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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네 마음 좀 눈치 채!
글쓴이: 은빛타천사
작성일: 12-04-30 08:58 조회: 1,733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겨울방학 뒤에 조그마하게 붙어있는 수업의 끝을 알리는 봄방학식이 끝났다. 난 도대체 히터를 트는지 아닌지 구분을 할 수가 없는 차가운 강당을 빠져나왔다. 다시 반으로 올라가야 된단 말이지. 이걸로 끝이면 편할 텐데.
“진열아.”
산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다. 그렇지만 무시하자.
“진열아!”
귀 아파! 귀 바로 옆에서 고함지르지 마!
“진열아, 왜 멍하니 있어.”
난 얼얼한 귀를 손으로 감싸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비단같이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색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트렸다. 커다란 눈망울은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고, 짙은 눈썹은 그러한 이미지를 배가시켰다. 새하얀 피부와 대조된 왼쪽 눈의 눈물점은 순수해보였다. 오뚝한 코도 붉디붉은 입술도 오밀조밀하게 얼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비록 복장은 흔해빠진 공립고교의 교복이지만 그야말로 미인의 정석.
그녀의 이름은 문 자화수. 하지만, 1년간 그녀를 봐 온 나로서는 헤실이 반장이란 별명이 더 입에 익숙하다.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지만, 지만, 지만! 특유의 백치 끼 때문에 ‘헤실이 반장’으로 통한다.
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헤실이 반장. 너보다야 멍하니 있을 리가.”
“우우, 헤실이 반장 아니라니까. 그리고 2학년 땐 몇 반인지 확인해야지. 어서 교실가자.”
날 채근하는 자화수의 말에 납득을 한 나는 중얼거렸다.
“…그것도 그러네.”
중요한 걸 깜박한 난 머릴 긁적였다. 에휴. 내가 뭐 그렇지.

반은 굉장히 어수선했다. 1년간 정들었던 친구와 헤어지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비록 같은 학교 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내 자리에 앉자마자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담임선생님은 출석부 사이에 껴 온 종이를 귀찮다는 듯 칠판에 테이프로 찍찍 붙이고는 사라졌다. …저 귀차니즘 쌤. 날이 갈수록 심해져.
칠판으로 우르르 달려 나가는 애들. 좀 기다렸다가 가면 어디 문제라도 생기냐. 나처럼 뜸해지길 기다리는 애들이… 2명밖에 없냐.
한 명은 서 휘. 내 친구이기도 한 녀석으로 그야말로 노는 녀석이다. 저 머리만 봐도 그렇다. 학생부에서 손을 못 댄다. 검은색이라고 우기면 할 말 없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암적색? 그것보다도 더 검은색에 가까운 색이다. 게다가 여성편력도 화려해서 현재 3다리 진행 중이다. 이런 녀석이면 으레 그렇듯 싸움질도 해댄다. 본인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1대 1로는 진 적이 없단다.
나머지 한 명은 여학생 이였다. 이름도 잘 모르는 반에서 항상 겉도는 애다. 딱히 어울리는 그룹도 없고, 쉬는 시간에도 항상 두꺼운 자습서를 풀고 있다. 그나마 이야기를 건네는 게 헤실이 반장인데. 저 애가 풍기는 ‘오지 마’ 오라를 눈치 못 채고 접근하는 거 같다. 지금도 자습서를 들여다보고 있다.
응? 그러고 보니 자화수는?
“히잉…. 나도 보자.”
칠판 앞의 인간덩어리 외곽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울상 짓고 계셨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휘에게 다가갔다.
“휘. 뭐하냐.”
“응?”
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문자라도 하냐?
“아들이 전부 흩어져서 말이여. 솔까말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제.”
“아들? 아, 애들.”
이 녀석…. 10대 용어와 사투리를 동시에 쓰니 알아듣기 힘들어!
“그려. 내 여친들 말이여.”
“…들이 붙어야 되지 않아야 할 자리에 붙은 거 같은데.”
“마 그라믄 어떠노? 안자라. 마침 내도 심심했데이.”
나는 휘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 녀석, 휘 옆에 있다 보니 정서불안 걸린 모양이군. 책상에 낙서가….
[옆이 무서워. 살려줘.]
다잉 메시지!? 난 황당한 얼굴로 휘를 보았다.
“뭐했냐?”
“응?”
“이 녀석한테 뭔 짓 했어?”
“그런 말 하지마레이. 마 내가 같은 반 아들한텐 손 안 대는 거 알잖카냐.”
“그러면, 넌 존재만으로도 이 녀석을 이토록 몰아붙인 거냐.”
난 이 책상의 주인공을 찾았다. 저기 있다. 소심안경쟁이. 반 배치표를 보고 있다. 또 뭔가 찾는다. 과도하게 안심하며 한숨을 내쉰다. 휘와 다른 반인가 보네.
“닌 와 안주꺼정 안 가노?”
칠판을 가리키며 휘가 물었다.
“응? 지금 가면 애들 바글바글해서 보기 힘들잖아. 나중에 봐도 상관없고. 그럼 넌?”
애들 우르르 몰려있는 게 싫어서 안 나가는 거 아니었어?
“낸 반이 무신 상관이고? 내가 공부를 해나, 뭘 해나?”
“…그도 그렇군.”
휘는 슬쩍 웃더니, 고개를 돌려 반을 훑었다. 그러고는 턱짓으로 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학생을 가리켰다.
“글고보니, 점마는 뭐하는 아고?”
“관심 있냐?”
“뭐. 저리 지가 킹왕짱이란 듯 지 홀로 있어부리면 누그든 신경 안쓰노?”
“그야 그렇지.”
관심 끊고 난 앞쪽을 바라봤다. 언제쯤 인파가 사라질라나. 우왓! 이런 몰인정한 녀석들. 지금 자화수가 밀려 쓰러졌잖아!
난 벌떡 일어나 자화수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안 다쳤어?”
“호오.”
휘 녀석이 휘파람을 불었다. 난 상관하지 않고 자화수를 부축해서 휘와 내가 앉아있던 자리로 데리고 와 앉혔다.
“도와줘서 고맙긴 한데, 반 확인해야지.”
“애들 좀 흩어지고 난 다음에 해도 되잖아. 나처럼.”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이기 누고? 우리 반 헤실이 반장 아닌기?”
휘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장난을 걸었다. 심심하냐?
“아, 휘. 안녕. 그리고 나 헤실이 반장 아니라니까. 왜 다들 그렇게 부른담?”
자화수는 그저 순수하게 인사로 답했다.
“…진짜 천연이제.”
“에? 응? 무슨 소리야?”
“마 됐다. 신경 안 쓰도 된디.”
“우웅?”
“…잘 해보그레이. 딱 봐도 조낸 힘들거 같으니.”
“그런 거 아니다.”
“에헤. 농담까지 마레이. 하는 짓이 딱 작업그는 것 이구마.”
“응? 작업? 진열이 알바 해? 우리학교 알바 금지잖아.”
“……. 마 힘 내그라.”
“…응.”
“어라? 아니야?”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갸웃하는 자화수를 보는 순간 반박할 말도 사라진 나였다.
“점마에 대해 뭐 아나?”
아까의 여학생에게 관심이 남아있는지 휘는 자화수에게 물었다.
“은영이잖아. 김 은영.”
“은영…이라.”
휘는 작게 뇌까렸다. 그건 또 어찌 들었는지 자화수는 방긋 웃으며 휘에게 말했다.
“데려올까?”
“응? 잠깐!”
오. 난 그 휘가 당황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하지만 지금은 이 장면이 중요한 게 아니므로 자화수를 눈으로 쫓았다. 자화수는 은영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심지어 교사가 뭐라고 해도 미동도 않던 은영이 자화수한테는 반응했다. 고개를 돌려 자화수와 눈을 마주친 것이다. 자화수는 방긋하고 웃으며 뭔가를 계속 설명했다. 우리와 이야기 나누자는 소리겠지.
우와. 은영이 우리 쪽을 바라봤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녀는 아름다운 축에 속하겠지. 마치 은세공같이 우아하면서도 날카롭게 뻗은 눈매나 어깨까지 단정하게 자른 머리칼. 눈꼬리를 좀 낮추고 말을 자주 하기만 해도 인기가 하늘을 치솟을 텐데.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자화수는 은영의 손을 잡고, 이쪽을 오고 있었다.
“데려왔어.”
“…….”
은영은 아무 말 없이 빈자리에 앉아 나와 휘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윽고 은영이 입을 열었다. 꽤나 목소리 톤이 부드러웠다. 내용은 정 반대로 고압적 이였지만.
“그래서, 둘 중 누가 나한테 관심 있다고? 웬만하면 그딴 거 버려줬으면 하지만.”
우와. 대뜸 본론부터 날리냐.
“이쪽.”
저 아무것도 모르는 자화수는 손으로 휘를 가리켰다. 절체절명이군. 자, 휘 이 난관을 어찌 빠져나갈 것이냐!
“아, 아들 빠졌데이. 우리, 확인하러 가제.”
기대를 배신하다니! 하면서도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반 확인하는 거 중요한 일이긴 하잖아? 애들이 죽 빠진 칠판 앞으로 가서 종이를 바라봤다. 내 이름…. 여기 있다.
[이 진열 ? 2학년 4반]
“4반이네….”
“진열이 4반이야? 나도 4반인데. 내년에도 잘 지내자.”
자화수가 새삼스럽게 인사해왔다. 나도 답해야지.
“그래. 잘 지내….”
“여. 나도 4반이네. 잘 부탁한데이.”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휘. 사람 말 하는걸 방해하냐. 하지만 그 사이에 자화수는 은영에게 다가갔다.
“은영이도 4반이네? 잘 부탁해.”
“…….”
“어찌 이린 우연이 다 있노. 우리들 다 4반이네?”
“그러게 말이야.”
나는 자화수에게 말했다.
“내년에도 잘 지내자.”
자화수는 내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응. 진열아.”

