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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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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잉여파티 세계정복!
글쓴이: 내팔은최강
작성일: 12-04-30 23:53 조회: 2,812 추천: 0 비추천: 0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약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지구라는 행성의 험난한 자연환경 속에서 편하게 살아나갈 만한 종족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리를 짓는다. 무리를 지었기에 인간은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간은 그 무리를 점점 키워나가 도시와 나라라는 거대한 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지구에서 제일 잘난 종족으로 만들어 주었다.

인간들의 힘은 뭉치는 데서 나온다. 따라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강력한 힘이나 지능 따위가 아니다. 바로 다른 인간들과 어울리는 능력이다.

철기는 그 능력이 조금 부족한 아이였다.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요즘같이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그에 따라 수많은 온라인 게임이 쏟아지는 시대에 집에서 혼자 게임을 한다고 그 아이가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온라인 게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어른들이 언뜻 보기에는 그게 아무리 온라인 게임이라고 한들, 기계덩어리와 하루 종일 씨름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기계덩어리 안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고 그 또 다른 세상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힘을 합쳐 강대한 적과 상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물건을 교환하기도 한다. 사람 사는 곳이 으레 그렇듯 온갖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고,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때로는 현실세계로까지 이어지는 인연이 싹트기도 한다.

요지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게임을 즐기는데도 남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사회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님 뭐해요!?>>

<<진짜 허접하네.>>

<<그러게, 별 거지같은 걸 파티에 받아가지고.>>

철기가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모니터 위로 팀원들의 불평이 텍스트가 되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철기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죄송요.>>

하지만 팀원들의 분노는 그것으로 사그러들지 않았다. 모니터를 한가득 메우고도 넘칠 정도로 욕이 쏟아졌다. 별의 별 사소한 일 들이 모두 철기의 잘못이 되어 돌아왔다. 철기는 억울했지만 단지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게임, Colosseum of Colosseum(최고의 콜로세움)은 각각의 캐릭터를 가진 네 명이 팀을 이루어서 상대편 네 명과 싸우는 팀플레이 형식의 게임이었다. 그 옛날 검투사들이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였듯이, 게임 속에 마련된 거대한 콜로세움 안에서 플레이어들이 서로 팀을 만들고 짝을 이루어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철기는 1/4, 네 명중 한사람으로써의 역할은 다했다. 눈에 띄게 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팀의 비난은 모두 그에게로 쏟아졌다.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철기의 캐릭터가 상궤에서 벗어난 비상식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이었다.

철기의 캐릭터는 좋게 말하면 개성 있는 캐릭터, 나쁘게 말하면 병신 캐릭터다. 일반적인 상식의 틀을 벗어난 캐릭터는 모두 병신,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이런 캐릭터를 사람들은 흔히 잉여캐릭터라고 부른다. 줄여서 ‘잉여캐’. 쓸모없는 캐릭터란 뜻이다.(본디 ‘잉여’라는 것은 ‘쓸모없다.’가 아니라 ‘남는다.’이지만 이 경우, 사람들 사이에서 뜻이 와전된 경우다.)

사람들끼리 팀을 짜서 하는 게임일수록 ‘잉여캐’를 배척하는 경향이 심하다. 같이 게임을 하는 팀원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이런 잉여캐가 배척 받는 데는 정말로 정석적인 캐릭터에 비해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정관념에서 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대부분이었다. 뭐가 안 좋은지는 잘 모르지만 평소에 보던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다 나쁘다고 하니까 그냥 싫은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것은 사회로부터 배척받는다. 그것은 게임 속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려면 자기 자신을 남들과 비슷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철기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자기 자신의 개성을 고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그게 마음에 드니까!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했다.

<<팀 구합니다! 개념 박혀있습니다. 씨팔! 팀 구한다고!>>

철기는 그날도 팀을 구하지 못해 몇 시간 동안 게임은 커녕 <<팀 구합니다.>>라는 말만 쳐대고 있었다. 제 입으로 개념이 있다고는 하지만 딱 봐도 요상한 아이템들을 줄줄이 장착하고 있는 그를 받아줄만한 파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보통 한 시간정도 죽치면 마음씨가 좋거나, 생각이 없거나, 시간이 급한 사람이 팀원으로 받아주지만 그날은 재수가 없는 날이었는지 그런 사람들도 없었다.

이럴 때는 별 수 없었다. 콜로세움 오브 콜로세움, ‘콜콜’은 사람과 사람간의 싸움이 목적인 게임이었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할 것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냥’이었다.

투기장 바깥의 필드에는 수많은 괴물들이 득시글거린다. 그런 괴물들을 사냥하면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아이템으로 투기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싸운다. 그것이 바로 '콜콜'이라는 게임의 일반적인 플레이 방식이었다.

팀을 구하는 것을 포기한 철기가 투기장을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문득, 그의 옆에서 열심히 팀을 구하고 있는 한 캐릭터가 눈에 띄었다.

<<팀 구해요! 아무 팀이나 들어갑니다. 아무나 데려가세요!>>

캐릭터의 아이디는 <<liberation>>, 노랑생머리에 육감적인 몸매가 인상적인 인간 여자 캐릭터였다. 게임 속의 여자 캐릭터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철기였지만, 그 캐릭터가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들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파란 색 쌍검과 하늘거리는 레이스가 달린 노출도 높은 흉갑.

'파란 번개 쌍검에 삭풍의 가호...... 스피드형 전사인가?'

굳이 정보창을 띄워볼 필요도 없었다. 철기는 얼추 생김새만 보고 그 캐릭터의 특성을 알아냈다.

