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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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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내게 여자친구가 없는 이유
글쓴이: 일락
작성일: 12-02-15 23:55 조회: 4,154 추천: 0 비추천: 0

0.

고지율은 여자애였고, 그래서 나는 그 애와 이야기조차 나눠본 적 없었다. 뜬금없지만 이것만큼은 말해야겠다. 하늘에 맹세코 난 지금까지 그 애에게 지탄 받을 만할 행동이나 경멸의 대상이 될 짓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그 애의 이름이나마 알고 있는 것도 지나가다가 남자애들이 이야기하는 걸 흘려 들었을 뿐이었다. 2학년 여자애들 중에 유명한 연예인 중에 누군가를 닮은 여자애가 있다고 하기에, 이따금씩 멀찍이서 흘깃 보고 ‘아, 저 애가 바로 그 애구나.’하고 확인해 본 정도였다. 작고, 갸름하고, 단발로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어울리는 그 얼굴은 확실히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닮아 있긴 하던데. 키도 크고, 팔다리도 늘씬해서 예쁘더라- 그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거기에 나뿐만이 아니라 그 애에게 더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녀석들까지, 정작 그 애와 몇 분 이상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다.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어딘가 우울한지 항상 눈매가 축 쳐져 있다든가, 말 수가 극도로 적다든가, 여튼 홀로 고독하게 서 있는 인상이었다. 다가가기 힘들어서 저 애 친구는 있는 걸까 의심들게 만드는 그런 여자애였다. 친한 애들한테 공공연히 그 애랑 사귀고 싶다며 떠들어대는 남자애들조차도 다가가기 힘들어 하는데, 딱히 그 애한테 관심도 없었던 나는 오죽할까. 아예 접점조차 없었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본관 4층 전산실 앞의 좁은 복도에서 그 애와 마주쳤을 땐 오히려 내가 더 긴장했다. 딱히 그 애라서가 아니라, 그냥 여자애들과 마주치면 기분이 나빠지는 내 성격 때문이었다. 여자애들 앞에만 서면 이런 저런 잡다한 걱정 때문에 위장이 상할 것 같았다. 아침에 늦잠을 자버리는 바람에 아침도 대충 먹다시피 하고 왔는데, 머리라도 삐친 건 아닐까? 눈가가 간지러운데 눈꼽 붙은 거 아냐? 그러고보니 나 양말은 제대로 신었던가? 아, 이마에 여드름 났는데… 혹시라도 그 애가 날 보고 속으로 흉이라도 보면 어떡하지?
그러니 여자애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저절로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면서 손에 땀이 가곤 한다. 기분 나쁘잖아. 내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기분이 들어야 하는 거야. 그런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고지율과 마주치자마자 나는 최대한 눈에 안 띄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혹시라도 그 애가 속으로 내 흉을 보는 일이 없도록, 아예 나를 의식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빠르게, 하지만 그 녀석이 눈치채지 못 하게끔 스쳐 지나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애는 날 보자마자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그런 소리를 냈을까.
“흐이이익!”
만화처럼 눈 앞에 대형 글자조각이라도 나타나서 내 머리통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히이이~’같은 백치미 있는 웃음 소리도 아니고 ‘히.’같은 장난끼 어린 웃음 소리도 아니었다. 물론 영어로 he도 아니었고 heee?도 아니었다. 그건 분명히 비명소리였다. 겁에 질렸다기보다는 뭔가 역겨운 것을 보았을 때 내는 반응 같은 것이었다. 제정신으로 못 볼 광경을 보았다는 듯, 급격하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였다. 듣기만해도 가슴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될것만 같은, 그러면서도 약간 귀엽게까지 느껴지는 비명소리였다.
“에?”
‘응?’과 ‘왜?’가 동시에 나오려다 목에 걸려 이상한 소리가 났다. 오히려 내가 ‘히이이이익!’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애가 나를 보는 시선은 무시무시했다. 여고에 나타난 바바리맨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래, 마치 변태를 보는 눈이었다. 아침부터 난 변태 취급 당한 것이다.
황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 애한테 이상한 변태 취급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일단 사과부터 해야 되나? 하지만 왜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이야기는커녕 얼굴 맞댄 적조차 없는 여자애에게,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비위 상하게 해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고지율은 계속 나를 바라보며, 복도 벽에 찰싹 달라붙어 걸어갔다. 마치 내게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걸어다니는 방사성 물질이었던가, 오히려 내가 화날 정도로 어이없고 노골적인 행동이었다.
“저, 잠깐만...”
말싸움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소리 해야되지 않을까 싶었다. 초면에 너무 심하잖아. 나는 그 여자애를 불러 세우려고 했다. 내가 결백한 이상, 겁낼 이유가 없다. 없지.