* * * * *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나한테 제일 인연이 없는 날이 다가왔다. 뭐, 이 날도 난 여전히 독서실에 가는 중이다.
더군다나 요번 14일은 일요일에 위치해있어서 방학이여도 보충수업을 하는 우리 학교에서 짜증나는 염장질을 안 봐도 돼서 속 편하긴 하다.
“하암.”
나는 하품을 했다. 추운 날씨 탓에 흰 김이 뿜어져 나왔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날 쳐다보는 거 같지만, 뭐. 잘못한 건 없잖아.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건너편에는 내 목적지인 독서실이 있다. 불이 바뀌었다. 재빨리 건너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하다.”
스토브가 돌아가는 독서실 로비에는 알바중인 고시생이 공부중이였다. 저걸 뭐라 말해야 될까….
“형.”
“어, 진열이 왔구나.”
형은 보던 책에서 눈을 때고, 날 봤다. 곧바로 눈을 다시 책으로 돌리고는 출입카드와 펜을 나한테 내밀었다. 난 그걸 받아서 내 이름과 입실시간을 작성했다. 형한테 다시 내밀었다.
“들어가도 돼.”
“네이.”
옆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십 수 명의 학생들이 각자의 참고서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뭐 비슷한 상황에 곧 처할 것이므로 그들에게 동정하질 못했다.
최대한 구석으로 빈자리를 찾았다. 이 독서실을 싼 대신 지정좌석제가 아니라는 게 문제야. 또 한 번 나올려는 하품을 참으며, 고개를 돌리던 난 빈자리를 찾았다.
“오, 운 좋다.”
오전도 채 지나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한산한 덕에 괜찮은 자리를 발견했다. 무려 바로 옆에 라디에이터가 있다. 따뜻하다.
털썩.
자리에 앉은 난 뭐 별게 있겠어? 가방에서 참고서와 문제집을 꺼냈다. 머리가 아파온다. 이걸 언제 다 한데? 잠시 고민하던 난 그나마 양이 적은 수학 문제집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독서대 천장 위에다가 올려뒀다.
“어라, 진열이?”
자화수의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장소에서 들릴 목소리가 아닌데? 나는 뒤돌아봤다.
노란색의 목도리는 자화수의 가느다란 목을 감싸고 있었다. 흰색의 스웨터는 굉장히 따듯해 보였고, 체크무늬 스커트와 검은색 레깅스는 추위로부터 자화수를 지키고 있었다. 갈색의 어그 부츠는 포근하게 발을 감쌌다.
“헤실이 반장?”
“우우, 헤실헤실하지 않다고오….”
자화수는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말꼬리를 늘렸다.
“근데 해실이 반장은 언제부터 이 독서실 다니기 시작했어?”
“우우.”
삐져서 볼을 부풀리는 자화수. 그러니까 애들이 해실이 반장으로 부르는 거잖아.
“그게, 겨울방학 시작할 때.”
“응?”
자랑은 아니지만, 과보호 엄마의 극성덕분에 무려 오자 and 야자를 뺄 수 있는 대신 이 독서실을 다니게 되었다. 그러면 중간에 한 두 번은 만나야 되지 않나?
“난 그전부터 끊었는데? 왜 그동안 못 만났지?”
잠깐, 설마 그건 아니겠지? 제발 내 예측을 배신해줘. 자화수.
“끊고 까먹었어. 에헤헤.”
배신해달라니까!

사각사각.
샤프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 뒤로도 잡담을 좀 나누다가 금세 공부로 집중했다. 자화수는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았다. 자기가 앉으려고 한 자리에 벌써 누가 앉아버렸다고 한다. 이젠 안쓰럽기까지 하다.
슥.
독서대간의 차단막의 위를 넘어 무언가가 내 책상으로 떨어졌다. 종이비행기? 날개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펼쳐봐.’
난 무시하고 공부를 계속했다. 툭. 계속했다. 툭. 계속…. 툭.
우와! 되게 짜증나! 난 처음 온 종이비행기부터 펼쳤다.
‘점심 같이 먹자.’
‘응?’
‘응? 답장 좀 줘.’
‘히잉. 내가 싫은 거야?’
히잉…. 이걸 말도 아니고 편지에 쓰는 녀석이 있을 줄이야. 음? 그러고 보니 왜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얘. 점심 사달라고 그러는 거야? 무섭다. 여자. 이래서 고시생 형이 여자를 안 만나는 거구나. 아니, 없는 거지. 그건.
난 생각을 접고, 맨 처음 종이비행기 뒤편에다가 짧게 편지를 썼다.
‘알았어. 근데 사주진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종이비행기는 내 멋대로 컨트롤하기 힘들다. 앤 어떻게 정확히 내 책상으로 보냈대? 난 그냥 꾸깃꾸깃 뭉쳐서 차단막 위로 휙 던졌다.
툭.
“히야앙….”
맞은 거냐?! 조그마한 앓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부스럭거리며 종이를 펴본다. 잠시 뒤, 종이비행대 5번기가 출격했다.
톡.
정확히 내 책상에 착륙한다. 어떻게 컨트롤 하는 거냐? 난 종이비행기를 펼쳤다.
‘사달라고 안했어!’
그리고 그 밑에는 삐진 표정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입을 주욱 빼고, 이마에 혈관 마크가 하나 있고, ‘뿌우~’란 글자도 있었다. 묘하게 고퀼이다.
자 이제 공부하자. 사각사각. 톡.
이번엔 내 머리 위로 종이 뭉치가 떨어졌다. 이번엔 종이비행기가 아니네, 하고 고개를 드니 자화수자리로 돌아가는 종이비행기가 있었다.
폭격기!? 방금 종이 뭉치 떨어트리고 기지로 귀환하는 거야!? 종이비행기로 가능해!?
‘아까 복수닷!’
음…. 그냥 무시하는 게 낮겠지?
톡. 톡. 톡. 톡. 톡.
종이뭉치가 계속 떨어진다. 펼쳐도 아무 내용도 없다. 무시하자.
슈왕!
뭐야!? 탄도미사일!?
미사일 모양의 종이가 내 책상에 꽂혔다. 정확히 말하면, 앞부분이 구겨져서 꽂힌 모양이 되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책상에 부딪혔다곤 하지만 앞이 구겨질 정도라니, 종이공예로 그런 에너지를 얻을 수 있어? 그 소리는 또 뭐고?
‘하지 마. 공부하자.’
난 황급히 종이에 일곱 글자를 쓰고는 둥글게 뭉쳐서 던졌다.
툭.
“히양… 또야.”
또 맞았나!?
나는 갑자기 등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녹슨 문이 열리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없는 고시생 형이 웃고 있었다.

