다.

부재중 전화 일곱 건 중 다섯 건과 문자 두 건은 편의점 점장님이 보내신 거였다. 문자 두 건의 내용은 [한 시간 지각. 월급 삭감한다.] [다음부터는 말이라도 하고 펑크내라.] 으로, 예상보다는 상냥했다. 덕분에 갑자기 알바 그만둬서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냈더니 돌아온 즉답이 욕이었던 건 상당한 갭을 선사했다.

나머지 전화와 문자는 그 녀석의 것이었다.

첫 번째 메시지.

[괜찮아?]

두 번째 메시지.

[아직 안 깬 거야?]

세 번째 메시지.

[깨면 바로 전화 줄 거지?]

네 번째 메시지.

[오늘 아침 학교 가기 전에 잠깐 병문안 갈게. 동파 병원 703번 병실 맞지?]

다섯 번째 메시지.

[아차. 자는 중이라서 문자 못 보지? ㅎㅎ 깼으면 답장 안 했을 리 없으니까. 좀 이따 봐~.]

마지막 메시지가 왔던 건 오전 5시 정각. 녀석은 그때까지 잠도 안 자고 기다렸던 걸까. 일단 퇴원했다고 전화 줘야겠다.

그때 손에 진동이 퍼지며 새 메시지가 왔음을 알렸다. 발신인은 ‘DB’, 그 녀석이다.

[ㅎㅎ...... 병원에 가보니 깨어나서 퇴원했다고 그러네? ^^]

……눈웃음 이모티콘이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두려움에 치를 떨기도 전에 핸드폰의 진동으로 손이 떨린다.

[오전 6시경에 어떤 잠옷차림의 여자가 왔었다는데? 누군지 궁금하네~ㅎ]

지금 당장 핸드폰을 박살 내 버리자. 그리고 태연한 얼굴로 ‘문자 했었어? 미안. 핸드폰이 망가져서 못 봤지 뭐야? 하하하.’ 하면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럼 학교에서 봐~ㅋ]

무섭다. 이대로 핸드폰을 가지고 학교에 갈 자신이 없다. 어서 창밖으로 핸드폰을 던져 버리자.

하며 창문을 여는 나이지만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다. 난 내 손으로 이 핸드폰을 망가뜨리고도 밤에 이불을 걷어차지 않을 자신이 없다. 씁쓸하게 ‘오늘 꼭 살아서 돌아오자’하고 마음먹는 나를 안쓰럽게 여기다가 내가 위암 환자라는 걸 깨닫는다. 어이없게도 잠시 잊고 있었구나.

잠깐만 이렇게 태양이라도 쬐고 있자. 채광은 공짜니까. DB의 팬티 관람도 공짜고. 하하 DB녀석 의외로 귀여운 팬티를 입잖아? 팬더 팬티라니, 키키킥.

……DB?

“저, 저 녀석이 왜! 아니 그보다 어떻게 하늘을 날고 있는 건데!”

뒷모습이었지만 저 바다색 머리는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분명 DB다.

“아, 아하하. 그, 그거구나! 환영! 환영이 보이는 거구나!”

그래. 일어나자마자 느닷없이 암 선고를 받았는데 제정신이면 이상하지. 그동안 너무 담담했다고 나. 하하하. 그래도 비록 환영이지만 눈앞에 저런 게 있으면 상당히 부담스러우니까 어서 벗어나야 해!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비비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결과, 환영은 싱거우리만치 확실히 사라졌다.

“휴~. 다행이야.”

종전의 DB가 환영이었음에 감사하며 슬슬 학교에 가기로 하고 방을 나선다.

“응?”

문을 나서자마자 발치에 걸리는 것이 뭔지 보니 웬 검은색의 커다란 상자다.

[그리고... 이제부턴 아침에 인스턴트 먹지 말고~! 알았지?♡]

상자의 정체는 3단 도시락통이었고 하트모양 포스트잇에는 꾹꾹 눌러쓴 마음이 새겨져 있었다.

○ ○ ○

“안녕 DB!"

문을 열자마자 부러 활기차게 인사한다. 학교에서 평소에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나인지라, 교실에서 이렇게 크게 소리를 낸 건 아마도 처음이다.

“어라?”

DB가 아직 안 왔다? 아, 그 시간에 병원에 있었으니 벌써 도착했을 리 없구나. 살다 보니 내가 먼저 오는 날이 다 있네. 사물함에서 실내화를 꺼내 갈아 신고 자리에 앉는다.