스피드형 전사...... 그것도 쌍검. 비주류 캐릭터다. 대부분의 팀은 전사에게 방어력을 요구한다. 상대방의 주의를 끌어 공격을 유도하고, 동시에 아군을 보호하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고, 또 요구하는 전사의 모습이다. 이 역할을 해내려면 무조건 방패가 필요하다. 쌍검을 든 순간부터 그 캐릭터는 팀 구하는 것을 거의 포기해야 된다. 철기는 우락부락한 덩치를 자랑하는 자신의 캐릭터를 바라보았다. 그 넓은 등에는 산더미만한 몬스터들도 보고 '어마! 무서워라!'하고 도망칠 것 같은 도끼가 걸려있었다. 그 도끼를 보자, 철기는 문득 초라한 쌍검을 걸치고 애처롭게 팀을 구하는 노랑머리 여자캐릭터에게 말로 표현 못할 동질감과, 동정심을 느꼈다.

철기는 잠시 그 캐릭터가 팀을 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그리고 30분이 지났다. 그 동안 주변에서 수많은 파티가 생성되고, 해체되었지만 그 스피드형 쌍검 전사를 데려가는 팀은 없었다.

철기는 현실에서건 게임에서건 누군가에게 선뜻 말을 거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키보드를 두들겼다.

<<저기요.>>

<<네?>>

<<저랑 같이...... 사냥이라도 하실래요?>>

//////////////////////////////////////////////////////////////////////////////////////////////////////////////

철기와 리버레이션(liberation)은 금세 친해졌다. 서로 잉여캐를 키우는 사람들이라 공감대를 쉽게 쌓을 수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철기와 리버레이션은 왠지 궁합이 잘 맞았다.

콜콜이라는 게임이 워낙 팀플레이를 중요시하는 게임이다 보니 컴퓨터의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몬스터들도 플레이어 혼자서는 잡을 수 없도록 만들어진 녀석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냥을 할 때도 혼자서 하는 사람은 드물고 적게는 둘, 많으면 셋이서 팀을 이루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철기와 리버레이션은 세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겨우 잡아낼 몬스터들도 둘이서 비교적 쉽게 잡아내곤 했다.

둘은 서로를 친구로 등록했다. 게임에 접속할 때마다 인사를 나누고, 게임을 하는 도중에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둘이 붙어서 팀을 구할 수는 없었으므로(잉여캐 한명도 팀에 들어가기가 힘든데 둘이면 어떻겠는가?) 같이 게임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사냥을 할 때는 꼭 서로를 불러서 팀을 이루었다. 얼마 전 부터는 핸드폰 번호도 교환해서 문자도 조금씩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리버레이션이 말을 꺼냈다.

<<남도님, 어디 살아요?>>

철기의 캐릭터 아이디는 ‘남자라면도끼’였다.

철기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저요? 저 G시 살아요.>>

<<G시여? G시 어디요? 저도 G시 사는데.>>

<<H동에 사는데요. 근데 왜요?>>

리버레이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의아해진 철기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리버레이션이 말했다.

<<남도님, 우리 언제 한번 진짜로 만날래요?>>

“엉?”

갑작스러운 리버레이션의 제안에 철기는 당황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게임을 해온 그였지만 컴퓨터를 통해 온라인에서 사귄 사람을 실제 오프라인에서 만난 적은 없었다.

“이, 이거 어쩌지?”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래요. 한 번 만나죠. 리버님은 어디 사시는 데요?>>

<<저도 H동 살아요. 그러니까 만나자고 했죠. ㅋㅋ>>

<<아 진짜요? ㅋㅋㅋ 그럼 언제 쯤 만날래요?>>

<<음...... 이번 주 토요일 어때요? 시간은 한시나 두 시쯤으로 하고...... 괜찮으세요?>>

철기는 잠시 생각을 한 뒤에 말했다.

<<토요일이면 학교도 일찍 끝나고 하니까 괜찮겠는데요.>>

<<아, 학생이셨어요? 설마 초등학생?>>

<<설마요. 지금 고2에요.>>

<<헐, 저도 지금 고2인데. ㅋㅋㅋㅋ 대박인데요? 진짜 무슨 인연인 듯. ㅋㅋㅋ>>

철기는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헐, ㅋㅋㅋㅋㅋ 그럼 토요일로 정하죠.>>

<<그래요. 그럼 저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 게요.>>

<<그럼 저도 여기까지만 해야겠네요. 잘 가세요.>>

<<네. ㅋㅋ>>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철기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게임을 종료했다. 그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서는 리버레이션과 조금 더 가까워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상대 쪽에서 먼저 만남을 권해온 것이다. 좋은 흐름이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 구나.”

철기는 컴퓨터 옆의 책상 위를 보았다. 고등학생 용 문제집 몇 개가 책상 이곳저곳에 펼쳐져 있었다. 문제풀이보다는 온갖 쓸모없는 낙서들만 가득한 문제집들이었다. 앞날이 막막했다. 이번 시험에서도 좋은 결과를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눈앞에서 번쩍거리고 있는 모니터의 화면을 보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게임이나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게임에서의 그는 잉여였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언제나 그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이번에야 말로......’라고 생각하며 철기는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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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약속했던 토요일이 되었다.

약속 장소인 xx백화점 앞 입구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사람 엄청 많네.”

철기는 질린다는 듯이 혀를 내밀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한시 사십분. 약속시간보다 이십분 빠른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막 돌아온 그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너 오늘 무슨 약속 있다며?’

‘어, 두시까지니까 한시 반쯤에 나가면 돼.’