“으아아. 아파라.”
“괜찮아?”
정오의 분식집. 나는 고시생 형한테 두들김 당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그 형. 분명히 은거고수야. 4시간이나 지났는데도 갓 맞은 듯 따끈따끈하게 아프다. 자화수는 그런 날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 됐다. 됐어.”
“응?”
궁금섞인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자화수를 애써 무시하며, 어깨를 주물렀다.
“그건 그렇고. 너 그 폭격기는 어떻게 한 거야?”
“응? 폭격기?”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며 눈동자 굴리는 거, 다 보인다.
“에헤헤. 그거 그냥 비행기 띄워놓고 손으로 던진 거야.”
“진짜?”
“으…응. 진짜야.”
제발 진짜라고 해라. 눈동자 굴리지 말고. 시선 먼 산 처리하지 말고. 여긴 건물 안이야.
“여기 있다.”
아주머니가 튀김 1인분 섞은 떡볶이 2인분과 김밥 2줄을 가지고 오셨다.
“어묵 국물은요?”
“셀프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종이컵에 어묵 국물을 떠왔다. 분식 먹는데 이거 없으면 안 되지.
“그래. 먹자.”
“응!”
뭘 또 그리 금세 헤실헤실하는 건데. 헤실이 반장.
“근데, 점심은 왜 같이 먹자고 한 건데.”
별 생각 없이 묻는 말에 자화수는 ‘나 놀랐소!’ 하고 광고라도 하듯,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흠칫했다.
“응? 아니, 뭐. 아는 사람이 있는데. 뭐. 한 번 말할 수도 있잖, 있잖아.”
“그런 이유라면 왜 당황하는 건데?”
“응? 그러네. 헤헤.”
“여전히 헤실헤실.”
“우우.”
김밥을 집으며 볼을 부풀리는 자화수. 그러면 입안으로 넣기 힘들 텐데.
“나, 남이야! 헤실헤실하든.”
자화수는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르더니 옆에 있는 컵에 손을 대, 벌컥벌커… 야! 그거 어묵 국물이야!
“푸헷! 콜록콜록! 뜨러라.”
“말 정돈 제대로 해.”
물통에서 빈 잔에 물을 따라서 자화수에게 건넸다. 자화수는 데인 입을 찬 물로 식혔다.
“진열이 땜에 혀 데였어.”
낼름하고 혀를 내미는 자화수. 분명히 혀에는 조그마한 기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되게 까끌까끌하겠네.
“왜 나 때문인데?”
“어묵 국물 떠온 건 진열이고, 나 놀린 것도 진열이고.”
“하지만, 마신건 너지.”
물기어린 눈으로 째려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고. …분명히 잘못한건 없지만. …왠지 찔리긴 하지만!
“아파라.”
파우치에서 조그마한 손거울을 꺼내 혀를 보고 있는 자화수. 그런 자화수에게 난 말했다.
“자화수.”
“왜?”
“미안한데.”
“흥.”
“떡볶이의 어묵. 다 먹었다.”
“꺄악!”

점심을 다 먹은 뒤에는 캔 커피를 사 줬다. 어쨌든 혀 데였으니 위로금 명목이랄까. 자화수는 ‘헤헤.’하고 웃으며 손바닥에 캔 커피를 비볐다. 안 차갑냐.
“일부러 찬 거 샀는데. 안 차가워?”
“차가워.”
“그런데 왜 손에 비벼. 뜨거운 거라면 몰라도.”
“진열이가 사준 거잖아.”
어라? 자화수. 설마? 에이. 말 그대로 설마 자화수가 날 좋아할 리가. 나 도끼병 없는데 왜 이러지?
“그만 좀 헤실 거리지?”
“그럼 진열이는 그만 좀 놀려.”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헤실 거리고 있다. 뭐 어떻게 된 근육구조냐.
편의점에서 나오자 결국 자화수는 캔 커피에서 손을 뗐다. 차갑기 때문이다. 편의점 안에서야 차가운 캔 커피를 비비적비비적 거릴 수 있어도 아직 추운 2월에 캔 커피를 바깥에서 맨손으로 들고 있기엔 힘들기 때문이다.
“에휴.”
내가 지금 같은 반 친구를 보는 거냐, 애를 보는 거냐?
자화수는 작은 크로스백에 캔 커피를 넣었다. 안 마셔? 자화수는 핸드폰을 꺼내 보더니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
“? 왜?”
“아무것도.”
베시시 웃으며 날 보았다. 뭐지?

오후 공부가 시작되었다. 오전에 수학 문제집을 겨우 끝냈다. 보통은 오전에 두세 과목은 끝내는데. 자화수의 방해 때문이다. 영문 자습서를 펼치고 한창 번역에 몰두하고 있을 때 비행기가 날아왔다.
툭.
펼쳐봤다. 아무 것도 써져있지 않았다.
툭.
펼쳐봤다. 앞뒤로 봤다. 아무것도 써져있지 않았다.
툭.
펼쳐봤다. 앞뒤로 봤다. 햇빛에 비쳐보았다. 아무 것도 써져있지 않았다.
툭.
펼쳐봤다. 앞뒤로 봤다. 햇빛에 비쳐보았다. 연필로 스크래치 해보았다. 아무 것도 써져있지 않았다.
툭.
펼쳐봤다. 무언가 써져 있었다.
‘일부러 무시할 거 같아서 앞에 것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지롱.’
…본론은?! 기승전병이냐?!
화가 난 나머지, 난 모든 종이를 뭉쳐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재활용하지 못하게끔. 다시 책상에 앉을…. 어느 사이에 또 종이비행기 하나가 착륙해있냐.
펼쳐봤다.
‘저녁에도 같이 가자. 나 5시 쯤 가.’
…헤실이 반장의 부탁이니 같이 갈까. 난 조금 빨리 들어갈 거라는 문자를 엄마에게 날렸다.