“…”
없을 터인데. 고지율이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니, 괜히 내가 더 움츠러들었다. 아니, 이래서야 내가 변태라고 스스로 입증하는 꼴이다. 그래도 역시 눈이 마주치는 건 무서우니까 적당히 그녀의 이마에 매달린 수수한 머리핀을 바라봤다. 하얗고 조그마한 리본이네. 수수한 편이구나.
“에, 그러니까…”
하지만 고지율은 애초에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모양이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지율은 고개를 휙 돌리더니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한시라도 빨리 나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는지, 여자애치고는 꽤나 큰 보폭으로 빠르게 걸어 계단으로 내려가버렸다.
나는 반쯤 뛰어가는 그 여자애의 뒷모습을 보며,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고민해야 했다.



1.
학생회장의 얼마 없는 특권 중에 하나를 소개하자면, 학생회 회의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서 지루하고 졸리고 짜증나는 아침 0교시 보충수업을 빼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작 학생회실에서 학생회 회의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매일 ‘열정적으로’ 학생회 회의를 해야 하는데 그 안건 소재를 어떻게 다 충당하겠냐 이거지.
어쨌거나 나는 그 소중한 특권을 사용해서 서예리를 꼬셔내는 데 성공했다. 학생부회장 겸 총무 겸 기획부장을 맡고 있는 그 조그마한 계집애를 불러다가, 커다란 6인용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보게 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제서야 안심이 좀 되었다. 예리는 아는 것도 많고 꽤나 똑똑한 녀석이기도 했지만, 내가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애이기도 했다. 그 능력에 기대어서 내 고민을 털어놓을까 했는데, 예리는 내 고민을 꽤나 재미없는 농담 정도로 들었던 모양이었다.
예리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정말 황당해 해야 될 사람은 나다. 방금까지 이야기를 잘만 듣고 있던 녀석이 내가 어떤 질문을 하자마자 갑자기 못 들은 척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 들었냐? 이해갔지?”
내 확인에 예리는 아무 말 없이, 비쩍 말라서 뼈가 다 드러난 손으로 머리를 매만질 뿐이었다. 삐죽삐죽 제멋대로 솟게 놔둔 머리카락에 갑자기 없던 관심이라도 생기셨나. 때 늦은 손빗질이나 하고 있는 예리가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빨리 대답을 말해.”
“대답이라니?”
“못 들은 척 하지마.”
하지만 어쨌거나 내 주변에 아는 여자애라고는 이 녀석밖에 없으니, 여자애의 심리 같은 걸 물어보려면 어쩔 수 없다… 배알이 꼴리지만, 비리비리하고 푸석푸석하고 아사한 귀신같은 요 빌어먹을 녀석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 내게 여자친구가 없는지는 나중에 한탄하더라도.
“음? 아니아니, 못 들은척 하지 않았도다? 물론 들었지…도다?”
하지만 예리는 슬쩍 내 눈길을 피하며 대답을 얼버무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 거슬렸다. 그렇게 좋아하는 옛날 사극 말투마저 살짝 어그러질 정도로 동요하고 있는게 분명한데. 나는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상처 받았다.
할 수 없지, 나는 다시 한번 기를 모아서, 내게 정말 중요하고 꼭 알아야 하는 질문을 예리에게 던졌다.
“내가 그렇게 못났냐?”
“…”
“…”
예리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민망한 시간이 몇 초동안 흐른 것 같다. 그 동안 예리는 책을 두 페이지나 읽었고, 나는 옆에 서서 그 장면을 쭉 지켜보았다. 시계 바늘은 짤깍짤깍 소리를 내면서 움직였고 어느 선생님인지 모를 우렁찬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끊어진 듯이 속이 부글부글 타올랐다. 적당히 폭발하기 직전에, 예리는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뭐, 그렇게 뻔뻔하게 물어보는 회장은 못났네만.”
“생긴 건?”
“회장이여. 외모란 부질 없는 것이도다. 나를 보아라. 비록 이렇게 비쩍 말랐고 볼품없어 보여도 실속 있는 여자이지 않은가?”
“볼품없다고 자각은 하고 있냐?”
“물론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도다.”
빼빼 마른 손으로 아무 굴곡도 없는 가슴팍을 퉁퉁 치며 잘도 그런 소리를 한다. 지방인지 DHA인지 하여튼 영양소가 심각하게 부족한 게 틀림없다.
“예리, 난 지금 진지하다고.”
“우연이군 회장이여. 나도 진지하도다.”
“아니, 넌 진지 좀 먹어야겠다.”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봐, 여자애가 너랑 마주치더니 잔뜩 인상 찌푸리면서 도망쳐버리면 기분이 어떻겠어?”