‘돌아오기는 언제 돌아오는데?’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일찍 들어와. 너 요즘 매일 집에서 게임만하고...... 오늘 하루라도 좀 일찍 들어와서 공부 좀 해. 나랑 너희 아버지가 너 놀라고 그 비싼 학교 보내준 거 아니야.’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그런 비싼 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알았어. 일찍 들어올게.’

말을 끝낸 그는 옷을 갈아입은 다음, 바로 집에서 나왔다. 그가 집에서 나온 시간은 한시였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철기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오늘은 일찍 들어가지 뭐. 어차피 같이 밥만 먹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는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시간은 한시 오십분. 십 분은 무엇을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가만히 있기에는 긴 시간이었다. 그는 핸드폰의 버튼을 두들겼다.

<<님, 어디세요? 전 지금 도착했어요. ㅋㅋ>>

답장은 바로 왔다.

<<아, 그래요? 저도 거의 다 왔어요. ^^ 약속시간에 늦지는 않을 듯.>>

철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근처에는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하학적인 모양의 구조물이 있고 그 아래에 벤치가 놓여있었다.

<<그럼 저는 여기 백화점 앞에 있는 요상한 구조물 아래에 있을 게요.>>

<<네 ㅋㅋ 금방 갈게요^0^>>

화사한 리버레이션의 답장에 철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벤치에 앉았다. 평소에는 이렇게 막 이모티콘 쓰고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돼지같은 남자애가 여드름 가득한 볼을 씰룩이면서 << ^0^ >>같은 이모티콘을 쓰는 모습을 상상했다.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

그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상상을 부정했다. 하지만 곧 리버레이션의 캐릭터가 떠올랐다.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금발 여캐. 참으로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현실의 리버레이션이 모니터 속 리버레이션을 보며 하악하악 몽롱한 눈으로 침을 흘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철기는 주먹으로 이마를 쥐어박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멍청아. 설령 진짜로 리버레이션이 그런 놈이라고 해도 그게 무슨 대수냐.

몇 번이나 더 머리를 쥐어박고서야 망상에서 벗어난 철기는 오늘 두 번째의 한숨을 쉬며 벤치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분은 찝찝했지만 날씨는 참 좋았다.

“남도님?”

맑고 가느다란 목소리. 철기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세상에 어느 남자가 저런 예쁜 목소리를 낸단 말이냐. 하지만 다시 한 번 그 예쁜 목소리가 들렸다.

“남도님이 아니신가?”

분명히 여자의 목소리였다. 철기는 얼른 고개를 내려 앞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 리버레이션이 갈색 빵모자가 어울리는 귀여운 여자애라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예쁘장한 얼굴이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철기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리버레이션을 가리켰다.

“어, 너는......”

철기의 얼굴을 확인한 리버레이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매몰차게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어? 야! 임마! 어디가!”

철기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헐레벌떡 그녀의 뒤를 쫒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수많은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정신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쫒던 철기는 금세 포기하고 원래의 벤치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둔한 머리로는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상황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아는 한, 그가 아는 그 여자는 쓸데없이 게임 같은 것을 할 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진짜 이름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하리가...... 리버레이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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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사립 고등학교. 그다지 특별한 고등학교는 아니었다. 그저 돈 많은 집안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들어오는 평범한 사립학교일 뿐이었다. 그리고 철기는 돈 없는 집안의 공부 못하는 아이였다.

학교의 쉬는 시간은 비교적 조용했다. 반 아이들 중 반은 서로 시시덕 대면서 떠들고 있었다. 나머지 반의반은 잠을 자고, 나머지 반의반은 묵묵히 공부를 한다. 철기는 그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공부하는 쪽일까.

그는 책을 보고 있었다. 보통 독서라고 하면 무난하면서도 고상한 취미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무슨 책을 읽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철기가 보고 있는 것은 흔해 빠진 무협소설이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천애고아가 사실은 엄청난 천재였고, 세상 제일의 스승을 만나 무공을 익히고, 그것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삼서 사첩을 줄줄이 거느리고 산다는 그런 뻔한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 사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하고, 그런 쓸모없는 것을 왜 보냐고 핀잔을 주지만 철기는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무협지를 읽었다. 이유는 언제나 그렇듯 단순했다. 그냥 그게 좋으니까!

무협지는 내용이 뻔한 만큼 읽기 편하고 시간 죽이는 데는 천하명검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서로 재잘 재잘 떠들고 있는 여자애들을 훔쳐보았다. 정확히는 아이들 사이에 파묻혀있는 하리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저 녀석이 맞아.’

철기는 확신했다. 저번 주 그가 토요일에 만났던 사람은 분명히 하리였다. 일단은 딱 봐도 생긴 게 비슷했다. 토요일에 봤을 때, 그렇게 자세하게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아는 얼굴이었으니 기억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것 외에도 하리가 리버레이션이라는 증거는 많았다. 그날 이후부터 리버레이션이 접속을 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하루에 못해도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은 접속하던 사람이 갑자기 접속을 끊는 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게다가 그가 보낸 문자에 답장이 오는 일도 없어졌다.

문제는 하리가 리버레이션이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정황상, 하리가 리버레이션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철기는 하리를 알았다. 이름도 알고 얼굴도 알고 대강의 성격도 알았다.

성, 하. 이름, 리. 나이 18세. 여성.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디어디 잘나가는 집안의 딸. 성적. 전교에서는 1,2 등을 다투고 모의고사에서는 상위 1프로대의 우등생. 성격은 매우 원만. 잘 웃고, 유머감각도 제법 있으며 누구라도 호감을 가질만한 온화함을 가지고 있음. 외모, 예쁨. 귀여움. 작음. 끝.