5시가 되자, 자화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갔다. 나는 황급히 핸드폰 시계를 보고 짐을 챙겼다. 출구로 나가자 고시생 형과 자화수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라?”
고시생 형이 의아하단 눈길로 날 바라보다 자화수를 보고는 납득했다.
“이 녀석.”
고시생 형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아파요. 엄청! 굉장히!
“진열아, 가자.”
자화수는 내 손을 이끌고 나갔다. 야, 아파. 왜 이렇게 세게 잡아당겨?
독서실을 나가고 자화수와 내가 들어간 곳은 유명 커피전문점이었다. 자화수는 카운터에 서서 말했다.
“프렌치 초콜릿 라떼 두 잔이요.”
“네.”
“아, 휘핑크림 얹어서 주세요. 둘 다요.”
“1만2천원입니다.”
“여기요.”
내가 뭐라 말하거나, 제지할 틈도 없이 자화수는 내 몫까지 주문을 마쳤다. 난 초콜릿 라떼 같은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전자 부저를 받아온 자화수는 한쪽에 있는 2인용 테이블에 앉았다. 나도 정면의 자리에 앉았다.
“나 별로 단거 안 좋아 하는데. 게다가 적어도 내건 내가 계산하는게….”
“나중에 다 말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봐.”
얇은 검지를 자기 입술 위에 가볍게 댄 상태로 왼쪽 눈을 찡긋하는 자화수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조금 뒤에 부저가 울렸다. 자화수는 카운터로 갔다. 내가 받아 오려고 했지만, 자화수는 그것마저 제지했다. 이내 자화수는 프렌치 초콜릿 라떼 두 잔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한 잔을 내 앞으로 밀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자, 밸런타인데이 선물.”
“어?”
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뭐? 자화수가 나에게 밸런타인데이 선물?
“왜 안 받어? 나 팔 아퍼.”
“어? 응.”
나는 팔을 뻗어 자화수가 건네준 프렌치 초콜릿 라떼를 받았다.
설마? 진짜로? 아니야, 아니야. 나 도끼병 없고, 자화수는 언제나 헬렐레야. 그냥 주는 거일수도 있어. 열도에는 의리 초콜릿이란 것도 있잖아? 비록 진심의 변명이긴 하지만. 악! 더 도끼병 같잖아! 머리아파! 그냥 물어봐?
“맛 어때? 괜찮지? 여기 라떼 종류는 맛있어.”
“으, 응.”
“특히, 이거. 프렌치 초콜릿 라떼.”
나는 빨대로 한 모금 빨아들였다. 달다. 역시 나와 단거는 잘 안 맞아.
이게 아니라, 어떡하지? 내 눈치가 백단이긴 하지만 이런 건 어렵다고! 그냥 물어봐? 진짜? 자화수는 헬렐레니 물어봐도 서로 서먹해진다거나 하진 않을 거 같은데. 그래도 이런 거 묻는다는 거 자체가 인간으로서 최악 아니야? ‘너 나 좋아하지?’ 묻는다는 게. 한 번 더 되새기니 진짜 최악이잖아!
“괘…괜찮네. 고마워.”
“고마워할 거까지야. 헤헤.”
자화수는 웃으며 답했다.
아아, 망했어요. 저 헤실이 반장 때문에 내가 도끼병이 생겼어요. 애초에 밸런타인데이에 여자가 초콜릿을 주는 건 그냥 ‘날 가져요.’ 아니야? 이렇게 덥석 주는 것도 그런 의미 아니야? …진짜 생겼다아아! 어떡하지? 정신과 상담 일요일도 받나? 아니, 지금 저녁이지. 저녁에도 받나? 그게 안 되면 경찰이라도 가야되나? ‘저 도끼병 생겨서 그런데 전자발찌 좀 주세요.’ 라고? 잠깐, 이건 딴 거잖아!?
내가 폭주하는 사이에도 자화수는 초콜릿 라떼를 두 손으로 잡고 조심스레 마시고 있었다. 아까 어묵국물 때문에 생긴 기포 때문에 잘 못 마시는 거 같다.
그 모습을 보고 겨우 진정한 나는 심호흡을 한번 했다. 왜 진정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두 손으로 컵을 잡고 있는 자화수가 귀여워서 그런지도. 그리고 나는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슬쩍 떠보았다.
“근데, 왜?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 주는 건….”
내가 말을 미처 끝내기 전에 자화수가 입을 열었다.
“그야 좋으니까.”
직구냐! 아니, 이거 고백? 고백이야?
“자화수, 설마. 너 나 좋아하냐?”
“엣. 뭐…뭔 소릴 하는 거야! 진열이 설마 나 꼬시는 거야? 에헤~.”
내 말을 장난으로 받아 들였는지 ‘얼레리 꼴레리’를 부르며 장난치는 자화수. 아니 그렇게 치면, 놀림의 대상은 나뿐만 아니라 너도 포함된다만.
중요한 걸 깨달은 난 머리를 싸쥐며 고민에 빠졌다.
어쩐다냐…. 자화수가 날 좋아한다니…. 이거 진짜 어쩌지? 환호해야 돼? 야호! 나 이제 솔로부대에서 제대한다! …근데 어떻게 사귀지? 방금 자화수 반응으로 봐선 내가 고백해도 거절할 거 같은데? 애초에 자신이 누굴 좋아하는지조차 모른다니…. 말이 돼?
“왜?”
자화수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날 좋아해주는 건 진짜 고맙고도 절을 스무 번은 해줄 수 있는 일이지만, 너 자신이 그걸 모르면 어떠하니….
2월 14일.
눈치백단 소년은 자신을 좋아해주는 완전둔감 소녀를 만났다.

1화. 봄방학 중 보충학습.

우성 고등학교. 평범한 공립 고등학교다. 내가 다니기도 하고.
어째서 봄방학에도 보충수업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것도 새 학기 발표를 한 뒤라서 새 반 편성을 따른다고 한다. 뭐야, 정식 수업 시작하기 전에 보충수업으로 친구들 익히라는 거야?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고등학교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월요병의 증상이기도 하지만, 바로 어제의 일 때문이다.
“엿차!”
가벼운 기합소리와 함께 누가 나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보나마나. 휘겠지.
“안녕.”
“역시, 휘구나.”
“즐거븐 월요일 아침부터 와 그리 얼굴이 우그려졌노.”
“즐겁긴 개뿔. 넌 뭐 그리 좋냐?”
“그야, 사랑시러븐 내 아가 새들을 볼 수 있으니 을마나 기분이 좋노.”
이 능력자 녀석. 아니… 이 녀석한테 상담해보면 되지 않을까? 일단 우리 학교에서는 ‘연애 신’으로 통하며, 남녀를 막론하고 하루 3번 휘를 보면 연애 운이 좋아지거나, 고백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설이 나도는데 말이지.
아니 안 돼. 가장 큰 문제는 휘는 입이 은근 가볍다는 것이다. 지킬 건 지키지만, 아닌 건 바로 퍼트려 버린다는 거지. 특히 그들에게 퍼트린다면…. 끔찍하다.
“…진짜 무슨 일, 있냐?”
“왜? 아무 일도 없어.”
일단을 보류해보자.