“그런 경우는 흔하도다. 별로 와 닿지 않도다…”
급 우울해지는 예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이 녀석이 그야말로 ‘귀신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속마음이 여린 거야 인정하긴 싫지만 알고 있어도, 비쥬얼적으로는 그로테스크한 녀석이었다. 그로테스크보다는 호러틱하다고 해야할까. 외국이라면 할로윈데이 같은 날에 사탕 깨나 얻어먹게 생긴 녀석이다. 이마에 저절로 손이 올라갈 만큼 안타까운 일이다. 근데 난 아니거든!
“너야 그러겠지. 근데 난 너처럼 귀신이 아니라고. 난 사람이니까 상처받는단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회장의 몰염치한 말투는 필히 고쳐야겠도다.”
그 되도 않은 사극말투부터 고쳐야지.
말은 점잖은 척 하지만 잔뜩 삐친 게 분명한 표정을 지으면서, 예리는 나를 노려보았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놀랍도록 흐트러진 모습이 없는 정자세다. 그 모습이 또 지박령같다. 원한이 아주 제대로 박혔나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띠꺼운 말투로 괴롭히는 데, 다른 여자애들이 질려하면서 피할 만하지 않는가.”
“아, 그런 거냐. 그럼 계속 그래야 너도 내가 무서운 줄 알겠구나.”
“나를 다른 여자애들과 같은 사람이라 보면 안된다네. 회장이여.”
“애초에 여자라고 본 적도 없느니라. 귀신이여.”
“그런 말을 하니 여자친구가 없는 게로다. 나로서는 기쁜 일이지만.”
“악담을 퍼부어라 아주 그냥.”
예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여자애치고는 꽤나 개성적인 웃음소리다. 당연히 좋은 의미는 아니다. 저런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니까 자기도 여자친구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이성친구가 없는데, 예리는 동성이면서 없잖아? 투덜거리려는데, 예리가 선수를 치면서 말을 돌렸다.
“그래서 회장,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가? 그 여자애한테 관심이라도 생겼나?”
“뭐 딱히 그런건 아니다만.”
오히려 관심은 눈을 초롱초롱 밝히는 예리에게 더 있어 보인다.
“아니, 진짜 관심 없으니까.”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대체 내가 왜 그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그 애도, 나도 서로 모르는 사이다. 직접적으로 고지율에게 이상한 짓을 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혹시 내가 못생겨서 그런 건가?
변론해보자면, 나는 내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적어도 남들한테 불쾌감을 줄 정도의 외모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나름 객관적으로 평가도 해봤고, 애들 스마트폰을 빌려서 해본 닮은 꼴 연예인 찾기에서도 꽤 높은 확률로 잘생긴 배우가 나왔었다. 이 정도면 상위 30%, 아니 못해도 50% 안에는 들지 않을까? 하고 나름 자신감도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자기를 보자마자 역겨워하면서 도망치는 여자애를 발견한 뒤로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급상실 했다 이 소리인가.”
“마음에 안 든다만 대략 그런 이야기다.”
그게 아니고서야, 나를 보자마자 험한 표정을 지을 이유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본 결과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내 외모가 평범한 여자애들을 질리게 만들 정도로 최악일지도 모른다고, 정말 말도 되지 않는 가정에서부터 다시 고지율의 불쾌한 행동을 추리해 본 것이다.
“역시 회장은 여러모로 속이 좁구만”
그리고 내 추리에 대한 예리의 평가는 잔혹하기 그지 없었다. 예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좀 빗나간 말인데, 회장은 여자애들을 너무 의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도다.”
“그런가?”
그야 뭐, 여자애들과 대화하기 난감한 건 사실이지만. 예리의 말에 갑자기 흥미가 돋았다. 맞는말 같기도 하고, 내 이야기를 듣는 것 같고. 자세히 말해봐, 나는 예리에게 더 이야기해보라고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의외로 여자애들의 행동에는 정말 아무 뜻도 없는 경우가 많다는 거 아나?”
“진짜냐?”
“뻥이지. 바보인가?”
귀 옆을 손가락으로 뱅뱅 돌리며 예리가 낄낄거렸다.
“뜻은 있지만 별 거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서 내가 이렇게 단추를 풀 때.”
그러면서 예리는 교복 상의의 맨 윗 단추를 하나 풀었다. 기계 같은 움직임이다. 교복 단추 푸는 법 교육 동영상이라도 보는 것 같다. 교복이 헐렁해서 그런지 스르륵 풀리는 느낌이다. 예리는 나를 슬쩍 보더니, 짜증을 내는 듯 거칠게 두번째 단추도 풀었다. 쇄골 아래로 창백한 피부가 훤히 드러났다. 예리가 또 다시 나를 슬쩍 쳐다보다가 자기 교복 옷깃을 잡아 아래로 잡아끌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째서 동작 하나하나마다 날 쳐다보는거야. 수업 잘 받나 감시하냐?