그가 아는 건 그게 다였다. 그녀가 누군지,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았지만 실제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어디 놀러간다고 하면 배시시 웃으면서 가방에 영어단어장을 챙겨갈 것 같은 이미지의 여자가 왜 게임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으니까 모를 수도 있다. 몰랐던 사이였으면 이제부터라도 알아 가면 그만이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번 주 토요일 약속의 날, 리가 철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곧바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철기는 그게 마음에 걸렸다.

철기가 땅위 하늘아래 두 번 다시없을 추남이었으면 그도 그냥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근데 그건 아니었다.

아무리 철기가 반에서 겉도는 아웃사이더라고 해도 같은 반 학생인 이상, 하리 역시 철기의 얼굴을 알아봤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하리는 철기를 알아봤기 때문에 가버렸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이후로 게임에 접속을 하지 않고 계속 그를 피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철기는 하리가 그와의 관계를 거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평소의 그라면 신경이야 좀 썼겠지만 금방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그에게는 하리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하리의 분신(分身)인 리버레이션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쉬는 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하리에게서 떨어져 나간 틈을 타서 말을 걸었다. 소심하게.

“......저기.”

처음에는 그냥 이름으로 부르려고 했지만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조금 껄끄러웠다.

하리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더니 이어서 환하게 웃었다. 유난히 커다란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철기구나? 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순진한 그녀의 표정에 철기는 당황했다. 순간적으로 리버레이션이 하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하리가 리버레이션이라는 것을 증명할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그가 토요일에 봤던 여자야 그냥 하리랑 조금 닮은 사람일 수도 있고, 토요일에 그를 보고 가버린 건 그냥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게 생겨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별의 별 가정들이 떠오르면서 머리 속이 꼬이기 시작했다.

“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혼란에 빠진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났다. 그 다음 수업시간 동안 철기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하리가 리버레이션인가? 리버레이션이 하리인가? 그러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하리가 리버레이션인지 아닌지를 증명할 방법을 찾아냈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다시 쉬는 시간이 왔다. 마침 하리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철기는 하리의 책상 위에 놓인 그녀의 핸드폰에 집중했다. 그는 발신자표시제한을 걸고 리버레이션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우우웅

매너모드로 설정이 되어있는지 하리의 핸드폰이 책상 위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철기는 하리가 전화를 받기 전에 신호를 끊었다. 하리는 잠시 의아해 하는 듯 했지만 금세 신경을 끊었다. 별거 아닌 스팸전화로 생각한 것 같았다.

“......!”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하리는 리버레이션이었다. 철기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뭐? 철기구나? 왜? 요런 깜찍한 것!

철기는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처럼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사냥의 시간은 빨리 오지 않았다. 하리는 누구와는 달리 예쁜데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서 친구가 많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타입이었다. 철기는 굳이 아이들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철기가 하리에게 다시 말을 건 것은 마지막 수업이 끝난 직후였다. 아이들은 모두 가방을 싼다고 떠들썩했고 청소당번들은 청소를 한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철기는 그 혼란을 틈타 하리에게 접근했다. 그는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들어갔다.

“어이.”

“응?”

명백한 시비조의 말투로 운을 때었지만 하리는 이번에도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철기를 돌아보았다. 철기는 하리의 조그마한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참았다.

“너, 리버레이션이지? 토요일에 xx백화점 앞에 나온 거 너 맞지?”

“무슨 소리야?”

하리는 고개를 갸웃 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서 철기의 마음이 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하리를 추궁했다.

“거짓말 하지 마. 너 맞잖아.”

철기는 핸드폰을 꺼내서 하리의 얼굴 앞에 들이댔다. 핸드폰의 액정에는 하리의, 리버레이션의 전화번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 내가 확인해 봤어. 네 핸드폰이 울리는 거 확인 했다고.”

하리는 빤히 철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그 얼굴이 왠지 울먹이는 것 같아서 철기는 왠지 모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조그마한 입술이 달싹였다.

“짜증나.”

“뭐?”

“짜증난다고.”

백팔십도 뒤바뀐 하리의 분위기에 철기는 주눅이 들었다. 기세에서 눌린 그가 뭐라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데 하리가 말했다.

“그래, 내가 리버레이션 맞아. 그래서?”

“......”

철기는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하리가 리버레이션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려고만 했지 그것을 판별한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는 계획한 적이 없었다.

“왜 말이 없어? 네가 먼저 말 걸었잖아.”

쪼는 입장에서 갑자기 쪼이는 입장이 되자 난처했다. 그래서인지 나오는 말도 싱거웠다.

“음...... 너 요즘 왜 접속 안하냐?”

“게임 접었으니까.”

그녀의 대답에 철기는 갑자기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얼른 물었다.

“게임을 갑자기 왜 접어?”

하리는 대답대신 철기를 쏘아보았다. 그 따가운 눈길에 철기는 저도 모르게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굳어버렸다.

“하리야. 뭐해?”

한 여자아이가 말을 걸었다. 하리는 자신이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신기막측한 변화에 철기는 기가 막혔다. 허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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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철기는 책상을 내리쳤다. 그 소리에 놀란 어머니가 밖에서 외쳤다.

“무슨 일이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철기는 샤프를 들어 빈 공책에 욕설을 줄줄이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공책 위를 마구 그어서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성질 더러운 여자애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 생각하니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리에게 말을 걸었다. 같은 반이니까 이름이나 얼굴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하리는 마치 철기가 자기 부모님이라도 욕한 것 마냥 굴었다.