윽.
교실에 들어서자 바로 자화수가 보였다. 나 너무 신경 쓰고 있잖아. 자화수는 분명히 아무것도 모르고 헤실헤실 댈 텐데. 억울해. 좋아하는 사람이 신경 써야지. 받는 사람이 신경 쓰다니.
“진열아!”
다른 반에서 올라온 여자애들이랑도 신나게 잡담을 나누던 자화수는 날 보고는 활짝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야! 야! 반 분위기 싸해진다고!
자화수는 분명 남녀 모두 문제없이 잘 지낸다.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반갑게 인사하진 않는다.
드륵. 드륵.
걸상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길. 온다. 악마들이! 이번에 유난히 우리 반에 그들이 몰렸다고! 난 재빨리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취하려 했다.
그래, 휘가 잡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미안하네만, 오델 가노?”
…제길. 쌈박질만 해가지고 악력이 장난 아니네.
“자, 그럼 조례 전 축구한판 할까?”
“오!”
반의 남학생들 대부분이 괴성을 지르며 나왔다. 사물함에서 축구화로 갈아 신고는 내가 있는 뒷문으로. 언제 사물함에 축구화 갔다둔거냐. 욱. 컥. 발 밟지 마! 너희들 다 밟고 갈 생각이냐! 거기다가 난 당신들 중 절반이상은 아마 처음 보는데?!
질질 끌려가면서 난 천장의 얼룩만을 세며 조례시간이 어서 오길 기다렸다. 물론, 난 조례시간이 10여분이나 남았다는 걸 알고 있다.

“배신은 곧.”
“방범이다.”
어두운 창고. 운동장 구석에 있는 이 창고는 어째서인지 우리 반의 누군가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 라고 현실도피를 해봤다. 제길. 시커먼 오라를 풍기는 21명의 남학생들. 테니스할 때, 중간에 거는 그물. 그걸로 내 몸을 칭칭 감았다.
“자, 그럼 자화수 친위대 주최 제 21회 청문회를 시작하도록 한다.”
“어느 사이에 20명이 당한거야!?”
무섭다. 자화수가 입학한지 1년 밖에 지나질 않았잖아. 2달에 3명꼴이냐.
같은 반에서 올라온 얼굴이 번들거리는 한 학생. ‘타쿠야’가 이 녀석들을 이끌고 있는 모양이다.
절대 그 일본 배우 ‘기X라 타X야’ 닮아서 붙은 별명이 아니다. ‘(오)타쿠’야. 이게 타쿠야가 된 거다. 라고 현실도피를 해본다.
“피고는 현재 변호사를 선임할 능력이 안 되므로, 국선 변호사를 붙여주겠다.”
“청문회라면서!? 이건 재판이잖아!”
“국선 변호사는 19번 학생이 맡도록.”
“존명.”
“존명?! 문파라도 세웠어?!”
19번 학생. 역시 같은 반에서 올라온 ‘멀대’는 자꾸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천장이 울퉁불퉁해서 일부가 머리에 닿기 때문이다. 얼마나 키가 큰 거냐.
“피고는 4월 2일 오전 7시 29분에 코드네임 헤실이 반장으로부터 인사를 받은 죄를 인정하는가?”
“하겠냐!”
내 외침을 들었는지, 변호를 맡은 멀대가 오른손을 앞으로 힘차게 뻗으며 말했다. 좋아. 저건 역 앞에서 하는 재판의 포즈다! 가라!
“이의 없소!”
“판결. 사형!”
“이의 있어! 내가 잔뜩 이의 있거든! 야! 타쿠야! 멀대! 무시하지 마!”
고함지르는 내 목소리에도 상관없이 그들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야구 배트….”
“축구공….”
“테니스 채….”
이 녀석들. 이렇게 타락한 줄은 몰랐는데….
“흠흠. 잠시 그럼 피고의 변명을 듣기로 하지.”
타쿠야가 날 보며 말했다. 변명이라.
“그게 말이다.”
“음음.”
낌새가 이상해서 난 말을 말았지. 그러자,
“….”
“음음.”
“….”
“그렇군. 사형!”
“들을 생각도 없었던 거냐!”
나는 헐레벌떡 보따리를 풀기로 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 듯.
“어제 내가 독서실에서 자화수를 만났거든.”
“뭐라!?”
이제 내 말을 들을 자세가 되었군.
“그래서 그냥 아는 체 한 걸 거야. 뭐 달리 있겠어?”
“…판결이 애매해지는군. 좋아 배심원제도를 적용하지.”
좋아! 아…. 아니! 그 이전에 다 같은 통속이잖아.
““능! 지! 처! 참!””
능지처참은 양팔다리를 다른 소 또는 말에 묶어서 사지를 찢어버리는 형벌로, 혀균이 받은 벌로 유명하다. 라고 현실도피를 해봤다.
“‘진열대’ 유언은?”
제길. 내 이름에서 따온 진열대. 저 별명 진짜 싫은데 말이지.
“그럼 그걸로 끝?”
“말도 안 꺼냈거든!”
좋아! 조금만 더!
“그럼 한 마디 해봐.”
“…내 승리다.”
“뭐? 무슨…. 제길.”
전교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 조례시작시간인 7시 40분을 알리는 소리다. 살았다.

“어디 갔다가 오는 거니?”
작년에 1학년 수학을 맡았던 수학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던 중 떼거리로 몰려오는 남학생들에게 물었다. 타쿠야가 대표로 말했다.
“축구 좀 하고 왔습니다.”
“1교시 나니까 졸지나 마라.”
“네이.”
별 신경도 쓰지 않고, 고갯짓으로 남학생들을 자리로 가게 만들었다. 수학 선생님은 계속해서 출석을 불렀다.
“자, 다 온 거 같으니 설명하지.”
수학 선생님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반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내가 너희들 담임인 동시에 2학년 학년주임이다.”
“네에!?”
“난다고레!?”
“일본어로 외친 놈 나와.”
누구냐. 처음 보는 애군. 거 참. 센스 있는데. 라곤 해도 교실 앞에서 엎드려 뻣쳐하는 걸 보며 그런 마음도 사라진다.
“그래. 힘들지. 학년주임이랑 담임이랑 같이 맡다니 말이야. 하지만.”
수학 선생님은 남학생들만 골라 노려보면서 말했다.
“좀 말썽부리는 애들을 한 군데 모아놓고 관리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말이야.”
거 참. 좀만 일찍 관리하지요. 그럼 제가 끌려갈 일도 없잖습니까. 어라? 왜 웃고 있지? 뭘 숨기는 거 같은데?
“수업 시작한다. ebx 수학특강 펴. 자, 오늘은 어딜 할까….”
나는 생각을 그만뒀다. 이 수학 선생님은 진도를 랜덤으로 뽑아서 따라가기가 굉장히 힘들다.