그나저나 마르긴 참 말랐다. 항상 뭔가를 좀 먹으라고 다그치는데도, 예리 특유의 비쩍마른 몸매와 빈약함은 어떻게 고쳐지질 않는다. 너무 말라서 쇄골이 날카롭게 솟은 모습이라니 신선한 개념의 쇄골미녀였다.
박수만 치지 않았다 뿐이지 나름대로 꽤 훌륭한 ‘교복 단추 푸는 법’ 수강생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예리는 곧 단추를 잠그고 옷맵시를 바르게 했다. 살짝 혈색이 도는 얼굴을 하고선,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뾰루퉁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 행동은 단지 더워서 그런 것일뿐, 결코 회장을 홀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지.”
“아 그러냐.”
여튼 예리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는 갔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날 놀려먹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니까, 그 애는 그냥 단지 회장 뒤에 있는 거미에 놀란 것일 수도 있도다. 너무 섣부른 판단은 말라. 혹시 아나? 회장의 남대문을 보고 놀란 것일지.”
“…열렸냐?”
“열고 싶도다.”
바지춤을 내려다봐서 내 팬티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예리에게 마음껏 소리 질렀다. 아침 8시 45분, 해가 지평선 위로 뜬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간에 끔찍한 성희롱 발언을 들은 이 상황에서라면 화를 내도 아무 거리낌이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넌 내 남대문이 여자애들이 울면서 도망칠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런 위험한 발언을 하면 여자애들이 울면서 도망칠 만 하도다.”
“그리고 아무리 여자애라도 거미를 변태취급하진 않을 거야…”
“그건 그렇도다. 회장이 거미 같긴 해도.”
“시끄러. 그런 말 하지마. 진짜 같단 말야.”
어떤 의미에서 거미인진 모르겠지만 좋은 의미는 아니겠지. 예리마저 날 거미 이하로 보다니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질 만큼 충격이다.
“흠흠, 결론은 회장이 그 더러운 말투에 비하면 그냥 평범하게 생겼다는 말이도다. 너무 평범해서 학생회장처럼 안 보이지만.”
“그래?”
“적어도 귀신 같은 생김새는 아니도다.”
“아직 삐쳤네.”
“조금.”
예리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렇다고 사과할 마음은 죽어도 없다. 그 애는 귀신이니까 인지상정이란 말도 필요 없고, 난 거미니까.
“그럼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 외모 때문은 아니고, 대체 이유가 뭐지?”
“좀 인정해 줬더니 바로 기고만장해지는 회장이란… 정말 답이 없도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자부심 부리겠냐.”
“그나저나, 정작 그 여자애가 누구인지 말도 안 해주고 있지 않은가. 모르는 여자애가 회장을 거미 보듯이 보든 벌레 보듯이 보든 내가 알게 뭔가.”
변태, 거미에 이어서 이번엔 벌레인가. 점점 인류에서 멀어지는 것이 나중에는 효모나 박테리아도 나올 기세다. 나에 대한 예리의 솔직한 감상은 둘째치고, 역시 예리에게 그 여자애 이름을 알려 주는 건 왠지 께름직했다. 여러모로 뒷담화를 하고 있을 때는 아무리 어이없는 녀석이라도 익명을 보장해 줘야 마음이 편한 법이다.
“인권 보호 모르냐. 뭐, 지나가는 여학생 K정도로 해두자고.”
“K인가, 고씨?”
“…어째서 가장 흔한 성씨를 놔두고 고 씨부터 말하는 거야.”
김해 김씨, 경주 김씨, 안동 김씨, 하고 많은 김씨들은? 망설이지도 않고 너무 빠르게 말해버리니까 혼란이 온다. 정말 예리는 귀신인가? 이미 고지율이라고 눈치챈 거 아냐?
“제주도에서는 고씨가 제일 흔하다고 했도다.”
“설마.”
김 씨가 제일 많은 건 전국공통 아니었나? 예리는 못 믿으면 말라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가나다 순으로, 강 씨인가?”
“그건 내 성이고.”
“여장에 관심 있는가?”
“꺼져.”
“여장하면 좋을 텐데, 이름이 ‘석재’니까 여성화하면… 석희인가? 강석희, 예쁜 이름인데…”
“시끄럽고, 애써 이니셜로 말하는데 굳이 알려고 하지마.”
“이니셜로 가려보았자지. 우리 학교 전교생 수가 고작 450명에 ‘감옥’ 선배들 빼면, 1학년 애들까지 합쳐도 고작 300명 정도이지 않은가. K 씨에 여자면 전교생 중에서 나누고 나눠도 50명 도 채 되지 않을 터인데.”
“그건 사실이긴 하지만 제발 그런 짓 하지 말아줘.”
‘감옥’이라는 건, 3학년들이 있는 별관을 뜻한다.