평소라면 전날 빌린 공책을 돌려주고 간단한 잡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 혼자 있자니 무료함이 심히 몰려온다. 사람 구경이라도 할까 싶어 내다본 창밖엔 학생은 안 보이고, 이르게 떨어진 낙엽만이 단조롭게 굴러다닌다. 낙엽이 몇 개인지 세어보는 잉여활동을 해보려다 개수를 셀만큼 잘 보이지는 않음을 깨닫고 포기한다. 피곤했으면 잠이라도 잘 텐데 장장 12시간 이상을 잤으니 오늘 밤을 새더라도 거뜬하겠지. 앞으로 어떻게 수술비를 마련할지에 대한 계획을 지금부터 세워보려다 역시 그만둔다. 어차피 오늘은 수업시간에 안 잘 테니 그때 생각해보기로 등교하며 계획해두었다. 어제 쓰러진 뒤로부터 이미 여러 차례 생활리듬이 깨졌다. 더 이상은 계획했던 무언가를 깨기 싫다.

이젠 정말 뭐하지, 하며 햇살이 댑혀둔 책상을 멍하니 보고 있길 10분째. 여닫이문의 끼익- 소리와 함께 DB가 등장했다. 어제부터 비일상이라 할만한 것들을 겪다가 평소와 다름없는 DB를 마주하니 왠지 마음이 안정된다. 평소와 같이 가슴 부분은 헐렁하지만, 허리는 늘씬하게 패인 흰 와이셔츠. 네이비 컬러 체크무늬 스커트와 그 반 뼘쯤 아래의 깨끗한 무릎, 말랑말랑할 종아리. 그 종아리를 감싼 검은 스타킹.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를 가도 눈에 확 띌 머리색. 단순히 파랗다고 하기엔 약간 녹색빛이 감도는 저 머리색을 아이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사파이어와 에메랄드의 가루로 물을 들인 색.

두려움도 잊은 체 일상과 같은 이 소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려는 순간 눈이 이상한 걸 감지했다.

DB의 오른손에 감긴 붕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다. 아까 집에서 봤을 때도 없었다.

아, 그건 환영이지.

“이거? 헤헤…… 조금 높은 데서 넘어지는 바람에.”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묻기 전에 궁금증을 해소시켜줬다.

그보다, 날 보고 웃었다. 어쩌면 별로 화나지 않은 걸까?

“누구 덕에 급하게 오느라 말이야~.”

“죄송합니다!”

“응? 아냐 아냐~ 괜찮아. 진우도 고2니까 이제 여자친구가 생길 수도 있고 뭐 그런 거지~. 문자 씹은…… 아니, 문자랑 전화 무시한 건 잘했어. 헤헤, 여친이 오해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그런데 말야~, 왜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을까?”

“자, 잠시만!”

“그것도 잠옷까지 갖춰 입고 네 품에 안길 정도의 사이가 될 때까지?”

“오해야!”

“아냐 난 오해하고 있지 않아. 설마 진우가 그렇고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일단은 다행이네. 사실은 말이지-.”

“그년, 아 미안. 그래, 그년이 먼저 널 홀린 거겠지.”

결국 다시 그년이라고 했잖아!

“전부 오해야! 누구한테 뭘 어떻게 전해 들은 지는 모르겠지만.”

“예쁜 간호사 언니가 얼굴을 붉히며 알려주시던걸?”

그 간호사의 변태 끼는 손가락으로 눈 가릴 때부터 알아봤지만, 대체 뭘 어떻게 전해준 거지.

“그 여자는 집주인이야.”

“……응? 아……그, 그랬구나.”

집주인님. 당신이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 이 소녀가 납득하는 표정을 보면 뼈저리게 느끼실 겁니다.

“미, 미안…….”

“아냐. 미안할 거까지야. 문자 답장 안 해서 미안해. 고의는 아니었어. 자느라 못 봤어.”

확인 후에 답장을 안 한건 고의지만. 그건 무서워서…….

“생각해보면 내가 참견할 문제도 아닌데 화냈고…….”

DB는 어째서인지 좀 심하게 풀이 죽는다. 이런 녀석이 아닌데.

“아냐. 넌 이럴 자격 충분히 있어.”

“내가 너한테 뭐라고…….”

좀 오글거리기야 하지만 답장 못한 것도 미안하고 하니 마음 풀어줘야겠지.

“넌 내게 있어서 소중한-.”