물론 그가 시비조로 말을 튼 것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애매모호한 상황을 만든 것은 하리였다. 돌이켜보니 토요일에 그를 불러놓고 그냥 가버린 것도 괘씸했다. 자기가 불러놓고 정작 자기 자신은 그냥 제멋대로 가버리다니. 거기에 그 마지막 눈빛은 뭔가. 그녀의 눈빛은 마치 너 때문에 내가 게임을 접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철기는 그녀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날 철기는 이를 박박 갈면서 침대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철기는 대놓고 하리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주변에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자세를 취했다.

“어...... 하리야.”

안하던 짓을 하려니 낯이 따끔따끔하고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철기에게 집중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구석에 처박혀 책만 읽던 놈이 갑자기 말을 걸었으니 신경이 쓰일 만도 했다.

하리의 눈에 짜증이 스쳐지나갔다. 철기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하리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철기를 바라보았다.

“그래, 철기야. 근데 너 요즘 나한테 말 많이 건다?”

“웃......”

예상치 못한 반격에 철기는 당황했다. 왠지 모르게 의미심장한 하리의 말을 한창 때의 여자애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 중 한명이 까르륵 웃으며 말했다.

“어머, 어머! 철기야. 혹시 설마 우리 리이가 좋아서 그러는 거야? 응?”

“무, 무슨 소리를...... 아니야!”

철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완강하게 거부의 몸짓을 취했지만 장난기가 발동한 여자애들은 그런 것에 물러설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왠일이니! 왠일이니! 어머머머.”

“헤에...... 평소엔 말 한마디도 안하더니 너도 어쩔 수 없는 남자애구나!”

아이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기 시작하자 반의 시선이 모두 철기에게로 쏠렸다. 철기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던 그의 눈에 슬며시 웃고 있는 하리가 보였다. 하리는 가볍게 눈웃음을 치면서 입 꼬리를 살살 말아 올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가증스러웠다. 그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하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

“할 말이 있어. 따라와!”

철기는 하리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 이거 놔!”

하리는 반항했지만 체중은 두 배에 가깝고 키는 30센치나 더 큰 철기가 끌자 끌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리의 친구들은 말리기는커녕 신이 나서 더 떠들었다.

“어머! 완전 터프해!”

철기는 하리를 끌고 빠른 속도로 복도를 걸었다. 그러던 중 하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놔.”

뒤를 돌아보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하리가 보였다. 철기는 순순히 하리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새빨갛게 손자국이 남아있는 손목을 주물렀다.

“미안. 괘, 괜찮냐?”

하리는 대답대신 고개를 쳐들고 철기를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철기는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래, 그 눈빛이다. 철기는 그 눈빛이 기분 나빴다. 그러고 보니 저번 주 토요일, 백화점 앞에서 만났을 때도 저런 눈빛이었다.

“이봐,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

하리는 부어오른 손목을 들어보였다.

“그, 그거 말고! 그건 내가 잘못했다.”

“그럼 뭐?”

하리는 또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철기의 마음에 불씨를 당겼다. 성질이 확 치밀어 오른 그는 분통을 터트렸다.

“제기랄! 도대체 왜 그러냐? 내가 네 얼굴에 똥이라도 처발랐냐? 왜 그리 날 싫어하는데?”

하리는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너, 반에서 몇 등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철기는 가슴에 비수가 박히는 것 같았다. 활화산처럼 용암을 뿜던 그는 순식간에 휴화산이 되어 거무죽죽한 얼굴로 하리를 바라보았다.

“그, 그건 왜?”

하리는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말 해봐. 몇 등?”

“꼬, 꼴찌.”

철기는 중학교 때도 공부를 그렇게 잘하지 못했다. 평범한 중학교에서도 50명 안 밖인 반에서 20등에서 30등 사이의 수준을 유지했었다. 그런 녀석이 못해도 반에서 5등 안에는 들던 아이들이 모이는 사립 고등학교에 들어왔으니 꼴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공부는 못하네.”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공부야 뭐 못할 수도 있지. 그럼 뭐 다른 거 잘하는 건 있어? 운동? 그림? 노래? 아무거나.”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너 네 집이 잘 살기라도 해?”

철기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나랑 너희 아버지가 너 놀라고 그 비싼 학교 보내준 거 아니야.’

철기는 하리의 물음에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었다. 하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야...... 그러니까 네가 싫은 거라고.”

“......”

“너 같은 애랑 어울려서 나한테 득이 될게 하나도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안 그래도 다른 인간들 장단 맞춰주는 것도 힘들어. 너 같이 쓸모없는 놈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어.”

하리는 등을 돌렸다.

“다시는 말 걸지 마. 이 패배자야.”

철기는 멀어져가는 하리의 등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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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하리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제법 충격이 컸는지 철기는 아직도 복도에 멍하니 서있었다.

“흥.”

최악의 남자였다. 가진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쓰레기. ‘남자라면도끼’의 정체가 저런 쓸모없는 인간이었다니...... 깊은 실망감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교실로 들어가자 친구들이 다가왔다.

“리이 왔다. 리야?”

리는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홧김에 철기에게 쓴 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녀라고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넋이 빠져버린 철기의 얼굴을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이 근질거렸다. 잠시, 잠시 동안이라도 좋았다. 혼자 있고 싶었다. 그녀는 교실로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리이야?”

생각 같아서는 혼자 있고 싶으니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를 한순간에 망치게 될 것이었다.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보기 좋은 모습으로 다듬을 줄 알아야 한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응? 왜에?”

“철기가 뭐래? 응? 네가 좋데?”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던데?”

하리는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냥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에이~ 거짓말.”

“진짜야.”