우리 학교 본관에는 1,2학년들만 있고 별관에는 3학년들만 있다. 입시 때문인진 몰라도 일부러 격리시킨 느낌으로,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본관 건물과 별관 건물이 따로 있다. 3학년들은 본관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데다가(별관 안에 자체적으로 교무실이나 특수목적실이 다 있는 모양이다) 왠지 학교 선생님들이 별관을 감옥이라고 부르고 있어서 우리들도 자연스럽게 그 호칭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본관에는 1,2학년 합쳐서 300명뿐. 새삼 느끼지만 우리학교 인원 수 너무 적다… 괜히 이니셜을 밝힌 것 같다. 예리가 마음만 먹으면 어찌어찌해서라도 알아낼 것 같다. 나름 학생부회장 겸 총무 겸 기획부장에 귀신 같은 녀석이니까. 학생 명부라도 뒤지겠지.
“레오디나스 왕이 그닥 백성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도다.”
“너까지 그런 말 쓰지마.”
300명이라서 바로 테르모필레 전투를 떠올리는 그런 낡은 고정관념, 반드시 고쳐야 한다.
“여튼, 비밀이다. 괜히 알려고 하지마. 아니, 알아서 뭐하려고?”
“칫.”
예리가 가볍게 혀를 찼다. 불안하다. 이 녀석 뭔가 저지를 것 같다. 예리는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시 책을 펼치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나에게 물어보지 말라. 내가 그 여자애가 아닌 이상, 나도 잘 모르겠도다.”
“포기냐.”
“흥미는 있지만, 귀찮도다. 회장의 쓸데없는 소리를 들을 바에야 독서를 하는 편이 낫도다.”
예리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읽고 있던 책에 집중했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예리는 포기하고야 말았다… 하긴, 예리라고 만능은 아니다. 배에 주머니 달린 파란 고양이정도로 생각한 내가 바보다. 내가 아는, 그리고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여자애라고 해도 시시콜콜 내 속을 긁어대는 역귀에게 상담을 받으려 한 행동은 그야말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 고지율인가 뭔가 하는 애가 어째서 나를 묘하게 바라봤는지 애매모호해지기만 하지 않았나. 나나 걔나 여자친구가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차라리 드라마 폐인들에게 물어보고 말지.
“내 가치는 드라마 폐인보다 밑이던가.”
“책이나 보셔. 혼잣말 듣지 말고”
“혼잣말 시끄럽도다.”
그리고 예리는 정말로 혼잣말조차 듣지도 않았다. 나는 몇 번이나 더 혼잣말로 예리를 도발해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은 내 마음도 몰라주고 혼자서 책을 읽다가 할 일이 있다며 먼저 나가버렸다. 쓸모 없는 녀석!
별 수 없이 나도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에서 혼자 시간을 죽이다가 0교시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미련 없이 나왔다. 쉬는 시간까지 잡아먹을 정도로 학생회 회의를 열정적으로 진행하는 경우는 절대 없으니까.



2.
어째서 우리 학교를 지은 건축가 선생께서는 화장실을 중앙계단 쪽에 만들어서 쉬는 시간마다 번잡하게 만든 걸까, 본관 학생은 300명뿐인데 어째서 이 곳만큼은 이럴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난 번잡하고 왁자지껄한 중앙계단을 바라보았다.. 아주 미묘한 문제가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여자애들을 껄끄러워 한다고 해도, 여자애들끼리 대화라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는 꼭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미묘한 기분이 든다고 해도, 사람이 많은 곳에 여자애들도 많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진 않는다. 단지 방금 전에, 그 애를 발견해서였다. 아침에 나와 마주쳤던 그 애, 고지율이 여자화장실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바로 교실로 향했으면 마주칠 일도 없었을 텐데, 예리와 이야기를 해도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괜히 오타쿠 친구들이나 찾아가 볼까하고 잠깐 다른 반에 들른 것이 화근이었다. 매일 휴대용 게임기로 여자애들이랑 연애하는 게임을 하는 녀석들이라면 그래도 예리보다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조언해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는데.
“기만자는 꺼져.”
따위의 의미도 모를 소리를 듣기만 했다. 별로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조금 낙담했을 뿐이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른 반을 나와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멀리서 그 애를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고지율이 눈치채지 못하게 모퉁이 뒤쪽으로 숨었다. 이유라면 있다. 4층 복도와는 다르게, 화장실 앞은 다른 애들도 많은 곳이다. 고지율이 나를 보고 또다시 그런 비명소리를 내면서 역겨워하면 후폭풍이 어떻게 될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내가 학생회장이라서 곤란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누구누구가 고지율이한테 이상한 짓이라도 했었나봐’ 같은 소문이 도는 건 사양이었다.