“자. 이렇게 해서 x는 7이다. 알겠지? 좋아. 그럼 예시문제 하나 풀어보자.”
칠판에 또각또각 문제와 풀이를 쓰던 수학 선생님이 고개를 돌렸다. 사사삭 눈길을 피하는 학생들. 하지만, 눈길을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수학 선생님이 학생 지목용으로 가장 잘 쓰는 방법은!
“1.”
“2!”
아싸! 살았다! 바로 눈치게임! 선생님이 교탁에 턱을 괴면서, 1을 말하자, 내가 바로 손을 들며 2를 외쳤다. 하하. 이게 바로 나의 눈치! 우성 고등학교 최강의 눈치백단! 우하하!
“3!”
뒤이어서 누군가가 3을 외쳤다. 그러나 그 뒤로는 아무도 외치지 않았다. 당연하다. 한 반에 무려 34명. 굳이 하지 않아도 중간쯤에 자연스럽게 탈락자가 생기게 생겼다.
이 때, 휘가 스윽 주머니에 있던 손을 빼려고 했다. 난 반을 훑어보다가 경악했다. 팟! 재빨리 손을 뻗어 휘의 손목을 잡았다. 휘는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그리고 그 때, 내가 얼핏 본 여학생이 손을 들며 말했다.
“4.”
휘는 날 봤다.
“…일단은 고맙데이.”
휘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난 휘의 손목을 놓았다. 옆에서 휘가 휘파람을 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내가 신호를 하면, 그 때 해.”
“오케오케.”
그 뒤로도 정적이 가득하다가, 무료한 듯 수학 선생님이 책상을 탁 쳤다. 동시다발적으로 이곳저곳에서 살짝의 간격으로 숫자들이 등장했다.
“15!”
잠시의 침묵 후에 던져진 15. 많이 듣던 목소리라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자화수였다. 좋아 자화수도 통과구나.
절반이 가까워지도록 아무도 동시에 말하지 않자, 다급해졌는지 이곳저곳에서 숫자를 외쳐댔다. 금세 30에 가까이 되었다.
“어이어이. 신호는 언제 줄겨?”
“기다려.”
“30!”
누군가 30을 외쳤다. 지금이다! 난 휘의 무릎을 살짝 쳤다. 휘는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31!”
“31!”
…어라? 눈치백단인 내가 왜 눈치를 못 챘지? 말도 안 돼! 31을 같이 외친 학생이 누군지 고개를 돌렸다.
“은영이?”
턱.
아니, 잠깐. 이상하다. 내 눈치에 은영이가 안 걸릴…수도 있겠다. 워낙 조용한 애니까. 근데 일단 내 뒤통수를 잡고 아이언 클로를 먹여주고 있는 휘의 손부터 처리를 하지않으면내머리가너무아파서제대로된사고가안되잖아살려줘살려줘살려줘엇!
“좋아. 이제 끝낫군. 그럼 오늘이 15일 이지. 아까 15말한 사람.”
“네?”
자화수가 귀여운 목소리로 답했… 자화수가 15번!?
“나와서 풀어봐.”
그 사이에 칠판을 지운 수학 선생님은 칠판에 아까의 문제와 비슷한, 그러나 조금 다른 문제를 칠판에 적었다.
“좋아. 풀어보렴.”
“네.”
자화수는 분필을 집어서 공식을 이용해 칠판에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좋아. 정답이다.”
수학 선생님은 자화수의 답을 보고는 말했다.
“일단 안 걸렸으니께. 봐준데이.”
휘는 손을 놓았다. 으아, 악력 엄청 세네. 머리통이 엄청 아파!

점심시간까지 수업은 큰 문제없이 끝났다.
명문은 아니어도 진학교. 슬슬 수능 걱정을 시작하는 고등학교 2학년이다. 수업시간에 까지 장난을 칠 애들은 아니다. …라고 믿고 싶었다. 그냥 수학 선생님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다. 특히 3교시 국어 선생님한테는…. 아오.
근데 진짜 이건 큰 문제가 아니다. 저어쪽에 있는 분께서 자꾸 재앙을 몰고 온다는 것이다.
“진열아. 혼자 먹어?”
우리 학교는 당연히 급식이다. 대한민국에 급식 안하는 학교가 어디 있어? 반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식당으로 내려가 줄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연인지 기어들어왔는지 자화수가 내 뒤에 있었다. 이거 분명 같이 먹자는 건데, 어떻게 거절하지?
“글쎄.”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같은 반이였던 타쿠야나 멀대도 있고 하니 혼자 먹진 않겠지. 휘는 분명 여친들이 싸 준 도시락이나 먹고 있을 거고. 내가 둘에게 눈치를 보내자 둘도 비슷한 눈길을 나한테 보냈다. 음 이심전심.
“혼자 먹진 않을 거 같은데?”
“그렇지?”
자화수는 활짝 웃으며 의문으로 답했다. 왜 웃어? 그리고 잠시 후.
“…….”
내 전방에 타쿠야. 타쿠야 좌측에 멀대. 내 우측에 자화수.
설마 자화수, 내 말을 너하고 같이 앉겠다는 걸로 해석한 거냐! 제길. 내 불찰이다. 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공기를 어떻게 하지?
“어…. 자화수?”
“응? 왜? 진대야.”
이제 밝혀진 사실! 타쿠야의 이름은 진대였다! 하지만 난 타쿠야가 더 익숙해.
“그러니까, 음. 왜 진열이랑 않는 건데?”
“그럼, 진대나 연성인? 그냥 친구니까 앉는 거잖아.”
멀대의 이름은 연성이었군.
“그야 그렇지만…. 다른 친구들도 있잖아?”
“아무 친구나 앉는 거지. 뭘.”
자화수의 말에 타쿠야나 멀대는 벙 찐 표정을 지었다.
“그…그렇구나.”
그리고 곧 고개를 들어 날 본 두 녀석. 우왓! 피눈물을 흘리냐! 내가 뭘 그리 심한 짓거릴 했다고!
주로 자화수가 떠드는 소리와 내가 받아주는 소리. 두 소리를 제외하고는 조용히 식사가 끝났다.