순간 DB의 두 눈이 동그래지는 것을 보았다. 솔직히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런 것치곤 너무 쉽게 내뱉었지만. 역시 나, 오늘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친구야.”

“…….”

녀석은 감동했는지 그 쿤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리기만 한다. 본인도 평소에 이런 말을 안 하는 내가 이러니 부끄러운지 두 볼을 물들인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녀석은 결코 예상을 못 했던 일인지 표정이 흘러넘쳐 거의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10초 정도가 흘러서야 간신히 진정이 되었는지 입을 연다.

“그래……. 난 그 정도지.”

어? 뭐지 이 반응은? 아~ 그건가. DB친구를 3년이나 했더니 나도 눈치가 제법 늘었구나.

“하하. 장난이야 장난~. 넌 내게 있어서 정말이지 아주 많이 소중한-.”

DB의 동공이 다시 한 번 부푼다. 그 눈에는 어서 빨리 뒤에 이어지는 말을 뱉으라는 소망 같은 것이 깃들었을 거다.

“베스트 프랜드야!”

솔직히 학교 밖에서는 거의 만나는 일도 없고 학교 내에서도 애들이 모이기 전까지의 이 아침 시간에만 대화를 하는 사이이기에 베스트 프랜드라고 하기엔 모한면이있다. 하지만 DB녀석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게 있어 DB는 베스트 프랜드였다.

말하고 나니 여간 쑥쓰러운 게 아니구먼 이거. 내일도 제정신이 아니면 집에 가면서 두통제 같은 거라도 사야겠네.

“야, 이-!”

다행히 DB녀석도 이번에는 감동했는지 나를 껴안기라도 하려는 듯 쌍수를 들고 크게 소리쳤다. 그런데 어째서 그 손바닥들은 내 등이나 허리가 아닌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걸까?

“안녕 DB!"

“나쁜……모기를 칠칠치 못하게 얼굴에 붙이고 다니면 안 되지 진우야. 가을인데도 아직 모기가 있구나~.”

DB의 두 손이 내 양 뺨에 닿기 직전 앞문에서 DB를 향한 인사소리가 들렸다. 굳이 옆을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DB의 짝인, ……그런데 쟨 이름이 뭐였지?

“어? 안녕. 일찍 왔네?”

DB는 내 얼굴을 껴안으려던 두 손으로 천연덕스럽게 무언가를 집는 척을 하더니 마찬가지로 천연덕스럽게 짝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다음부터는 모기 조심해 진우야~.”

DB는 그 말을 남기고 빠르게 짝의 곁으로 사라졌다. 나는 조금 얼떨떨해서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내 자리로 돌아갔고.

뭐, 상황 자체는 신물이 나도록 익숙하다. 3년간 그래 왔으니까. 방금 내가 녀석에게 베스트 프랜드라고 했던 게……, 혹시 나만 그렇게 생각해온 건 아닐까 싶어 조금 부끄러웠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다른 면에서 부끄럽다. 내가 DB에게 그러하듯 DB역시 맘을 터놓고 얘기 나눌 수 있는 친구는 나 뿐이라 했다.

나야 애당초 친구가 거의 없으니 그렇다 치지만 DB는 지금도 보이는 것처럼 등교하는 녀석마다 곧장 들러붙는 인기인이다. 상냥하고 예쁜데다가 성적까지 좋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대외적으로 상냥한 거지만 그런데 그런 DB가 속마음을 보여주는 건 오직 나뿐이라는 거다. 분명, 분명 DB도 나를 절친이라 생각하고 있을 거다. 믿어야지. 친구인데.

“헤헤. 정말?”

창가인 내 자리와는 정 반대분단인 복도 쪽 중간자리에 앉은 DB를 중심으로 어느새 삼삼오오 애들이 모여 떠들고 있다. 그 군중 속에서 돋보이는 바다빛 머리의 녀석은 작은 것에도 맞장구를 쳐가며 참 잘 웃어주곤 한다. 이를테면 호랑이가 차를 세우더니 한 말이 ‘타 이거’였다는 둥의 개그에 충분하면서도 조금도 경박하지 않게 웃어준다. 아마 그 개그를 내가 날렸다면 엄청 욕먹었겠지…….

DB도 대한민국의 청소년. ‘청소년들은 모두 욕을 한다’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폐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반 애들 대부분이 ‘딴죽을 걸 정도의 일은 아니다’라 생각하며 피차 따지기엔 귀찮기도 한 맘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줄 거다. 하지만 DB에 관해서 만큼은 달랐다. DB의 숨은 성격을 모르는 녀석 들로썬 DB의 입에서 'th'발음이 나는 일은 쓰레기나 쓰나미나 쌍화탕이나 쌀이나 쑥갓나물 정도를 말할 때가 전부일거라 생각하겠지.