분명 그 상상이 두려워서이다. 절대 걔한테 겁먹어서가 아니라고. 아침에 나를 쳐다보던 그 험악한 표정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모퉁이 뒤쪽도 애들로 붐비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무리들 틈에 숨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곁눈질로 고지율을 쳐다보았다. 어째서인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원래 정서불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단적인 표정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다. 눈이 마주칠 뻔 했을 땐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애들이 많아서인지 날 자세히 못 본 것 같다. 이대로 인파 속에 묻혀가면 그 애가 나를 볼 일도 없겠지.
아니지,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불안해 하고 있으니까, 무슨 일 있어? 라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접근한 다음에 슬쩍 아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는 거지. 대체 왜 날보고 비명을 질렀는지는 모르지만 난 무서운 사람 아니라고. 그런 다음에 무슨 일인지 듣고, 오해를 풀면 해피엔딩…
그런 보기 좋은 전개가 될 리 있나. 나는 현실로 돌아와서 그 애가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서 슬쩍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 애가 무슨 이유로 날 싫어하는지, 날 정말 싫어하는지는 둘째치고, 서로 마주쳐봤자 좋을 일이 없어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지율의 뒤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잠입 액션 영화 같은데 나오는 특수요원도 아닌데 괜히 긴장감이 돌았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포복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될 것 같은 분위기다. 몇 발자국 차이도 나지 않는 거리인데 왜 이렇게 멀어보일까. 세 발자국, 두 발자국, 그리고 마침내 고지율을 지나쳐 안심하고 있는데,
레이저 센서에라도 걸린 것 마냥 경보가 울렸다.
“아,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잖아, 지율아.”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난 저절로 발걸음을 멈췄다. 주변이 소란스러워도 그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아직 특수요원에 감정몰입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지율이 나를 보고 질러댔던 비명소리만큼의 충격이었으니까.
설마하니 예리가, 옛날 사극 말투를 좋아해서 억지로 자기 말투까지 바꿔버린 귀신 같은 녀석이 평범한 여자애 말투로 이야기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고지율의 앞으로 어떤 여자애가 다가가고 있었다. 교복이 헐렁할 정도로 바짝 마른 몸매에 푸석푸석하고 제멋대로 솟구친 머리카락, 분명 예리였다. 헛소리가 아니었다.
“열쇠 필요하다 해놓고 니가 빼먹으면 어떡해?”
예리는 검은색 스트링에 매달린 자그마한 열쇠를 손으로 흔들며 고지율에게 다가오다가, 그 뒤쪽에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
그러고는 흠칫 놀라며 몸이 굳어버렸다. 큰일이었다. 예리도 내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나는 재빨리 손짓을 해 보였다. 제발 모른 척 해줘, 급하게 허둥대느라 제대로 전해졌을지는 의문이었는데, 다행히 예리는 눈치챈 듯이 미묘한 표정을 내게 보였다. 예리가 자기 이름만큼이나 예리한 녀석이라 다행이었다.
“응?”
“흐, 흐흠. 아니 잠시 아는 사람을 봐서. 열쇠는 여기 있도다. 가져가라. 지율이여.”
아니, 자기 이름값도 못 할만큼 둔감한 녀석이었다. 말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면 다 티가 나잖아. 골치 아픈 녀석이다. 그래도 고지율이 별 말없이 열쇠를 받아드는 것을 보면 딱히 예리가 어색한 연기를 느끼진 못 한 듯해서 다행이었다.
“으, 으응…”
“앞으로는 미리 말하는 걸 잊지 말도록. 그럼 가보시게.”
지율은 예리에게 열쇠를 받자마자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요즘 여자화장실은 자물쇠라도 잠겨있는걸까…같은 이상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상상은 관두자, 지금 내 앞에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는 귀신 녀석이 있었으니까.
“…어째서 회장이 여기 있는가? 변태인가?”
귀곡성이 들려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력이 상당히 강하다.
“오해하지마. 그냥 지나가려고 했을 뿐이야.”
“헛소리! 여자화장실 앞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눈치를 살피고 있지 않았나!”
어디 사는 변태인진 모르겠는데 참 역겹네. 설마 내 이야기는 아니겠지. 나는 이미 변태를 졸업하고 거미를 거쳐서 벌레 수준까지 내려왔다고. 굳이 말하자면 효모 지망생이란 말이다.
그야 당연히 저 지율인지 뭔지 하는 여자애 몰래 지나가려고 그랬지, 라고는 죽어도 예리에게 말하기 싫었다. 예리가 딱히 방금 전 일에 대해서 말을 꺼내고 있지 않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겠지. ‘회장은 여자애들을 너무 의식한다.’ 같은 소리는 한 번으로 족하다. 머리 속에서 예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징징 울렸다. 소름이 돋는 소리다.
“남자화장실 앞이거든? 난 생리적 욕구도 해결 못하냐. 사람이 많아서 그랬어.”