“거짓말 같은 데에~?”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악의가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것이 더 짜증났다. 그녀는 눈치 없는 인간이라면 질색이었다. 욕이라도 한 사발 퍼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더 귀찮은 일이 생길게 뻔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친구들의 장단에 맞춰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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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서도 하리는 계속 기분이 나빴다. 이게 다 그 멍청한 쓰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쉬는 시간 내내 친구들의 장난에 시달리게 한 것도 모자라서, 쓴 소리 좀 들었다고 하루 종일 침울한 표정으로 구석에 찌그러져있었다.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 놈이 더 꼴 보기 싫어졌다. 그녀가 상상했던 ‘남자라면도끼’는 그런 찌질한 남자가 아니었다. 상상 속의 그는 훨씬 더 터프하고, 멋진...... 그런......

“......관두자.”

그녀는 잡념을 털어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책을 바라보며 공부에 집중했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의무로 하는 공부. 별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 게임하고 싶다.”

턱을 괴고 책상에 앉아있던 그녀는 지루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긴 하지만(철기를 제외하고) 게임은 그녀에게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것도 못하고 있었다. 이것도 다 그놈 때문이다.

“아니지.”

그녀는 요즘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이유를 떠올렸다. 그녀가 게임을 끊은 이유는 하나였다. 더 이상 철기와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처음에는 추궁받기가 싫어서 접속을 안했지만 이제 다 들통나버렸으니 추궁당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우울해하는 철기의 반응을 봤을 때, 더 이상은 그녀에게 말도 걸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컴퓨터를 키고 게임을 실행시켰다. 접속을 하고 친구 목록창을 보니 철기가 접속해있었다. 하지만 철기로부터 귓속말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들어오자마자 게임 접었다면서 왜 들어왔냐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내심 안심하며 게임에 집중했다.

<<팀 구합니다. 상대편 딜러 한 명은 확실히 따드립니다. 파티 해주세요.>>

그녀가 팀을 구하는 데는 한 시간이 걸렸다. 보통 사람들의 몇 배는 되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캐릭터, 리버레이션이 잉여캐의 범주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들이 원하는 모양새로 캐릭터를 바꾸면 게임을 더 편하게 즐길 수 있겠지만 그건 싫었다. 남들을 위해, 남들이 원하는 대로 장단을 맞춰주는 건 현실세계에서 하는 것만 해도 충분했다. 게임에서 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팀을 구하는 데는 한 시간이 걸렸지만 팀에서 쫓겨나는 데는 십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이런 병신들! 손가락 다 짜르고 게임 접어라. 왜 사냐?>>

방금 전까지 그녀와 팀원이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녀를 욕했다.

<<꺼져! 이런 똥매너야. 존나 쓰레기 캐릭 키우는 주제에 매너도 똥이네. 너 비매너 유저로 신고할 꺼임.>>

하리는 코웃음을 쳤다.

<<신고해. 븅쉰들아. 멀쩡한 캐릭탓하고 자빠졌네. 좆도 못하면서 입만 살아가지고...... 그냥 나가서 다 뒤져라. 허접들아.>>

방금 전까지의 게임에서 그녀는 10분 동안 무려 아흔 여섯 번의 욕을 했다. 그리고 비매너 유저로써 세 번의 신고를 받았다.

“흥! 멍청이들.”

하리는 그것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현실이 아닌 게임 속 세상이었다. 욕 좀 먹고 신고 좀 당한다고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과거에 신고 누적으로 계정정지를 당한 적도 있었고, 몇몇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비매너유저로 블랙리스트에까지 올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비매너 유저니, 신고니 운운하는 것보다 신경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팀을 다시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한 시간 동안 고생해서 겨우 팀을 구했는데 10분 게임하고 다시 한 시간죽칠 것을 생각하니 기운이 빠졌다.

그냥 사냥이나 갈까하고 투기장 부근을 어슬렁거리는데 문득 ‘남자라면도끼’가 눈에 띄었다. 남자라면도끼는 오늘도 열심히 팀을 구한다고 채팅창을 도배하고 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어놓고도 게임을 하다니, 하리는 대단한 배짱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같이 사냥하자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애초에 그와의 관계를 거부한 건 그녀 쪽이었다. 그런데 철기 쪽에서 귓속말이 왔다.

<<팀 없냐?>>

하리는 망설였다. 대꾸를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애매했기 때문이다. 같이 사냥을 하고 싶기는 한데 왠지 좀 껄끄럽고, 그렇다고 끌리지 않는 건 또 아니고.

철기는 무슨 생각인지 스스럼없이 귓속말을 보냈다.

<<사냥 갈래?>>

“웃......”

친근하게 다가오는 철기의 귓속말에 하리의 얼마 남아있지 않은 양심이 벌렁벌렁 거렸다. 욕이라도 하면 마음은 편할 텐데, 저렇게 부드럽게 나오니 괜히 아까 했던 일이 미안해졌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지만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새침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조, 좋아!>>

철기는 하리에게 파티신청 메시지를 보냈다. 하리는 수락했다. 철기가 물었다.

<<어디 갈 거야?>>

<<아직 광란 못 배웠어. 오우거 마을로 가자.>>

<<그래.>>

콜콜은 오로지 전투만을 강조하는 게임이었기에, 전투이외의 진행은 매우 간략화 되어있었다. 따라서 사냥터인 오우거 마을까지 뛰거나 날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하리와 철기, 남자라면도끼와 리버레이션은 투기장 외곽 부근에 설치되어있는 순간이동 장치를 이용해 오우거 마을로 이동했다.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사냥은 투기장에서의 대전에 비해 긴장감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었다. 사람과의 대전은 변수가 너무 많아 매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일정한 행동양식이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몬스터의 행동은 변수라고 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몬스터들이 쉬운 상대라는 것은 아니었다. 멍청하지만 능력치만큼은 플레이어를 압도하는 것이 몬스터다. 빅-오우거(Big-Ogre)는 그런 타입의 대표적인 몬스터였다.