“잡아!”
내가 자화수랑 사귀기라도 하면 몰라! 그냥 같이 밥 한끼 먹은 건데 되게 신경질 부리네.
잠시 회상하자면, 나는 식판을 놓자마자 타쿠야의 배에 스트레이트 펀치를 먹였다. 타쿠야는 당연히 휘청거렸고, 뒤에 있는 멀대쪽으로 쓰러졌지. 그 틈을 타서 대쉬! 했지만 추적이 따라 붙어서 이리저리 도망치는 중이다.
“어디 있나! 감히 헤실이 반장이랑 같이 밥을 먹은 죄! 단죄하리다!”
잠깐. 뭐라고? 같이 밥을 먹은 죄? 아니 그렇게 치면 타쿠야나 멀대도 같이 먹은 거잖아! 좋았어. 이거다!
“잠깐잠깐잠깐!”
나는 방수함 안으로 압축하기한 몸을 압축해제하며 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다행히도 내 목소리의 박력 때문인지 모두 움찔하며 몸을 멈췄다.
“뭐냐! 진열장! 변명이라면 듣지 않는다!”
“헤실이 반장이랑은 타쿠야나 멀대랑도 같이 먹었어!”
……. 조용해졌다. 친위대의 집행부원들을 경악의 눈으로 타쿠야와 멀대를 바라봤다. 누가 봐도 명백히 당황한 얼굴. 증거다.
저 애 누구더라? 유난히 분노한 얼굴을 가진 한 학생이 외쳤다.
“친위대 집행부장의 이름으로 배신자를 처벌한다! 가자! 정의의 전장으로!”
여기서 모 가상 국가의 이름을 안 외쳤다는 점에서 정상으로 봐야겠지? 응. 그럴 거야. 아차차. 이 틈에 도망을.
“그 쪽의 배신자께선 어딜 가시나?”
뒤돌아보면서 고개를 모로 꼬는 고등스킬을 발휘 중이신 집행부장. 인류의 목구조로 가능해!? 뭐야저거무서워어머니아버지조상님살려줘요!
난 뒤돌아보지 않고, 당장 내 뒤로 이어진 복도를 달렸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면서도, 내가 기대고 있는 코너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지 확인해… 우홧!
갑자기 등 뒤가 사라지면서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벽이 아니라 문이었던가! 제길. 소리가 안 나게 낙법을….
취할 수가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 그냥 뒤로 넘어지는 것이다 보니 반응속도가 느렸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움직임을 멈춘 것은 다른 것이었다.
이상향이 펼쳐져 있었다.
흠흠. 객관적으로 상황판단을 해보자. 우선 내가 기대고 있던 문. 이게 열렸다. 우리학교는 흔해 빠진 공립. 미닫이 문이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열었다는 게 정답이겠지. 그럼 교실 안에 있겠지. 그 상태에서 내가 뒤로 넘어졌다. 그럼?
그 사람 다리 사이로 내 머리가 위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추가로, 여자라면?
이상향이 펼쳐지는 것이다.
치마를 뚫고 미약하게 들어오는 햇살. 그것에 의해 검은색 스타킹으로 가려진 미끈한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쭉 뻗은 다리는 색은 다를지언정 신전의 기둥을 연상시킬 정도로 장엄함과 신성함을 보여준다. 그 다리를 따라 올라가면 기름진 삼각주가 펼쳐져있다. 팬티스타킹인 듯 엉덩이까지 이어진 스타킹은 속옷의 색깔을 쉬이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잠깐!? 나 어서 비키지 않고 뭐하는 거지!?
“어머어머? 난감해라.”
이 느긋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학생회장!? 난 놀래서 벌떡 일어났다. 근데 잠깐. 아까의 그 포지션에서 내가 별다른 행동 없이 바로 일어서려 하면….
머리가 치마 속에서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읍!?”
기름진 삼각주가 얼굴 정면을 파고들었다. 양쪽 볼은 회장의 보드라운 허벅지에 감싸여있다. 부드러운 나일론 재질의 스타킹은 회장의 체온은 얼굴에다가 전달해주고 있었다. 따듯하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보름달처럼 둥그스름한 회장의 엉덩이. 가까이서야 보이는 하얀색 속옷은 꽉 잡고 있는 검은색 스타킹으로 인해 안에서 주름이 져 있었다.
“어머어머. 이러면 안 돼. 어서 나오렴.”
“우왓.”
난 당황해서 뜨거운 숨을 뱉었다.
“아, 그렇게 하면. 아앙!”
내 뜨거운 숨 때문인지 회장이 탁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러니까 내가 굉장히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거 같잖아! 해선 안 될 짓을 하고 있는 건 맞지만.
당연히 나는 숨을 쉬기 위해서 숨을 내뱉고, 그것으로 인해 회장은… 생각하지 마! 무념무상!
“으응! 아. 저기…. 좀 나와 줄래?”
“아. 죄송합니다. 그만 나올게요.”
“아앙! 그래그래.”
나는 치마 속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떻게 나와야 되지? 아무래도 손을 써서 나와야겠지?
“회장님? 죄송한데 손을 좀 쓸게요.”
“그래그래.”
그나마 느긋하시고 대인배이신 학생회장이라서 다행이다. 아니면 큰일이 나도 벌써 났겠지. 나는 두 손을 이용해서 학생회장의 치마를 잡고 들쳐서 얼굴이 빠져나올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얼굴을 뒤로 젖혔다.
“…….”
자, 아무래도 이 장소는 학생회실인 것 같다.
그럼, 학생회장이 있으면 당연히 부학생회장도 있겠지.
그 부학생회장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경멸가득한 눈으로.
다시 한 번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자. 부학생회장의 위치는 내 뒤. 그러니까 복도다. 어쩌면 외부의 일을 마치고 다시 학생회실로 들어오려던 중인 것 같다. 그리고 내 위치는? 학생회실 입구에서 회장님의 다리사이에 주저앉아서 회장님의 스커트를 들추고 기름진 삼각주 바로 앞 부근에 얼굴을 위치시키고 있다.
객관적으로 변태다!! 난 얼른 무릎걸음으로 빠져나와 일어섰다. 무릎은 털고. 탁. 탁.
“우왓, 아니. 부회장님! 이건 사고입니다. 사고.”
“그렇구나. 사고야?”
부회장은 침착하게 내 눈을 바라봤다.
“네. 사고예요.”
“좋아. 사고가 일어나면 경찰에 신고해야지. 번호가?”
“잠깐만요. 웨이런 미닛! 핸드폰을 왜 꺼내세요!?”
“사건 신고는 경찰번호 112”
“아녜요. 경찰번호는 131입니다.”
“그래?”
갑자기 칼 같은 날카로움이 눈에 깃들었다. 우와. 살벌하다.
“네, 그거 기상일보 번호예요. 장난 좀 쳤어요.”
부회장은 손에 있던 핸드폰을 내 얼굴로 던졌다. 크악! 데드 볼! 데드 볼! 1루 진출!
“아야야! 왜 던지세요!”
“변태!!”
갑자기 매도당했다.
“자자. 윤정이도 그만두고.”
신기하다. 그 흉포한 부회장이 회장의 말에 조용해졌다.
“그래서… 음.”
회장은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내려서 내 가슴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저, 회장님?”
내가 반걸음 물러서자, 회장은 금세 날 나무라며 어깨를 잡아 고정시켰다.
“가만히 있으렴. 옳지옳지.”
나, 애완견? 잠시 현실도피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회장의 얼굴은 점점 내 가슴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지그시 노려봤다. 잠시 후 활짝 웃는 얼굴과 함께 허리를 편 회장이 말했다.
“그래그래, 진열이구나. 난 회장인 성 지수. 저쪽은 부회장인 이 윤정이야.”
손을 앞으로 해서 맞잡은 회장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항상 웃고 있는 저 천사표 미소. 머리에는 직접 짠 흰색 털실베레모가 포근하게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문 자화수와 함께 우성고의 양대 천사라고 불리는 지수 선배다. 자화수가 특유의 백치 끼로 인기가 있다면, 지수 선배는 이지적인 이미지와 화를 내지 않는 느긋한 성격으로 인기가 있다.
“미안미안. 내가 근시가 약간 있지만 안경을 안 쓰거든.”
고개를 돌려 부회장을 바라봤다.
“…….”
일단 주인의 만류에 진정은 했지만,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물어버릴 것 같은 불독의 기세인데?
윤정 선배. 똑 부러지는 성격으로 조그만 실수 때문에 이번년도 선도부장이랑 회계, 서기 두 명을 해임시켜버린 일은 유명하다. 그럼에도 학생회가 문제없이 운영되는 이유는 공석이 된 자리의 업무를 윤정 선배가 다 해치워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미롱 펌의 머리카락은 가슴께에서 부드럽게 말려있어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경계심 가득한 얼굴은 그 굳은 표정과는 별개로 굉장히 아름다웠다. 선이 살아있다고 해야 하나. 얼굴에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가냘픈 인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의 몸매에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역시 허리도 가냘픈 덕분에 크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평균정도인 지수 선배나 자화수에 비교해도 보이질 않는 가슴 때문이다.
“봐. 지수야! 지금도 이 변태는 날 쳐다보며 온갖 망상을 펼치고 있잖아! 어서 신고해야 돼!”
아직도 오해하고 있다. 윤정 선배의 외모를 하나하나 뜯어봤을 뿐인데.
“어머어머. 진열아. 진짜니?”
“아니요. 저는 전혀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는데?”
웃으면서 윤정 선배를 바라보는 지수 선배에게 윤정 선배는 발칵 화를 내었다.
“범죄자가 자기 죄를 시인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자수범.””
내 말과 지수 선배의 말이 겹쳤다. 지수 선배는 날 바라봤다. 나도 지수 선배를 바라봤다.
“어머어머. 너. 나랑 코드가 잘 맞을 거 같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회장님.”
“그냥 이름 부르렴. 진열아.”
“아, 그럼…. 지수 선배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래그래. 아, 윤정아?”
둘의 합동공격과 이어진 둘만의 대화에 잠시 아웃 오브 안중이 되었던 윤정 선배가 지수 선배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응? 왜? 이제 저 변태를 신고하려고?”
왜 자꾸 날 보고 변태라고…. 들을 만 한 일을 하긴 했구나.
“아니아니. 우리 학생회 서기 자리가 비었잖아? 진열아, 너 학생회 서기 안할래?”
“반대반대반대반대앳!!”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달려와 지수 선배와 나의 사이를 가로막는 윤정 선배. 뭐,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제 자식도 아니니 이제 그만 제 가슴에 대못을 박지요?
“이런 성범죄자예비바바리맨귀축변태랑은 절대 같이 일 못해요!”
그렌X간!? 당신은 지금 내 가슴을 돌파했어!! 천X돌파했어!!
“어라어라? 진열이 운다. 봐봐. 진짜 울겠어.”
“흥! …진짜?”
“아니♬”
“지수야!”
“자, 자. 봐.”
지수 선배는 윤정 선배의 얼굴을 잡고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치게 했다.
“윤정이가 봐. 거짓말을 하는 눈인지. 진열아.”
“네?”
난 눈동자만 굴려서 윤정 선배에게서 지수 선배로 옮겨 봤다.
“진열이는 윤정이 보고.”
“네.”
지수 선배가 다시 말했다.
“너 윤정이가 말한 대로 변태니?”
“아니요.”
사고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원래 사춘기 남학생이 관심이 있는 건 당연한 거지만. 이건 확실히 아니다.
“음.”
내 눈을 보고 계신 윤정 선배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알았어. 변태라고 해서 미안해. 근데.”
윤정 선배는 다시 눈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까 내가 본 장면은 도대체 뭐지?”
“그건….”
“그건?”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같은 반의 여자애랑 같이 밥 먹은 거 때문에 반 친구들한테 쫒기다가 이곳까지 와서 벽에 기대고 있었는데 그게 벽이 아니라 문이어서 지수 선배가 안에서 문을 열다보니 내가 쓰러지면서 치마 속을 보게 되었고, 당황해서 자세를 바꾸는 일 없이 그대로 일어나다가 얼굴을 기름진 삼각주에 파묻게 되었다.
기승전병도 아니고, 병병병병이잖아! 이걸 누가 믿어!
“어머어머? 그거 내가 부탁했어.”
“네?!”
“지수야!”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금지.”
“윽.”
누가 봐도 명백히 거짓말을 하는 지수 선배를 노려보는 윤정 선배. 셀프로 눈싸움이 전개되었다. 윤정 선배가 한숨소리와 함께 어깨를 으쓱하며 지수 선배의 승리로 끝났다.
“알았어. 알았어. 그래도 말이야.”
“윤정이는 태클이 너무 많아.”
“가만 들어봐. 지수야.”
윤정 선배는 나와 지수 선배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학생회 서기로 임명하는 건 재고해.”
“그렇지만, 일도 많고.”
“내가 다 처리할 수 있어. 딱히 손이 더 필요하진 않아. 오히려 방해야.”
본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당신은 방해라는 소리를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중 한명이니 운이 좋다고 생각해도 되지? 되는 거지? 훌쩍.
“능력문제가 아니더라도. 학생회가 윤정이랑 나, 둘 뿐이야. 나 엄청 심심하다고. 윤정이가 일 나가면 혼자서 컴퓨터 키보드나 타닥타닥. 궁상맞게 타닥타닥. 창밖으로 친구들끼리 즐겁게 돌아다닌 걸 보며 쓸쓸하게 타닥타닥.”
“지수야…. 왠지 내가 외부 일을 나가있을 땐, 작업 속도가 느리더니 그거 때문이었어?”
“어머어머. 작업은 제대로 해. 그래도 혼잔 심심하단 말이야.”
“그래도 안 돼.”
진심으로 남간하단 표정으로 검지를 입에 대고 고개를 모로 꼬는 지수 선배를 윤정 선배는 무시했다. 그러나 무시한다고 할 말을 안 할 지수 선배가 아니다.
“그럼그럼. 어쩔 수 없지. 진열아.”
“네?”
“학생회 서기 해.”
“지수야, 내 말….”
“이건, 명.령.명.령.”
방긋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지수 선배한테 윤정 선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기… 제 의견은 안 물어보는 건가요?”
“글쎄?”
끝까지 웃음으로 답하는 지수 선배였다. 그때 학교 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이 울린 것이다.
“자자, 우리는 학생이잖아? 제대로 수업 들어야지.”
왼팔을 하늘 높이 뻗으며 말했다.