“상상조차 못했어. 아니 최악이다. 회장이여. 회장은 분위기와 눈치와 개념을 놓고 있는게 틀림 없도다.”
“그럼 오줌이라고 말하리?”
“으읏…! 그게 아니다 회장이여! 이건 마치, 갑자기 여자친구 집 앞에서 전화를 걸고 지금 찾아가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란 말이다.”
“뭐라는 거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리는 방방 날뛰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뭔가 이유가 있는 거겠지. 당연하지만 예리에게 사과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대충 무시하기로 했다. 그 전에, 깜짝 이벤트 같은 걸로 여자친구 집에 찾아가면 정말 안 되는지 생각하는 편이 나아보였다.
“이러니 회장이 여자친구가 없는 것이도다! 나에겐 희소식이다만.”
“시끄러.”
아침에 한 말 또 써먹지 마.
“됐도다. 회장에게 그런 섬세한 마음씀씀이는 바라지도 않았도다. 애초에 그런 센스가 있었다면 내가 이런 고생도 안 했겠지.”
예리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꾸만 투덜거렸다. 내가 째려봐도 그만 둘 기세가 아니었다. 예리가 계속 말을 덧붙였지만 중간부분부터는 거의 듣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화났다는 것이고, 회장은 그런 나의 기분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로다. 그러니 이렇게 된 이상 회장은 내게 음료수를 사야 하도다.”
그리고 이야기는 뜬금없이 마무리되었다.
“음, 그럴까… 어? 내가 왜 음료수를 사야 돼?”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거릴 뻔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전개에 괴상한 논리였다. 예리는 아쉽다는 듯이 눈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마치 내가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리고 음료수를 사준다고 기대라도 한 것처럼. 예리는 평소보다 더 독한 표정으로 날 잡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봤다.
“내가 아니고서야 회장의 그 정신나간 자기 자랑과 잘난 척을 들어줄 여자애가 있는 것 같은가? 그런 의미에서 회장은 나에게 음료수를 사줘야 할 것이로다.”
“내가 아니고서야 너랑 이야기라도 나눌 남자애가 있을 것 같냐. 그런 의미에서 니가 나에게 음료수를 사줘야지.”
“회장의 뻔뻔함은 그야말로 경천동지로다.”
“천둥도 없고 지진도 없고.”
나는 머리 속으로 빠르게 지갑에 남은 돈을 계산했다. 어제 예리에게 떡볶이를 강제로 먹이고 남은 돈이 만원 이하로 줄었다… 여기서 내가 물러서서 얌전히 조공을 바친다면 내 재정상태가 더 악화되겠지.
“잠깐만, 어제 떡볶이 처먹으면서 양심도 같이 잡숴부렀서?”
“그랬던가- 나는 잘 모르겠도다.”
지금 이 순간, 난 세상에 자랑하고 싶다. 이런 어이없는 정신공격에도 말짱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정도로 참은 게 어디냐.
“회장은 레이디퍼스트라는 개념조차 없는 걸로 보아서 신사라는 이름의 변태임에 틀림없다.”
“변태는 또 왜 나오냐. 난 신사도 아니고 레이디퍼스트면 니가 먼저 사야지.”
“그렇게 세세한 것에 집착하니 여자친구가 없는 게로다. 나에겐 희소식이지만.”
또 다시 열 받는 그 소리를 하면서 예리는 마법사가 수인이라도 맺는 듯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왠지 아까 고지율 몰래 내가 예리에게 보냈던 사인 같아 보였다. 이 빌어먹을 녀석이…!
“아 시끄러! 알았어. 사면 되잖아 사면.”
결국 함락되고야 말았다. 안녕, 내 용돈.
예리는 내 등을 툭툭 쳐가면서 본관 건물 끝에 있는 자판기까지 나를 끌고 갔다. 기세만으로는 귀신이 아니라 사신 같다. 저승사자도 이렇게 길을 재촉하진 않을 텐데. 커다란 자판기 앞에 도착할 때쯤에는 살짝 기분이 좋아졌는지 낄낄거리면서 내 소중한 천원짜리 지폐가 빨려들어가는 잔혹한 장면을 지켜보았다. 천원짜리…!
“패스워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도다!”
“패스워드… 여튼 알았어.”
제일 가격이 싼 솔눈을 고르기로 했다.
곯려 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짜로 예리는 솔눈을 제일 좋아한다. 그 씁쓸하고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은 악마의 음료를 좋아한다니. 이해할 수 없는 취향에 정상인이 아닌 미각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나는 정상적인 취향이고, 아침부터 탄산은 거북하니까 이온음료로 할까.
“자, 니가 좋아하는 솔눈이다.”
무심코 ‘왼손’으로 음료수를 건네려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오른손’으로 건넸다. 예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음료수캔을 받아들고서는 뺨에 문지르면서 고양이처럼 웃고 있었다.