내가 3년 전에 그랬듯.

3년 전 DB도 욕을 쓴다는 것을 알았을 땐 나도 정말 깜짝 놀랐다. DB와 난 중학교 2학년 때 운 좋게 짝이 됐었다. DB는 그때도 마찬가지로 대외적으로는 그저 상냥한 모범생이었고 나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탁을 잘 못하는 나도 DB에게는 공부를 가르쳐달라 할 수 있었으려나.

DB는 정말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하지만, 머지않아 편의점 야간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기에 부족한 잠을 학교에서 보충하는 수밖에 없었고, 공부했던 내용은 하루하루 잊혀지는 반면, 시험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왔다.

시험이 일주일 정도 남았던 날. DB는 점심시간마저 자는 나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눈을 떠보니 DB는 내 눈에도 제법 익은 구름무늬 공책을 들고 뒤에 있는 친구들에게 떠밀리듯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퀭한 눈으로 어서 용무를 말해주길 기다리자니 머뭇거리던 입이 열리며 한 마디를 남겨주고 사라졌다. “시, 시험공부 열심히 해!” 내 손에는 어느새 DB가 수업시간에 열심히 필기하던 노트가 들려있었다. 잠결이라 사양할 생각도 들지 않았기에 가방 얕은 곳으로 대충 넣어두고 그대로 다시 잠을 청했다.

인적이 드문 지역의 편의점 야간 알바란, 근무시간에도 제법 높은 자유도가 누릴 수 있는데다가 돈은 1.5배나 받을 수 있는 좋은 것이다. 카운터를 책상 삼아 공부를 할 수도 있다! 공부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시에도 “장난하냐?”라며 어깨 펴고 말할 수 있었지만, 공부조차 안 했던 전날까지는 할 일이 너무 없었기에 휘파람까지 불며 DB가 빌려준 공책을 펼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에 엄청난 것들이 쓰여져있을 줄은 추호도 모르고.

첫 페이지를 펼치니 뭔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때로는 연필로 때로는 볼펜으로. 몇가지는 형광펜도 칠해져 있었다. 역시 DB는 성실하다고 생각했던 한편 여자애치곤 예쁘게 정리하는 스킬이 낮다고 느꼈다.

첫 번째 줄을 읽었다.

공책을 덮었다.

포스기에 출력된 시간을 보니 새벽 2시. 그래. 한창 눈과 뇌가 피로할 때였다. 눈을 힘까지 줘 싹싹 비비고 손가락끝으로 머리를 통통치며 정신을 가다듬고 한 번의 심호흡 후 공책을 다시 펼쳤다.

두 번째 줄을 읽었다.

공책을 덮었다.

더는 읽을 자신이 없었다. 'th'발음으로 시작하는 무난한 것들부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동물의 자식들이 한가득 있었다. 동물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하고 디테일했는지 ‘하울아 피그미 마모셋 원숭이 새끼!’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에 남은 욕이 있다.

‘도진우... 새끼 판다 같은...’

그날은 평소처럼 충실히 카운터만을 지키다가 등교하기로 했다. 더 이상 보는 건 이 공책의 주인한테나 나한테나 좋지 못했다. 특히 내 정신건강에 좋지 못했다.

그날은 교대시간이 오기 전에 미리 모든 채비를 해두었다. 학교에 제일 먼저 가서 가방을 내 자리에 걸어둔다. 그리고 난 적당히 교외를 배회하다가 평소 등교하던 시간에 교실에 등장해서 태연하게 ‘어? 가방 놔두고 갔었네.’라고 하면 DB는 아무 상처 없이 끝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지만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고 속으로 자화자찬을 하며 행여나 늦을세라 학교로 향했다. 학교를 향한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교실의 문을 열었던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들 때문에 발이 굳었지만.

칠판 위에는 태연히 7시 5분 후를 가리키는 시계가 막 떠오른 참이던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깨끗한 칠판이, 칠판의 앞에는 낡은 원목 교탁이, 교탁의 바로 앞자리에는…….

“도진우!”

내 짝 DB가 있었다. 설마 늦을 줄이야.

“어…… 그, 아, 안녕?”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넨 건 이때가 처음이었나?

DB는 말 대신 몸으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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