“너…. 어디 간 거냐?”
타쿠야가… 아니, 말을 말자. 타쿠야가 날 보며 따졌다. 멀대도 마찬가지. 피곤과 짜증으로 얼룩진 얼굴로 날 노려봤다.
“당연히 숨어있었지.”
“친구를 파니 좋디?”
“먼저 판 건 누군데?”
나는 따지듯이 말했다. 타쿠야나 멀대는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 때, 누가 내 뒤에서 등을 툭 쳤다.
“뭐 하노? 종 칫다. 들 가자.”
“휘, 넌 어디 가있었냐?”
“나? 아들이 만들어준 도시락 까묵고 있었제. 마 한 아는 주먹밥을 뭉텅으로 해가지고 먹기도 힘들고 말이제.”
“그래그래.”
교실에는 아직 5교시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이다. 자리에 앉은 나는 머릴 감싸 쥐었다. 우와. 이걸 어떡하지. 학생회 서기? 그거 농담이겠지? 굉장히 아쉽게도 나 그런 거 할 정도로 능력 있지 않는데?
“진열아, 어디 아파?”
교실 뒤 사물함에서 참고서를 꺼내던 자화수가 내 자리에 와서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물어봤다. 맞다. 자화수 문제도 있었지?
“아니야.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 거야.”
“그래? 몸조심해. 다치면 안 돼.”
그렇게 말하곤 뒤돌아서 자리로 돌아가는 자화수. 응? 왜 다시 돌아서 와? 뭘 따지려는 표정인데?
“깜빡했어.”
“뭘?”
“하나 말해줄게 있는데.”
자화수는 허리를 굽혀 앉아있는 나와 눈을 마주친 상태로 말했다.
“친구를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
“응?”
친구? …식당에서 타쿠야의 배에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린 거 말하려는 건가?
“나, 실망이야.”
“아. 그건.”
타쿠야와 멀대가 당황해서 변명하려고 한다. 그야 그렇지. 그렇게 세게 때린 것도 아닐 뿐더러, 남자애들 사이에선 당연한 거랄까?
“진대는 가만히 있어. 나 진열이 그런 애 인줄은 몰랐어. 진짜 실망이야.”
“오호.”
휘는 웃음진 채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었다.
“저기, 자화수? 그거 별거 아니야.”
타쿠야가 뭐라 말을 하지만, 자화수는 들으려하지 않았다.
“나 진열이를 좋게 보고 있었는데.”
우와. 이거 진심인데? 어떡하지? 뭘 어떻게 해명해야 하지? 너랑 같이 앉은 거 때문에 이런저런 일이 일어났다고? 그게 사실인데 그 누가 믿겠어.
그때, 타쿠야가 나와 자화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화수. 그거 아니야. 진열이는 그런 애가 아니야. 그건 내가 보증해.”
“그렇지만….”
“그때 진열이가 날 때린 건….”
“때린 건?”
자화수가 꽤나 큰 목소리로 말한 덕택에 반 전체의 이목이 이쪽으로 몰려 있었다. 원래 잘 나서지 않는 소심한 성격인 타쿠야는 시선을 보고 주눅 든 게 뻔히 보인다. 우와. 되게 미안하다. 그리고 엄청 큰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내가! 때려달라고! 한! 거야!”
“…….”
반은 경악으로 술렁거렸다. 하지만, 난 살짝 감동했다. 친구를 위해 M선언을 하다니. 난 멀대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의 눈에선 진실을 아는 자의 고뇌가 그대로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반 남자애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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