“아, 이 차가운 느낌, 너무 좋아…도다.”
귀신의 고양이 미소는 무섭다기보단 짜증이 난다. 요력으로 내 즐거움을 쭉쭉 흡수해가버린 듯이 예리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캔을 땄다. 그리곤 주변을 둘러보다가 몇몇 애들이 자판기 쪽으로 오는 모습을 보고서는,
“다리 아프도다. 회장이여. 업어주지 않겠는가?”
같은 헛소리를 했다.
“니가 애냐.”
“농담이도다, 회장이여. 그래도 어디 앉았으면 좋겠도다.”
그렇게 말하면서 예리는 또 다시 내 등을 툭툭 치면서 나를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거절할 여유도 없이 나는 간이식 의자에 떠밀리듯이 앉았다. 생각해보니 여기 앉아 있으면 방금 전에 자판기로 향하던 애들 눈에는 잘 안 뜨이는구나, 예리가 또 뭔가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느낄때 쯤, 예리가 솔눈을 한 모금 마시고서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회장이여, 어째서 유리를 그렇게 피하려고 했는가?”
“유리?”
유리? 유리가 누구야.
“고지율. 율이. 유리.”
예리는 리드미컬하게 세 번 입을 열었다. ‘유리’라고 하는 호칭은 고지율의 애칭인 모양이다. 어째서 말을 하지 않나 싶었는데, 내가 했던 손짓을 흉내낸 것도 그렇고 역시 고지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속셈이었구나. 어쩌면 일부러 음료수를 사달라고 졸라댄 이유도 이 것일지 모른다. 평소에는 허허거리면서 능글능글하게 사람 속을 뒤집어 놓다가도 잔머리는 기가 막히게 굴리는 녀석이었지.
“애칭? 친한가 보네.”
“뭐, 여러가지 알려주는 사이이도다. 내가 선생인 쪽이지만.”
“아 그러셔?”
막역한 친구 사이라는 것 같다. 친구 없을 것 같은 예리로서는 드문 일이긴 하다. 내가 건성건성 대답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예리는 시킨 적도 없는 부연설명을 했다.
“무슨 터무니 없는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네만, 나는 그 애랑 친구가 아니도다. 정말 사제 관계이도다.”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 같다. 예리는 답지 않게 부끄러워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나저나 회장도 유리를 알고 있었는 줄은 몰랐도다.”
“그거야…”
아침에 봐서 그렇지, 뒷 말을 겨우 멈췄다. 이니셜 K 운운 하면서 애써 숨기려고 했는데 하마터면 아무 생각없이 말할 뻔했다. 그런데, 그런 노력도 헛수고로 만들겠다는 듯, 예리가 낄낄거렸다.
“아침에 말한 여자애가 유리인가?”
놀랐다.
“K 양, 고지율. 음… 아까 고 씨부터 말하니까 당황해 하던 것도 그렇고, 역시 고 씨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만. 유리였단 말인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예리는 속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던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확신하고 있으면, 어찌 둘러댈 방법도 없다. 별 수 없이 나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그래… 걔 맞어.”
“진짜?”
놀라고 있었다. 제 멋대로 추리를 다 해놓고 놀라는 척이라니.
“나의 친우가 그런 혜안을 갖고 있다니 깜짝 놀랄 일이로다.”
취소, 다른 쪽으로 놀라고 있었다. 깨알같이 나를 놀려먹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녀석 같다.
“뭐가 혜안이냐. 그리고 아까는 친구 아니라고 하더니.”
“음, 내 제자 유리가 그랬단 말인가. 그럴 애가 아닌데…”
예리는 적당히 말을 바꾸고 적당히 내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이온 음료가 반쯤 남아 있는데, 돈으로 환산하면 대충 300원쯤 될 텐데, 이 정도면 제령 값으로 절대 아깝지 않은 가격이겠지. 소금은 없지만 이온음료의 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힘으로 정화되어 버-
“유리가 고집이 좀 센 아이이긴 해도 초면에 그런 실례를 범할 아이가 아닌데… 특이한 일이도다.”
“이제야 좀 진지를 먹은 것 같구나.”
무당이 되어보고 싶은 충동은 관두기로 했다. 남은 내용물을 전부 마셔버리고 나는 빈 캔을 자판기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사이에 결론을 내렸는지, 예리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진중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유리는 착한 아이다. 일부러 회장을 효모 취급하진 않았을 것이로다. 역시 회장이 뭔가 잘못하지 않았나 싶도다.”
드디어 효모 단계까지 왔다. 앞으로 박테리아 단계만 남았다. 좀 더 예리에게 미움 받게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 내 종족레벨이 점점 하향되는 건 그렇다치고. 그렇다면 고지율의 행동은 전혀, 하나도, 완벽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거면 미안한 일이다만, 난 전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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