키가 플레이어 캐릭터의 두 배가 넘는 빅오우거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오우거 마을의 중간보스 격인 빅오우거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으면 웬만한 캐릭터들은 그냥 한 방에 죽거나 빈사상태가 된다. 체력을 채워줄 힐러 없이 사냥하는 철기와 하리에게는 굉장히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하리가 먼저 나섰다. 그녀는 ‘슈팅스타’라는 기술을 사용했다. 그녀의 캐릭터, 리버레이션이 빠른 속력으로 돌진하며 쌍검으로 오우거를 베고 지나갔다. 공격을 받은 오우거는 바로 리버레이션을 바라보았다.

<<크왁!>>

기둥만한 몽둥이가 리버레이션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리버레이션의 힘 능력치로는 오우거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콜콜에는 ‘가드 브레이크’라고 해서 일정수치 이상의 힘 능력치의 차이가 나면 방어 스킬을 써도 스킬이 무효화 되는 시스템이 있었다. 방패 전용의 스킬을 쓰면 그와 같은 능력치 차이를 대부분 무시할 수 있지만 리버레이션은 쌍검을 사용하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라고 쓸 수 있는 방어스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리는 ‘패링’을 사용했다.

리버레이션이 머리 위로 쌍검을 교차해 양 옆으로 흩뿌렸다. 그러자 충격파와 함께 오우거의 몽둥이가 튕겨나갔다.

패링은 특수 방어스킬로써 상대의 공격 타이밍에 맞춰서 정확하게 사용해야만 발동 되는 기술이었다. 잘만 쓰면 능력치 차이를 무시하면서 아무런 피해 없이 공격을 막아내고, 공격자에게 기절효과까지 줄 수 있다. 효과는 매우 좋지만 쓰기도 어렵고 쿨타임도 길어서 사람 상대로 하는 투기장에서는 그렇게 많이 사용되는 스킬이 아니었다. 하지만 행동을 읽기 쉬운 사냥터에서는 워리어 클래스의 필수 스킬이기도 했다.

패링의 효과로 기절상태에 빠져 멍하니 서있는 오우거의 등 뒤로 남자라면도끼의 도끼가 날아들었다.

몬스터든, 사람이든 전면부와 후면부의 판정이 달라서 등 뒤를 공격을 하면 추가적인 데미지를 줄 수가 있었다. 거기에 남자라면도끼가 장착하고 있는 도끼는 순수하게 공격력만 놓고 봤을 때, 콜콜 내에서 세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기였다.

남자라면도끼의 도끼가 오우거의 몸에 박힐 때마다 오우거의 체력이 눈에 띄게 줄어갔다. 기절상태에서 풀려난 오우거는 이제 리버레이션이 아니라 남자라면도끼를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몬스터의 기본 패턴으로써, 몬스터는 자신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힌 플레이어를 공격하도록 되어있었다.

남자라면도끼는 가장 기본적인 방어스킬 ‘디펜스’로 오우거의 공격을 막았다. 능력치가 힘에 치중되어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디펜스는 사용하기 편한 대신 패링처럼 피해를 완전히 상쇄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상당한 체력이 소모되었다. 물론 그거라도 쓰지 않았으면 그냥 한방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남자라면도끼가 시선을 끌자 이번에는 리버레이션이 오우거의 등을 노렸다. 남자라면도끼만큼은 아니었지만 리버레이션의 데미지도 약한 편은 아니었다.

둘은 그렇게 번갈아서 어그로(몬스터의 주의도)를 끌어가며 오우거의 체력을 깎아내렸다. 언뜻 보기에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생각만큼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방어스킬에는 쿨타임이라는 한계가 있고 방어스킬 없이 받아내기에는 오우거의 공격력이 너무 강했다. 만약 둘 중 한명이라도 방어에 실패하거나 어그로를 끌어오는 타이밍이 틀리면 순식간에 둘 다 시체로 변할 수도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맨발로 칼날 위를 걷고 있는 상황이다. 실수 한 번에 모든 게 끝나버린다.

혼자서도 오우거의 공격을 계속 받아낼 수 있는 방어형 전사나 체력을 회복 시켜줄 회복형 마법사가 있고, 어그로를 끌어줄 사람이 한명 더 있다면 난이도가 굉장히 쉬워진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팀플레이가 맞아 들어갈 때의 이야기였다. 온라인 게임의 특성상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호흡을 맞추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티구성이 제대로 갖춰진 플레이어 세 명, 네 명이 들러붙어도 절절 메는 게 빅오우거다. 그런 빅오우거를 철기와 하리는 잉여캐릭터 둘로 잡고 있었다.

하리는 지금 잡고 있는 빅오우거를 상대로 두 번째의 패링을 사용했다. 정확한 타이밍의 입력에 오우거의 몽둥이가 간단하게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리버레이션을 향해 공격이 가해졌다.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동안 끊임없이 공격을 가하다가 그녀의 캐릭터에 몽둥이가 닿기 바로 직전에 ‘백스텝’ 스킬을 사용해 공격을 피했다.

그녀는 굉장히 아슬아슬한 캐릭터 운영을 하는 타입이었다. 잘될 때는 한도 끝도 없이 잘되지만 안 될 때는 한도 끝도 없이 안 되는 타입.

평소에는 다른 팀원과 말싸움 하느라 바빠서 나락까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남자라면도끼와 팀이 되었을 때는 그런 일이 없었다. 애초에 말을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라면도끼와는 대화 없이도 손발이 잘 맞았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상대가 원하는 행동을 해준다. 그리고 그것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톱날 바퀴가 맞물려 들어가듯이 다른 사람과 호흡을 맞추는 것은 굉장히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상대방과의 사이에 모니터가 있고, 컴퓨터의 본체가 있으며 본체와 본체를 이어주는 길고긴 네트워크의 회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묘한 감정을 품을 정도로 말이다.

‘현실은 못생기고 능력 없고 자신감도 없는 찌질이에 불과했지만......’

죽어나자빠진 오우거가 떨어트린 아이템들을 주워 담으면서 하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떠올렸다. 가슴에 못 박는 말을 잔뜩 한 뒤에 ‘다시는 말 걸지 마.’라고 으름장 까지 놓은 사람과 같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길.”

못할 짓이었다. 철기에게도, 그녀에게도.

하리는 아이템을 다 챙기자마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바로 게임을 종료시켜버렸다. 공부할 마음도 들지 않아서 그녀는 그냥 불을 끄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언제나 두터운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 그녀에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단순한 숫자놀음에 불과했다. 이득이 되면 가까이하고, 이득이 되지 않으면 멀리한다. 그리고 철기는 그녀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은 언제나처럼 적당히 무시해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도 그랬듯이 같이 게임을 하다보면 그게 생각처럼 잘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콜콜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부터는 다른 게임이나 찾아봐야겠다......’

결심을 내린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했다.

하리는 한참이나 뒤척거린 뒤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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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야. 매점 갈래?”

“아니, 난 좀 속이 더부룩해서.”

아이들을 보내고 난 뒤 하리는 한숨을 쉬었다. 매점은 무슨 매점이냐. 살찐다. 이것들아. 홀로 남은 그녀는 습관적으로 책을 펴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기 싫지만 점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야 한다.

한참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위로 드리워졌다.

철기였다.

“또 뭐야?”

어제의 일로 마음이 약해진 하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대번에 인상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철기는 씨익 이빨을 드러내면서 웃더니 성큼 성큼 교실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옥상으로 와. 할 말이 있으니까.”

“......어?”

오늘의 철기는 왠지 분위기가 달랐다. 평소에는 조금만 날카롭게 반응해도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더듬었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고, 거친 느낌이었다. 야성적이라고나 할까?

그 모습이 왠지 그녀가 상상했던 남자라면도끼와 비슷해서 하리는 저도 모르게 철기의 말에 따라 옥상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갑자기 변한 철기의 태도가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옥상은 휑했다. 학생들은 그다지 옥상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 철기는 옥상난간에 몸을 기대고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리는 그의 등을 툭 건드렸다.

“야.”

철기는 하리를 돌아보았다.

“왔네.”

하리는 손가락으로 철기의 가슴팍을 꾹꾹 눌렀다.

“네가 뭔데 사람을 오라가라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다시는 말 걸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철기는 또 다시 웃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은 저번에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 때 네가 그냥 가버려서 못했거든. 좋아, 다음부터는 학교에서 말 안 걸게. 됐냐?”

아무리 봐도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묘하게 여유가 있는 것이 무언가에 초탈한 느낌이었다. 하리는 어울리지 않게 삐딱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나랑 같이 팀 만들자.”

하리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슨 소리?”

“무슨 소리긴...... 나랑 콜콜팀 만들자고.”

“하아?”

하리는 기가 막혔다. 분위기로 봤을 때 뭔가 거창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하는 말이 고작 게임하자는 거였다. 철기의 말은 같이 게임 몇 번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같이 게임을 할 파티를 짜자는 소리였다.

순간 장난하는 건가 싶어서 하리는 철기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철기는 진지해보였다.

“너 정말 어이없다...... 우리 내년이면 수능이야...... 근데 무슨 팀까지 만들어서 게임을 해?”

그 말은 지금까지 하리가 철기에게 한 말 중에서 제일 많은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리고 백번 천번 옳은 소리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수능이야기만 나오면 꼬리를 말고 덜덜 떠는데 철기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글쎄, 지금 내 수준으로 보면은 남은 1년 반 정도 열심히 한다고 갑자기 공부가 늘 것 같지는 않은데. 애초에 그렇게 열심히 할 자신도 없고.”

“아예 포기 했구나?”

철기의 말은 하리에게 ‘나는 이미 망했으니 너도 같이 망하자.’라는 말로 들렸다. 그녀는 경멸이 담긴 눈으로 철기를 바라보았다. 이런 남자에게 눈꼽만큼이라도 기대를 걸었던 자신이 한심했다.

철기는 하리의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말이야...... 내가 이 학교에 들어와서 가장 처음 깨달은 게 뭔지 알아?”

“뭔데?”

“내가 못났다는 거지.”

철기는 나이답지 않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잘났더군. 돈 많은 얼라들만 들어오는 데라서 그런가? 한두 놈도 아니고 다 전의 학교에서 전교 몇 등, 반에서 몇 등, 하는 놈들이고. 초중학교 때 유학한번 안다녀온 놈이 없고...... 거기다가 뭐, 음악성이니 창의성이니 별의 별 희한한 걸 하는 놈들도 많더만.”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제길, 나는 초등학교 운동회에서도 1등한 적이 없어.”

가만히 내버려두면 한도 끝도 없이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하리는 적당한 부분에서 철기의 말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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